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책을 냈습니다 - <...
- 무화과
- 2022
-
- 자음과모음 부당 전...
- 무화과
- 2015
-
- 앤지 젤터와 이석기(3)
- 무화과
- 2013
-
- 출판노동자들의 노...(2)
- 무화과
- 2013
-
- 보리출판사 6시간제...(55)
- 무화과
- 2013
'윤구병 효과'라는 게 있다. 뭐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말은 아니고, 요새 나와 몇몇이 즐겨 쓰는 말이다. 운동권이던 사람을 사장말 잘 듣고 복종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운동권이 전혀 아니던 사람을 사장 말에 복종하지 않는 저항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게 바로 윤구병 효과다.
이런 말이 나온 까닭은, 보리 출판사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활동했던 경험 때문이다. 우리가 노동조합을 만들 때, 가장 열심히 노동조합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거의 평직원이었다. 이들은 노동조합 경험은커녕, 노동자 집회도 안 나가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진보정당 당원도 아니고, 촛불집회도 안 가봤고, 보수적인 신학교 출신의 목사 지망생이었던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사회과학 서적 한 번 안 읽어본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하다못해 과대표 같은 것을 해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보리에서 진보 물 먹어봤다 하는 사람들은 주로 간부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나이로는 386 세대였는데, 대학 다닐 때 어느 정도 운동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자처했다. 이분들 가운데 몇몇은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진보정당 열성 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노동자 투쟁에 연대를 열심히 하는 분도 있었다. 강정 마을에, 홍대 청소 노동자들 투쟁에, 희망버스에 확실히 일반 직원들보다 열심히 싸우러 다녔다. 이 사람들은 평직원들을 정치 의식 없고 노동자 의식 모자란 사람들로 보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가르치고 했다. 작은책 강좌를 듣게 하고, 변산 공동체에 가서 일을 하면서 보리가 가진 철학(진보)을 배우라 했다. 노동조합을 만들 때는 노동자의식도 없는 애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어 댄 것이 내 귀에 흘러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 반대의 태도를 보였다. 대표이사 눈밖에 나서 해고 당할 위기에 조합원이 처해도 간부들은 대부분 침묵했다. 아니 오히려 징계위원회 사측위원으로 들어와 중징계를 주장하기도 했다. 납득할 수 없는 인사발령이 내려져도 늘 침묵했다. 그러다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가는 회사 결정이 날 때면 굉장히 열성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회사 안에서 대표이사의 폭력과 권력에 맞선 것은 늘 평직원들이었다. 운동권 출신 간부들에게 정치의식 없고 노동자 의식 없다고 무시받는 평직원들은 거창한 이데올로기 같은 것 없이, 뛰어난 사회과학 이론 없이, 그저 자기가 가진 상식과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 결과는 저항이었다. 물론 사회 운동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서툴고 실수투성이였지만 말이다.
나는 진보가 무엇인지, 진보를 삶의 가치로 품고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리 간부들을 이미 철지난 기억을 추억삼아 살아가는 그런 386 세대로 치부해버리면 모든 문제가 단순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간부들 가운데 몇몇은 지금도 활발히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또 그런 분석은 저 사람들을 비판하기에는 좋아도 나에게는 아무런 시사점도 주지 못하니까.
양심적 병역거부에 찬성하면,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면 진보인가? 희망버스를 탔으면, 밀양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면 진보인가? 맑스주의자거나 코뮨주의자면 진보인가? 진보신당 당원이거나 녹색당 당원이면 진보일까? 그렇다면 윤구병을 비롯한 보리 경영진과 간부들은 죄다 진보다. 윤구병에 맞서는 노동조합보다 훨씬 진보다. 하지만, 비정규직 직원을 마음대로 해고하려고 하고, 수습 사원을 맘대로 해고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진보가 어디있다는 말인가. 우습게도 윤구병 사장이 우리를 공격하거나 우리의 공격에 반격하는데 써 먹는 것도 진보적인 가치였다.
