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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1/31
    아이의 비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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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1/27
    아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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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1/24
    최근 본 미남자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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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1/16
    집 떠나 일주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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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1/09
    새해소망이라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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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1/06
    <까페 뤼미에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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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비명

그 완벽한 아이가 밤에 비명을 지른다.

자다가 갑자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가슴 속에 응어리가 있는 것이다.

응어리, 가슴에 맺힌 그 응어리는 나로 인한 것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최고 애착대상인 부모, 즉 나와의 충만한 시간.

엄마가 일하러 가야하기 때문에, 아빠가 일하러 가야하기 때문에, 바쁘기 때문에, 아이는 계속 참아왔다.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응 알았어,대답하고는 어린이집에 갔었다.

그러나 어린이집 훌륭하시다는 선생 열, 또래친구 수억 다 필요없다.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 냄새를 맡고, 엄마와 눈을 맞추고, 엄마 입에서 나오는 엄마 말을 듣고, 엄마가 밥을 먹여주고, 엄마가 옷을 입혀주고, 엄마가 친구가 되어주는 것, 오로지 이것을 원한다.

아아, 이 안쓰럽게 사랑스러운 것.

그런데 나는, 사실, 며칠 전 읽기 시작한 소설이 더 재미있다.

이제 얼마있으면 새 일이 시작될 직장 준비에 더 마음이 급하다.

엄마는 너를 최고 사랑해,하고 으스러뜨릴 듯 껴안고 눈을 맞추어 바라보고는 돌아서서 직장 준비를 바삐 하고 잠깐 짬이 날 땐 궁금한 소설책을 집어 들고 싶은 것이다.

아이의 이 집착은 생존본능일 것이다.

약한 것의 생존본능.

그러나 그는 나를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본다(더할 수 없는 사랑의 눈빛).

나를 보면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안도와 평화가 보인다. 내가 없으면 그에게 안도와 평화가 있을까, 불안하다.

나는 외면하기도 잘 하면서, 실은 가슴으로 전전긍긍한다.

이렇게 완벽한 아이는 흔한 사랑 조차 충만히 받지 못하고, 인간과 인생과 세계의 괴리를 일찌기 체험하며 못난 인간의 허울많은 인생을 시작하나보다. 그래서 세계는 부조리 투성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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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여 아이와 대화가 가능해진 후, 그러니까 아이의 실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내가 조금씩 발견할 수 있었던 그 실체라는 것을 한 문장으로 하자면, 아이는 참말로 완벽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이루 말 할 수 없이 상투적이라 이미 너덜너덜하게 닳아빠져 그 의미조차 너절해진 느낌의,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다'란 명제도, '아이는 천사와 같이 순수하다'란 명제도, 그래서 참인 것이었다.

 

이것은 섬뜩한 발견이었다.

 

나는, 아이를 싫어한다는 편으로 남고자 끈질기게 애쓰며 살아왔었는데(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된 주제에도. 딱히 어떤 아이가 싫어서라기 보다는 꾸역꾸역 태어나는 인간들이 싫은 것이었음) 두 손 들어 완패를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앞에 육화하신 부처, 예수, 성인을 두고 감히 내가 뭐라고 그 존재를 '싫다, 좋다' 한단 말인가.

 

 

이 발견의 근거가 되는 상황 상황들을 하나하나 여기에 옮기기는 어려우니 요약정리하자면, 아이는 내가 풀어놓는 인간관, 인생관, 세상관 등에 대해서 내가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과 내가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았다. (그 판단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천상으로부터 내려진 솔로몬의 왕관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테고, 사실 그것은 다름아닌 아이의 '백지와 거울'이란 특성 때문이다. 외부를 고스란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고스란히 내비추고 있는 특성.) 그리고 그 괴리를 자기 몸으로 고민한다. 해답을 찾으며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오오.

 

이러니 아이 앞에서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초라해지겠는가.

나의 일거수일투족, 일사일언이 진실인 것인가,하는 검증은, 이 나이에 새삼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섬뜩한 발견이었다.

