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 칼럼] <21> MB 정부 예산에 '배고픈 국민들'은 없다

 

 

정부가 드디어 내년도 경제성장률을 2%대로 낮추겠다는 것 같다. 이게 낮은가? 아직 충분히 정신 차렸거나, 어떤 일이 2009년도라는 시점에서 벌어질 것인가 실효성 있게 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원래도 한국 경제는 내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일방적으로 희망하는 것과 달리 내년도 상반기에 세계 경제가 저점을 통과하고 무난히 하반기부터 회복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건 지난 칼럼에서 이미 얘기한 바가 있다.

 

이 상황에 들기름을 쏟아 부은 것은 지금 여당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뒤죽박죽 예산들이 통과된 내년도 예산안이다. 즉 정부가 무엇을 할 것인가의 기본 방향이다. 정부와 토목관련자들이 당분간 TV와 라디오 그리고 신문을 장식하며, SOC의 불가피성과 경제적 효과 등을 얘기하며, 마치 무당굿 하듯이 "내년에는 다 잘 될거야"라고 외쳐댈 것이다.

 

먼저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뉴딜 때 토목과 관련된 예산은 아무리 높게 추정을 해도 10% 이상 나오지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90%는 복지와 사회안전망 관련 예산이다. 정부의 내년 예산안에서는 평균증가율 정도만 올라갔다. 그리고 지금 오바마의 '새로운 뉴딜'의 방향 역시, 절반 이상이 의료복지와 노후된 학교시설 보수 등이고, 나머지 토건 예산도 오랫동안 보수되지 못한 고속도로에 대한 '리뉴얼' 작업 그리고 세계 10위권 바깥으로 추정되는 인터넷 고속망 설비라는 점이다. 뉴딜은,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토건 비중이 전체의 10%를 넘지 않는다. 지금 미국의 금융위기가 건설부문 과잉투자의 가장 '약한 고리'였던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 터져나왔지만, 미국 경제 내에서 건설부문의 지출은 10%를 넘지 않는다.

 

한국은 평소에도 그 두 배 가까운 건설지출을, 국책사업이라는 형태로 억지로 끌어오면서, 지난 10년 동안 새만금과 각종 특구와 지역도시 등을 만들어냈다. 많은 지방공단의 입주율이 50%도 제대로 넘지 않는 현 상황에서, 국민경제의 나머지 남은 돈을 탈탈 털어 건설에 넣으면, 위기가 극복이 될까?

 

불행히도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지는 경기침체가 하반기에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내수 위축으로 연결되면서 내년 9월 이후 청명한 가을 어느 날, 한국 경제는 사회붕괴라고 할 수 있는 '경제 빅뱅'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사람은 굶고는 살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 사람들의 밥과 일자리에 들어갈 돈을, 시멘트 사는 돈, 불도저 움직이는 돈, 그리고 토호들에게 토지 보상비로 풀 돈으로 쓰고, 정작 "배고파"라고 하는 국민들에게는 아무 것도 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주류 경제학 혹은 표준 경제학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경제원론 체계를 지지하는 그 경제학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약점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이 '위기이론'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이 이론은 '일반 균형' 그것도 '장기 균형'이라는 개념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이질적인 케인즈의 거시경제 이론을 교과서에 끌어다 놓았다. 그러나 케인즈의 경제이론에도 왜 위기가 생기고, 이 위기의 전개, 즉 '과정'에 관한 이론은 거의 없다. 지난 주에 내가 얘기한 위기의 패턴 분석 같은 것들은 표준 경제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콘트라티에프의 장기파동설과 '공황론'과 같은 비주류경제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패턴 분석들이다.

