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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15년 10월 7일 이후의 몸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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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1/03
    2015년 10월 18일:폐소공포
    하루

2015년 10월 18일:폐소공포

고소공포가 있다는 건 11살 때 알았다.
해남 우리 학교엔 옥외에 계단이 있는 2층 건물이 있었는데
심부름으로 2층 건물에 올라갔다가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며
내가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높은 곳이 무섭다기 보다는
높은 곳에 있으면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강렬해서
높은 곳이 무서웠던 것같다.

폐소공포는
한별을 낳기 일주일 전쯤 처음 발견했다.
아기 하은이를 위해 볼풀텐트를 샀는데
씩씩이어린이집에서 돌아올 하은을 기다리며
낑낑대며 텐트를 설치하고 
그 안에 볼풀공을 몇층을 넣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린이집서 돌아온 하은이는 무서워하며
나한테 들어가라고 했다.
하은이는 늘 그랬다. 
그래서 나는 늘 선발대가 되어서
음식도 먼저 먹어보이고(지밀상궁인가? 기미상궁이닷!)
장난감도 먼저 시범을 보이고
그래서 그날도 볼풀텐트 안에 들어갔는데
좁은 텐트 안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배가 너무 불러있었고
거실은 추워서 옷을 두껍게 입고 있었고
볼풀 공들은 너무 많았고
바닥이 짚어지지가 않아서
마치 익사하는 것처럼
볼풀에 잠겨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살아나긴 했는데
그 때 죽는 줄 알았다.
그때부터 폐소공포가 생겨났다.

사실 이 증상의 이름이 폐소공포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엘리베이터, 놀이기구, 비행기 같은 것을 탈 때
죽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탄다.
그래서 안탄다. 
엘리베이터는 좀 나은 게 언제든 얼른 멈추고 내릴 수 있으니까.
내가 막힌 공간에 있다는 것,
한 번 타면 내가 마음대로 내릴 수 없다는 것,
이 상황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고
죽을 것같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물에서 허우적거릴 때와 
비슷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그 때 이후로 내시경도 수면 말고는 못한다.

그런데 MRI촬영을 해야했다.
MRI촬영은 내가 이 병원에 온 목적이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일주일 정도 물리치료를 받은 후에
촬영이 가능하다고 했다.
보험 관련해서 규정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오전 오후 두 번씩
상위 1%의 순위를 지키며 열심히 물리치료를 받다가
드디어 일주일이 되는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MRI촬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입원한 병원에는 MRI설비가 없어서
구급차 같은 걸 타고 다른 병원으로 가야했는데
그 차를 기다리는 동안
폐소공포 생각이 나서 너무 무서웠다.
남편한테 전화해서 보호자로 좀 오면 좋겠다고 하니
고구마순을 걷어야해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럼 폐소공포에 대한 마인드콘트롤 안내를 부탁하니
푸른 풀밭에 누워있는 나를 
예수님이 지켜보고 있는 이미지를 상상하라 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관처럼 생긴 기계 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진행하는 분한테 시간을 물어보니 허리와 목을 같이 찍으니
35분 정도가 걸린다 했다.
내가 폐소공포가 있어서 하나씩 따로 찍었으면 좋겠다 하니
그렇게 말해놓겠다 했다.

귀에 스폰지를 넣고 헤드폰 같은 걸 끼고 누웠다.
마치 화장터에서 본 풍경과 비슷한 순서로
누운 나는 어딘가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눈을 꽉 감고서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주기도문을 30번 외우면 35분이 가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따닥거리는 소리가 들리고부터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몸이 뜨거워지는게 느껴졌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면
내가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는 것,
내가 관같은 것 안에 누워있다는 것,
기타 등등의 상태를 인식하는 순간
내가 패닉 상태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계속 푸른 풀밭, 푸른 풀밭,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주기도문, 주기도문, 주기도문,
만 생각하면서 내가 푸른 풀밭에 누워있다고 상상할 수 있도록
예수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죽을 각오로 힘껏 노력했다.
주기도문은 두 문장 말고는 생각이 안났고
한 번, 두 번, 세 번 세는데
열 번 정도를 세고 나니 소음이 멈췄다.
그리고 몸이 스르르 밖으로 나가는 것같았다.
아, 이제 끝났구나.
라고 눈을 뜨는데 나는 여전히 관 안에 있었고
눈 바로 앞에 금속 바가 있었다.
아마 다음 촬영을 시작하는 듯했다.

방금 눈으로 본 그 실체를 밀어내기 위해서
또 필사적으로 푸른풀밭....을 떠올리는데
고구마밭이 떠올랐다. 자꾸.
다음날 고구마 캘 준비를 하기 위해서
고구마 순을 걷고 비닐을 걷어내고 있을 엄마와 남편.
고생하고 있는 두 사람을 생각하면
나는 어떻게든 내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MRI를 견디지 못하고 몸부림을 치거나
몸을 움직여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면
나는 MRI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익숙한 장소들
내가 가고 싶은 곳
그리운 사람들
고구마밭, 내 아이들, 푸른영상의 어둠컴컴한 사무실
내 컨테이너 작업실, 그리고 다시 고구마밭.
떠오르는 장소가 강렬하지 않으면 다시 방금 본 금속 막대기가
떠오를 것같아서
얼른 다른 생각을 할 때
가장 확실하고 가장 강력하게 금속 막대기 이미지를 밀어내는 건
고구마밭.

하은보다 한별보다 은별보다
고양이 미요나 진이 연이보다
남편보다 엄마보다
가장 강렬했던 이미지는 고구마밭.

결국 아까처럼 또 소리가 멈추고
어딘가로 나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또 아직 진행중일까봐
눈을 꼭 감고 있는데
진행하는 분이 다 끝났다고 말해주었다.
두개를 다 한 거냐고 그랬더니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새빨개진 얼굴을 본 그 남자는
이제 끝났다고, 잘했다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검사봉투를 받고 1층까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서있는데
거울처럼 반짝거리는 금속벽면에
일주일동안 씻지 못해 떡진 머리를 한 채
후줄그레한 환자복을 입은 
내 모습이 비쳐졌다.
대견한 내 모습이.

그렇더라도 다시는 그 관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사고 당시가 떠오를 때마다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때보다 더한 공포를 견뎌냈다.
퇴원을 하고 나면
나는 큰 일을 할 것같다.
꼭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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