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ould suggest, however, that ‘‘we the people’’ in the symbolic sense of the term, but also much more concretely and practically ‘‘we’’ the citizens, ‘‘we’’ the public opinion, are seldom aware of the extent to which the official democracy has a reverse side, becomes practically restricted or denied to many, and involves the implementation of ‘‘laws of exception,’’ if not the establishment of camps."
- Etienne Balibar, "Historical Dilemmas of Democracy and Their Contemporary Relevance for
Citizenship", Rethinking Marxism, Volume 20 Number 4 (October 2008), Routledge, p. 528(강조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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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배제의 맞짝으로 '사회 통합'을 내세우려는 배제 분석은, 많은 경우 반동적이다.
그렇긴 해도 배제가 정치에 어떤 쟁점을 제기하는지에 관해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배제를 좌익적 사고의 중심에 올리려는 시도가 많은데,
내 생각에 한 쪽 끝에 아감벤이, 다른 쪽 끝에 랑시에르가 있는 것 같다.
주지하듯 아감벤은 배제의 문제를 '수용소'(camp)의 일반화와 연결시킨다.
이에 대해 랑시에르는 이렇게 말한다.
"We do not live in democracies, Neither, as certain authors assert — because they think we are all subjected to a biopolitical government law of exception — do we live in camps. We live in States of oligarchic law, in ohter words, in States where the power of the oligarchy is limited by a dual recognition of popular sovereignty and individual liberties. We know the advantages of these sorts of states as well as their limitations."
- Jacques Rancière, Hatred of Democracy, Verso, 2007, p. 73
랑시에르의 이 같은 지적은 일리가 있다.
발리바르는 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서, 그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What he wants to avoid, and I share this concern, is a transformation of the debate into a metaphysical alternative between ‘‘true democracy’’ and ‘‘camps’’ — that is, generalized totalitarianism, or ‘‘evil,’’ which in practice deprives the democratic conatus (as Spinoza would say) of its possibilities and its concrete objectives. In short, we should agree on the necessity
associated symbolically with the motto of equaliberty to retrieve the ‘‘lost tradition of revolutions’’: the tradition of the first modernity which its protagonists in Europe and in North and South America called insurgency — albeit in completely different conditions."
- Etienne Balibar, 위의 글, p. 528
하지만 앞에서 발리바르가 말한 것을 실마리 삼아 가설을 제기해 보자면,
랑시에르는 배제, 특히 현대적 배제가 산출하는 종별적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것 같고,
그 결과 '갈등'(일반적인 의미에서 '계급 투쟁')과 '배제'를 같은 수준에서 다루지 않나 싶다.
물론 양자의 경계가 애매하고 따라서 서로 뒤섞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를 구별하는 것, 좋았던 옛 맑스주의 용어법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룸펜프롤레타리아트'
를 구별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발리바르는 프랑스 사회학자 로베르 카스텔의 개념을 빌려
현대적 배제의 핵심을 '탈퇴'(disaffiliation) 또는 '부정적 개인주의'(negative individualism)
로 규정하고, 그것이 낳는 고유한 정신적 동요를 지적한다.
이는 예컨대 『끝없는 이야기』에서 바스티안이 겪은 다음 상황과 같다.
"여러 낮과 밤을 방랑하면서 움튼 외로움 때문에 바스티안은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 것, 어떤 집단 속에 받아들여지는 것, 주인이나 승리자나 특별한 자로서가 아니라 그저 다른 이들 중의 하나, 어쩌면 가장 하찮은 자나 가장 중요하지 않은 자로, 하지만 물론 거기에 속하고 그 공동체에 참여하는 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소원하게 되었다. (…) 위스칼나리들에게는 서로 다투거나 불화가 생길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개체로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 견해 차이를 극복할 필요가 없었고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다(…)."
내가 제기하는 가설은, 랑시에르는 배제된 이들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파괴, 이에 따라 규정되는
배제된 이들과 '통합된 이들'(심지어 갈등적으로 통합된 이들) 사이의 소통의 어려움,
이것이 해방의 정치에 제기하는 장애물과 이를 극복하는 문제,
특히 현대에 고유한 배제에 관한 사고를 충분히 전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아감벤 등에서 보듯, 이 문제를 잘못 사고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
예컨대 허무주의와 그 맞짝으로서의 주의주의(푸코의 저 위대한 분석의 리스크)
사이에서의 동요는 아주 분명하다. 어떤 점에서 랑시에르는
분석을 성글게 하고, 평등의 지위를 '전제' 편에 놓는, 다소 거칠고 야성적인 논의 전개를 통해
완전히 통합된 '일차원적 인간' 따위의 숙명론에 항체를 제공하는
역설적인 진리 효과를 만들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한 때 지젝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더라도 배제의 문제를 훨씬 더 정교하게 분석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훨씬 중요할 것이다. 배제된 소수자를 다시 '자명한 주체'로 부당전제하는 경향,
그렇지만 배제가 기존의 갈등과 정치 전반에 제기하는 파괴적 효과를 충분히 제기하지 못한 채
배제에 맞선 투쟁과 계급 투쟁을 부당대립하는 경향(오늘의 정세에서는 양자의 변증법을
긴급한 문제로 제기하고 해명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실천적으로 이 같은 경향으로 귀결된다)
모두가 낳는 '비사고'에서 벗어나려면,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를 사고하려면 말이다.
Posted by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