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으면서 TV를 보다가 어처구니 없는 공익광고를 보고 글을 올린다.
최근 다양한 시도와 형식으로 시청자에게 신선함을 주고 있는 공익광고가
이번에는 상식을 넘어서는(그래서 상식 이하의) 광고를 제작, 방영하고 있다.
아래 그림이 바로 그 광고의 한 장면이다.
이 광고에는 모두 네 가지의 문구가 오버랩된다.
' 질서가 있는 주장, 존중이 있는 주장, 절제가 있는 주장, 배려가 있는 주장' 이 그것이다.
얼핏 문구만 보면 정의적인 측면에서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하나씩 따져보자, 과연 맞는 말인지.
우선 장면들을 보자.
광고에서는 각 문구마다 그에 어울리는 시위대의 모습이 연출되어 나온다.
('존중'은 시위대가 아니라 각 대표 종교인의 모습이라 논의에서 제외한다.)
질서⇒촛불시위(사실 장면만 보면 촛불 들고 노래하는 합창단 같다.)
절제⇒삼보일배(전체화면은 실제화면인 듯 하고, 클로즈업되는 모습은 연출인 것 같다.
물론 이 연출, 어색하다.)
배려⇒물 건네는 시위자(전경에게 한 시위자가 물통을 건네고 전경은 웃으며 받는다.)
그리고 나오는 멘트, '배려가 있는 주장은 아름답습니다.'
각 장면의 시위대에서 절박함을 읽을 수 없다. 마치 문화행사(퍼포먼스)를 하는 듯한 모습이
다. 즉, 실제의 시위 이유에 한참 모자른다. 실제에서의 시위는 대부분 생존이 걸린 문제이다.
그렇게 여유롭게 행동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방송에서는 '이래야 착한 어린이지~!' 하는
식으로 모범적인(?) 시위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그런 시위대가 존재하는 양 말이다.
다음은 '배려'라는 단어에 대한 딴지이다.
적어도 상식선에서 생각할 때 배려라는 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또는 서로 동등한 입장일 때
베풀 수 있는 미덕이다. 사전적 의미도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이다. 즉, 상대를
도와주거나 보살펴 줄 수 있는 상태에서 행할 수 있는 것이 배려라는 것이다. 바꿔 생각하면,
약자는 강자에게 '배려'라는 것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는 뜻이 된다. 약자는 강자를
도와줄 수도, 보살필 수도 없다. 만약 그와 비슷한 행위를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순종' 내지는
'복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이 사회에서 국가는 개인 또는 시민에게 절대 우위의
강자이다. 헌법에는 '민주 공화국'이라고 떡하니 명시했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국가가
절대권력이다.(혹자는 대기업이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이런 역학관계에서 어떻게 우리가 국가에게 '배려'있는 주장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또, 만약 일반 시민이 광고의 주장대로 질서있게 절제하며 배려하는 주장을 내세우면, 과연
국가가 들어줄까? 분신을 해도 안 들어주는 판국에 무슨.....
암튼 결론은,
지금 방영되고 있는 공익광고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공익보다는 소수의 기득권의 이익을 위한
내용을 그럴싸한 도덕률에 버무려서 싼 값에 '어린 백셩(훈민정음)'을 유혹하는 불량식품일 뿐이다.
불량 식품 잘못 먹으면 탈난다. 가려 먹자!
추천 꾸~~욱 하고 갑니다^^
촛불집회, 삼보일배 등만이 배려가 있는 것이라고 강요하고 있으니 말이죠.
질서, 존중, 절제, 배려가 있는 진압부터...^^;;
문정현 신부님께서는 20여일 넘게 단식하고 계셨고,대추리 할아버지,할머니들은 청화대까지 삼보일배를 했으나 몇걸음도 띄지 못했다.
물론 배려깊은 전경들이 어른들 허리와 무릎이 상할까봐(?) 철저하게 막아서. 정부는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들을 쇄뇌시키려고 쓰레기같은 광고만 만들고 있다.히틀러도,박정희,전두환때도 광고의 파급효과를
잘 아는 그들이기에 그려려니 하고 싶어도 울화통 터지는 건 어쩌란말인가 930여번의 촛불로 저들이 말하는 주장을해도 군병력과 둉역
깡패를 동원했던 정부가 아닌가.
만들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