 

내년에 한국에서 벌어질, 1945년 시작된 한국 경제사 초유의 사건에 대해 경제학 교과서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다. "같은 구조가 재생산된다"는 전제 하에 진행되는 어떠한 시뮬레이션 모델도 내년도의 한국 경제 상황을 모델 속에서 재현해줄 수는 없다. 이건 데이터의 문제가 아니라, 이론적인 문제이며, 동시에 모델 구조상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데이터는, 지금 부동산을 위해 국민들이 융자한 개인 부채가 상당하고, 이로 인해 실제 '소비 패닉'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고, 내년도에 '건설 일용직' 일부를 제외하면 추가적인 일자리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물론 현 정부가 염두에 둔 2~3%의 지방토호와 재력가들의 '다주택 보유 프로그램'은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어차피 내년 내내 부동산 경기는 일부 지방개발지에 대한 투기를 제외하면 꽁꽁 얼어붙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현 상황은 여러 가지 이유로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던 국민 혹은 이사가 필요했던 국민들이, 이 공간에 대한 지출을 일시 정지시키고, 경제빅뱅이 초래할 최소 2~3년 간의 대공황 상황에서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할 '가처분 소득'을 지키려고 하는 상황이다. 불행히도 경제빅뱅이 진행되면 현재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절반 가까이는 영세민 혹은 도시빈민으로 경제적 위상이 변하게 될 것이다.

 

그 밑의 사람들은? 일부는 70년대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 그랬던 것처럼 다시 지방으로 공사장을 따라다니며 일용직 근로자로 살게 되는, 1939년 출간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가 연출될 것이다.

 

경제학 이론에서 답을 찾기가 어려우므로, 잠시 시계를 십년 전으로 되돌려 1998년 막 집권한 DJ 정권 내부에서 있었던 논의들을 잠시 생각해보자.

 

당시 나는 재벌사였던 어느 그룹의 내부에 있었고, 1월초 어느 날 기획실 간부들이 청와대 회의에 참석한 이후에 벌어진 몇 가지 일들을 처리하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매각하는 계열사의 가격을 조금이라도 높게 받기 위해서 '기업 가치평가'를 맡은 컨설팅 회사들에게 줄 자료들을 정리하거나, 조금이라도 이 회사들이 나아보이게 하기 위해서 경영계획서 같은 것들을 영문으로 만드는, 그런 귀찮지만 어쩔 수 없던 일들도 했었다. 그리고 막 구성된 대통령 인수위원회에 몇 가지 자문을 해주기도 하고, 또 개혁적인 경제학자들끼리 정부에 대한 직간접적인 건의에 대한 논의들도 같이 했었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 인수위원회, 그리고 청와대 경제팀에서 가장 심각하게 학자들의 건의에 대해 경청했던 것은 '폭동'에 관한 것이었다. 서울역으로 노숙자들이 밀려들고 있었고, 이런 노숙자들은 서울만이 아니라 부산 등 거의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여기에 잠시 후 기업에서 정리해고 이후로 쏟아지게 될 해직자들에 대한 사회적 프로그램을 경제적으로 디자인하는 것들을 시급히 하지 않으면, 대규모 폭동으로 인해 정부가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것들을 논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혼동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할 정치적 여건이 형성됐고, 자활 사업 등 한국에는 없었던 적극적인 복지정책들이 급하게 도입됐고, '사회안전망'이라는 복지담론이 성립됐다. 당시 급하게 도입됐던 이런 프로그램들이 과연 실효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나중에 당시 소장파 학자들이 기대했던 대로 발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실증적 검토와 같은 아카데믹한 논의는 추후에 하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1998년 1월과 2월, IMF 경제위기라는 엄청난 사건 속에서 새롭게 정권을 인수한 사람들에게는 '폭동'이라는 개념이 탑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내 시각이 너무 비관적일까? 나는 지금 이명박 정부가 최근에 보여준 모습대로 '토건 위주의 재정정책'을 강행한다고 하면, 내년 상반기가 지나더라도 중산층과 하층민들, 즉 도시빈민들의 소비여력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고, 그 효과는 끔찍할 정도로 꽁꽁 얼어붙은 내수경제로 인해 9월 이후에 경제빅뱅이라는 클라이막스로 가게 될 것 같다.

