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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4/22
    선녀와 나뭇꾼과 백설공주(2)
    이유
  2. 2006/04/18
    규민이 이런 말도 해요(2)
    이유
  3. 2006/04/03
    규민의 이런 사과(2)
    이유

선녀와 나뭇꾼과 백설공주

<선녀와 나뭇꾼> 동화책을 사주었다.

그 책엔 나뭇꾼이 선녀옷을 감추고 숨어있다가 혼자 남은 선녀에게 솔직하게, 내가 색시를 얻고 싶어 사슴에게 말했더니 이 방법을 알려주더라, 내 색시가 되어주실 수 없냐,라고 부탁하여 허락을 받아 같이 살게 되었다고 나온다.

 

얼마전 토요일아침 이비에스에 채널 고정하고 티뷔를 틀어놓고 있었다.

딩동댕유치원 공개방송에서 <선녀와 나뭇꾼> 연극을 하고 있었다.

나뭇꾼이 선녀옷을 감추고 숨어있다가 혼자 남은 선녀에게 그냥, 울지말고 우리집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하고 집으로 데려간다. 장면 바뀜. 선녀는 아이 둘을 낳고 잘 살고 있다.

 

딩동댕유치원이 끝나고 뭉뭉 인형극장, <백설공주>를 하고 있다.

못된 왕비가 머리빗에 독을 발라 백설공주 머리에 꽂는 바람에 백설공주는 쓰러졌다. 일 나갔던 일곱난장이가 돌아와서는 빗을 빼내 백설공주는 다시 살았다. 난장이들과 공주는 기쁨의 노래도 하고 다시는 모르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면 안된다는 대화를 나누는데, 난장이들이 계속 번갈아 공주와 춤을 춘다. 말을 할 때도 살가움의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계속 공주에게 스킨쉽을 한다.

 

 

연속으로 저 두 편의 방송을 보고있자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왜 내 기분이 모래씹은 것처럼 찝찝한가, 뚱딴지처럼. 생각해봤더니,

저 설정 때문이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와 이래저래 살을 맞닿는, 계속되는 저 설정.

그러나 여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남자 쪽에서 무턱대고 다가와 여자에게 살을 맞댄다.

 

특히 인형극에서 백설공주 인형은, 짐작하시겠지만, 가슴은 c컵 사이즈이면서 얼굴은 열서너살, 목소리도 약간 코맹맹이에 어린 기가 다분, 그 여자 하나를 중심으로 수염난 난장이부터 철부지 어린 난장이까지 번갈아 다가와 손을 잡고 춤을 추고 팔을 비벼대는데, 거의 성추행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도 백설공주는 화 낼 줄 모른다.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난장이들에게 감사해한다.

 

<선녀와 나뭇꾼>은 좀 미묘하다.

딩동댕유치원의 연극은 납치에 다름 아니지만, 내가 샀던 동화책에는 솔직한 나뭇꾼의 태도에 선녀도 마음을 열고 색시가 되는 것으로 나와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선녀와 나뭇꾼>은 나뭇꾼이 선녀옷을 감추어 선녀를 색시로 삼는다는 하나의 스토리가 대표할 뿐이지, 상황과 심리 묘사 따위가 세심하게 읽혀야하는 것이 아니라서, 결국 때에 따라 논의 외의 납치가 되기도 하고 인지상정의 여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무슨 어마어마한 간극이란 말인가. 말도 안되는 인권유린의 납치와 그럴 수도 있는 인지상정이 뚜껑을 열면 나란히 들어있는 한 세뜨라니. 이게 가능한 것이 상대가 여자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사실 아이들을 상대로한 동화에서든, 어떤 이야기에서든 취하고자 하면 취해지는 것이 여자다. 남자들이 싸우기도 하지만 아무튼 누군가 취한다.