 

 

언젠가부터, 아이가 짜증을 부리고 떼를 피우면,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구나, 엄마가 몰랐구나,라는 말이 나왔다. 백만번 사과를 해도 미안해. 그러다가도 나는 역시 범인이라, 어른이랍시고, 떽 혼을 낸다. 홍수나는데 저수지에 또랑내어 논에 물대고 있는 꼴이라지. 누가 누구를 혼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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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미남자둘

한 남자는 키가 훌쩍 커서 백 구십 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색깔이 바랜 보라색 털모자를 쓰고 있었고 헐렁한 검정 스웨터를 입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긴 얼굴, 그러니까 뭐든 다 길어보이는 인상, 손가락도 길 것 같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예민섬세하기만 한 얼굴은 아닌데, 순정만화과의 극단으로 쏠릴 뻔한 분위기를 잡아주는 것은 나이 같다.

젊게 봐야 삼십대 후반. 마흔이 넘었다고 해도 그럴 법해보이는 연륜이 이 사람의 경우 매력 포인트 몇십점을 가산해주는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며 주로 듣는다. 목소리는 분명 보드럽고 감미로울 것 같아.

 

옆의 남자도 어디서 빠지지않을 얼굴이지만, 키 큰 남자에 비해 약간 간이 덜 된 느낌이다.

조금 키가 작고, 조금 살집이 있고, 조금 더 젊어보인다.

주로 말을 하고 있고, 눈이 크고 눈빛이 강하다.

 

 

멀리서도 그들은 큰 키 때문에 눈에 띄었다.

내가 서있는 방향으로 그들이 걸어오고 있는 사이, 점점 더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시선을 끌어잡는 무언가 다른 공기가 있었다.

 

둘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삼십대 후반, 마흔의 두 (미)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걷고 있는 그 모습은 아찔할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여기가 빠리의 거리라면 그렇게나 아찔하지는 않았을 지도..

 

그 둘이 내 곁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살짝 꽃 냄새와 벌꿀 냄새가 가미된 고농도 순수자연 신선 공기가 대기엔 가득하고, 햇볕은 항상 골든 옐로우이며, 비는 나무와 풀을 어루만져 항상 진초록이고, 사람들은 사랑한다. 항상 서로 사랑한다.

 

내가 잠깐 천사를 본 것이었다고 해도 그럴 법 했다.

 

사람들은 왜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사랑을 갈라놓으려 했던 걸까.

그것이 가장 아름다와, 너무 고혹적이라, 세상이 너무나 평화로와져서 악마질을 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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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 일주일

집 떠나기 전 일주일, 규민이랑 부비며 꼬박 집에만 있었다.

규민이가 기관지염을 앓아 꼼짝없이.

공기 좋은 데 가서 살아야지, 하는 소리가 입에 달렸다.

그런 일주일을 보내니 어서 빨리 부산으로 가고 싶었다.

떠나는 날 월요일 전 주말엔 규민이에게 "엄마 퇴근"을 선언하고 뻗었다.

일요일밤엔 잠까지 안 왔다.

이게 얼마만이냐. 흥분과 긴장.

아이가 걱정되긴 했지만, 남은 선수진들도 든든하고, 이제 애 걱정은 의도적으로 접어두기로 작정하였다.

 

월요일 새벽 4시반 집을 나섰다.

5시25분 발 케이티엑스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정확히 구포역.

8시 10분 도착했더니 왠걸, 날씨 너무 좋음. 완전 봄.

촌스럽게 두꺼운 겨울코트 차림이라니.

낯선 도시, 차 창 밖의 낯선 거리,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8시 45분 쯤 목적지 신라대에 도착했다.

대학켐퍼스 또한 얼마만이냐. 스무살로 돌아가는 기분이닷.

 

그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아홉시부터 저녁 여덟시까지 수업으로 꽉 채워진 날을 보내는데, 왜 그렇게 신이 나고 재미있고 즐겁고 상쾌하고 유쾌한지.

규민, 미안, 집에서 고생하는 남편, 미안, 여러모로 신경쓰고 고생한 엄마, 미안.

역시 학생이 최고 좋은 직업임을 다시 한 번 느낌.

나, 그냥 학생으로 평생 살면 안될까.