 

경제학적이거나 정치적인 수사를 다 제외하고, 이번에 한나라당이 강행처리한 예산은, 솔직히 이 미증유의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경제 위기 예산'이라기보다는, 2010년 6월의 지역선거를 겨냥한 선거용 선심선 예산처럼 보이지 않는가? 어차피 내년이 되면 선거를 치르기 위해 각 지역에 도로를 놓고, 건물을 짓고, 또 하천정비 등 별의별 사업을 '무슨 무슨 르네상스', '무슨 무슨 중심축 개발' 이렇게 해서 여야가 잘 합의해서 했을, 그런 선거용 예산 사업이다. 이번에는 그 선거용 예산을 1년 당겨서 미리 선거준비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비상편성을 해놓고, 내년도에는 "경제가 나아질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셈이다.

 

몇 가지 간단한 원칙을 생각해보자. 지금 재정지출이 가야할 곳은, 지역복지, 노동, 그리고 창의성 이 세 가지이다. 창의성에 대한 투자가 필요한 것은, 2~3년 경제가 힘들다고 해서, 산업활동이나 생산활동을 그만둘 수는 없기 때문이고, 글로벌 경쟁이라고 하는 것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상과 발상을 위해서 예를 들어보자. 지금 사실 이번 국회에서 시급히 논의해야 했던 것은, 실업급여의 지급 기간을 한시적으로라도 1년 이상 장기로 연장하는 방안과 같은 것들이다. 어차피 내년에는 실업자 혹은 유사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있는데, 1929년의 대공황과 달리, 이미 존재하는 실업급여 제도를 약간 손질하고 그 기간을 특별대책 등으로 연장하면, 가장 시급한 서민들에게 바로 재정정책이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런 간단한 방법을 두고,온 국토를 헤집는다고 해서, 그게 내년도에 바로 '삽질 들어가게' 만들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멘트 사오는 돈이 늘어난다고 해서 국민들의 지급여력이 단기에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실업급여, 사회적 일자리, 창의성 사업, 이 세 가지만 주력해도 단기적인 충격을 받아내면서도 장기적인 산업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데, 정부는 도무지 이런 일들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년 9월과 10월, 아마도 한국 경제에 다시 폭동 형태로 배고픈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위기가 실제 닥칠 가능성이 높다. 배고픈 사람들이 가게에서 생필품을 집어가거나, 그중의 일부가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기 시작하면, 그 혼동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러 가지 형태로 국민경제 내에서 폭동의 위험은 항상 잔존하고 있지만, 그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경제 폭동이다. 이게 내년도 하반기에 실재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굶어봐라. 역사가 '근대의 탄생'이라고 찬미하는 프랑스 대혁명도, 경제적 눈으로 보면, 자식들에게 빵을 먹여야겠다고 길거리로 나선 여성들이 베르사이유 궁으로 행진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한국의 경제빅뱅이 여의도 증권가와 정가 그리고 과천의 관청에서 사무직들의 컴퓨터와 서류 위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는 2009년도 한국 경제의 전개과정에 대해 아직 하나도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국민경제라는 것은 부자들만의 것도 아니다. 경제를 구성하는 가장 아랫 단계에는 "배고프다"라고 아우성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먹을 것을 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지금이 그 시기이다.

 

대기업와 중소기업에서 내년 한국 경제를 헤쳐나갈 힘과 일자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시 자활 혹은 시민경제의 영역을 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정부가 조금 더 적극적 복지로 연초부터 사회안전망을 대대적으로 확대시키는 방식으로 할 것인가?

 

그냥 대책 없이 삽질만 하고 있다가는, 정말로 '빈곤형 경제빅뱅'을 볼 수 있다. 제발 폭동이라는 개념이 경제 과정에 존재한다는 것을 탑재하기 바란다. 한국은 좋든 싫든 이미 중남미형 경제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 중남미에서 언제 폭동이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됐는지, 내년 연초 경제팀은 그걸 연구해야 한다. 최악의 상황을, 서로 피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

(출처 : [프레시안] 우석훈 칼럼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1215141254§ion=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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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함'에 대하여

2008/12/09 11:25

평온함

 

1. '평온하다'는 말은 참 어감이 좋다.

