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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15년 10월 7일 이후의 몸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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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1/03
    2015년 10월 13일:몸이 있었다
    하루

2015년 10월 13일:몸이 있었다

<몸이 있었다>

매일매일 엄청나게 많은 사건과 생각이 안팎에서 일어나고
오늘 나는 그 일을 기록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몰랐는데 내 핏줄은 너무 약해서 자꾸 터진다 한다.
바늘을 꽂을 데가 없어서 이젠 오른쪽 손등까지 꽂게 되어서
수액을 맞는 동안에는 오른손을 쓸 수가 없다.
밤이 되면 손을 쓸 수 있게 되어서
잊기 전에 기록을 한다.

나는 10월 7일 수요일 오후 7시경 
강화도 온수리 온수사거리에서 집으로 가던 중
반대편 농협 골목에서 튀어나온 차에 뒤를 받혔다.
상대편 차는 아반테였고 나의 차는 모닝이었는데
상대편 차가 회전하며 내 차 왼쪽 뒷바퀴 부분을 받아서
튕겨져나간 내 차는 중앙선을 넘어 버스정류장 부스를 완파하고
다시 튕겨져서 택시에 부딪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밖으로 나와보니 영화에서나 나올 장면이 펼쳐져있었고
나는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충격 때문에 차 안의 물건들이 뒤죽박죽이 되어있어서
전화도 못 걸고 사진도 못 찍으면서 멍한 상태도 서있었다.
렉카가 두세대 달려왔고 유리조각이 뒤범벅이 된 그 길에 서서
나는 가슴과 목에 통증을 느끼는 상태에서
"누가 경찰에 전화 좀 해주세요, 전화 좀 해주세요"
외쳤다.

다행히 버스정류장에는 사람이 없었고
다행히 택시 아저씨가 차 앞에 서서 손님을 기다리느라
그 모든 광경을 다 보았다.
택시 아저씨가 경잘에 신고를 해주었고
나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서 
택시 아저씨에게 전화기를 좀 달라고 했는데
아저씨는 사진을 찍어야해서 줄 수없다고 했다.
전화기를 좀 달라고, 달라고 소리를 치고 있으니
내 차를 받은 아저씨가 전화기를 주셨다.
그 전화기로 집에 전화를 해서 빨리 좀 와달라고 하고
차 안에서 계속 내 전화기를 찾았다.

차 안에는 가방과 짐들이 뒤죽박죽 된 상태였고
전화기는 좌석 사이에 끼어있었다.
겨우 찾아서 내 차의 보험사인 한화보험에 전화를 하고 
사고현장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그 때가 7시 6분.
사고가 난 것은 6시 50분에서 7시 사이이다. 
휴대폰에 남아있는 기록을 살펴보니
함께 작업하는 팀으로부터 문자를 받은 시간이 6시 50분,
그리고 사진을 찍은 시간이 7시 6분이다.

아무튼 보험사직원(동부화재)으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열심히 사진을 찍으면서 
이런 저런 것들을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우리 보험사 직원은 외포리에서 오니
20분쯤 후에 도착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보험사직원이라기보다는
응급출동반 정도인 듯하다)

사고를 낸 아저씨도 침통한 표정이었고
그 친구인 듯한 아저씨는 뭔가 심상치않은 것을 느낀 표정으로
자꾸 내 차를 살펴보며 어떻게 부딪친 것인지 친구에게 물어보고
목격자 택시 아저씨가 정황을 설명하니
같이 듣던 동부화재 아저씨가 나보고
"직진차량 우선이라고 하더라도 
주위를 살피지 못한 직진차량의 과실도 크다"라고 말했다.
사고아저씨의 친구는 "앞을 받친 거 아니냐?"고 그러고
이런 저런 말들이 오가면서 무척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택시아저씨가 "뒤에서 받는데 주의하고 말고 할 것이 어딨냐"
라고 말해줘서 무척 위로가 되었다.

동사무소에서도 나왔는데
버스정류장이 부서진 것 때문이었다.
동사무소 아저씨도
동부화재 아저씨도
경찰도 다 내 인적사항을 적어갔다.
음주측정을 하고
내 보험사인 한화보험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사실 가슴도 아프고 목도 아파서
쓰러질 것같았지만 한화아저씨가 오고나서 가야할 것같았다.
한화아저씨는 경찰이 조사를 다 하고 간 후에 오셨다.
아저씨한테 이런 저런 설명을 했는데
아저씨는 별 궁금한 것도 없는 듯했다.
(나중에야 나는 이 아저씨들은 보험사조사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무척 불안해하며 강화병원 응급실로 갔다.
사실 그 전에 읍에 있는 인성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갔는데
진료는 8시에 끝난다 하고(문을 닫고 있었다)
강화병원 응급실로 갔다.