수업은 어찌나 가슴을 절절 끓이던지, 그림 수업은 또 나의 손의 아티스틱 욕구를 어찌나 일깨우던지, 몸으로 움직이는 수업은 또 어찌나 착 달라붙던지.

이렇게 한나절을 보내고, 기숙사 방의 단출한 살림 속에서 밥을 챙겨 먹고 빨래를 하고 책을 들춰보는 저녁나절, 이런 하루가 꿈인가, 생시인가..

 

그리고 집으로 왔다.

마지막 뒷풀이밤을 거하게 보내고, 잠이라곤 기차안에서 잠깐 눈을 붙인 게 전부인 물먹은 솜덩이같은 몸을 끌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에서 누가 달려온다.

엄마, 부르면서.

 

앗, 저 아이가 규민인가.

내 팔에 들어온 이 아이가 규민이던가.

나랑 너무도 똑같이 생긴 이 아이.

특히 눈매가 너무 나랑 똑같다. 표정을 어색하게 구사하는 모양새하며, 입 안의 말을 분명하게 꺼내놓지 못하는 망설임도 어쩜 이렇게 나랑 똑같은지.

내가 이렇게 나랑 똑같은 애를 세상에 내놨구나, 넌 어떻게 앞으로 살아갈래.

갑자기 이 애가 와락 측은하다.

어차피 세상에 나와서 살아가야하는, 나랑 똑같은 아이.

 

규민아, 니가 규민이 맞아?

엄마는 어떤 예쁜 요정이 날개를 훨훨 움직여 엄마한테 오는 줄 알았어.

 

엄마, 나 보고싶었어?

그럼,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몰라.

맨날맨날 내 생각했어?

그럼, 규민이 잘 있는지, 밥 잘 먹는지, 터전에서 잘 놀고 있는지, 아빠랑 잘 놀고 있는지, 맨날맨날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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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소망이라면,

돈 많다는 삼성생명은 어찌나 돈이 많은지, 정확한 기간과 액수를 외우고 있었는데 까먹었다, 비틀즈 원곡을 사용할 때 지불해야하는 로열티(원곡 뿐 아니라 비슷하게 부르거나 연주된 곡도 사용료를 내야한다고 함, 웬 재수.)가 가히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마어마했는데, 테레비를 거의 틀지 않는 나도 자주 봐야할 정도로 쉴 새 없이 쏘아대던 삼성생명 부라보 유어 라이프 광고 배경음악으로 "I will"을 정확하게 폴 메카트니가 부른 것으로 쓰고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삼성생명이 그토록 거부가 된 데에는 적으나마 나의 돈도 있다. 십시일반이라고, 없는 통장에서 꼬박꼬박 매달 삼성생명께 돈을 바친다. 암보험도 두 개나 들어있고, 엄마가 옛날에 들어준 여성보험도 하나 있다.

 

그래서 삼성생명 직원(은 아닌데.. 보험아줌마의 현재 호칭은 무엇인가.)이 가끔 사근사근한 안부전화를 한다. 지금 돈이 없어서 보험을 더 들 수 없는데요,하고 어느날 용기있게 말했는데, 아, 그런 거 신경쓰지 마세요, 그것때문에 전화하는 거 아니에요,하고 그녀는 매우 프로훼셔널하게 대꾸를 하였다.

그러더니 급기야 우리집에 한 번 오겠다고 조르고 졸랐다. 내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게 이유의 전부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왔다.

산타클로즈처럼 선물을 잔뜩 들고.

2006년 새해달력은 기본이고, 내가 평소에 갖고 싶어했던 딱 그 모양의 탁상거울이랑, 핸드폰에 매달라는 앙징맞은 개 인형줄 두 개, 원래는 여기까지였는데 애기선물을 안 챙겼다며 18 k 금으로 된 네잎클로바 책갈피까지.

 

나도 답변용 무언가를 내주어야하겠는데, 줄 수 있는 거라곤 그녀의 강의를 열심히 들어주는 것 뿐. 그녀는 역시 프로훼셔널하다.