 

되게 불쾌하다. 난장이들이 계속 다가오면서 춤 추자고 하고 팔을 비벼댄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난장이라서가 아니라 수염달린 남자부터 코맹맹이 철딱서니까지 번갈아 다가온다고 생각해봐) 아, 정말 싫다. 하긴 그런 뽀르노도 봤다. 어디서 난장이 배우들은 줄줄이 잘도 구해가지고 일곱 난장이들이 번갈아 백설공주와 섹스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고전 버전일 것이다.) 백설공주는 순진무구탱이라서 난장이들이 내미는 성기를 귀여운(?) 장난감이라고 생각하고 오잇오잇 소리를 내며 함께 논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일곱난장이와 백설공주는 그런 식의 환타지인 것이다. 그것을 아무리 어린이버전으로 옮겨봤자 그대로 드러난다. 공주는 열댓살이라도 가슴은 c컵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들이 어떤 외모를 가졌건 공주 쪽에서의 선택의 자유는 없다. 남자는 (중?)늙은이부터 어린애까지 골고루, 번갈아.

아, 정말 여자에게 너무도 잔인하다.

 

그림형제의 백설공주는 어쩌자는 식이었을까. 사실 그림형제를 이제 다시 읽어보면 죄다 음흉하고 의뭉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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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민이 이런 말도 해요

만44개월

 

ㅇㅇ하기는 한데 .....하다.

ㅇㅇ하다면서 .... 하냐?

 

 

 

* 무서운 얘기 해달라고 졸라졸라서 다 듣고 난 후,

"재미있기는 한데, 무서웠어."

 

*  엄마랑 둘이 이부자리에 누워 뒹굴뒹굴, 이럴 때 나는 꼭,

"규민아, 최고 사랑해."

"엄마는 날 최고 사랑한다면서, 떼 부렸다고 혼내냐?"

 

 

뿐만 아니라 감정의 세밀한 고개고개를 타는 말도 구사한다.

 

어젯밤 된통 골이 나있던 나는 이부자리에서 가만 있는 남편에게 무어무어라 쪼았다.

내 딴에야 지난 밤의 일이 도저히 풀리지 않아 이대로는 숨통 막혀 잠을 못 잘 것 같아 한 짓이지만, 어젯밤 이부자리에서만 보았을 때는 한 사람이 가만히 있는 한 사람을 냅다 건드린 꼴이었다. 그걸 지적한 사람은 규민이었다.

"엄마, 빨리 아빠한테 미안해 해라."

...

"안 하면 아빠하고만 놀거다."

(내심 아이의 그 말에 슬펐음) "넌 엄마 속상한데 왜 속상한 것도 모르고 그러냐?"

(급격하게 자세 바꾸어서)"엄마, 내가 미안해."

이건 감정의 세밀한 고개가 아니라 감정의 평평한 평야인가..

하여간에 여전히 엄마 아빠가 세상의 전부인 사랑스러운 울 애기..... 규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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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민의 이런 사과

다섯살이 되니 이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논다. 엄마된 사람들은 수다도 떨 수 있어 좋다.

네살 무렵까지만 해도 친구를 옆에 앉혀놓으면, 장난감 실갱이에, 밀고 때리기 실갱이에, 어떤 엄마들은 그래도 무시하고 수다에 몰입하던데, 나는 그러지 못했었다.

이제 실갱이가 벌어지긴 하지만 서로 미안해, 괜찮아, 사과하고 화해하고 다시 놀고 다시 싸우고 다시 사과하고 다시 화해하며 그럭저럭 자기들끼리 논다. 기특해라.

 

규민이 친구집에 놀러갔다.

아이들 네 명이 모였고, 엄마들 네 명도 모였다.

그 집엔 플라스틱 미끄럼틀이 제법 큰 거 하나 있었고, 트럼폴린이라고 하던가, 고탄력판 아래 거대한 용수철이 있어 점프하며 노는 것까지 있었다. 아이들이 거기로 몰리는 건 당연하지. 네명이 한꺼번에 몰려 놀기엔 싸이즈가 작아서 계속 실갱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애들 실갱이가 일어나면 수다에 몰입하지 못 하던 습관으로, 그 모습을 한 켠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여자 친구 하나가 미끄럼틀 계단을 올라가더니 내려가지 않고 버티고 앉아있다.

그 뒤 올라가던 사람은 규민, 그리고 규민 뒤에 바로 이어서 남자 친구 하나가 계단을 붙잡고 올라갈 태세.

윗 친구는 내려가지 않고있지, 밑 친구는 빨리 비키라고 하지, 규민이 진퇴양난, 사면초가, 당황난색, 결국 세명 동시에 실갱이 벌어짐.

