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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29
    나의 방학(4)
    이유
  2. 2006/08/25
    엄마의 발견(5)
    이유
  3. 2006/08/23
    호주의 아룬타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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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8/18
    허락 안 받고.(4)
    이유
  5. 2006/08/17
    영화, <괴물>(3)
    이유

나의 방학

옛날 옛적 나의 선생님들은 말했었다.

"방학만 길면 뭐할라고 그래? 게을러지기만 해서 되겠어? 빨리 개학이 되어야지."

그들의 말은, 아아, 거짓말.

나의 학생들이 내 입에서 거짓말이 나오게 하지말기를...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방학은 끝났다.

방학 시작하자마자 부산으로 연수를 떠나면서 바리바리 쌌던 가방 속엔, 그때 읽고있었던 소설 한 권, 이걸 다 읽고 나면 허전해서 어떡하나 걱정해서 소설 한 권 더, 소설만 내리 두 편 읽으면 무언가 어색해서 어떡하나 걱정해서 서경식의 그림 이야기 한 권, 이 쯤 읽으면 수업 준비를 위해 한 권 정도 읽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수업방법에 관한 책 한 권.

그런데?

지금 내 손에는 그 때 읽고 있었던 그 소설, 아직도.

 

한 일 있다면,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는 것.

<괴물> 두 번이나.

 

아무래도 이 번 방학은 이것으로 마무리해야할 듯.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 31일.

<괴물>도 극장에서 봤는데, 홍상수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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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발견

일주일간 '엄마와 함께' 연수를 다녔다.

발도르프 교육 연수라서 거의 선생들이 다니는 연수를 엄마랑 함께 등록한 이유는 자질구레한 여러가지가 있지만 죄다 생략하고, 다녔다,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다른 교사연수도 그러한지 모르겠는데, 발도르프 연수는 시작하는 첫 날 첫 시간에 모두 자기소개하는 시간이 있다. 평소에도 그렇게 사는 지 알 수 없지만, 다들 착한 얼굴을 하고 남의 이야기에 세심하게 귀기울였다가 별 것 아닌 부분에도 활짝 웃어주고 별 것 아닌 부분에도 박수를 쳐준다. 자기소개라는 것을 이 나이에도 하며 살고싶지는 않지만, 그 착한 분위기에 그럭저럭 몇 마디. 이 번 연수에서 자기 소개를 할 때 나는 엄마 얘길 덧붙였다. 죄다 교사들, 그리고 거의 20,30,40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뻘쭘하게 느끼고 있을 엄마를 위해 "사랑하는 엄마와 내가 요즘 재미있어하는 공부를 같이 하고 싶었다."운운, 박수.... 우리 엄마, 바톤을 이어받아 수줍은 자기소개.

한 발 물러서있는 엄마의 자세, 항상.

 

나의 엄마의 발견은 오후에 있는 미술 수채화 시간에서이다.

첫날, 엄마의 그림이, 오, 제법 괜찮았다.

노랑과 파랑으로만 칠하는 간단한 그림이라 우연히 괜찮게 나왔나보다, 했다.(못된 딸)

둘쨋날, 엄마의 그림, 오, 역시 괜찮은 것이다.

무엇보다 붓칠이 다른 것이다. 둘쨋날에 그것을 발견하였다.

셋째날, 엄마의 그림, 오, 정말 확실히 괜찮다. (나 보다 오만 배 낫다.)

확실히 붓 터치가 다르다.

엄마는 그림을 그리면서, 하하, 재밌다, 재밌어,하였다.

 

그림의 젬병인 나, 당연히 우리 엄마가 그림을 그릴 거라고 생각, 상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엄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던 것이다.

하긴 언제 엄마의 그림을 볼 기회가 있던가. 노래라면(음악이라면) 재주를 확인해 볼 기회가 있다해도, 그림이란, 수채화란, 붓터치란 살면서 확인해 볼 기회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내 엄마가 그림을 그릴 줄 안다는 것을 삼십육년만에 알 게 되었다.

 

사흘째되는 날, 선생님도 엄마에게 한 마디.

"너무 잘 하시는데, 계속 그리셔서 아동미술치료 해보시지 그러세요."

 

오늘 연수 마지막날이다.(근데 안 가고 인터넷짓하고 있음)

그림그리는 마지막 날.