 

2. '평온하다'는 말은 '편안하다'는 말에 비해 동적인 것 같다.

태풍이나 땅이 파일 정도의 비바람이 몰아친 뒤에는 평온함이 오는 것이다.  '태풍 뒤의 편안함'은 부자연스럽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평온함은 '(자신이나 어떤 결과의) 노력으로 찾아오는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3. 평온한 삶과 편안한 삶을 보면 더욱 그렇다. 

 

4.삼국지를 보면, 제갈공명은 항상 부채를 가지고 다닌다. 이에 의문을 품고 물어보니 제갈공명은 '항상 냉정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 부채질을 한다'고 말한다.

 

영화 [달콤한 인생]의 첫 장면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등장하는데, 이에 주인공은 스승에게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바람때문입니까, 아니면 나무가 흔들리기 때문입니까'라고 물어본다. 스승은 '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다. 네가 흔들리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

 

5. 되물어 본다. 

'나는 어떤 격정이나 두려움에도  들뜨지 않고 항상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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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와 평화/반전 문제 

 

출처 : 만감: 일기장 2008/12/01 22:50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17406 
 
 
                            ”평화의 아들은 전장에 나가도 되는가?”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글을 보내달라는 청탁에, 처음에 망설였다. 자본주의•국가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인, 정의와 사랑이 원천적으로 결여돼 있는 이윤추구 체제에 적응한 어느 종교조직도 ”태생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지 않을 수 없지만, 종교학자 최준식 교수 (이화여대)도 일찍이 지적했듯이 국내의 종교조직 치고 가톨릭교회는 그나마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될 만한 소지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보기만 들자면, 불자로서 필자에게 중요한 사실이 가톨릭교회가 불교와 화목한 교류관계를 맺어 ”종교간의 상생”의 선례를 남긴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을 이야기하자면, 전쟁과 평화, 폭력과 비폭력 저항의 문제를 보는 국내 가톨릭교회의 시각에서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유구한 역사의 숨결도 해외교회들과의 유기적 관계성도 느낄 수 없다는 부분이다. 20세기에 군사적 폭력에 가장 멍든 사회라면 분명히 두 쪽으로 갈라져 아직 평화협정도 맺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부터 이야기해야 하지만, 이 폭력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영적 힘을 국내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서 얻기가 힘들다는 것은 한탄스러운 일일 뿐이다.
 
