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전과 단식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4/10/17 11:51단전이라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여기서는 일단 斷電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 단식이 '음식을 단절하는 것'이라고 하면 단전은 '전기를 단절하는 것'이 된다.
단식은 절박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진정어린 요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최근의 경우 지율스님이 그랬고, 김재복 수사가 그랬고, 동화작가 박기범이 그랬다.
미국의 평화운동가 캐띠 켈리 Kathy Kelly가 미국의 반전운동을 소개하면서 "미국의 대학생들은 미군의 폭격으로 전기가 끊어지므로 전쟁이 발발해 전기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이라크 민중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해보자는 캠페인의 하나로 24시간 동안 단전 (fasting from electricity)을 한다"고 말했다.
내가 짐작하기에 하루 동안 전기 없는 생활을 해본 그 대학생들은 사회의 기반시설을 철저히 파괴하는 전쟁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그리고 전기가 얼마나 현대의 생활방식과 사회체제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 느끼게 될 것 같다.
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에게 아마 단식보다도 힘든 것이 단전일 것이라고.
하루 동안 전기 없이 사는 생활이라니 밥이야 먹지 않아도 견디겠지만 과연 내가 인터넷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과연 내가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몹시 가난한 생활을 하는 나에게는 매달 전기세를 내는 것도 쉽지 않아서 얼마 전에는 전기세를 내는 것을 깜빡 잊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니 한전에서 몇 일까지 돈을 내지 않으면 단전하겠다는 스티커를 붙여놓고 갔더라.
그것이 내게는 아주 효과적인 협박이었다.
나는 바로 은행으로 달려가 돈을 털어 전기세를 납부하고야 말았으니.
한전이 돈 없는 사람들에게 전기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는 단전과 내가 '고통 함께 느끼기' 차원에서 감행하는 자발적인 단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차이가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미국처럼 엄청난 에너지 낭비를 하는 국가에서 그것도 부유하고 풍족해서 대학까지 온 애들이 며칠 단식을 하는 것과 전쟁의 위협이 일상 곳곳까지 침투해서 전기까지 끊어버려 절박한 생활을 하는 점령지의 민중들이 전기 없이 생활을 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 이상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 말이다.
자발적인 단전을 '배부른 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좀 덜 느끼기 위해 벌이는 철저히 자신만을 위한 자작극 정도'라고 폄훼해 들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고민을 계속할수록 전기가 생활의 기초가 되어버린 이 체제에서 살아가는 나는 전기 없는 생활을 몇 시간이나마 해본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며, 이 체제의 모순과 문제를 명료하게 느끼기에 아주 좋은 실천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도 이제 자발적인 단전을 해볼까 한다.
사실 단전이 근본적으로 나에게는 돈이 없다는 절박함에서 나온다.
당장 전기료를 아끼면 한 끼를 더 먹을 수 있으니까.
방에 보일러 한 번을 당장 절약하면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컴퓨터를 끄고, 형광등도 끄고 모든 것이 잠들어버린 암흑의 세상에서 조그만 촛불을 밝혀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