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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2/30
    미켈란젤로
    봄-1
  2. 2006/12/30
    다빈치
    봄-1
  3. 2006/12/24
    파밥
    봄-1
  4. 2006/12/24
    춘천의 파장수
    봄-1
  5. 2006/12/24
    춘천의 안개꽃II
    봄-1
  6. 2006/12/24
    남자선수인줄 알았네^^(1)
    봄-1
  7. 2006/12/24
    겨울나무가지마다 핀 안개꽃
    봄-1
  8. 2006/12/03
    한노정연을 역사속에 남기며(2)
    봄-1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최후의 심판

 

 

천지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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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인체해부도>

 

 

<다빈치>

 

 

<다빈치>

 

 

<다빈치>

 

 

<다빈치>

 

 

<다빈치>

 

 

<다빈치>

 

 

<다빈치>

 

<다빈치>

 

 

<다빈치>

 

 

<최후의 만찬>

 

 

<자회상>

 

<다빈치>

 

 

<다빈치>

 

 

The Last Supper

<다빈치>

 

 

<다빈치>

 

 

<다빈치>

 

<다빈치>

 

 

<다빈치-어머니의 자궁>

 

 

<다빈치>

 

<다빈치가 그린 용>

 

<디빈치-어머니의 자궁>

 

 

<다빈치>

 

 

<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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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밥

야채를 볶을 때, 마늘을 후라이팬에 먼저 넣고 볶으면 마늘향이 짙다. 며칠전에 누가 파를 볶아서 볶음밥을 해먹으면 좋다고 한다.

 

"파"는 음식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것이라고 느낀 때는 영국에서 공부할 때이다. 영국에서는 파가 매우 귀했다. 파 한두뿌리에 우리돈으로 몇천원씩하니 파를 사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궁리끝에 어느날 봄날에, 파씨를 사다가 기숙사 뒷뜰에 뿌려두었었다. 여름내내 기척이 없어 여름끝무렵에 들여다 보았을 때, 그 실망감이란... 파가 마치 머리카락처럼 자라고 있었다. 잦은 비와 잿빛하늘이 주를 이루는 영국의 날씨에서는 파가 자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뒤로 설렁탕집에 가면 파를 한주먹씩 넣어서 먹는게 버릇이 되었는데....누가 파를 볶아서 볶음밥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하니, 한번 해보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아까 아침에 파 한단을 3000원에 샀고.. 이제 파볶음밥을 한다.

 

후라이팬에 들기름을 넣고 송송 썰은 파를 넣어 볶다가, 마늘, 감자,새우 썰어놓은 것을 넣어 마저 볶다가, 잡곡밥을 넣고, 맨 나중에 제철에 나는 굴을 조금 넣고 약간 뜸을 들이니, 마치 이탈리아음식인 해물밥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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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파장수

춘천의 파장수.. 오늘 아침에 시골 조그만 장터에서 파를 팔고 계셨다. 지나가전 한 아주머니가 한단을 다 사기엔 너무 많다며, 얼면 어떻하냐며? 이미 조금 얼었다며.. 파를 살까 말까 고민하고 계셨다.

 

파장수왈 "이 파는 조금있으면 살아난다니까요!! 살아나요!!"

 

"한단이 (먹기에) 안많아요. 그냥사세요."하고 나도 훈수를 두었지만... 그이는 이내 가버렸다.

 

열이 받은 파장수는 3000원어치 한단을 사는 나에게 덤으로 다른 파단에서 반이상을 덜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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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안개꽃II

오늘도 안개꽃이 피었다. 안개꽃은 부지런한 사람만이 볼 수 있나보다^^ 해가 나기시작하면 더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풍물장터에서 자판을 펴 놓았던 파장수 아저씨, 과일장수 아저씨는 아마 보았을 것이다.

