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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지각[1]; 더 정확히 말해서[2] 사물과 착각[3]
(§1) 대상에 찰싹 붙어있는 확신은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망태에] 담은 것을 놓고 자기가 취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4]왜냐하면, 그가 [망태에] 담게 되는 것은[5]항상[6] 보편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장대 끝에 달린] <이것>을 [포기하지 않고] 취하려고 욕망하기[7]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각은 [현실{원칙}에 충실하여] 자기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을[8] 보편적인 것으로[9] 받아들인다.
[1]여기서 <Wahrnehmung>이 영어 <sensation>과 <perception>이, 즉 <impression>으로서의 수동적인 것과 <perception>으로서의 능동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는 것 같다. <감각적 확신> 마지막 문장에서 <Wahrnehmung>이 한편으로는 <aufnehmen>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aufzeigen>으로 등장한다. <aufnehmen>은 수동적인 <impression>으로, <aufzeigen>은 능동적인 <perception>으로 이해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2]원문 <oder/혹은>을 이렇게 번역해 보았다.
[3]원문 <Täuschung>. <착각>으로 번역해야 하는지 아니면<기만>으로 번역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아낙사고라스 등은 지각(aesthesis)을<pseudeis>, 즉 기만적이라고 한다[철학개념사사전의Artikel <Wahrnehmung> 참조]. 그런가 하면 케네스 웨스트팔(Kenneth R. Westhphal)은 헤겔이<정신현상학>을 쓰기 전에 흄(David Hume)의<인성론>, 그 중에서 특히4권2부<Of sceptism with regard to senses>를 읽었을 것이라고 한다. [Kenneth Kenneht R. Westphal: Hegel, Hume und die Identitaet wahrnembarer Dinge, 1998 참조]. 그렇다면<Täuschung>은<illusion>의 번역이 될 텐데, <illusion>은<착각>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기만>이 능동적인 행위라면<착각>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한다.
[4]이 번역은 <정신현상학>을 구원의 역사로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린 번역이다. 정신현상학이 단지 의식이 진보하는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이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던 것을 정말 갖다 주겠다고 약속하고 이행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호롱불이 없어서 밤이면 어두운 방에서 바느질하는 순이네 엄마 곁에 갖다 주려고 장대(!) 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에 올라 달을 딴 아이들의 망태에 달이 들어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기가 된 번역이다. 이런 동기의 연장선에서 첫 문장<Die Unmittelbare Gewissheit nimmt sich nicht das Wahre, …>을 어떻게 이해하고 번역해야 할지 고민했다. <das Wahre>를 <참다운 것>, 혹은 <진리>로 번역하면 직접적 확신이 참다운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데 [임석진 번역 참조], 이건 받아들일 수 없다. 직접적 확신이 찍어 담는 것이 결국 추상적인 보편성이라 할지라고 그게 참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려 바로 그런 보편성이, <Das Ganze ist das Unwahre>라고 한 <부정 변증법>의 아도르노에 기대에, 참답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보편성이 참다운 것이라고 할지라고 그게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날 행복하게 해주는 것, 또는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추상적인 보편성>이 아니라 <그때 그사람>, 혹은 <그때 그것>, 즉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동기 때문에, 즉 직접적 확신이 지향하는 것이 참다운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das Wahre>의 이해와 번역이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 확신에 참답지 않는 요소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직접적 확신의 비진리성은 수행적 자기모순과 유사하게 행위의 意圖와 결과가 일치하지 않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과 동기 때문에 <das Wahre>를 <참다운 것>으로 번역하지 않고 <bewahren/보존하다>, <das Gesicht wahren/체면을 지키다> 등에 기대어 <[망태에] 담은 것/담게 되는 것>으로 번역했다.
[5]원문 <ihre Wahrheit/진리>.
[6]여기서 사용되는 현재형 시제를 역사적인 현재형으로 이해하고 <항상>, 그리고 <언제나>로 보충했다. 문제는 이 <항상>이 시시포스적인 반복의 역사인지 아니면 <그때>로 표현되는 성취(Erfüllung)가 스며있는(eingelassen) 역사인지 판가름하는데 있다. <정신현상학>이 다루는 문제가 이 문제가 아닌가 한다. 관련 <그때>의 시간성도 문제가 된다. 이 시간성은 독어 <einst>에서 처럼 지나간 <그때>인지, 앞으로 올 <그때>인지, 아니면 역사의 밑바닥에 줄곧 깔려있는(eingelassen) <그때>인지 부동한다. <das Wahre>를 <담은 것>으로, <die Wahrheit>를 <담게 되는 것>으로 옮긴 번역에도 이런 부동(浮動/Schweben)이 반영되어 있다.
[7]원문의 <wollen>을 <욕망하다>로 옮겼다. 직접적 확신의 행위를 욕망의 범주에 놓고 보면 역주 3에서 이야기된 모순은 직접적 확신의 욕망에 내재하는 모순이 되는 것 같다. 직접적 확신이 보편성을 대리만족(Ersatzbefriedigung)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 받아들이면 정상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리는 것인가?
[8]원문 <was ihr das Seiende ist>. 여기서 <das Seiende>는 역주 7의 연장선에서 현실원칙을 받아들인 터전에서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번역했다.
