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인 행위'냐고만 묻지 말고

현현님의 [성폭력 의미, 초간단 정리] 에 관련된 글.

성폭력의 의미를 정리한다고 현실에서 당장 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의미를 분명히 하는 만큼 폭력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과 실천들을 벼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몇 가지 붙이는 글.

 

성폭력을 말할 때 흔하게 사용되는 기준 중의 하나는 성적인 행위를 통해 폭력을 가한다는 점이고 그 행위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것이라는 점이다. 완고하거나 유연하거나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정의도 비슷한 듯하다.

 

성적인 행위는 무엇일까. 삽입부터냐 접촉부터냐, 행동부터냐 언어부터냐, 이런 쟁점들이 사법권력을 비롯한 가해자의 입장에서 제기되는 쟁점이다. 여성주의자들은 신체적, 정신적, 언어적, 환경적, 즉 모든 방식으로 성폭력이 자행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해왔다. 또한 중요한 기준은 특정한 상황을 피해생존자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라고 주장해왔다. 피해생존자의 의사에 반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당하는 상황이 성폭력이라는.

 

나 역시 이런 정의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은 왜 성폭력의 기준이 폭력을 가한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있을까 하는 것.

 

'성적인 행위'라는 것이 구분될 수 있을까. 두 사람이 손을 잡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 성적인 행위가 되기도 하고 우정을 나누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성을 소재로 한 모든 농담을 성적인 행위라고 보기도 어렵고 성을 소재로 하지 않은 농담이라고 해서 성폭력의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여성들끼리 농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도 폭력은 발생할 수 있고 서로 다른 섹슈얼리티를 가진 사람들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도 폭력은 발생할 수 있다.

 

결혼은 언제 하니?

나 너랑 같이 자고 싶어.

쟤 진짜 몸매 좋다.

청소도 못하냐?

 

혹은

 

어깨를 감싸며 토닥거려주기.

뒤에서 조용히 껴안으며 얼굴을 기대기.

와락 껴안으며 소리지르기.

손을 잡고 경쾌하게 걷기.

 

이런 상황들이 성폭력으로 이어질 때 그것을 밝히기 위해 이런 행위들이 '성적인 행위'라는 점을 밝혀야 하나. 당시에 딱히 동의하지도 않았지만 싫은 것도 아니었다면 어떡해야 하나. 혹은, 내가 저렇게 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농담도 하지 말란 얘기냐" "누가 농담하지 말랬냐"

"손도 못 잡냐" "손잡지 말란 얘기냐"

"거부하지 않은 것 아니냐" "거부하지 않으면 동의냐"

뭐, 이런 겉도는 이야기들에 시간 빼앗기지 않고 '그 농담'과 '그 손잡는 행위'가 피해생존자에게 어떤 성적 억압을 가했는지를 이해하도록 하려면...

 

중요한 것은 폭력을 유발한 행위가 '성적인 행위'였는지, 그것이 피해생존자의 의사에 명백히 반하였는지보다 폭력의 결과가 성적(sex, gender, sexuality)인 억압과 피해라는 점이 아닐까. 성폭력의 경계가 애매해지는 지점에서 '어떤 행위'가 성폭력일 것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기보다 어떤 행위가 유발할 수 있는 '성적인 억압'을 밝히고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 아닐까. 그래야 성기중심적인 접근을 좀 벗어나고 젠더나 섹슈얼리티에 대한 폭력(성적인 행위를 통한 폭력이 아니라) 이 성폭력의 경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성폭력에 반대하는 실천이 성적인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가는 길에 명쾌한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찬찬히 생각해봐야겠다. 이런 얘기는 늘 하다만 것 같은 느낌만... 쩝.

 

*추가*

많은 가해자들이 2차, 3차 가해가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 아닐까. 전혀 성적이지 않은 행위들이 왜 성폭력 가해가 되는지 말이다. 성희롱은 이해하겠는데 2차, 3차 가해 같은 것들은, 그저 사건에 대한 의견을 밝혔을 뿐이다, 모르면 닥치고 있으라는 말이냐, 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 뭐, 가해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것은 절대 아니구. 결과적으로 성적 억압이 가해졌다면 그것이 성폭력이고 그 가해가 어떤 성적 억압을 자아냈는지를 이해하고 반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성폭력에 대해 말할 때 강조해야 할 듯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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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7 15:48 2006/07/2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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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현현 2006/07/27 16:5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음...제 글은 '성폭행'이라는 단어보다는 '성폭력'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쓴 거였고요
    이 글은...그 폭력의 범위(유발에서 결과까지)를 세심하게 다시 생각하보자는 문제제기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하다만 이야기가 되더라도 더 많은 생각과 더 많은 사례가 모아지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무리 절친한 관계라 하더라도 농담을 하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해본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텐데...
    하지만 현실은 아직도 '강간이냐 아니냐'에 국한되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까요...에휴

  2. 미류 2006/07/27 22:3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음, 마져마져~ 현현 글은 '성폭행'보다 '성폭력'이 더 적절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쓴 글이라고 읽었구 이 글은 갑자기 '성폭력'을 어떻게 정의할지도 좀더 고민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쓴 거예요. 제목이 조금 이상한가?
    현현 말처럼 더 많은 생각과 경험들이 좀더 편안하게 이야기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현실이 아무리 단단해보여도 ... 우리, 힘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