 

삼십대 중반, 이때 십년 이십년을 내다보며 돈을 모아야한다,는 게 그녀 강의의 요지였다.

사실 나도 이 걱정을 안해본 것은 아니다.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세월이 어디까지일까.

땡자땡자하며 지나온 젊음 덕에 수중은 빈털털이고, 거의 하루 벌어 하루 살고 있는 형편인데, 그렇다면 앞으로 하루벌이가 끝나는 날, 내 생활도 끝인 것이다. 그때 가서 나는 살만큼 살았다고쳐도 규민은 또 어떡할건가(이런 걱정을 정말 진심으로 하게된다).

 

그녀는 은행저축보다 보험회사 재테크 보험이 왜 좋은지 줄줄 꿰더니, 그 중 하나 가장 추천할 만한 것으로 변제주식펀드? 변환주식펀드? 하여간에 주식에다가 일정 투자하는 보험을 설명한다.

그녀 : 지금 주식이 얼마인지 아시죠?

나 : 네?.... 네, 얼마더라..

그녀 : 1,300이에요.

나 : 헉 (거기까지 올랐나, 벌써. 천이라고 하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렇다면 갈 데까지 다 갔네.)

그녀 : (나의 표정을 읽은 듯) 미국 주식이 얼만지 아세요? 만***에요. 분석가들은 우리나라 주식이 미국의 딱 이십년전 상황이라고 해요. 이제 우리나라 주식도 그렇게 될거에요. 올해도 천오백,육백된다고 하잖아요. 삼성전자, 에스케이텔레콤 이런데에 예전에 주식 2억정도 가지고 계셨던 분들, 지금 68억원이래요. 주식으로 돈 번 사람들 참 많잖아요.

 

주식이 자본주의 꽃이라더니, 노동자도 자본의 주인으로 만들어주어 부자가 될 희망을 피워준다고 꽃인가, 아, 그 꽃, 공포스럽다.

침이 넘어갔다. 우리나라가 20년 후에 주식 만 포인트 달성하려고 무기 장사 총 장사에 전쟁 장사까지 벌이겠구나. 못할 짓이 무어겠는가. 삼성전자, 에스케이텔레콤 급기야 쌀농사까지 팔아넘기고 주식 천 삼백을 얻었는데. 핸드폰 장사 더 해먹어야 한다는 논리 오로지 이거 하나로 쌀농사 쯤 해치우지않았는가. 이것에 대면 그 어떤 논리도 나가떨어지지않았는가.

아, 무섭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한 사람이 어떻게 돈을 모아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는지를 얘기하는 자리에서 이제 다른 한 쪽은 어떻게 죽어나가든 상관없다는 식이라니.

 

 

새해 소망을 묻는 마이크에다 열에 여덟은 경기가 풀리고, 경제가 나아지고, 부자가 되었으면, 이라고 한다. 가구 당 한 대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고, 인터넷은 삼천만명이 사용한다고 하며, 핸드폰은 중학생이면 거의 가지고 있는 세상이면 소비산업이란 갈 데까지 다 간 것 아닌가. 여기서 경기/경제더러 더!더! 외치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정말 모르겠다. 사람들이 무얼 원하는 건지.

 

새해소망이란 거 없었는데, 생겼다.

주식 500대 이하로 확 꺽어서 자본주의 꽃 말라비틀어주시고, 미국 전쟁산업 좀 고만하게 하시고, (여기서 끝나면 좀 아쉬우니)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홀딱 망하고, 민주노동당 많이 당선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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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 뤼미에르>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휀이었던 염승주답게 염승주의 2005년 베스트 무비는 <까페 뤼미에르>라고 했다. 

 

 

얼굴 본지도 몇 년에다가, 그렇다고 앞으로 몇 년 후에 얼굴 볼 것인가 하면 그럴 것 같지도 않은 사람을 두고 나는 참으로 이러쿵저러쿵 별 생각을 다 한다.

그런 사람이 있긴 하지.

직접 보며 말을 나누지 않아도 그 사람을 가끔 떠올리고,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영향을 조금 가끔 받고 있는.

난 왜 그런 사람이 하필이면 멸치대가리 염승주일까.