계약직 직원을 해고하면서 한다는 이야기가 "계약직은 차별적인 나쁜 제도라서 보리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에 보리는 계약직 형태로 계약을 연장할 수 없다." 고 말한 것이나 홍대 청소노동자들에 가해지는 사회적 차별을 이야기 하면서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요구를 마치 이기적인것처럼 말한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사회적인 기준들은 보리에선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내 동료들은 진보에 질려하기 시작했다. 회사 밖에서 하는 말과 회사 안에서 하는 행동이 너무 다른 것이 마치 진보의 표상인 것처럼 되었다. 우스겠소리처럼 말하지만, 보리에서 한 때 가장 인기없는 정당이 진보신당인 적도 있을 정도니까. 나는 아니라고, 훌륭한 진보주의자들도 많다고 항변해봤지만, 나 스스로도 대체 진보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진보의 가치를 품고 사는 게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냉소에 빠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진보라는 이름 따위는 버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곳에서 가장 집중해야할 게 무엇인지 생각했다.
보리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각각의 사람들이 거기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 사람의 사회적인 배경이나, 과거에 어디서 무얼 했는지 따위는 다 지워버렸다. 결국에는 대표이사에 복종하는 사람들과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복종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나는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는 아주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 생계형으로 권력에 복종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윤구병을 정말로 존경해서 그러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냥 귀찮아서 지금 보리에서 주는 혜택을 받으면서 조용히 편하게 회사 다니고 싶어서 침묵으로 복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 유심히 생각했다. 맑스를 읽은 적도 없고, 추방과 탈주와 혁명을 이야기 하는 그린비 책을 읽은 적도 거의 없는 사람들이 하는 불복종과 저항. 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내가 감히 말할 수 있다면, 아주 거창한 이론도 아니고, 위대한 사상도 아니었다. 상식과 양심,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지는 마음. 이게 전부였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동료가 부당한 처우를 받을 때 함께 분노하고 함께 이야기하고. 거기에 변증법 같은 철학도 거창한 계급 의식도 필요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나는 양심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해봤다. 분명 윤구병에 저항하기를 포기한 사람들 가운데도 이성의 판단으로는 윤구병 대표의 회사 경영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가 내리는 인사발령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국 권력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데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은 양심아닐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상식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인간의 마음정도면 된다. 푸코나 맑스를 몰라도,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뭐가 문제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다. 아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 그건 양심의 힘이다. 모두가 알아도 모두가 그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자기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라들이, 양심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것, 그게 내가 지금 생각하는 진보의 가장 큰 조건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가 남았다. 실제로 윤구병을 존경하는 사람도 있기때문이다. 이들은 자기의 행동과 말이 자기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사람들도 보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대게 인정했다. 그런데 그게 윤구병 대표 때문이 아니라, 그 밑에서 일하는 몇몇 경영진들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이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건 뭘까? 왜 이사람들은, 자기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영진을 임명한 것도 윤구병이고, 문제의 그 경영진이 문제가 되는 행동을 해도 눈 감아줘서 그 행동에 정당성을 주는 것도 윤구병이라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소 성급하게 지금 시점에서 결론을 내리자면, '권력'을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윤구병 대표가 책과 언론 인터뷰에서 떠들어 대는 좋은 말과 좋은 철학만 보고, 현실에서 대표이사로서 휘두르는 권력은 보지 못하거나, 애써 피하거나 일부러 보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닐까? 다시 말해 '권력'을 직시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성찰하지 않은 거라 생각한다.
확실히 현실을 직시하는 것, 특히 현실의 권력을 직시하는 것은 상당히 고단한 일이다. 그걸 좋아하는 권력자가 없기때문에 권력자의 눈밖에 나고, 사는 게 퍽퍽해지겠지. 그러고보면 윤구병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철학자 윤구병' '농사꾼 윤구병' 이런 이름을 보지 않고, 자기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사장 윤구병'이 우리가 얼굴 마주하고 있는 윤구병이라는 개인의 실제 모습이라는 걸 알고, 윤구병을 (윤구병이 가장 싫어하는 이름인) 사장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는 것'과 더불어 '현실을 직시하고, 특히 권력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진보라고 생각한다.
진보주의자는 진보적인 철학, 진보적인 정치 성향, 혹은 진보적인 활동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권력을 직시하며,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양심에 어긋나는 일에는 복종하지 않는 것, 그게 진보의 참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댓글 목록
일몽
관리 메뉴
본문
잘 읽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글이었습니다. 보리출판사나 윤구병씨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서 찾아보니 저도 감명깊게 읽은 헬렌 니어링의 책을 출판한 곳이더군요. 그외에도 좋은 책을 많이 낸 곳 같습니다.그런데 왜 이 글의 제목이 "'진보'를 다시 생각하다"일까요? 이 글만 읽고 단정짓기는 힘들지만, 보리출판사에서 벌어진 일은 도대체 누가 진보적이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님은 이 글 마지막에서 '양심'을 거론합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에는 복종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보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렇다면 간부들은 양심적이지 않기 때문에 진보적이 아닌가요? 님은 이렇게 주장하십니다.
