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버스를 타고 한진중공업에 다녀왔습니다
나의 화분 2011/06/13 19:00지난 주말 희망의 버스를 타고 김진숙 동지가 159일 동안 농성을 하고 있는 한진중공업에 다녀왔다.
다행히 두리반 투쟁이 그 전에 마무리되어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있었다.
나는 1호차에 탑승했다.
1호차가 제일 먼저 출발한다고 해서 한시라도 빨리 영도조선소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 부산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그는 이미 원청봉쇄가 돼있던 한진중공업에 일요일 아침에 어렵사리 잠입했다고 했다.
그는 안에서 사측이 고용한 용역 깡패들의 폭력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그가 나올 수도, 내가 들어가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어서 만나자고 메시지를 교환했다.
하지만 같이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사람들 조차 '공장 안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미 사측이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문을 컨테이너를 통해 용접까지 하면서 완전히 막아놓았고, 컨테이너 앞에는 수 백명의 용역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만날 수 있다면 그건 무척 감동적일 것 같았다.
서울에서만 11대의 희망의 버스가 서울시청 앞 재능교육 농성장을 떠나 부산으로 출발했다.
사진: 조약골
희망의 버스들이 부산에 진입하자 제일 먼저 우리를 막아선 것은 역시 경찰들이었다.
버스를 세우곤 '어디로 가냐', '몇 대가 가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경찰의 면전에 "버스가 50대가 동원되었다. 우릴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고 소리쳐줬다.
듣기론 경찰이 15개 중대를 동원해 부산대교를 막고 있다고 했다.
긴급한 문자가 날아왔다.
지금 한진중공업 안은 엄청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고 했다.
공장 가까이서 내려 정문까지 약 1km를 촛불을 든 채로 걸어서 행진하기로 했다.
버스에 내린 사람들이 촛불과 기타와 깃발을 들고 차곡차곡 모여들었다.
새까만 밤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감동의 물결이 시작됐다.
나는 기타와 텐트를 든 무거운 몸임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열심히 폰카를 눌렀고, 실시간 상황들을 트위터에 올렸다.
일일이 답을 할 수 없을만큼 많은 알티와 멘션이 쏟아졌다.
사진: 조약골
나는 트위터에 "가자, 희망의 촛불을 들고 한진중공업 정문 앞으로. 우리가 강물이 되고 우리가 바다가 되자!!" "막을테면 막아봐라, 이 물결을, 이 함성을!" 같은 글을 올렸고, 사람들은 무한알티로 응답했다.
85호 크레인으로 향해는 촛불의 물결을 경찰이 가만 놔둘리 만무했다.
경찰이 막았지만 평화적이고 조용하게 진행되는 행진을 막을 근거는 희박했다.
게다가 경찰이 막으면 돌아서라도 어떻게든 공장으로 갈 촛불들이었다.
사진: 조약골
경찰이 물러서고 행진이 이어졌다.
나는 한진조선소가 얼마나 남은지 몰라서 답답한 마음에 대열 제일 앞으로 나갔다.
밤이라 어두운데, 바로 앞에 노란색 모자를 쓰고 일렬로 줄맞춰 도열한 용역깡패들이 보이고, 그 앞에서 희망의 버스를 열렬히 환영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얼마 전 두리반에서 G20 쥐벽서 사건 후원을 위한 파티하쥐에 왔던 박정수 씨도 예의 그 쥐벽서 그래피티를 들고 한진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평화바람의 활동가들과 꽃마차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평화바람은 밥차를 운영했는데,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200인 분의 밥을 준비했다고 했다.
정말 감동이었다.
이제 문제는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미 문이란 문은 용역깡패들과 컨테이너가 막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벽에서 사다리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사다리를 타고 공장 담벼락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짐이 많던 나는 저 좁은 사다리를 어떻게 타고 올라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공장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다친 동지, 연행된 동지들도 있었다.
공장 안은 정말 감동의 물결이었다.
공권력의 절망의 벽을, 용역깡패의 폭력의 벽을 희망의 버스를 타고 온 촛불들이 단숨에 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나는 마침내 그 부산 친구와도 만나 감격적인 포옹을 했다.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정문 앞 컨테이너에 올라간 문정현 신부님과 송경동 시인 등이 사자후를 토해냈다.
사진: 조약골
전국 각지에서 김진숙 동지를 만나기 위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여든 천 명의 사람들이 지금 85호 크레인 앞에 모여 있다!
나는 진실과 양심을 걸고 싸우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호응한다는 것을, 두리반 투쟁을 통해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윤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을 바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소박한 구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는가를 희망의 버스를 타면서 느끼게 됐다.
