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슬리 리뷰 50년으로 본 미국 좌파 역사
크리스토퍼 펠프스(Christopher Phelps)
먼슬리 리뷰 1999년 5월호
원 제목 = 서설 (Introduction: a socialist magazine in the American century; 'Monthly Review')
미국의 유명한 진보잡지 먼슬리 리뷰가 1949년 5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명문 `왜 사회주의인가?'를 담아 처음 나올 그 때의 정신을 그대로 지킨 채 50년 이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50년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기적같은 일이지만, 한번도 곁길로 빠지지 않고 자기자리를 지킨 것은 기념비적인 일입니다. 50년 기념호는 이 글 곧 크리스토퍼 펠프스가 쓴 50년사와 3명의 편집인 곧 폴 스위지, 해리 매그도프, 엘런 메익신스 우드의 인터뷰만으로 구성됐습니다. 원고지 300장에 해당하는 긴 글입니다.
서설: `미국의 세기'의 사회주의 잡지; `먼슬리 리뷰'
(Introduction: a socialist magazine in the American century; 'Monthly Review')
크리스토퍼 펠프스 (Phelps, Christopher)
<먼슬리 리뷰> 1999년 5월1일
인생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50살이 되는 것은 통계적으로 말할 때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미국 좌파의 잡지에게 50년은 진정으로 영원한 것이다. 단지 이 나이에 이르는 것만으로도 멋진 성과다.
이제 저물어 가는 이 한 세기동안 수많은 유망한 급진적인 출판물을 파괴해온 언제나 어렴풋하게 등장하는 위협을 생각해 보라. 정부의 괴롭힘과 탄압으로 1차 대전 중에 `인터내셔널 소셜리스트 리뷰(the International Socialist Review)'와 `민중(the Masses)'이 무너졌다. 재정지원이 없어지면서 1917년 `세븐 아츠(Seven Arts)'가 사라졌고 1937년에는 `마르크시스트 쿼터리(the Marxist Quarterly)'가 없어졌다. 편집자 한 명이 숨지자 `모던 쿼터리(the Modern Quarterly)'는 1940년 마지막을 고했고 편집자의 변덕은 1980년 `마르크시스트 퍼스펙티브스(Marxist Perspectives)'를 없애버렸다. 70년 사이로 이 나라 최고의 급진적인 신문이 전망을 잃고 독자가 줄면서 무너졌다. 1922년에 `어필 투 리즌(the Appeal to Reason)'이, 1992년에는 `가디언(the Guardian)'이 각각 말이다. 지원 세력 또는 당이 나뉘거나 합쳐지면서 다른 많은 출판물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가 잊지 않게, 완전한 낙담과 사기저하와 방향상실과 각성(미몽에서 깨어남)이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좌파 정기간행물들이 죽어 기록보관소에서 누렇게 변색하고 있다. 이것은 한 때는 대단했던 포부를 지녔지만 꿈이 바람에 흩어지는 것을 지켜본 작가와 독자들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됐다.
반면에 어떤 것들의 운명은 죽음만도 못하다. 버티는 것은 활력이 아니라 무기력을 나타낼 수도 있다. 매년 꼬박꼬박 나올지라도 똑같은 기계적인 공식을 반복한다면, 잉크는 채 마르지 않았더라도 생각은 케케묵은 것일 뿐이다. 삶은 다른 방식으로 한 기획을 메마르게 할 수 있다. 가장 흔한 방식은 목적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정기간행물이 세상을 얻되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성서의 표현에 빗댄 것=옮긴이) 종종 성숙은 한때는 당연히 무시했던 현상유지와 청중, 영향력을 갈망하도록 한다. 합리는 혁명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듯하고, 양식은 타협을 요구하는 듯하다. 또 품위는 유행을 더 눈여겨보게 한다. 이런 것이 `파티슨 리뷰'(Partisan Review)처럼 눈부신 마르크스주의 잡지를 중도 자유주의로 이끌고 끝내는 신보수주의에 도달하도록 했다.
