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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요즘 매주 토요일이면 에프티에이 때문에 맨날 시위가 열린다고, 그래서 시내는 막히니 돌아가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돌아가는 거라면 열번 돌아가도 괜찮지,라고 생각, 아저씨에게 부담갖지 마시라고, "에프티에이 반대 집회는 열어야죠, 괜찮아요."
그러나 나의 이 말은 아저씨를 발끈하게 했다.
"무슨 집회야, 집회. 그런 걸 왜 해."
나에게 호통.
길이 막히는 것 때문에 화가 나는가. 그럴 수도 있겠다. 이게 밥줄인데, 먹고 살 길 막히면 화가 나겠지.
그런데, 에프티에이하면 먹고 살 길 막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끊길텐데...
아저씨는 나에게 계속 따진다.
대충 종합해보니, 각자 부지런히 열심히 살고 그래서 집회가 필요없고 조용한 세상, 이것이 그가 옳다고 바라는 세상이다. 에프티에이도 할 것이니 정부가 하려는 것이고, 사람들은 열심히 살면 된다.
아저씨는 내가 내리겠다는 큰 길에서 차를 세웠다.
가방 두 개, 우산까지 두 개를 꾸역꾸역 목에 걸고 팔에 끼고 자고 있는 아이를 끙끙 안아보려 애쓰는 나를 보던 아저씨는, 그러고 어떻게 가,하며 집이 어느 쪽이냐 물었다.
이제부터 골목인데, 괜찮아요 아저씨,해놓고, 저쪽이에요...
아저씨는 차를 돌렸다. 마주 오는 자동차를 피해 볓 번이나 구석으로 차를 돌렸다가 다시 원위치해서 운전해야하는 번거로움. 그것도 이미 미터기 세운 뒤에.
빌라 바로 앞에서 내렸다.
아저씨는 이제 애까지 안아 올려주겠단다.
아이고, 괜찮아요, 아저씨, 너무 감사합니다.
천 원 한 장 더 꺼내 내미니, 아저씨는 무슨 소리냐고 했다.
그렇게 착한 택시 기사 아저씨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내가 택시를 별로 안 타봐서 그런가.
루돌프 슈타이너는 1903년 여름, 나를 위해 몇 시간이나 정성들여 색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촛불과 커다란 흰 종이를 손에 들고, 빛과 어둠 속에서 황(黃)과 청(靑)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 그의 눈길은 마치 그가 말하는 색채의 본질과 하나과 된 듯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나에게 1만 마르크가 있다면, 그리고 필요한 도구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색채에 대한 괴테의 사상이 진리라는 것을 이 세상에 증명할 수 있으련만."
괴테의 색채론, 괴태의 자연관을 영적 세계관의 기초 형성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으려 했던 그의 생각은 18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는 1883년부터 1897년까지 15년 동안 작업한 퀴르슈너판 괴테 자연과학논집의 몇몇 서론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자연과학의 도그마와 동맥경화에 빠진 근대철학의 관점 때문에 그의 외침은 주목받지 못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다른 길을 걸음으로써, 경직된 현대적 사고를 타파하고 틀에 박힌 형식에서 인간의 사고를 해방시키려 애썼다.
예술가는 인간을 창조적 언어에서 격리시키는 단단한 지성의 광물적인 벽을 깨뜨려야 한다.
1929년 마리 슈타이너(루돌프 슈타이너의 아내)
- 색채의 본질(루돌프 슈타이너) 서문 중-
<잘려진 머리>는 일종의 개안(開眼)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남자 주인공 마틴 리치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타인의 타인성을 받아들이기에 이르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가 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이 타인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문제는, 아이리스 머독의 중심사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랑은 개개인을 개개인으로서 인지하는 것, 즉 그것은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꺠닫는 지극히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이다. ........
중앙문화사 판 <잘려진 머리>해설 中
어제 갑자기, 타인성이란 단어를 생각하다가 이 소설의 해설이 떠올랐다.
그랬던가....마틴 리치가...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그녀가 소녀였을 때는 작가가 꿈이었다. 학교엔 한국인 선생님이 한 분 계셨었는데, 그 분의 글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품기 시작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서른이 넘었을 때도 여전히 작가는 아니었다.