 

오늘 동네 산 주변에 소나무 가지 가지에 앉은 안개꽃은 마치 서슬퍼런 동장군같다. 조금있으면 온몸이 녹아내려 없어질 운명이지만, 서릿발같은 기개와 서슬퍼런 분노를 품고 서 있는 동장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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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선수인줄 알았네^^

오늘부터 드디어 나의 수영일기를 쓰기 시작함을 자축하고자 한다. 왜 특히 오늘 쓰기 시작했냐하면, 오늘 수영장에서 접영을 50m 달려서 저쪽 끝쪽에 다달으니, 마침 내 모습을 보고 계시던 할머니 두분이 "남자선수인줄 알았네!!.. 너무 잘해!!"하시면서 칭찬을 하시는게 아닌가?

 

나는 칭찬을 들어서 너무 고맙지만, 저는 "남자선수보다도 더 잘할 수 있어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수영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뒤에서 "한 2000m 돌았어요? 너무 열심히 하던데?"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나에게 하는 말인줄 몰랐다.. 그 아주머니 역시 나를 칭찬해주고 있지 않은가? 어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마치 미운오리새끼가 백조가 된 느낌이었다.

 

내가 남자보다 더 잘한다고 칭찬을 들을때는 주로 마라톤을 할 때였다. 내가 마라톤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시기에는, 반환점을 돌아서 마지막 기치를 올려야 할 때, 나는 내 앞에서 온 몸에 힘이 빠져 "흐물흐물"  뛰고 있는 남자분들을 한 분 한 분 앞지르는 즐거움으로 마라톤을 즐겨 하기도 했었다. 강촌에서 야간마라톤대회를 할 때, 남자선수들을 앞지르면서 "남자선수, 별거아니네" 하면서 즐거워하던 생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후에도 이런 기억이 생활속에서 힘이 됨을 지금도 느끼고 있다. 즉, 남자에게 기죽지 않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할머니들이 결국 "남자선수보다 낫다"는 것을 또 말씀해주신 것이다. 이렇게 신이 날수가 있을까?

 

국민학교때 시골에 살면서도 시골아이들의 유일한 놀이였던 "고무줄놀이"도 잘 할줄 몰랐던 내가 이제 운동이란 운동을 미친듯이 좋아하는 것으로 보면 참 모든 것은 변화발전한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영도 좋아하고, 마라톤을 좋아하고, 스케이트, 스키도 무척 좋아한다.  

 

나에게 수영은 정말 어려운 과제였다. 1년 남짓 하면서도 도대체 물을 너무 무서워하는 내가 이 수영을 습득이나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래서 1년동안 이 블로그에도 감히 몇자도 적을 수도 없었는데, 이제 수영이야기를 적으려 한다.

 

자, 이제 미운오리새끼에서 백조로 날개짓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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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가지마다 핀 안개꽃

며칠동안 겨울날씨같지 않게 따뜻하다. 마침 이렇게 따뜻한 겨울에 후배가 멀리서 놀러오니 반갑다.

 

어제저녁에 내려온 후배에게, 춘천에서 보여줄게 무엇이 있을까.. 하고 열심히 고민하고 있던차에... 아침에 창문을 여니 겨울나무 가지마다 흰꽃송이들이 눈꽃보다도 섬세하고 부드럽고, 가녀린 모습을 하고 서있다. 흰눈속에 푹빠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아직 채 걷히지 않은 안개, 그속에서 은빛꽃을 피우고 있는 겨울나무들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소양강쪽으로 달리던 중에 택시 아저씨께서 밤안개가 새벽녁에 만들어낸 꽃이라고 "안개꽃"이라고 명명하시는 바람에 나도 "안개꽃"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무이파리 하나 없는 활엽수 가지위에 핀 안개꽃은 그야말로 은빛 찬란한 가지들로 변했고, 억새풀에 핀 안개꽃은 메마른 가지가 다시 살아난 듯 아름답다. 소나무가지에 핀 안개꽃은 청렴한 소나무의 기개를 그대로 살려주는 조명과도 같다.  