(염승주말고 다른 사람도 물론 있겠지, 예를 들면 존 레논이 그렇고...)

하여간에 나도 <까페 뤼미에르>가 무척 보고싶었다. <킹콩>보다 <까페 뤼미에르>가 더 보고싶다.

 

<까페 뤼미에르>의 광고를 보고 아, 이 영화 보고싶군,이란 생각을 하자마자 시사회신청을 열라 했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대여섯군데를 들러, 똑같은 답변을 써놓고, 회원가입을 하는 지랄을 하느라 두어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시사회 시간이 밤12시이니 규민이 재워놓고 나가면 딱 맞겠다, 티켓 두 장 오면 하나는 누굴 줄까, 일본인이랑 같이 보고싶은데 아는 일본인이라고는 하야타형밖에 없고, 이 양반은 밤 열두시에 만나 영화티켓을 건네며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나와 영화가 좋으면 팔짱을 끼고 밤거리를 걸을 지도 모르는 낭만의 상대로는 왠지 끌리지 않는군, 그렇다면 어떡하나, 학교에 일본어 선생을 꼬셔볼까...하는데 시사회에 당첨 안 됐다. 그 후에 들은 소리는 <까페 뤼미에르>가 염승주의 2005 베스트 무비라고.

 

2006년엔(이 까마득한 숫자라니.) 영화를 좀 많이 봐야지,하고 있지만, 아직도 영화 보는 습관을 들이기가 힘들다. 영화를 보자면 약 두시간 쯤(집에서 비디오로 볼때나 그렇지 영화관에 가자치면 반나절이나) 꼼짝없이 시간을 묶어두어야한다는 것인데, 애 낳고 키우다보면 금 한 다라이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게 두 시간이라, 이 금쪽보다 귀한 것을 어디 한 군데에 묶어쓰겠다는 과감성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이다. 사실 그러고서는 하는 짓이 인터넷이다.

인터넷 딱 삼십분만 하고, 책 한 시간, 나머지 삼십분은 차마시며 신문을 봐도 좋고, 손톱 맛사지를 할까, 인생을 음미하며 철학을 생각할까,하고 컴퓨터를 켜고는 두시간 홀랑 인터넷인 것이다. 이놈의 인터넷 정지해도 싸다.(아직 정지하지 못했음)

 

따라서 점점 영화와 나는 멀어지고(언제 가까운 적 있었던가만은) 그냥 이렇게 멀어지는 것이 수순인가보다,하고 생각하였다. 나에겐 내가 감당 못 할, 그러나 너무 가까와져버려 거부할 수는 이미 없는 것이 생겨버렸으니 영화 쯤 멀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영화는, 보면 재미있으니, 보면 또 보고싶고..

요즘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있어서 특히 그런가보다.

요즘 본 것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어찌나 재미있는지 여러번 보면서도 보면 볼수록 재미있다.

새삼, 감상의 기쁨이랄까.

(규민이가 아직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를 보지 못해(귀신때문에 무서워서 중간에 자꾸 빨리 돌려야함) 비디오로 복사를 못하고 있어 이 디비디를 빌려준 누군가에게 너무나 미안함)

오히려 처음 봤을땐, 캐릭터마다 이미지가 과다하게 느껴져서 싫었다. 이게 내가 에스에프나 환타지를 싫어하는 이유인 듯.

그러나 보면 볼수록 드러나는 것은 감정과 일상을 표현하는 섬세함, 세밀함, 풍성함.

섬세하고 세밀하고 풍성한 감정과 일상의 표현이란 창작의 원론 같은 것이다. 결국 아무 데도 더 가지 않았다. 아무리 길고 뛰는 디지털 시대 어쩌고 하지만, 세상은 늘 제자리인 것을. 줄기세포, 인간은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전기용접 따위로 신을 흉내내었다고 하려하다니.

황우석 얘기는 아무 데서도 하지 않는다고 결심했건만, 하필이면 엄마 아빠 앞에서 몇 마디 했다가 대판 싸우기만 했음. 으으으... (아니다, 황우석은 엄마랑 싸우고, 아빠하고는 이명박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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