강화병원 응급실로 갔더니 젊은 의사가
나한테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가슴과 목과 어깨가 아프다고 대답했는데
머리를 부딪쳤는지 물어서
안경은 벗겨졌는데 머리는...
하는데 재차 여러번 부딪쳤어요, 안부딪쳤어요?
하고 자꾸 다그쳐서 묻길래
아, 이 사람은 뭔가 사정을 듣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진술을 원하는 듯해서
정신을 차리고 단답식으로
"사고가 난 후라 어디를 어떻게 부딪쳤는지 잘 모르겠다"
라고 말을 했다.

목과 가슴 엑스레이를 찍고 
다시 침대에 앉아있으라 해서 앉아있는데
무릎이 아팠다.
바지를 걷어보니 무릎에도 멍이 들어있었다.
다시 가서 무릎에도 멍이 들었다고 하니 무릎을 또 찍었다.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앉아있는데
다른 쪽 무릎도 아파 바지를 걷어보니 거기에도 멍이 들어있었다.
(뭔가 네버엔딩스토리같다)
하지만 다시 또 가서 말하는 것도 그래서 그냥 가만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족방에다 교통사고가 났다고 했더니
오빠가 그러면 증상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병원에 입원해있어야지 왜 집에 가냐고 그랬다.
입원은 생각도 못한 게
강화병원 의사가
엑스레이를 보며 골절은 없는데
자세한 것은 내일 과장님이 나와봐야한다고 해서
우리는 당연히 "그럼 내일...."하며 집에 가는 길이었다.
입원을 하는지도,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모른 채로
우리는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무엇보다 밥도 못 먹은 채 놀란 은별과 하은이 함께 있었다.

하은이는 가족 중에서 사고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는데
무슨 일인가 보다가
깨진 유리조각, 엉망이 된 버스정류장을 하나씩 하나씩 보고있는데
거기 아수라장 그 가운데 "엄마의 민트색 잠바가 보였어"라고 ....
충격이 컸는지 차 안에서 자꾸 토할 것같다고 해서 
하은이가 더 걱정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잠을 잤다.
목부터 오른쪽 어깨까지의 통증이 심했지만 참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니, 잠에서 깨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남편을 불러 일으켜달라고 해야했다.
그 사이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다가
강화병원은 별로 평판이 좋지 못해서
강화사람들은 모두 피한다는 이야기를 
지인으로부터 전해들었고
안정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믿을만한 병원을 알아보던 중
몇년 전 남편의 무릎관절을 수술한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부천에 있는 병원이었는데
너무 멀지 않냐는 내 말에 남편은
"집에서 먼 건 나나 아이들이 괜찮으면 되는 거고
믿을 만한 곳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와서 다시 엑스레이를 찍었다.
이번에는 더 꼼꼼히 찍는 것같았다.
의사는 "골절은 없고 근육이 많이 뭉친 것같으니 물리치료를 받자"
라고 했다.
나는 그 날 세 개의 회의가 있었고 두 개의 원고가 마감이었다.
두 개의 회의는 아침에 연락을 해서 양해를 구했지만
한 개의 회의는 꼭 가야만 했다.
영화제 심사회의 최종심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후가 되어갈수록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고
남편은 입원수속만 하고 가버렸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끙끙대며 심사회의를 작성해서 
너무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메일로 보냈다.
원고는 한 개는 거의 쓴 상태여서 보냈고
다른 한 개는 쓰지 못해서 미안하다,
펑크내기가 너무 미안한데 혹시 다른 곳에 투고한 원고도 괜찮은지
물었고 다행히 괜찮다고 해서 그렇게 마감을 했다.

어떻게 그 밤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옆 침대 아주머니가
밤에 끙끙 앓더라고 했다.
금요일에 가족들이 오기로 했지만
차가 많이 너무 막혀서 돌아갔다.
그 이틀을 나는 말 그대로 몸부림을 치면서 일어나고
몸부림을 치면서 눕고....그렇게 보냈다.