 

아름다운 겨울아침.. 이 아침이 질세라 우리는 부지런히 또 청평사를 다녀왔다.

 

청평사의 독경소리를 들으면서 독서삼매에 빠진 후배..

 

역시나 돌아오는 길에 안개꽃은 없었다. 겨울에 모처럼 따스하게 내려쬐던 햇빛이 다 가져가 버렸다..

 

이 아름다운 꽃은 한적한 물가에 사는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혜택이던가?

 

오랜만에 즐거운 겨울소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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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정연을 역사속에 남기며

나는 어제 한노정연을 역사속에 남기고 돌아왔다. 춘천으로 오는 막차에서 그간 여러 동지들의 모습이 다시금 생각나서 방금 보고온 여러동지들에게 참을수 없이 또다시 전화질을 해대었었다. 그 이튿날인 지금, 나는 밀린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숨을 못쉬고 있는 상황에서도 나와 한노정연에 대한 생각에 일을 손에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왠 망령인지.....그래서 할수없이 나는 오늘 다 쓰고 정리하지 못할 지언정, 이 글을 시작하기로 했다.

 

우선, 내가 이렇게 가슴저리게 섭섭해하고 있는 것은 그놈의 '정때문에'라고 생각하고 싶다. '정'을 제외하고, 그러고도 남는 무언가가 있다면, 김세균선생님의 말씀처럼, 그간 운동의 발전에 따라 생명체들의 그릇인 하나의 조직도 생성, 발전, 소멸해 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내가 이렇게 아쉬워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것을 해명하고 싶었다. 무언가 잡을 수 없는 것같은 그것, 그것이 무엇인가?

 

잠깐 그놈의 '정'을 떼지못해 미련을 떨고싶다. 좀 사설을 늘어놓으려 한다. 한노정연에 소속되어서 내게 가장 인상에 남았던 일은 기아 소하리 동지들을 만났을 때였다. 안양유원지 근처의 어느 장소에서 거의 며칠밤을 새워가면서 내가 맡은 부분이랍시고 준비를 해가면, 50-100여명의 초롱초롱했던 눈망울들과의 만남속에서 며칠동안 밤을 새고 축쳐져서 간 나는 새롭게 살아나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때 소하리 역근처에 바람이 유난히 쎘는데....매번 추운 겨울에 우리는 갔었다. 나는 한노정연 보고서들을 너무나 잘하려고 내 딴에는 마음을 먹다가 예정된 마감일을 매번 훨씬 넘기기 일쑤여서 벌써 오랫동안 그런애라고 찍혀버린지 오래였다. 그래도 나는 나의 최선을 다했기에 사실 나 자신은 그런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었다. 나는 노동자의 연구보고서는 최상으로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것을 만들어야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신념은 그이후로도 2005년 현대자동차 노동강도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나의 엉터리였을지 모르는 신념 (왜 엉터리냐하면, 모든 사물에 완성의 지점이 있다면 또다시 새로운 시작지점이 있고, 해서 발전을 해 나가는 것을 그땐 모르고 너무 욕심을 부렸을지도 모르므로.....)을 그래도 받아주고 믿어주었던 한노정연 동지들이 너무 고마울 뿐이다. 기아 마지막 보고서 마감 몇시간전에 그 보고서를 들고 한노정연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 언니들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나때문에 이마에 주름살이 한개 더 늘지는 않았는지......