서른이 넘어서도 어떻게 살아야하는 건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이 일 저 일 하고 있는 일들은 있었지만, 모두 그럴 법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그저그랬다. 그러다가 루돌프 슈타이너가 쓴 글을 보게되었다. 무슨 뜻인지 더 알아보려고 공부모임을 찾아갔다. 점점 더 그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일본 안에서는 할 만한 곳이 없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독일 사람이어서 공부를 계속하려면 독일로 가야하는데 서른 넘어 새로 독일어를 배우기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한 번 해본 생각이려니 했다.
그러다 우연히 누군가 그녀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주며 관심 있으면 보라고 했다.
그 봉투 안에는 미국에 있는 발도르프 교사양성 대학 팜플렛이 있었다. 그녀는 당장 둘째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그렇게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미국의 발도르프 학교에서 교사가 되었다.
어느날 일본으로 돌아가서 일본에서 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학교를? 함께할 사람들은 어떻게 만나고?
미국에서 공부했던 대학에게 제안을 하였다. 교사양성프로그램을 지원해달라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함께 일할 동료를 만들수 있도록.
그 대학은 일주일 간의 회의를 거쳐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었다. 매년 일본에서 열 명 가량의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을 들었다. 7년 후 그동안 만났던 일본인 중 다섯명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국을 돌았다. 인형극과 강연을 하면서 학교를 세울 것을 알렸다. 몇몇이 관심을 보이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땅에 학교를 지으라고 내주었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아니어서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홋카이도 화산 옆 시골마을, 자식들은 도시로 다 떠나고 혼자 빈 집에 살던 할머니 한 분이 자기 집과 땅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그녀는 첫 눈에 그 시골이 마음에 들었고 할머니의 온갖 친척들의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할머니의 지지로 학교를 세울 터로 결정하였다.
그녀와 그녀 동료들은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농사를 시작했다.
인원들 중 싱글맘 한 명의 아이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어 유치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방과후 학교를 만들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림을 그리고, 수공예를 하고, 악기연주를 하고, 농업을 하고, 밖에서 뛰어노는 방과후 학교. 아이들은 점점 많아지고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싶은 아이들이 늘어가서 토요일 하루만 있는 발도르프 학교를 열었다. 점점 관심이 늘면서 전일학교를 드디어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학교만 세우면 애들을 보낼 것 같던 많은 사람들이 감감 무소식이고 5학년짜리 딱 한 명만 입학하였다. 아이는 한 명인데 선생은 일곱이었다.
그러나 참 즐거운 시간들이었어요,라고 그녀는 회상하였다.
곧 그 학생의 동생이 입학하고 학생 수는 점점 늘었다.
현재 그 학교는 100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다.
그 마을은 농장, 유치원, 정원, 교사양성 대학, 청소년 프로그램, 성인 프로그램, 까페, 공예가게, 캠프장 등이 있는 공동체이다.
푸른 엄지손가락 이야기-닿는 무엇이든 생기있게 살아나는 신비한 손가락을 가진 소년의 이야기, 그러나 소년은 학교에서 쫓겨난 부적응자이다. 그 소년의 신비한 힘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집 정원사 뿐. 그 소년의 아버지는 무기공장 사장인데, 전쟁이 일어나 무기를 만들어 팔아서 큰 돈을 벌고있다, 그것이 너무도 마음이 아펐던 소년은 공장으로 가서 무기마다 자기의 엄지손가락을 갖다대는데 그 무기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사용되자, 무기 안에서 총알이나 대포가 발사되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전쟁할 마음을 잊고 집으로 돌아가 전쟁은 끝난다. 정원사는 늙어 죽고 소년은 정원사를 따라 하늘까지 닿는 콩을 심어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가 아름다워 내내 울면서 운전을 했다는 그녀의 말이 전혀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는 온화한 미소를 가진 올해 육십 한 살된 일본여자.
공동체 마을을 세운 이 여자의 온화한 힘.
루돌프 슈타이너의 강연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고 그녀는 전했다.
"지구의 사람 모두의 할 일(미션)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자기와 다른 타인에게 기여하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타인을 타인으로 본다는 것, 하물며 내가 아닌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정말 무엇일까.