나한테 일어난 일을 찬찬히 되짚어보는 건 
토요일이 되니까 가능해졌다.
토요일 아침, 물리치료실이 문을 열자마자 가서 누웠는데
그렇게 누운 채로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당했는지 실감을 했다.
내 차가 중앙선을 넘는 순간 맞은편에서 차가 왔다면
나는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의 솜털을 세는 것같은 느낌으로
그 순간들이 생각났다.
아주 긴 시간동안 겪은 일인 것같지만
사실 그 모든 일들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핸드폰에 있는 흔적들로 시간을 역추산했을 때
사고가 난 후 핸드폰을 찾았던 게 아주 오랫동안이라고 느꼈지만
지금 보니 겨우 몇 분인 것처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쓴다.
내가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을 하는 건
앞으로 어떤 절차들이 남아있고
그것이 순조롭게 이뤄지지 못할 것같다는 판단 때문이다.
나는 월요일부터 12차시에 해당하는 특강을 하기로 했었다.
9월부터 준비했던 이 강의를 위해서
나는 커리큘럼을 짰고 수업차시안을 작성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이 수업을 하지 못했다.
수업을 일주일만 미뤄달라고 했지만
이미 공고가 난 상태라 그건 불가능했다.

오늘 우리편 보험사 직원이 말했다.
내가 포기한 수업과 내가 포기한 회의,
그리고 내가 겪고있는 신체적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에
보험사 직원은
피해에 대한 보상은
세무소에서 잡히는 수입에 대한 것에 한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특강을 못하게 된 것은 보상해줄 수 없다고 했다.
억울하면 민사소송을 하면 되겠지만
보험사에는 전문적인 변호사가 있어서 이기기 힘들거라고 했다.

상대편 보험사인 동부화재는 열심히 전화를 하고 찾아오지만
전화 한 번 없는 한화보험에 여러 번 전화를 해서
겨우 알아낸 것이 저런 내용이다.
대물관계 책임자한테 전화해서 이런 저런 사항을 물어보니
대인관계 책임자한테 전화하라고 한다고 했고
대인관계 책임자라는 저사람은
나한테 "궁금한 게 있다면서요?"라고 전화를 했고
내가 "이런 사고가 일어났을 때 기본 매뉴얼 정도는 알려줘야하는 거 아니냐"
고 했더니 "우리는 이해관계가 없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내가 당신네 보험을 들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했더니
동부화재에서 안내 안해주더냐고 그랬다.
나는 전화를 끊었고
남편이 전화를 걸어서 알아낸 게 저거다.

인천영상위원회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12월말까지 내 영화를 완성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어제 5일만에 처음으로 활동이라는 걸 했는데
그게 뭐였냐면 '머리감기'였다.
머리를 감고 나서 다음날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일요일, 옆침대 아주머니는 내가 좋아지는 것같다고 했다.
그런데 머리를 감고난 밤, 나는 또 끙끙 앓았다 한다.

나는 육체노동자이다.
나는 몸을 움직여서 촬영을 하고
몸으로 편집을 한다.
그리고 나는 소속된 직장이 없는 프리랜서이다.
푸른영상이 내가 속한 조직이지만
그곳은 정기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일 뿐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보는 게 맞다.
나는 열심히 뛴 만큼 돈을 받는다.
글을 써서 원고료를 받고
방송을 해서 출연료를 받고
강의를 해서 강의료를 받는다.

하지만 이 일들은 정기적이지 않다.
어제부터 하기로 했던 특강은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나는 이번 강의를 시작으로
다시 미디어교육을 시작해서
지속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결국 그 기회는 날아갔다.
나는 정말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밖을 나서는 일 조차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한테는 몸이 있었다.
나는 그걸 몰랐다.
주사바늘을 꽂으면서
혈관이 잡히지 않아서 여러 번 여기 저기 꽂히는 고통을 느끼면서
그러면서 나는 내 몸을 느꼈다.
물리치료를 받고 나면 통증이 가셨다가
다시 밤이 되면 살아나는 통증을 느끼면서
나는 내 몸의 존재를 이제사 안다.

보험사 직원은
등산갔다 오면 몸이 찌뿌드드 한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과연 그럴까?
나는 촬영을 위해 카메라와 삼각대과
어쩔 때엔 노트북까지 들고 다니기도 한다.
밀양의 산을 오를 때에도
카메라와 노트북을 지고 메고 갔었다.

중요한 것은
내 몸은 그런 몸이었다는 거고
앞으로도 그런 몸이어야 한다는 거다.

나는 잘못이 없다.
나는 갑작스런 사고로부터 몸을 상했고
그리고 치료중이다.
내가 두려운 것은
예전의 그 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등산갔다 하루밤 자고 난 후의 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빠듯한 일정에 이리저리 양해를 구하고 미루면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어렵게 얻어냈다.
그 일주일이 내 몸을 예전 상태로 돌려줄 것인가.
내 몸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이것이 온전히 내 책임이어야만 하는가?

아마도 긴싸움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렇게 기록을 해둔다.
빨리 자야한다는 조바심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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