전쟁, 폭력이란 예수의 교회에 있어서 애당초부터 ”우상숭배”, 즉 강압적으로 강요하는 로마제국의 어용종교와 거의 같은 차원에서 중대한 문제이었다.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시킨 교부 테르툴리아누스 (155-222)도 예수를 따르는 ”평화의 아들”이 전장에 나갈 일이 없다고 주장한 바 있었지만, 대체로 4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평화주의와 병역거부는 다수 초기 기독교인들의 굳은 자세이었다. 단,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국교화되자 교회와 국가 사이의 타협의 일환으로 교회가 – 신약의 가르침에서 분명히 없는 – ”의전” (義戰: 정의로운 전쟁)의 논리를 받아들여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 능력을 일시적으로 잃게 된 것이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도: 5:29)는 말씀이 망각됐을 때에 교회는 결국 상처를 입어 만신창이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주 등 비(非)유럽 지역에 대한 서구 자본주의의 침략에 편승하기도 하고 그 침략을 ”선교”의 이름으로 합리화한 것도 교회로서 씻겨지기 어려운 죄악이 됐지만, 독일 가톨릭들과 프랑스 가톨릭들이 서로를 전장에서 죽이게 된 제1차세계대전과 같은 상황들은 새삼 교회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의문을 많은 신자들에게 일으켰다. 이 세계에서 최대의 종교조직이라 할 가톨릭교회마저도 그 신자들이 각자 세속 정부들의 명령에 따라 서로 죽이게 되는 사태를 예방할 수 없다면 신자 개개인이라도 예수의 평화정신을 따라 제 양심을 살려야 하지 않는 것인가? 이와 같은 반성이 제1, 2차 대전 사이, 그리고 그 뒤에 축적된 결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1965)는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유의미한 결론을 내려 개개인의 양심적 병역거부의 권리를 신앙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그 덕분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많은 미국 가톨릭들의 병역거부가 미국 주교회의의 지원을 얻어, 1970년에 이르러 가톨릭계 거부자들이 전체 거부자들의 8%나 됐다. 이와 아울러 1980년대 이후에 전쟁에 대한 바티칸의 입장도 많이 분명해졌다. 지금의 이라크 침략은 물론이거니와 1990-91년의 제1차 걸프 전쟁도 교황청이 반대해온 것이다. 물론 예수와 초기 기독교인들의 평화정신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이것보다 훨씬 더 수위가 높은 전쟁 반대가 필요했을 것이지만, 교황청의 반전 입장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좋아할 일이 없는 중남미, 아프리카 등 수많은 주변부 국가들에서의 신자들에게 환영 받았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이와 같은 평화주의적 자세를 교회가 취하지 않는 이상 세계 체제의 주변부, 준(準)주변부 빈민들이 신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오늘에 과연 그 교세를 유지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준(準)주변부의 국가 중에서는 가톨릭들의 반전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작았던 한 나라가 있는데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라크 침략이 시작됐을 때에 한국 주교회의는 평화 촉구 성명서 (2003년2월14일)를 내는 등 세계 가톨릭 교회와 보초를 맞추었지만 국내 정치적 문제로서의 이라크 파병을 다룰 때에 교황청보다 훨씬 더 보수적, 그리고 거기에다가 상당히 자가당착적 입장은 일부 고급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확인됐다. 한국 가톨릭의 최고의 권위인 김수환추기경이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서 – 이라크 전쟁 자체는 잘못된 전쟁이라고 전제를 하고 - “파병문제에 대해 노대통령이 나에게 물었을 때 이라크의 평화를 위한 파병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평화를 위한 봉사단 성격으로 파병할 것을 권했습니다. 다만 그들이 공격받을 때를 대비해서 자위수단의 병력은 가야 할 것입니다. 이라크 문제는 이라크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평화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이라크는 석유보유국이기 때문에 세계 어느 나라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라크에 평화가 복구되도록 이라크 자치정부 수립을 함께 걱정해야 합니다” (김추기경의 인터뷰, <경향신문>, 2003년11월24일)라고 하지 않았던가? 생각하면 할수록 비(非)논리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전쟁 자체가 침략이었다면 침략국의 편에 서서 파병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평화와 복구”를 위한 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침략국의 편에 서서 파병된 한국 군인이 이라크 애국자들의 공격을 당해 “자위수단”으로서의 화기를 사용하게 된다면, 이는 침략 동참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겠는가? 세계 교회가 이라크 침략을 반대했을 때에 한국교회의 가장 존경 받는 어른은 예수의 평화정신을 배반하고 가톨릭교회의 비극적인 역사의 교훈들을 무시하는 침략 옹호의 주장을 피력한 것이었다.
 