어느 친구를 사랑하며, 그 사랑이 어느덧 더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며, 또 어느 남자를 사랑하며, 또 그 사랑이 어느덧 더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며, 또 어느 친구를 사랑하며, 또 그 사랑이 어느덧 더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을 과장하여 오만번 쯤 하고난 후,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지금껏 그 모든 사랑이란 것(친구를 대상으로 한 우정도 포함)이 사실 나의 나 자신 사랑, 자기애의 변주인 것이로군,하고 결론을 내렸었다. 즉, 친구건 남자건 대상은 거울이다. 비추어서 내가 잘 보이는가. 나를 얼마만큼 실천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아이는?
아이도, 고백하기 어렵지만, 그렇다.
나는 아직도, 고백하기 어렵지만, 장애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무섭다.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
타인을 타인으로 본다는 것.
내가 아닌 그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그에게 기여한다는 것.
그것이 지구인의 미션.
쓰면서 문득 든 생각.
그 미션을 수행할 만한 능력이 있는 자만이 장애아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지도...
본격적으로 출근하기 시작한지 일주일.
불끈 일어난 충동은,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것. 그리고 마냥 늘어진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것. 우리 딸래미랑.
다시 또 엄마 얼굴을 보지도 못 한채 하루를 시작해야하는 규민이를 생각하면...
그러다 늦는 날엔 딸래미 잠든 후에 퇴근해 집에 돌아오고 그 다음날 새벽에 다시 나가, 결국 만 24시간 동안 엄마 얼굴을 못 볼 규민이를 생각하면....
아아, 그런데 우리 규민이 많이 컸다.
저녁에 퇴근한 나를 방긋 웃으며 맞는다.
하루 내내 엄마 못 본 스트레스를 꽉꽉 채웠다가 냅다 짜증으로 내놓던 아이가, 이제 엄마에게 웃으며 하루동안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수다로 늘어놓는다.
나는 어제 어깨에 천 근의 짐을 달고 다리에 만 근의 모래주머니를 달고 퇴근을 했다가, 규민이를 만나고는 그 모든 짐들과 모래주머니들을 갑자기 날개로 바꿔 달고서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어 아이를 덥석 업었다.
업고 어린이집에서 우리집까지 걸어오며 우리 모녀는 소살소살 깔깔깔깔 소살소살 깔깔깔깔
규민이가 있어주어서 행복하다. 분에 넘치게 행복하다.
(자정에 귀가한 오늘. 저녁짬에도 보지못했던 딸래미 얼굴을 떠올리니 슬퍼서 이런 글을...)
(엔키노 사진)
위 장면이 그래도 가장 로맨틱했었던.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로맨틱함을 찾거나 기대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외의 로맨틱한 부분, 반가움. <오,수정>에서도 잠깐 그랬던 것 같아. 거기도 해변이었었어. 아니, 강변이었었나.. 정보석과 이은주가 껌종이를 발견하고 둘이 살짝 입맞춤을 했었었지.
저 위 장면에서 문숙은 그런다.
"우주에서 의식이 있는 종이 정말 우리 밖에 없다면, 우리가 이렇게 우주를 바라봐주니 우주는 얼마나 고맙겠어요. 우주는 외롭지 않아."
"제가 믿는 것은, 제가 정말정말 믿는 것은, (쉬고) 별이에요."
홍상수도 가끔 이런 귀여운 대사를 쓴다.
결국 김중래는 문숙을 끌어안고 키스를 하는데, 이것은 분명 홍상수의 어느 키스였을 것이다.
여자는 술에 취해 그렇게 귀여운 대사를 하고, 홍상수는 참지 못해 키스를 하였다.
참지 못하겠다는 느낌이 어찌나 컸던지 우악스러운 키스를 한다.
남자가 키스를 한다고 새삼 몸을 뺄 연륜도 아니면서도 여자는 몸을 흔든다.
키스가 너무 우악스러워서였다.
결국 귀엽고 로맨틱한 저 장면은 우악스러운 키스 때문에 왈칵 질리고만다.
저런 우악스러움을 마구 퍼붓는 키스에 대해 문숙 정도 된 여자라면, 왜 이렇게 난리야(혹은 지랄이야)?라고 한 번 어이없는 표정도 해주면 왈칵 좋았을텐데, 역시 홍상수는 남자라 그의 한계다.