"그러다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가는 회사 결정이 날 때면 굉장히 열성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보리출판사에서 벌어진 일은 진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강자(간부집단)와 약자(평직원집단) 사이의 대립일 뿐입니다. 이해관계의 문제이며, 자리의 문제입니다. 간부집단과 평직원집단의 위치가 뒤바뀌었다고 상상해봅시다. 평직원들 역시 아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며, 복종을 강요당하는 간부들 역시 마찬가지로 저항할 것입니다. 타인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복종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저항합니다. 다만 보리출판사는 진보적이라는 사장과 간부집단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님처럼 진보의 문제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진보정당에 대해서 비판적인 분 중에 어느 한 분이 그러시더군요. 부르주아 정당보다 더 심각한 권력투쟁. 이권다툼이 벌어지는 곳에서 양심 운운하는 것은 정말이지 한가한 일입니다. 지겹도록 그런 일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다 떠납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거나 주변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 뿐, 본인이 당사자가 되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부가 정보
무화과
관리 메뉴
본문
제가 보리출판사에서 겪은 일을 굳이 '진보'로 연결시켜 생각했던 까닭은, 제 경험이 단지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윤구병 대표나 보리 경영진들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진보가 가진 문제점이 보리출판사에서 드러났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장 그린비 출판사에서 지금 일어나는 일들만 보더라도, 혹은 다른 여러 진보를 표방하는 곳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지요. 저는 이게 단순히 집단 간의 권력투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성찰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 진보의 문제점을 극복해야한다는 생각입니다.윤구병과 보리 경영진이 나쁜 사람들이다. 이렇게 말해버리면 저도 편하지만, 그냥 제 개인적인 화풀이 밖에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윤구병과 경영진이 물러나고, 다른 착한 사람이 경영진으로 온다고 해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구조에 대한 고민, 자기가 가진 권력을 성찰 하는 것, 이런 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양심 운운하는 일이 어떤 일보다도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큐 <송환>을 보면 김동원 감독의 이런 나레이션이 나오죠. "비전향 장기수들이 전향서를 거부할 수 있던 것은, 이념이나 사상의 힘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오기 아니었을까..." 저는 이 오기가 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은 한가한 일이 아니고,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회사 다닐 적에, 복지고 임금이고 다 양보할 수 있었지만, 잘못하지 않은 것을 잘못했다고 말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게 양심이 아닐까요?
부가 정보
일몽
관리 메뉴
본문
목숨을 걸고 양심을 지키는 일이 한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님은 이렇게 말합니다."푸코나 맑스를 몰라도,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뭐가 문제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다. 아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 그건 양심의 힘이다. 모두가 알아도 모두가 그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자기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라들이, 양심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것, 그게 내가 지금 생각하는 진보의 가장 큰 조건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통 386세대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밑바닥 출신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님이 말한 양심에 따라 저항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양심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있을 때는 왜 그렇게 작동하지 않나요? 오히려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 양심에 옳고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 운동하는 사람들은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거창하게 권력 운운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 편 감싸주기는 어디나 마찬가지일뿐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지 않습니다. 친구가 잘못 했을 때 그냥 넘어가주지 않으면 자긴 친구를 잃거나 혹은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되거나 혹은 자기가 잘못 했을 때 감싸줄 사람이 없습니다. 권력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모두 약자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남의 눈치 보면서 적당히 사는 것이 처세술입니다. 진보적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계가 걸려 있는 직장이고 한 두 사람 거치면 다 알고 지내는 좁은 바닥입니다. 그들에게 양심에 따라 살라는 것은 매우 부당한 요구입니다. 그들은 남들의 투쟁에나 들러리 서지 절대로 자신들의 부당함에는 저항하지 않습니다.
