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평화가 무엇이냐 2006/02/07 21:52
오늘도 대추리에서 아침을 맞이한다.
잠이 들기 전 어두운 창문 너머로 바깥을 보았다.
말 없이 서 있는 너른 들판이 보이고, 그 옆으로 나부끼는 노란색 깃발에는 붉은색으로 '미군기지 확장반대'가 쓰여 있다.
저 깃발을 보며 잠이 들고, 다시 저 깃발을 보며 눈을 뜨겠지.
 
내가 처음 팽성 농민들의 촛불 시위에 오게 된 것은 2005년 1월 6일이었다.
당시에는 본정리에서 촛불 집회를 열고 있었고,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의 일이다.
그 때는 서울 길바닥평화행동 사람들과 함께 와서는 '여러분들의 투쟁은 정당하다. 우리는 여러분들의 투쟁에 지지를 보내고, 힘을 실어주러 왔다'는 식으로 말을 했었다.
여기에 다녀와서 쓴 글이 '부안과 평택은 하나'다.
 
1년여가 흐른 지금 나는 여전히 팽성에 오고 있다.
이제는 더욱 자주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팽성 주민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힘을 받기 위해서 대추리에 내려온다.
어제 참석한 촛불 집회가 그랬다.
한 분이 나와서 '냉동탑차' 이야기를 했다.
 
어떤 사람이 냉동탑차에 갇혔다. 그는 온몸이 꽁꽁 얼어죽겠구나 생각한 모양이다. 다음날 그는 탑차 안에서 동사한 채로 발견이 되었다. 그런데 냉동탑차는 고장난 상태였다. 냉동장치에 고장이 생겨서 실제로 탑차 안은 그리 춥지 않았다. 갇혔던 사람은 지레짐작으로 그 안이 추울 것이라고 여긴 모양이다.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동사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냉동탑차의 교훈을 생각하며, 나는 저 멀리 조용히 나부끼는 노란색 깃발을 보며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 보니 깃발은 보이지 않고, 그저 온통 하얀색만이 보일 뿐이다.
밤사이 10cm 이상의 엄청난 눈이 내린 것이다.
주민들은 2월 12일에 있을 3차 평화대행진 걱정이 태산이다.
눈이 녹으면 저번처럼 땅이 질퍽거리게 되어서 대보름을 맞이해 계획중인 다양한 행사들을 열기가 힘들게 되고, 눈이 녹지 않으면 대추리에 들어오기가 힘들 것이기에 또 걱정들을 하게 된다.
 
얼른 아침을 먹고 밖으로 나가서 숙소 주변과 놀이방 그리고 찻집에 쌓인 눈들을 치웠다.
그래도 눈은 하염 없이 내린다.
눈을 치운 곳에 다시 눈이 쌓인다.
저 멀리서 낯익은 트랙터 한 대가 대추초등학교 부근 도로에서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다.
신종원 씨가 직접 미군기지 확장반대 깃발이 꽂힌 트랙터, 지난 1월 전국을 돌며 수 많은 지지와 연대와 감동을 이끌어 냈던 바로 그 트랙터!를 몰고 눈을 치우고 있다.
그 큰 트랙터로 눈을 쓱싹 밀어내니 평택시에서 운용하는 제설차가 따로 올 필요가 없다.
어차피 팽성농민들은 국가에 기대하는 것이 없기에 눈이 오면 스스로 트랙터를 몰고 직접 나가 눈을 치우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국가에 기댈 것 없는 민중의 자치라고 생각한다.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인 것이다.
 
실제로 평택시에서는 올해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을 위한 예산을 한 푼도 배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오늘 평택시청 앞으로 몰려가 주민등록증을 불태웠다.
더이상 한국의 국민이 아님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준다며 세금을 뜯어가던 정부가 실제로 민중들을 위해서 한 것이라고는 멀쩡한 토지를 빼앗아 전쟁을 준비하는 미군기지로 바꾸겠다는 협박과 폭력밖에 없음을 절실히 자각한 팽성 농민들은 결국 정부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치'를 선포한 것이다.
주민들이 던져 넣은 주민등록증을 순식간에 녹여버린 채 활활 타오르는 검붉은 불꽃을 보며 나는 절박함과 처절함과 비장함으로, 그리고 솟구쳐 오르는 감동으로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것은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이미 정부에서는 대추리, 도두리 마을 철거 작업을 위한 용역깡패업체를 선정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포크레인을 멈출 수 있는 힘, 유도 유단자들로 구성된 용역깡패들을 물리칠 수 있는 힘, 진압장비를 갖춘 경찰을 막아설 수 있는 힘, 국가의 명령을, 정부의 법집행을 막아설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답은 간단하다.
민중의 힘이다.
살아 꿈틀거리는 민중의 힘밖에는 없다.
폭력을 독점한 국가를 덮어버릴 민중의 거대한 함성의 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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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7 21:52 2006/02/07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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