내가 홍상수가 변했다고 느낀 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였던가.
그 영화 즈음에서 홍상수가 너무 귀여워졌다고 난리난리했던 기억이 난다.
홍상수가 변했다고 좋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해말길.
나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다 좋았다.
그런데 <해변의 여인>을 보고나니, 홍상수가 그 무렵에 변하면서 귀여워진 것이 아니라, 원래 저렇게 귀여운 사람이었다,라는 걸 이제서야 알겠다.
<해변의 여인>을 보니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인데 드러나는 부분이 영화만큼이라 조금씩조금씩 알게되었던 것. 그러고보니 이제 꽤 그 사람을 알고있는 느낌. 길거리에서 만나면 친한 척이라도 해야할 듯.
<해변의 여인>도 변함없는 홍상수표.
재미도 변함없이 만점.
쌍쌍을 이루면서 일어나는 사건이란 형식도 여전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강원도의 힘>에서는 주인공 남자가 설악산으로 갔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여자도 설악산으로 가고, 남자와 스쳐갔던 여자가 실족해서 죽는다는 것을 주인공여자가 경찰에 신고하고... <생활의 발견>에서 예지원과 추상미의 의도적인 쌍쌍대비나..)
그것은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 법한데도 여전히 속아넘어가주게 되는 건, 카메라가 너무 솔직해서인가. 그의 영화를 보고있으면 옛날의 무슨 영화를 보고있는 느낌. 썰렁한 해변에 덜렁 서있는 남녀들-잘 모르지만 에릭 로메르의 무슨 영화를 봤을 때도 저런 장면이 있었던 것 같고-, 그러다가 앉아서 술먹는 장면, 가운데 테이블, 등장인물들을 고루 배정한 화면, 그러다가 누군가 말을 하면 그 사람을 쭈욱 줌 인해서 클로즈업. 이 웬 솔직한 카메라란 말인가.
이 카메라만으로도 참으로 정겨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홍상수만의 주장이 아닐 것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란 어찌나 기기묘묘한지, '기적'과 같아서,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의도한 것이든 내 외부에서 다른 식의 변주를 타고 다시 내게로 돌아와 한 쌍을 이룬다.
이를테면, 나는 오늘 아침 화장실에서 금요일 신문을 읽고있는데, 거기엔 내가 10년 전에 만났었던 인물이 실려있었다. 에스에프의 대부가 되었다. 내가 10년 전에 그를 만났을 때도 에스에프때문이었다. 그를 만나서 나는 알 수 없는 에스에프계의 용어를 잔뜩 듣고 마치 잠시 외국에라도 나갔다온 듯한 느낌을 받았었었다. 그 후 화장실에서 나와 나는 에스에프 영화비디오를 하나 본다. 그것은 내가 외국에 나갔다가 헌 비디오가게에서 싸길래 사왔던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도중 나는 갑자기 이 에스에프영화를 10년 전의 그 남자에게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꽤 희귀한 것이라서. 그래서 만난다.
음, 후지군.
예를 들어보려했는데, 어렵다.
그래도 바로 전의 영화<극장전>이 너무 훌륭해서 그것보다는 실망했었다.
<극장전>은 지나가는 대사들, 지나가는 인물들이 다 극적이면서, 뭔가 암호라도 되는 것 같아 죄다 기억에 남는,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의미심장하다고 느끼면 의미심장하고 죄다 코미디다 느끼면 죄다 코미디같은 훌륭한 영화였었다.
이번에는 지나가는 대사들, 지나가는 인물들은 다 그냥 지나가는 대사와 인물 같았다.
똘이를 둘러싼 헤프닝은 쓸 데 없어 보이기도 했다.
선희랑 그녀 친구의 조깅도 그렇고.
아, 또, 처음 갔던 횟집에서 종업원이랑 싸웠던 것도.
훌륭했던 것 중 하나, 고현정의 연기.
그 여자가 그렇게 연기 잘 하는 줄은 몰랐었네.
도마뱀,도마뱀,어쩌구저쩌구노래를 부르며 수풀 사이를 걷는 것, 그리고 얼굴이 좋아요,라는 말에 고마워요,라고 대꾸할 때, 오 너무 잘해.감탄,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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