윗 친구, 사태의 가장 큰 책임자, 이 사람이 그냥 내려오면 일 되는 상황인데, 계속 버티기 고집. 왜 안 내려가냐는 규민의 질문에 자기는 그냥 올라오고 싶어서 올라왔는데 내려가기는 싫단다. 이 뭔 뻔뻔스러운 대답인가. 한 켠에 가만 입닫고 있는 나까지 짜증날라 한다.

타고싶은 미끄럼틀을 못 타고 있는 이 한탄스러운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밑친구는 규민이 비키지 않는다고 신경질을 바락바락낸다. (사실 평소 윗친구보다 이 밑친구가 한 성깔로 유명하신 양반, 자기는 계단의 첫 칸도 밟지 않은 주제임을 파악하고 위 두사람에게 실갱이를 할 권리와 선택할 권리를 줄 것이지, 무작정 비켜비켜 비명을 내지르며 한 켠에 가만 입닫고 있을라는 나를 자꾸 발딱발딱 일어서게 할라 한다.)

왠만하면, 주변 어른들이 누구누구의 엄마가 아니고-그래서 때로는 누구편 누구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아이들 무의식 저변에 깔려있는- 공정하신(과연?) 선생님이 계신 어린이집이라면, 주변에 친구 언니 오빠들의 눈이 있고 자기가 떼쟁이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는 어린이집이라면, 사태는 긴장이 터지기 전에 수습되었을 것이다. 다섯살이면 그만한 이성은 있는 나이인 것이다.

그러나 주변 어른들이 죄다 누구누구의 엄마들이고, 떼쟁이로 낙인찍을 주변인들도 없는 그 곳에서 결국 셋 죄다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고, 어른들의 중재로 사태는 종결되었다.

 

내가 주목한 순간은 이 다음이다.

세 아이 대충 울음을 그치고 다시 미끄럼틀을 타기 시작하려 할때였다.

규민이 다른 두 아이 얼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더니, "미안해, 미안해"하는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한, 죄다 깡그리 잊었다는 의도의 표정을 짓고 미끄럼틀에 매달리려는데, 규민은 두 아이 모두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지자면, 규민은 아무 잘못없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해 통감하는 기분, 그것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그래서 안타깝구나'..

그러나 영어에서 sorry와 i'm sorry는 그렇게 차이난다지만, 우리말 '미안해'는 모호하다. 그 말을 한 이가 결국 밑지고(?) 들어가는 결판이 휙 나버리는, 미묘한 뉘앙스를 살리지 못해 미묘한 감정을 살려주지 못하고 결국 미묘한 상황과 관계를 단순하게 결판지어버리는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다.

나는 이 생각을, 당시 규민의 얼굴 표정과 슬로우모션처럼 플레이되는 '미안해'를 들으며 1분 간은 하고 서있었나보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생각들은, 그러고보니 나도 그런 식의 미안해를 참 많이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했던 순간들, 나는 진심이었다. 내가 아무리 객관적이려 노력하며 두번세번 반복하여 생각해봐도 내 잘못은 별로 없는 것 같은 경우이지만 일어난 사태가 불행스러웠을 때, 나는 미안해, 미안해, 나도 더욱 주의하지 못 했던 것 같아, 어쩌구하며 사과, 사과 또 사과했었다. 그렇게해서 사태가 불행을 극복한다면, 사태의 당사자들이 깨끗한 기분을 맞을 수 있다면 무언들 못하리, 사과 쯤이야. 백만번도 할 수 있어.

 

그때는 저 바닥의 나의 진심을 실컷 퍼올려 마구 퍼주던 사과가 갑자기 몹쓸 단어처럼 느껴졌다. 공정치 못하고, 사태에 무책임하고, 특히나 사후 관계까지 무책임한.

어쩌면 내가 겪는 내 주변 관계의 억지스러움은 내가 진심이라고 남발했던 무책임한 사과의 탓도 있을지 모른다.

 

딸내미의 사회적'미안해'를 들으며 규민이도 이제 지난한 여자의 길로 들어섰구나,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면 비약인가. 미안해 잘 안하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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