부가 정보
일몽
관리 메뉴
본문
지나가는 말이지만, 80년 5월 광주에서 끝까지 남아서 싸우던 사람들 중에 학생, 지식인 몇명이나 됩니까. 거의 대부분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였어요. 어떤 사람은 교사였는데 도청에 모이라고 유인물 뿌려놓고서 부인이 만류하는 바람에 자긴 안갔답니다. 왜 양심에 따라 살지 못하고 저항 안하겠어요. 자긴 잃는게 더 많으니까 그렇지. 손해보는 짓은 안하는게 인간입니다. 양심에 따라 살라는건 손해보면서 살라는 얘긴데 그건 어디까지나 잃을게 없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부가 정보
꽃개
관리 메뉴
본문
무화과님. 참 좋은 글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양심대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일단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주변엔 사상과 생각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 없긴 없습니다. 밖에서 노동해방과 진보 혹은 사회주의를 떠들어도 집에 가면 양말 한짝이나마 제대로 벗어서 세탁기에 넣는 일조차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생태와 환경을 걱정하며 일회용컵을 쓰는 사람을 벌레보듯 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개인 승용차를 '몰고' 다닙니다. 그래서 누군가 진보란 삶의 방식, 양식이라던 그 말에 저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보리나 그린비나 진보이냐 아니냐, 그건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만 그들은 '건강(해 보이는)인문 사상'이라는 상품을 파는 제조회사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상품은 그럴싸한 지적 욕구를 소비하고 싶은 자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는 것 뿐이겠지요. 그런 자들에게 일상에서, 삶에서 진보적일 것을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만들고 소비하고 읽는 책처럼 살 것을 바라는 것은 글쎄요,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는 것을 바라는 것처럼 무망해 보입니다. 진보신당 같은 데는 제게 그저 덜자란 민주당, 같은 느낌을 줍니다만 내 삶의 당대에선 그나마 그게 차선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편입니다. 대상화는 이성적인 사고를 돕기는 하지만 마음을 내어 관계를 맺는 데에는 다소 제한적입니다. 지킬 게 많고 갖고 싶은 게 많고 아는 척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면 그들이 왜 그렇게 사는지 아예 이해가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인정하고 이해하자는 건 아니지요. 주절주절 말이 많았습니다만 좋은 글 잘 읽고 마음에 담아 갑니다. 고마워요.부가 정보
무화과
관리 메뉴
본문
관계가 제한적으로 되는 것.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살면서 둥글둥글해지는 게 아니라, 보기 싫은 사람이 늘어가는 것.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대로 따르는 것. 이게 엄청 어려운거라는 걸 잘 압니다. 저도 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자신 없거든요^^ 그래서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무작정 비판하고 싶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다만, 노력하고 싶을 뿐입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진보라 떠들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드는 저 사람들처럼 되지 않기위해, 피 똥싸게 노력해야지요.
부가 정보
일몽
관리 메뉴
본문
안타깝지만 님의 현실인식으로는 보리출판사 간부집단에게 더 배우셔야할겁니다. 그들은 현실적이기라도 하지, 님은 정말이지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개인적 선택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양심으로는 진보를 재정의할 수도 재구성할 수도 없습니다.부가 정보
일몽
관리 메뉴
본문
꽃개님의 글을 읽고 글을 남깁니다. 하지만 꽃개님에게 답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꽃개님의 글은 일상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제가 하는 생각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누구를 비난하거나 비판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꽃개님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꽃개님은 "그런 자들에게 일상에서, 삶에서 진보적일 것을 바라는 것은, ...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는 것을 바라는 것처럼 무망해" 보인다고 하십니다. 그런 자들은 노동과 생존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작은 출판사의 간부직원들이거나 대기업의 정규직 사원들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들이 대부분인 이 사회를 어떻게 바꾸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꿀 생각이 아예 없습니다. 그래도 바꿀 생각이 있다고 생각하신 분일테니 묻는 겁니까. 그런 자들에게 진보를 바랄 수는 없으니 기대할 것은 노동과 생존의 세계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그럼 그들은 누구입니까. 비정규직과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면서 비정규직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오히려 그들을 머슴 대하듯이 하며 그들을 자신들의 방패막이로 생각하는 정규직들을 그렇게 만든게 누구입니까. 따지고 보면 자본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족때문입니다. 그럼 보리출판사에서 자기 자리 지키려고 매출에 혈안이 되서 평직원들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간부들은 가족 때문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진보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과 같이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무화과님의 글 제목인 "'진보'를 다시 생각한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입니다. 제가 에둘러서 진보적인 사람들도 진보적이지 않다고 항변한 것은 제 개인적 경험에 따른 일종의 환멸을 토로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정작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같다는 거였습니다. 꽃개님이 "그런 자들"이라고 호명한 사람들과 꽃개님이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요.