먼슬리 리뷰의 기적은 모든 측면에서 살아있다는 그 사실이다. 이 잡지는 초기의 원동력을 잃지 않고 사회주의자의 약속을 지키면서 성년에 접어들었다. 계속 깨어있고 세상에 개입하면서 말이다. 이 비결은 과연 무엇인가?
1.
역사 유물론을 투박한 유물론과 혼동할 위험을 무릅쓰고 돈 문제부터 시작해보자. 누구도 먼슬리 리뷰에서 돈벌이를 기대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잡지를 꿈꾸는 것과 실제로 만들어 내는 것은 다르다. 실제로 한 출판물을, 급진적인 출판물도 마찬가지지만, 전국 규모로 만들어내기 위한 필수 조건은 그렇게 할 적절한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다. 인쇄기, 건물 임대, 전화, 전기, 난방, 발송, 그리고 직원 모두에 돈이 든다. 가끔씩은 작가에게도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이성적인 마르크스 역사이론이라면 모두 기회가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은 다행이다. 먼슬리 리뷰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치만 낮았다면 결코 생기지 못했을 것이지 때문이다. 먼슬리 리뷰에게 그 코는 F. O. 매티슨(Matthiessen) 교수의 예상하지 못한 재산 상속이었다.
하버드 대학시절 동료 폴 스위지(Paul Sweezy)를 포함한 그의 친구들은 잘 알듯이, 매티(Matty)는 미국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다. 1941년 `미국의 르네상스'(American Renaissance)를 썼고 미국학을 확립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기독교인이며 마르크스주의는 거부했지만 이 이론을 바탕으로 통찰력을 자유롭게 발휘한 사회주의자다. 매티와 폴은 1935년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노조를 만들 때 함께 일했다.
1948년 늦가을 두 사람이 지지한 헨리 월리스(Henry Wallace)의 대통령 선거운동이 깨진 뒤에, 매티는 스위지가 하버드에 사표를 내고 몇 년째 살던 뉴햄프셔의 가족 농장으로 찾아갔다. 집 주변을 함께 산책한 뒤에 두 사람은 불가에 앉아 술을 마셨다. 매티는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캘리포니아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뒤 생각하지도 않던 상당액의 신탁자금을 상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매티는 하버드대학 정교수인데다가 잘 나가는 작가이며 부양가족도 없었다. 그래서 돈이 필요 없었다. 폴은 자신이 리오 후버만(Leo Huberman)과 계속 이야기하던 그 잡지를 시작하고 싶었을까? 이 횡재 곧 3년 동안 매년 5천달러씩 모두 1만5천달러, 지금 돈으로는 7만5천달러에 해당하는 이 돈이 먼슬리 리뷰가 창간될 수 있도록 했다.(1)
2.
다른 말로 하면 돈은, 훌륭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추측할 수 있겠지만, 사회 관계의 표명이었다. 이 돈은 여러분에게 거슬리는 잉여가치의 착취가 아닌 것이다. - 이 선물은 축적과정에서 몇 단계는 벗어난 것이었다. - 이 돈은 또 함께 활동하는 이들의 관계 곧 일종의 사회 관계다. - 이 관계는 먼슬리 리뷰가 그 때 이후 빚지지 않게 했다.