 

1996년인가 1997년인가? 안양 어느 작은 병원에서 산업보건전문의로 근무하던 나는 병원의 책상위에 기아자동차 소하리동지들의 설문지를 온통 펴놓고 틈만나면 작업을 해대다가 어느날 나도 모르게 짤린적도 있다. 그리고 갑자기 갈곳도없이 몇개월을 헤매다가 결국 영국에 유학이랍시고 다녀왔다. 2001년 다녀왔노라고 인사를 하러 사무실로 가자마자 나는 이**언니로부터 대우조선 노동강도평가를 하자는 명(?)을 받고 대우조선을 내집처럼 드나들때, 그때 나는 인생의 최고였고,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속에 있었던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다. 그때 후배들인 건형, 원진, 승연이가 나때문에 너무 고생을 했다. 그들은 겨우 본과 2학년, 아무것도 모르는 본과 2학년 학생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대우조선, 철도노동자의 건강문제를 해결한다고 한겨울에 녹음기와 귤박스를 들고 구로동, 독산동 철로를 건너던 때가 생각난다.

 

물론 그 이후로도 박**동지와 한노정연과 함께 한 여러개의 프로젝트가 있다. 교대제도 있고, 노동강도도 있고...... 기아화성동지들과 현대자동차동지들...... 모두들 고생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숱한 날들을 화성과 울산을 오르내리지 않고 차라리 그곳에서 머물면서 살았으면 더 좋았을것을.. 그러면 더 많은 동지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을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도 5월 메이데이와 11월 노동자대회때 항상 만나는 이들은 그때 만난 이들이다.

 

이렇게 같이 고생하며 그당시에 최선을 다했고, 나의 모든 에너지를 100%소모하면서 기뻐했던 그 곳,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정'이란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정'에 대해서 한마디만 더 고백하고 싶다.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인데...... 사람들은 나보고 고집이 세다하고 소통을 잘 못한다고 한다. 나라고 왜 고민이 없겠는가? 그런말을 듣고나서...... 하지만 나는 물론 앞서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있을 지언정, 동지들의 말을 다 들을 때까지 나의 의견을 내놓는 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했을 지언정, 일부러 소통을 안한것은 아니다. 지금 고백하자면 소통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내 의견을 어떻게, 언제 꺼내야할지 몰랐다는 것이다. 이 지면을 빌어서 그동안 같이 했던 여러 동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당장 내일부터는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어찌보면 나도 모르게 '한노정연'이라는 울타리속에서 안주하려고 했던 (나는 어느 모임에 가서나 한노정연회원입니다. 라고 하면 마치 면죄부를 부여받듯이), 그러한 안식처를 과감하게 벗어나야한다.

 

'민들레처럼.....' 우리는 떠나야한다.

 

여기까지는 '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제부터는 일이야기이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객관적 상황도 변화되었지만, 나도 많이 변화되었다. 그때 그런 현장노동자(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동조합이다)에서 요구되는 연구들을 제안받고 연구를 할때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때 그것이 최선이라고 알고 있었던 인식의 한계도 있다. 그 인식의 한계를 깨치고 다시한번 발전을 해야할 시기이다.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어제 한노정연의 마지막 회를 마감하면서도 우리의 역사적 사명과 한계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논의가 아직도 부족한것이 아쉽다. 이제는 우리가 역사에 남긴것은 무엇이었고, 또한 우리의 한계가 무엇이었는가?를 이야기해야한다.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까? 싶지만, 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마침 한노정연 백서가 나온다고 하니, 거기에 아마도 동지들의 많은 이야기가 실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은 '현장성'에 대한 접근을 좀 더 구체적이고, 발전적으로 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를 보면, 주로 노동조합과의 프로젝트속에서 안주했고, 건강이라는 주제속에 안주했고, 그것이 전부인양 생각했을것이다. 그래서 그 관계를 넘어서는 관계가 형성되지 못했고,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면 물론 개인적인 친분이 남긴 했지만, 그것이 조직적으로 남지는 못했던 것..... 그리고, 항상 운동을 기술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서만 기여하게 된것들...... 그것이 내가 이제 발전해야할 부분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현장성은 중요하고 유효하다고 본다. 오히려 이전에 한노정연이 했던 방식에서 더욱 발전적으로 현장의 노동자를 만나고 소통해야할 것이다. 그동안 그렇게도 소통을 못했던 내가 이제 진정으로 소통을 시작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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