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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동료의 무서운 충고...한국에서 펼쳐졌을 지옥도

[이봉렬 in 싱가포르] 독재 위한 대통령의 계엄 선포, 나라를 어떻게 망가뜨리나

4.12.17 07:04ㅣ최종 업데이트 24.12.17 07:06

2006년 싱가포르에 직장을 구해 이민 온 후 지금부터 스무 해 가까이 됐습니다. 반도체 관련 장비와 부품을 공급하는 작은 회사였는데, 사장이 한국 사람이라 직원들도 한국 사람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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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특이한 건 직원 중 한국 다음으로 많은 국적은 싱가포르가 아니라 필리핀이었다는 겁니다. 모두 필리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온 나름 엘리트였는데 회사에서는 주로 장비를 담당하는 엔지니어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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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만 필리핀 사람이 많은 게 아니었습니다. 싱가포르에는 약 200만 명 정도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중 25만 명 정도는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온 가사도우미입니다. 20년 전만 해도 가사도우미는 대부분 필리핀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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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이 되면 가사도우미들은 시내 길거리나 공원에 모여 휴식을 취합니다. 사진 출처 HOME(Humanitarian Organization for Migration Economics)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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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에 영어를 쓰는 필리핀 여성들이 싱가포르 가정에서 식사 준비나 청소는 물론이고 육아와 노인 간병까지 도맡아 했습니다. 싱가포르 전체 인구의 4% 정도가 필리핀 국적의 가사도우미였으니 필리핀 여성은 곧 가사도우미라 여겨질 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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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면서 지금은 좀 달라졌습니다. 필리핀보다 더 임금이 싼 미얀마나 인도네시아에서 온 여성들이 주로 가사도우미 자리를 차지하면서 필리핀 국적의 가사도우미 수가 크게 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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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필리핀 여성들에게 다른 일자리가 생긴 건 아닙니다. 가사도우미 혹은 식당 일을 위해 싱가포르 대신 한국이나 다른 나라를 찾는 걸로 바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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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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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현지시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마닐라 말라카낭 대통령궁에서 연설하고 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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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반도체 회사를 비롯한 제조업 분야에서 필리핀 출신 엔지니어들에 대한 수요는 여전합니다. 동남아 국가 중 교육 수준이 높고, 기술이 뛰어나며, 영어가 통하기 때문입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필리핀에서 구할 수 있는 변변한 직장이 없는 것도 싱가포르에 필리핀 엔지니어들이 몰려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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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반도체 팹으로 직장을 옮겼지만 여기서 함께 일하는 엔지니어의 대부분이 필리핀 출신입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일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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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나 여행, 문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서로 좋은 점을 추켜세워 주고 은근히 자국의 장점을 내세우며 대화가 흘러갑니다. 특히 케이팝과 넷플릭스를 통해 전해지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필리핀 동료들도 한국이 최고라고 입을 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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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치 이야기를 할 때는 좀 다릅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래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시아에서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필리핀 동료들은 한국이나 필리핀이나 뭐가 그리 다르냐는 식으로 받아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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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필리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저는 그가 한국의 전두환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를 섞어 놓은 것 같다며 어떻게 그런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 있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필리핀 동료들은 두테르테가 필리핀의 구악을 해소할 적임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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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폭력적이지 않냐고 물으니 이명박 정부 당시 서울 광화문에 컨테이너를 쌓아 시민들을 막았던 명박산성이나 전쟁과 같았던 용산참사를 이야기하며, 두테르테는 최소한 선량한 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응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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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필리핀 대통령이 됐을 때는 어떻게 나라를 망가뜨린 독재자의 아들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냐는 저의 지적에 독재자의 자식을 대통령으로 뽑은 건 한국이 먼저라고 답하는 바람에 할 말을 잃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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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선택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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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싸우겠다"는 윤석열의 말을 머리기사로 보도한 싱가포르 <스트레이츠 타임스>스트레이츠 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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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붉게 충혈된 눈으로 회사에 출근했더니 만나는 필리핀 동료마다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한국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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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의해 계엄이 해제되기는 했지만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정신이 이상해진 독재자가 계엄을 선포했으나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답게 국회가 막았으니 대통령은 곧 탄핵당해 물러날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동료들은 부디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면서 이제껏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필리핀에서도 대통령에 의한 계엄 선포가 있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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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장기독재를 했고, 그 가족은 구두 수백 켤레로 상징되는 사치를 일삼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 장기독재의 시작이 대통령의 계엄선포로 시작됐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평소 정치 이야기를 해도 농담을 섞어 가볍게 하던 그 동료는 계엄 상태에서 나라 꼴이 어떻게 되는 지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해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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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6일(현지시간) 필리핀 케손시티에 있는 피플 파워 체험 박물관에서 한 방문객이 계엄 희생자들의 사진을 보고 있다. 197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의 계엄 선포부터 1986년 평화 혁명까지 다각도로 체험할 수 있는 이 박물관은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피플 파워 혁명 3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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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이 장기독재를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고 의회를 해산했습니다. 계엄 해제까지는 10년, 독재자 마르코스가 쫓겨나기까지는 무려 14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인권 단체인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필리핀의 계엄 기간 동안 약 7만 명이 투옥되었고 3만 4000명이 고문당했으며 32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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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목숨만 빼앗은 게 아닙니다. 경제도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르코스가 집권한 1965년 필리핀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8달러로 한국의 105달러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됐습니다. 1981년 필리핀의 계엄이 해제되던 해의 1인당 GDP는 815달러, 한국의 GDP는 1883달러로 이번에는 한국이 필리핀의 두 배 이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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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과 장기독재로 인해 꺼져버린 성장동력은 독재자가 물러난 이후에도 다시 살아나지 못해 2023년 필리핀의 1인당 GDP는 3725달러로 한국의 3만 3121달러에 비하면 12%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12%의 GDP도 외국에서 남자는 엔지니어로 여자는 가사도우미로 일해 부친 돈으로 겨우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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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필리핀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세계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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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마친 필리핀 동료는 끝으로 이 말을 제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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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필리핀처럼 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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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걱정 말라'고, '우린 대통령을 탄핵할 것'이라고 답했지만 사실 걱정이 컸습니다. 국민의힘 의원들의 방해로 탄핵소추안 표결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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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난 14일 오후, 계엄 발표 이후 11일 만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습니다. 필리핀은 계엄 후 의회가 해산됐지만, 우리 국회는 계엄을 해제했고 불법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을 탄핵했습니다. 이제 헌법재판소의 심리만 남았습니다. 탄핵 인용으로 내란죄 수괴를 완전히 끌어내린다면 제2의 필리핀은 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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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남은 여정에서도 우리 국민 모두가 자랑스런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여 줄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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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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