평화정신의 또 하나의 축인 병역거부 등 적극적 반전 행동의 차원에서도 국내와 국외 교회의 “온도차”가 뚜렷하다. 아직까지도 미국에서의 철저하게 반전적, 병역거부 지향적 “가톨릭 노동자 운동”과 같은 대규모 “좌파 가톨릭” 단체들이 국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일부의 기능을 정의구현사제단 등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열기 속에서 태어난 가톨릭 사제 단체들이 담당하지만, 그 역량의 한계가 있어 가톨릭 교회의 전체적 보수성을 깨뜨리기에 “역부족”인 듯한 느낌이다. 그러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분명히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린 대체복무제에 대한 국내 가톨릭의 입장도 놀라울 정도로 “온건”(?)하다. 2002년3월에 김수환추기경이 <교육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개인적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국가의 안보를 크게 해치지 않는다면 병역 의무에 못지않은 사회봉사로 대체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 대체복무를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라도 천만다행이지만, “국가 안보를 해치지 않는다면”라는 – 종교인보다 정치인에게 더 어울리는 – 전제와 “강력한 요구” 대신에 단순히 “괜찮다”고 하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구미 가톨릭에게 보기 드문 무관심을 나타낸다. 실제로 지난 2005년10월19일에 가톨릭 청년 고동주가 국내 가톨릭으로서 최초로 병역거부를 선언한 바 있었는데, 그에 대한 교회의 제도적 지원이 너무 취약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폭력을 거부한 이들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게 다 죄가 있는 만큼 예수의 재림까지 전쟁의 위협이 계속 임박할 것이다. 그러나 죄악을 사랑의 단결을 통해 지워버릴 수 있다면 폭력도 아울러 정지시킬 수 있는 것이다…” (“Non possumus non laudare eos, qui in iuribus vindicandis actioni violentae renuntiantes.. Quatenus homines peccatores sunt, eis imminet periculum belli, et usque ad adventum Christi imminebit; quatenus autem, caritate coniuncti, peccatum superant, superantur et violentiae”).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결의문 ()을 충심으로 실행할 만큼 한국 교회가 과연 그 특유의 보수성을 약간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사유제와 사유제가 부추기는 탐욕, 가족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전쟁을 모두 다 거부한 예수의 – 진정한 의미에서의 – “공산주의적”, 즉 사랑으로 뭇 존재들을 아우르는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이들이 교회 안에서 많아져 제도권에서의 안주의 관습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폭력 정지”에 대한 바티칸 제2공의회의 말씀이 한국교회에서 “공염불”로만 남지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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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제45장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衝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靜勝躁 寒勝熱 淸靜爲天下正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 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 신영복. 2008.『강의』. 돌베개.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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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이고, 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Science is what you know, philosophy is what you don't know.
 
송상용(과학기술학자) 
 
철학과 과학의 관계를 설명하는 버트런드 러셀의 상당히 명쾌한 말이다. 그렇게 구분을 해서 우주에 대해 우리가 아무것도 몰랐을 때 도대체 우주는 무엇으로 되어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고 탐구한 것이 철학이라고 한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우주에 대한 뭔가 알게 되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은 과학으로 넘겨주고 철학은 계속 모르는 것을 탐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론이 천문학으로 독립해나가고 또 영혼의 문제 등을 철학에서 탐구했는데 그것을 조금 알게 된 부분은 심리학으로 넘어가고...... 이런 식으로 철학은 개별과학을 계속 독립시켰다.

 

그러면 이와 같이 다 과학으로 넘겨주면 철학의 역할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실지로 그런 경향 때문에 철학의 위기가 얘기될 때가 있었다.
 
리어왕이 딸들에게 땅을 다 나눠주고 나중에는 황야에서 울부짖고...... 철학의 가련한 운명이 아니냐 이런 얘기까지 나왔는데 사실 우리가 수학에서 무한이라 정의함은 거기다 보태도 무한이고 빼도 무한이기 때문에 결국 아무리 가감을 해도 무한은 무한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철학에서 아무리 살림을 많이 낸다고 하더라도 철학의 영역은 계속 무한한 것으로 남는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 영국의 과학자 보일(1627~1691)이 이전의 화학과 다른 점은, 물질에 관한 신비적인 설명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보일에게는 화학물질이 왜 그렇게 변하느냐라는 것이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화학물질이 변하되 ‘왜?’가 아닌 ‘어떻게’ 변하는가?를 중점적으로 보는 것이 보일의 목적이다.

 

물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무거운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느냐?라는 질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이라면 갈릴레오는 거기에서 ‘왜’를 제거하고 무거운 물체가 ‘어떻게’ 떨어지느냐, 또 속도가 ‘어떻게’ 변하느냐는 것이 갈릴레오의 관심이었다.

 

‘왜’에서 ‘어떻게’로 넘어가는, ‘why’가 아니라 ‘how’로 넘어가는 이것이 바로 과학혁명의 특징이다.

 

- 출처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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