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식 할아버지와 국가보안법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4/12/23 02:35자주 만나는 분이지만 오늘도 할아버지는 내게 할 이야기가 많은지 나는 2시간 가까이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에는 내가 이미 여러번 들었던 이야기들도 있고, 듣지 못했던 이야기도 있고, 듣지 못했어도 내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있다.
할아버지가 했던 공산주의 이야기며, 반핵운동이 얼마나 중요한 운동이며, 환경운동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인데 한국의 환경운동은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들.
그리고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부정하며 투신하게 된 아나키즘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
내가 보기에는 할아버지는 자신만의 저서를 썼어도 이미 몇 권은 쓸 수 있었을 사람이다.
그런데 항상 할아버지는 남이 했던 이야기를 번역만 했을 뿐, 정작 글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지 못했다.
그 많은 이야기들, 무수한 사연들, 할아버지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현체제의 문제점과 모순을 집어내며 던지는 많은 화두들.
이런 것들을 모아도 책 몇 권 분량이 될 듯 싶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자신의 말을 하지 못했다.
압축적으로 설명하자면 국가보안법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일의 최선두에 섰던 안전기획부가 할아버지의 입을 막았던 것이다.
그는 이미 완전히 북한의 공산주의를 훌훌 털어버렸지만 국가보안법과 정보기관의 감시의 칼날은 여전히 할아버지의 머리 한 쪽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 한 사람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머리 속에 국가보안법은 또아리를 틀고 앉아서 끔찍할 정도로 야만적인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해온 것이다.
국가의 권위에 맞서는 어떤 불복종도 처벌된다는 두려움을 이 체제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어온 것이다.
내가 가진 정체 없는 두려움도 국가보안법과 함께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리게 될까?
고문도, 조작사건도, 의문사도, 억울한 옥살이도 없어지게 될까?
공권력이 저지른 만행에 고통을 받으며 죽어간 사람들,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는 수많은 원혼들도 50년 회한의 눈물을 거두는 그 날이 오긴 올까?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하루빨리 국가보안법이 흔적도 없이 역사의 무덤으로 묻혀야 한다.
어쩌면 더 무섭고 더 지능적인 괴물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국가보안법이 강요한 것은 바로 짓밟는 자의 진실이었으니 말이다.
이것을 벗을 때 비로소 짓밟힌 자의 진실이 보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