파시스트적 감성은 매우 자연적이며, 직적접인 감성입니다. 부르디외는 파시스트적 감성이 농촌적 감성에 기초한다고 합니다. 순박하고 착한 감성이라는 겁니다. 그럼 이 감성은 무엇일까요. 자기 존재에 자족하는 감성. 자기 자신, 자기와 가까운 것, 자기를 둘러싼 것 이외에는 모두 배척하는 감성. 순박한 이 감성에게는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는 모든 것은 두려운 것이고 그래서 악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진보적인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거의 대부분 이런 감성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일베를 대하는 태도.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고 그들을 우리라고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같이 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진보적인 사람들은 굉장히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동조합 같은데서 대중운동 하는 사람들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진보적인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족적인 활동을 하지 대중운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대중이 낯설어요. 그래서 나꼼수도 이해하지 못하고 일베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가 진보적인 사람들을 비난했다고 해서 특별히 그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당신들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맑스는 자본가들이 경쟁의 외적 강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본가들을 이해하고 같이 싸우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이 생존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관리자들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바꿀건가요. 진보는 취미생활인가요.
부가 정보
꽃개
관리 메뉴
본문
대답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야매하긴 합니다만...저를 포함해서 '그런 자들'이 지금처럼'만' 살아도 세상은 바뀝니다. 아니 바뀌어 갑니다. 문제는 지금보다 '더' 뭘 하려고 하는 때에 발생합니다. '그런 자들'의 대부분 사람들은 뭘 덜 하려고 하기보다는 뭘 더 하려고 애를 씁니다. 더 가지려 하고 더 사려 하고 더 쓰려 하고 더 떠들기를 원하고 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들의 인정욕구, 에비에미도 못 말립니다.부가 정보
일몽
관리 메뉴
본문
님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 지금처럼만 살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일상이 계속될 뿐입니다. 님이 언급하신 '그런 자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제 얘길 하고 싶은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상관은 없습니다. 전 더 가지려고 하거나 더 사려고 하거나 더 쓰려고 하진 않습니다. 돈이 많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더 떠들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습니다. 제 인정욕구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나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못마땅하겠죠. 인정욕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못봤습니다. 아마 있다면 너무 무시당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존감이 없는 사람일겁니다. 하지만 인정욕구가 유달리 심한 사람은 있을겁니다. 그런 사람들때문에 살기가 힘들다는 얘긴 한번도 못들어봤어요. 누군가의 인정욕구는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정욕구의 실현이 방해될 때만 힘들뿐. 그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 있고 나는 나의 삶의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항상 문제는 같은 걸 욕망할 때 생깁니다. 누군 가지는데 나는 못가지고 누군 사는데 나는 못사고 누군 쓰는데 나는 못쓰고. 항상 이런 문제들입니다. 님이 정말 소비에 관심이 없다면 그들은 아무 문제되지 않습니다.부가 정보
꽃개
관리 메뉴
본문
저는 바로 위의 댓글을 읽고 님 같은 분과는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가에 관해 그동안 잃어버렸던 감각을 되찾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고마움이 솟구치네요. 아울러 억측(assumption)은 금물입니다. 제게 소비에 정말 관심이 없다면, 이라는 가정법으로 말씀하셨는데 이건 억측입니다. "그들이 네게 문제로 되지 않으려면 너는 소비에 정말 관심이 없어야 한다"는 게 논리상으로 맞는 말이지요. 저는 소비에 아주아주아주 관심이 많답니다. 뭘 살 때는 내게 정말 필요한 건지 그걸 따지다가 세일기간 다 놓치고 박싱데이 다 놓치고 그렇게 삽니다. 따라서 님을 포함해서 '그런 자들'이 제게 정말 문제로 되는 겁니다. 블로그 쥔장께 예의도 차릴 겸 저와 대화는 이 정도로 거두시지요. 님의 블로그나 제 블로그에 장을 여시면 흔쾌히 마중나가겠습니다. 이만 총총.부가 정보
일몽
관리 메뉴
본문
그렇군요. 님 같은 분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님 같은 분이 어떤 분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하며 님 같은 분에게 문제적인 그런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도 역시 알고 있어야겠군요. 대화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군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