소중한 배움이었고, 값진 깨달음이었다.
내가 현장에 가서 투쟁을 하는 단순하지만 명쾌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진: 조약골
친구와 인증샷을 찍고 우리는 바로 85호 크레인 바로 밑으로 이동했다.
긴 하루였다.
두리반 투쟁 승리로 한동안 제대로 쉬지 못해 몸은 피곤할대로 피곤했다.
사실 한동안 쉬려고 했지만 상황이 그렇질 못했고, 나는 꽉 짜여진 일정을 소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희망의 버스를 굳이 타려고 했던 것은 모든 것을 걸고 질기게 싸우면 승리할 수 있다는 단순한 교훈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사진이나 동영상이 아니라 가까이서 김진숙 지도위원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절망 끝에 선택했던 85호 크레인의 그 무섭디 무서운 계단을 김지도가 행복하고 가뿐한 마음으로 사뿐사뿐 걸어내려 오길 바랬기 때문이었다.
그냥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가까이서 그를 본다면 설사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 같았다.
노래라도 한 곡 같이 부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평화가 무엇이냐'를 들려주고도 싶었다.
노동자들이 힘을 내서 다시 공장으로 돌아갔으면 했다.
그래서 평화가 무엇이냐와 함께 새로 만든 '하늘의 별처럼'도 불렀다.
사진: 조약골
그래서 우리가 외롭지 않음을 알게 하고 싶었다.
우리 투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저들의 삶만큼 우리의 삶도 정당하다는 걸 모인 사람들의 몸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다른 곳도 아닌 85호 크레인 아래서 다짐해보았다.
흥을 내면서, 재미있게 버티면서 투쟁을 해도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퍼뜨리자.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마음이 있는 연대가 두리반을,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을, 한진중공업을 또 하나의 해방구로 만들었지 않았나.
자본이 만든 절망의 벽은, 공권력의 원천봉쇄는, 용역깡패의 폭력은 이렇게 무너뜨릴 수 있다.
우리 그렇게 계속 나아가자.
그리고 날이 밝아오는 새벽, 날라리 외부세력이 트로트 메들리를 부르며 신나는 무대를 열어제꼈고, 나는 이어서 기타를 들고 낮은 무대로 올라갔다.
평화가 무엇이냐를 불러달라는 열화와 같은 요청을 받았다.
노래를 못하는 나라도 이 열기라면 제대로 에너지를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이미 한진중공업 공장 안은 광란과 흥분의 도가니였다.
사다리를 타고 금지와 폭력의 담을 넘어 그 안 친구들과 감격적인 해후를 한 순간부터 우리는 막을 수 없는 물결이 되었다.
바다에 이른 우리들이었다.
사진: 홍원석
사진: 황진미
이렇게 우리 '폭도들'은 무기 대신 악기를 들고 노동자들과 연대했다.
김진숙 동지가 듣고 있는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아래에서 희망의 버스를 타고 모인 천 명의 사람들과 다같이 '평화가 무엇이냐'를 부르던 순간은 나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살면서 이런 순간들이 있기에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현장에서 연대하는 활동가로 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다.
곧이어 아침이 밝아오고, 한진 가족대책위 분들이 정성들여 만든 밥과 김치를 먹으며 고픈 배를 달랬다.
그런데 날라리 김여진 씨가 공장 문을 나서다 연행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어 공장 안에 있던 우리도 모두 강제연행 한다는 방침이 발표됐다고 했다.
해볼테면 해봐라!
영도조선소 안은 무척 넓었다.
나는 처음으로 조선소 안으로 들어가봤는데, 거기서 만들고 있는 배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들이 엄청난 크기였다.
경찰이 잡으러 오면 나는 바다로 들어가 헤엄을 쳐서라도 빠져나갈 수 있겠다 싶었다ㅋㅋ
조금 후 '전원 연행' 방침은 '전원 연행, 신원 확인 후 훈방' 방침으로 완화됐다는 소식이 또 들려왔다.
여전히 우리들을 범죄자로, 혐의자로 몰고 있는 일방적인 발표였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느굿하게 나는 잠을 청했다.
피곤했고, 또 잡아가려면 잡아가라고 했다.
어차피 법은 가진자들의 편이고, 나는 그것을 어기며, 또는 것을 거부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법 따위는 조롱하며 그냥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맑은 하늘에서 어느샌가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공장 안에서 맛본 승리는 달콤했고, 이제 우리는 이 집단적 희망의 기억을 안고 다시 버스를 타고 우리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꿀 같은 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