엄마가 재밌게 계속 그림을 그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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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아룬타족

발도르프 학교가 다른 학교랑 다른 것 중 하나는, 2교시부터는 영어, 미술, 수학, 체육 등등 똑같은데, 아침 1교시에는 한 달을 주기로 달라지는 주제 공부 시간이 있다는 것. 무슨 소리냐면, 예를 들어 3학년은 1학기 동안, 3월에는 창세신화를, 4월에는 텃밭가꾸기를, 5월에는 측량과 측정을, 6월에는 동화 속 인물을 공부하였다. 학년이 높아지면, 동물에 대해서 배우는 한 달이 있고, 기하학에 대해서 배우는 한 달이 있다. 역사나 지리 같은 과목도 고대역사, 한국역사, 아시아역사, 동네지리, 한국지리, 실크로드, 식으로 잘라서 한달 주기 공부시간에서 배운다. 내가 이 학교에 엉덩이 붙이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인, 매력적인 수업이다.

 

 

수업방식은 매력적인데, 그러나 내용도 매력적일까.

이걸 정말 매력적으로 하고 싶었으나, 선생의 한계는 수업에서 고스란히 나온다.

결국 뛰어봤자 벼룩이라고, 수업을 하다보니 내가 경험한 것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책 찾아보고 이것저것 뒤지고 그림에, 수수께끼에, 노래에, 게임에 벼라별 것을 아는 척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수업에 들어가지만, 애들 앞에서는 처음 말문을 열며 이야기를 해주고, 머리 속에 넣으라고 무언가(그림이나..)를 했다가 , 머리 속에 넣으라고 쓰고,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머리 속에 잘 넣으라고 마무리를 하는 식이다. 결국 뭐를 하든 '머리 속에 잘 넣으라'가 내가 하고 있는 짓이었다. 노골적으로 그런 식의 수업만 받아봤던 나로서는 아무리 쑈를 해봤자, '머리 속에 잘 넣으라'의 변주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전혀 받아보지 못 했던 류의 수업을 앞에 두면, 그나마의 경험 조차 없는 것이라 밑바닥만 박박 긁어대는 꼴을 보이지나 않을까 두렵거나, 아예 내 마음대로 해버릴 수 있는 새 기회라 반기거나 헛갈리는 감정이다. 이럴 때 좋은 자료를 만나면 좀 만만해지는 기분인데, 그런 걸 못 만나면 밑바닥을 긁는 게 아니라 아예 땅을 파고 무덤을 파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다음 학기 수업에는 "집"이 있다.

이걸 두고 지난 학기 내내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처음엔 아예 안 할 생각이었다.

학교 뜰 구석에 조그만 움막을 세우기도 한다는데, 나보고 그걸 어찌 하라고. 뭐, 하면 하겠지만, 그래도 그걸 어떻게 하라고. (밖에서 뭘 하기만 하면 좋아하는) 남자애들을 생각하면 걔들하고 얼레발 설레발 한 달 떼우기 좋을 수도 있겠다는 짐작도 드는데, 하여간에 그걸 어떻게 하라고.... 근데 웬 뚱딴지 같은 집이람.

 

그리고 어거지로 방학 중에 책 한 번 보겠다고 도서관에서 책 검색을 했다.

도서관 책 검색 주제어에 "집"을 치니, 검색된 책이 삼십 몇 페이지가 나온다.

그걸 어거지로 하나하나 보고 있었다.

대부분이 "사과나무 한 그루의 내 영혼의 집"류라 페이지는 잘 넘어간다.

이러다가 적당한 책이 없겠지. 그러면 나도 자료 하나 없는데 수업 어찌하라구. 그냥 못 하지, 뭐. 하는 마음 자세로.

 

이십오페이지가 넘어가고, 제목이 냅다 "집"인 책이 하나 나왔다.

소제목으로 [6,000년 인류 주거의 역사]. 오호라, 이것이라면.

책은, 삼만오천원짜리로, 장장 오백팔십사페이지에다가, 싸이즈마저 에이 포로 크기도 크고, 껍데기가 대단한 양장이라 무겁기도 오지게 무거운 것이었다. 한마디로 누군가 평생을 '집'만 좇아다니다가 죽기 전에 그걸 죄다 쏟아놓고 죽은 모양이었다.

표지에 이렇게 써있다.

 

        건축과 역사와 인류학이 한데 어우러진 이 백과사전적인 책은 도시가 생겨나기 전 원주민이 살던 움막집에서부터 중세의 요새도시, 근대의 전원주택, 현대의 최첨단 아파트까지 전 세계와 전 시간에 걸쳐있는 집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안을 펼쳐보니, 크고 두꺼운 책에 글씨체도 작다.(여기서 글씨체 커버리면 사기지.)