[9]<Allgemeines>는 <감각적 확신> §7에서 이렇게 정의된다. “Ein solches Einfaches, das durch Negation ist, weder Dieses noch Jenes, ein Nichtdieses, und ebenso gleichgueltig, auch Dieses wie Jenes zu sein, nennen wir ein Allgemeines. (부정을 통해서 존재하는 이와 같은 단순한 것,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딱 찍어 잡아 들어 보여줄 수 없는 것, 그러면서도 여기에 개의치 않고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가운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을 우리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이어 § 21에서 „ein einfaches Zusammen vieler/다수가 [한군데] 하나로 모여 있는 것“으로 정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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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문장의 이해와 번역이 좀 부족한 것 같다. 원문은 이렇다. “Die Wahrnehmung nimmt hingegen das, was ihr das Seiende ist, als Allgemeines.” 첫째 문장에서는 내동 ‘das Wahre’, ‘die Wahrheit’를 운운하다가 둘째 문장에 와서는 뜽금없이 ‘das Seiende’를 운운한다. 첫째 문장의 흐름상 다음 문장은 “Die Wahrnehmung nimmt hingegen das, was ihr das Wahre ist, als Allgemeines.” 정도로 기대되는데 말이다.둘째 문장에서 ‘das Wahre’ 대신 ‘das Seiende’를 사용한 것은 ‘das Wahre’의 번역과 관련해서 제시한 문제의 연장선에서 보면 그리 뜽금없지 않다. ‘das Wahre’의 번역과 관련해서 문제시된 것은 궁극적으로 직접적 확신의 가상(Schein)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das Seiende’는 가상(Schein)에 대조되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가상과 존재하는 것의 구별이 희랍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도 이런 이해를 뒷받침하는 것 같다. 가상에 대조되는 것으로서 ‘das Seiende’는 ‘das wirklich Seiende’의 준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현실원칙을 운운했는데 이 Intuition이 그리 빗나가진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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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문장 이해 – 추가‚das, was ihr das Seiende ist, als Allgemeines’란 표현이 ‚etwas als etwas’(무엇을 무엇으로)와 그 구조가 같다. 직접적 확신은 ‚이것’(,das Diese’)과 직접관계하고 그 관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반면 지각은 거기서 헤어나와 ‚als etwas’란 새로운 지평에서 ‚이것’과 관계한다.
‘das Diese’와 ‘etwas als etwas’와의 관계를 이렇게 이해해보고자 한다.
갓난아기가 말을 배울 때 먼저 ‚엄마’란 말을 배운다. 그때 ‚엄마’를 ‚이름’으로 배울까 아니면 ‚[보편]개념’으로 배울까? 분명 이름으로 배울 것이다. 반면 ‚자동차’를 배울 때는 ‚[보편]개념’으로 배운다. „이거 뭐야?“ „자동차“. 이 대화에 ‚etwas als etwas’의 구조가 엿보인다.
직접적 확신과 지각이 말하는 존재가 상이한 것 같다. 플라톤은 ‚양자간 존재에 대한 이견 때문에 大戰’ (gigantomachia dia ten amphisthetesin peri tes ousias pros allelous, Sophistes 246a)이 있다고 한다. 직접적 확신이 말하는 존재는 Sophistes에 기대어 ,몸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tauton soma kai ousian horizomenoi, 같은 책, 246 b).
전쟁이라면 전선과 편이 문제가 된다. 직접적인 확신과 지각이 싸우고 헤겔이 지각의 편을 드는지, 직접적인 확신과 헤겔이 싸우는지 약간 불분명하다. 전선이 정확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직접적인 확신, 지각 모두 헤겔에게 야단을 맞는다. 직접적인 확신은 „넌 그저 사념일 뿐이야“란 야단을, 지각은 „넌 기만행위를 하는 놈이야“란 야단을 맞는다. 야단치는 방법만이 좀 다른 것 같다.
지각은 헤겔의 야단에 쉽게 순응할 것 같은데, 직접적 확신은 그럴 것 같지 않다. 왜? 그냥 느낌이 그렇다. 이 느낌의 근거를 나중에 (공부를 더 하고 나서) 좀 더 정확하게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선 직접적 확신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스파르타 시민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와 유사할 것 같아서 그렇다. 스파르타의 아낙네들은 전쟁터로 나가는 남편, 아들에게 무거운 방패를 건네주면서 ‚이것과 함께 아니면 이것 위에(syn tai e epi tai)’ [방패에 찰싹 붙어 승리해서 살아 돌아오든지 아니면 전사해서 주검으로 방패 위에 실려 오든지 하지, 절대 방패를 버리고 도주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외 정신현상학의 목차를 보면 '회의주의', '불행한 의식' 등 직접적 확신에서 제시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지나갔기 때문에 헤겔이 이 문제를 정신현상학에서 줄곧 다룬다는 느낌이기 때문에 직접적 확신이 이미 승복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각의 ‚etwas als etwas’는 자본론에서 이야기는 되는 상품의 이중성과 유사성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좀더 자세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사용가치가 가치로 등장하는 지평이 교환인데, 그 구조가 ‚이것’이 ‚als etwas’란 지평에 등장하는 것과 유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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