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지금 마음을 어떻게 정리해서 말할 수 있을까. 작은 승리이지만, 말 그대로 작은 그것을 위해 우리가 쏟아낸 노력은 정말 작지 않은 현실이 새삼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어제 밤을 거의 새고 잠깐 집에 들렀다 오면서 친구에게 말했다. 난 지금 150%로 각성된 상태야. 하하. 지금은?

이틀 전 허가취소 통보, 하루 전 재승인 통보.

취소 통보를 받고 13회 인권영화제를 개막하고 많은 관객들과 영화를 나누기 위한 최선의 방안을 하루종일 찾고 묻고 궁리했다. 사실, 예정대로 개막식을 진행하고 개막작을 상영하기로 했지만 우리는 원래 계약했던 상영장비들을 취소한 상태였다. 하려던 대로 하기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따져볼 때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많았다. 우리는 기동성이 있는 장비로, 빼앗겨도 다시 세울 수 있는 여분까지 알아보느라, 그리고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하느라 1년 동안 준비해온 사업을 하루 안에 처음부터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속상한 일이었다. 사무실로 걸려 오는 문의전화들 중에는, 누구누구와 함께 가려고 했는데 상황이 불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 지 궁금하다는 내용도 있었다. 최선을 다해 안정적인 개막식과 개막작 상영을 성사시켜보겠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 이상 우리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개막식 공연을 해주시기로 했던 분들에게도 준비했던 무대나 장비들이 달라졌다는 말씀을 드려야 했다. 공연을 부탁드리기엔 민망한 장비들이라는. 그래도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하고 개막식 장소로 오겠다는 분들에게 고맙다는 말씀밖에는 드릴 말이 없었다.

물론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힘겹지만 뼈저리게 확인했고 우리가 물러설 수 없는 자리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 벅차오르는 뭉클한 느낌을 수도 없이 마주쳤다.

오후 다섯 시쯤 시설관리공단에서 연락이 왔다. 만나자고. 우리는 더 할 얘기가 없었다. 이미 청계광장에서 개막식을 예정대로 열겠다고 발표했고 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만나고 오는 데 걸릴 한 시간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간곡히 만남을 요청하는 데에는 더욱 안정적인 상영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차를 타고 가는 중에 공단이 발표했다는 해명자료 내용을 전화로 들었다. 욕밖에 나오지 않는 내용. 그래도 갔다. 관객 한 분이라도 더 편안한 마음으로 개막식에 올 수 있는 무언가가, 공연을 오래 전부터 준비해주셨던 분들의 공연을 기획했던 대로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아쉽게도 포기했어야 했던 낮 시간 상영작들을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그런데 하는 얘기가 재신청을 하라는 거다. 허. 우리가 스스로 신청을 철회해본 적이 없는데 왜 재신청을 해야 하는가. 취소를 결정한 것도 그쪽이고 승인을 다시 할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것도 그쪽인데, 우리가 인정할 수 없었던 취소 사유를 받아들이라는 말 아닌가. 그 이야기를 하느라 오랜 시간이 흘렀다. 결국 재신청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나왔다.

심란했다. 재신청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을까, 어찌보면 사소한 행정절차일 수도 있는 건데, 더욱 많은 관객들과 영화를 나누려는 욕심을 져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머리 속에 온갖 고민들이 떠돌아다녀 하나도 손에 잡히지 않아 괴롭던 때 공단에서 연락이 왔다. 원래 예정대로 사용하시라고. 허.

솔직히 어떤 허무함의 냄새가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나서 속상함과 억울함과 짜증 등이 잇달아 지나갔다. 그리고 남은 자리에 기쁨이 살풋 앉았다. 정말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연대가 있었기에, 우리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기에 얻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쁨만은 아니다. 속상하고 억울한 느낌의 끝에서, 나는 정말 예정대로 준비된 장비로 모든 것을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쏟지 못한 것을 반성한다. 더 치고 나가기 위한 시간을 150% 쏟지 못한 것을.

그리고 이제 기쁘게 개막식을 기다리련다. 물론 여전히 상황은 안정적이지 않다. 우리는 애초 공단과 싸우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거수기 노릇을 공단이 했던 것이지만 그 뒤에 어떤 세력이 있을지 굳이 짐작할 필요도 없다. 경찰이 무슨 짓을 할지는 아직 모르는 거다. 더이상 두려워하거나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기쁘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잃을 때에도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는 어디까지를 각오할 수 있는지 서로 확인했다. 어떤 상황이 펼쳐지든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하.

 

 

* 마음이 괜히 쳐지는 듯해 잠시 블로그를 펼쳤는데, 쓰다 보니, 내 기분이 가라앉은 건 잠을 못 잤기 때문일 뿐이라는 거, 그리고 이걸 쓴답시고 지금도 잠을 못자고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한 듯. 엉엉. 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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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5 03:39 2009/06/05 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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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CEscher 2009/06/05 06:3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소식보고 안타까웠는데, 다행이구만. 힘내시구려, 불끈! ^^

  2. 콩!!! 2009/06/05 08:0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잘됐어요. 마구 찔러보는구나 싶어서 화는 나고, 힘은 조금도 보태지도 못해서 답답했는데. 나도 함께 기쁘네. 고마와요.

  3. 슈아 2009/06/05 09:3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맘 조리고 있었는데...
    좀 잘 수 있으면 자고 이따 봐요. ^^

  4. 비올 2009/06/05 10:3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놈의 차벽은 어찌 넘어뜨린겨...아 참 띠벌...

  5. 2009/06/06 03:0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수고 많았삼!! 이따 봐요^^

  6. 미류 2009/06/09 10:2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MCEscher// 고맙! 멀리서 안타까워한 사람이 있었다니 반갑고 고마워~ ^^

    콩// 앙코르 상영회가 그대 사무실이랑 가까우니 많이 와서 봐요~ ^^

    슈아// 반가웠엉~ 내가 넘 정신없이 돌아다녀서 얘기도 별로 못했넹. 영화 괜찮았지? ㅎㅎ

    비올// 뭘해도 당신이 처리해줄 것 같아서 막 뎀볐지 ㅋㅋ

    현// ^^)//

  7. 콩!!! 2009/06/11 17:5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우리 사무실 구로로 옮겼다우 ^^;;;

  8. 미류 2009/06/11 19:5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 글쿤. 예전에 들은 듯도 하고... 흠, 그래도 가깝잖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