촘촘히 적혀있는 글과 연필로 그려진 것들을 옮긴 듯한 그림들- 각종 집의 입면도 단면도 평면도 앞모습, 위에서 본 모습....

 

수업이고 뭐고 이런 책을 보면 압도되기 마련이다. 그야말로 누군가의 평생을 손에 든 것인데...

 

당장 집으로 빌려와 본다.

지은이의 머리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주거는 예외 없이 동굴이었을 것이라는 완고한 통념을 헤쳐버리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동굴보다도 빈번하게 '움막'이 최초의 주거역할을 하였다. 예수회 성직자였던 로지에가 시적으로 연출한 것처럼, 한 남자가 방형의 원시 오두막을 발명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가장 초기의 오두막은 원형이었으며 대부분 여성들이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옮긴이의 머리말

       ........................새로운 눈을 열어준 지은이에게 경의를 표하며...............

 

중간에 재미있었던 것

호주 원주민 아룬타족 이야기; 아룬타족은 호주대륙 중앙 사막에서 사는데, 가끔씩 매우 추운 밤이 찾아오지만 아룬타족은 옷을 전혀 입지 않는다. 잠잘 때 역시 아무것도 덮지 않는다. 그러면 날씨가 너무 추우면 어떻게 하느냐. 온 가족이 개를 껴안고 잔단다. 아하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 웃으면 안됨.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굉장히 진지한 생활방식임.  아룬타족이 바깥기온을 말할 때 그 단위는'개 몇마리'이다. 즉, 따뜻할 때까지 필요한 개의 마리수로 바깥 기온을 얘기한다는 것이다.

"오늘 밤은 너무 추워. 개 세마리 쯤이야."

"날씨가 많이 풀렸군요. 개 한마리야."

사막에 사는 그들은 물이 어디있는지를 아는 것이 필수지식인데(그들뿐이랴, 누구나 그렇지), 하여간에 물이 굉장히 소중하다. 성년식의 시험문제는 부족 영역 내 샘물의 위치를 모조리 외우는 것이다. 그리고 벼라별 각종 방법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모든 방법이 실패하면 아룬타족은 자신의 정맥을 잘라 피를 마신다고 한다. 허.

 

사실 아룬타족의 이 얘기를 하려고 시작한 글인데, 사설이 넘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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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 안 받고.

 남편쟁이의 혹평이 어딘가에 실려있길래....

(아니, 이런 방을 만들어놨으면, 말을 할것이지.. 우리 사인 정말 매우 브로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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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을 보았다. '왕의 남자'도 '친구'도 '동막골'도 뭐도 하나도 안 본 내가 '괴물'을 보았다. 그리고 보는 내내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지겨웠던 게다.

 

 이 영화는 아마추어가 만든 아마추어 영화이다. 심한 말인지 모르지만, 난 의도적으로 못 만들려고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의도적이지 잘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한 B무비가 되었다.

 

 우선, 인물의 성격에 하나도 깊이가 없어 집중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매력있는 인물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인물마다 그저 짤막한 메모 정도 해놓은 수준이다. 취직못한 386, 가난하지만 정이 많은 가장, 이런 식의 외적인 조건만 있고,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내면이 하나도 없다. 집중할 인물이 없는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했다고 하는데, 글쎄. 왜냐하면 인물 자체가 아무런 특성이 없기 때문에 배우들이 개성을 발휘할 여지가 별로 없다. 시나리오에 있는 대로 최대한 노력해서 연기하지만 본래 그 인물이란 게 그리 심혈을 들일 인물이 아니다. 연구를 해야할 인물이 아닌 것이다. 변희봉이 그럭저럭 잘했는데 그 정도는 그 사람에게 어려운 게 아닐 것이다.

 

 게다가 주변 인물로 나온 사람들이 하나 같이 로봇이나 다름없다. 이건 머릿속에서나 있을 인물이지 실제로 피가 흐르고 숨을 쉬는 인물이 아니다. 이건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나오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미국에 대한 메시지가 있는가? 없길. 있다면 코미디.

 

 가족이 있는가? 과연 가족에 대한 재발견이 있는가? 현대 사회의 가족에 대한 탐구가 조금이라도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광고에는 괴물 대신 가족이 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가족 대신 괴물이 있을 뿐이다.

 

 공허하다. 모든 게 적당적당하고 조금이라도 깊은 여운이 없다. 텅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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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귀가 얇은데, 특히 옛날부터 이 남자의 말에 혹하는 이상한 기류가 내 몸에 있다.

이 글을 읽고나니, 아 맞다, 싶은 것이다.

 

음, 그런 것 같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도 영화 보는 내내, 그들의 대사가 그들만의 대사라기 보다는

누구나 툭툭 내뱉을 수 있는 말장난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대사가 좀 후지다,란 느낌이었다.

 

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봐도 나는 재미있는 것 같아.

 

음, 그러나 그것은 정말 나의 가슴에 정확하게 파고드는 지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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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모에게 다시 한 번 재미거리를 선사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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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괴물>

각설하고,

아, 멋져, 멋져.

 

날휘 블로그에서 가져온, 오, 이 근사한 사진의 포스터를 보라.


 

누구야, 사진까지 이렇게 잘 찍어주다니.

 

날휘 말대로, 잡다한 것 다 치우고 오직 깊이와 넓이로 공간 감각을 공포로 확장시킨 이 하수구.

 

봉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그의 도시 공간 감각은 참으로 탁월하다.

 

두 미천한 주인공이 서로 쫓고 쫓기는 아파트, 그것도 복도식 아파트(나도 어렸을 적부터 느꼈던 것인데 이 복도식 아파트의 복도만 걸으면 공간감에 압도됨. 유럽의 古大성당식 압도감이 아니라, 공간도 나도 피차간이 천박한 존재라는 식의 압도감.)의 복도.

그리고 모두에게 친숙한 그 시멘트 덩어리 아래, 아무도 가 본적 없는 아파트 보일러 지하실....

 

 

그랬던 그의 공간 감각이, <살인의 추억>에선 농촌의 탁 트인 벌판으로 나와버려 좀 시시해져버린 것일 수도... 꼬불꼬불 길의 형사의 혐의자 추격씬이 생각나기도 한데, 이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헛갈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랬다가 다시 <괴물>에서 살았다.

<괴물>은 진정 <플란다스의 개>를 잇는 봉 감독의 계보인 것!!!

날휘가 극찬한 서울의 골목하며, 한강의 그 밋밋한 철제 시멘트 덩이 다리들.

 

누구는 반미의식과 반자본주의의식을 서둘러 겉에 둘렀다고 하기도 하고,

누구는 괴물 컴퓨터 그래픽이 좀 미흡했다고 하기도 하고,

날휘는 괴물과 괴물을 좇는 인간 무리들 간의 미묘한 교감이 있었더라면, 괴물에 좀더 델리키트한 캐릭터가 있었더라면 하는, 고급스러운 아쉬움을 살짝 남기던데, 나는 모두 그 정도도 대만족.

 

박강두 가족이 매점에 들어가 요기를 때우고 잠시 쉬고 있을 때, 박강두가 문틈으로 발견한 괴물.

"우릴 보는데."

그리고 카메라는 문 틈으로 괴물을 내다본다.

멀리 보이는 괴물.

이 장면에서 괴물 컴퓨터 그래픽이 미흡해서 그런건가, 아무튼 나는 멀리 보이는 그 괴물이 마치 다리 꼬고  앉아 시선은 먼 하늘에 두면서 휘파람을 불고 딴 청을 피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껏 딴청을 피우지만, 살짝살짝 시선을 돌려 매점 안을 살피고 있는.

그랬다가 총 알 한 방이 발사되자마자 즉각 매점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그 자세바뀜.

그리고 총알을 퍼부어대며 악다구니로 자기를 내몰아치는 박강두 가족에게 정말 '삐친 듯', 먹이에게 상처를 내지않고 아지트로 끌고가는 습성에 반하여, 박희봉을 땅바닥에 패대기질치는 그 앙가품.

난 이 대목에서 괴물에게 살짝 연정(?)이 가던걸.

 

근데 아무리 봉감독이 잘 했어도, 배우가 반.

 


(프레시안)

 

이 배우들이 나오는데 어째 천만이 넘지 않겠는가.

나만해도 두 번이나 봤다.

부산가서 애 없이 열흘 지내는 동안.

애 없이 지내니까, 어쩜 그렇게 시간이 많은걸까.

예전에 애 없을 때 이 많은 시간들을 다 어디다 쳐발랐던걸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노벨상을 타리, 세계일주를 하리, 팔만대장경을 해석하고 다시 청동에 새기리.

 

그런데 서울에서 애 보며 고생했을 남편에게 미안해서 처음엔 영화 봤다는 말도 못 했다가, 살짝 봤다고 말을 흘렸다가, 두 번 봤다고 결국 고백하였다.

남편은 오늘 <괴물>을 보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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