친구들 가운데 처음은 편집인들인 리오와 폴이었다. 둘은 배경이 다르다. 앞사람은 뉴욕 좌파가 배경이고, 뒷사람은 뉴잉글랜드의 고학력이 배경이다. 앞은 중하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고 뒷사람은 상대적으로 특권층에 해당한다. 하나는 유태교인이고 다른 이는 개신교다. 그래도 둘은 대공황이 깊어갈 때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직후다. 둘은 모두 런던경제학교(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공부했다. 또 둘 다 편집인인 동시에 집필자였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기 직전, 둘이 만나 친구가 됐다. 전쟁동안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은 다시 가까워졌으며 새로운 종류의 사회주의자 잡지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스위지 보다 7살이 많은 리오 후버만(1903-1968)의 경력은 두 사람이 먼슬리 리뷰에 불어넣은 지적 경험과 정치적 경험의 깊이를 보여준다. 뉴저지에서 태어나 자란 후비(Huby)는 1926년 뉴욕대학을 나왔고 1933-1934년 영국에서 공부했으며 1937년 뉴욕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우리, 인민들(We, the People)'(1932)의 저자이다. 이 책은 그가 29살 때 출판된 대중적인 미국 역사책이다. `사람의 세속적인 재화(Man's Worldly Goods)'(1936)는 50만권 이상 팔린 일반 경제사 책이다. `노동 스파이의 부정한 거래(The Labor Spy Racket)'(1937)와 `위대한 버스 파업(The Great Bus Strike)'(1941)도 있다. 그는 몇 자리를 역임했다. 콜롬비아대학 사범대에 설치된 실험적 학과인 뉴칼리지의 사회과학과장을 1938-1939년 지냈고 1940-1941년에는 자유주의 신문 `피엠(PM)'의 노동 담당 편집자였으며, 1941-1942년에는 `유에스 위크(U.S. Week)'의 칼럼니스트였으며, 1942-1945년에는 전국해운노조의 대외관계 및 교육국장이었다. 또 1945-1946년에는 레이널 앤드 히치콕(Reynal and Hitchcock) 출판사의 실험적 팜플렛 담당 편집자를 맡았다. 발기인이며 대중활동가이며 정치평론가인 후버만은 그의 상당한 에너지를 먼슬리 리뷰에 쏟았다. 1968년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숨질 때까지.(2)
발행인 난에는 후버만과 스위지의 이름만 나왔지만, 이 잡지 초기에 상당히 중요한 인물들이 몇 명 더 있다. 하나는 오토 네이선(Otto Nathan)(1893-1987)이다. 그는 독일 이민이며 바이마르공화국의 고문이었으며 뉴욕대학의 경제학자이며 후비의 가까운 친구다. 세 번째 창간 편집인인 네이선은 표지에 이름이 공개적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했다. 1949년 기명 기사를 몇 건 썼는데도 말이다. 첫해가 지나고 네이선은 둘과 다른 길을 갔지만, 짧은 재임기간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또렷한 것이었다. 그 중의 하나는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글을 창간호에 실은 것이다. 이름 자체가 천재의 동의어나 다름없는 이 물리학자는 먼슬리 리뷰의 설립을, 사회주의에 대한 "자유롭고 거리낌없는 논의"가 "강력한 금기"에 짓밟힌 시기의 "중요한 대중에 대한 서비스"라고 평했다.(3)
초창기 15년 동안 훨씬 더 중요한 인물은 폴 바론(Paul A. Baran)(1910-1964)이다. 바론을 초창기 독자 대부분은 처음에 몰랐다. 히스토리커스(Historicus)라는 가명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이는 1939년부터 스위지와 다정한 친구 사이었다. 이 때는 모스크바, 베를린, 프랑크푸르트에서 공부한 뒤 유럽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때다. 1956년부터 실명으로 먼슬리 리뷰에 글을 썼으며 `성장의 정치경제학(The Political Economy of Growth)'(1957)의 저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책은 세계경제의 제국주의적 구조의 산물인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엄청난 차이를 설명한 것이다.
1960년대 초, "먼슬리 리뷰 학파"라는 말이 흔하게 거론되던 때, 물론 이 말을 듣는 이들로서는 언제나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바론의 이름은 거의 언제나 후버만, 스위지와 함께 거론됐다. `비즈니스 위크'는 1963년 "말뿐인 사회주의자가 아닌 트리오가 전혀 새로운 사회주의를 퍼뜨리고 있다. 이 사회주의는 철저하고 완고하며 과감해서 저개발국의 많은 좌파들이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 과거의 사회주의와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이다."라고 썼다. 1948년 스탠포드에 들어가 1951년까지 있던 바론은 미국 대학의 경제학과에서 가르치는 이 가운데는 아마도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밝힌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학과 동료들은 그를 싸늘하게 대했으며 이 대학 졸업생들의 압력에 겁먹은 학교 행정 당국은 그의 월급을 동결했다. 불면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린 그는 1965년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가 스위지와 함께 거의 마무리지은 책 `독점자본(Monopoly Capital)'(1966)은 다음 10년 동안 신세대 급진경제학자에게 이론적 참고점을 규정하는 것이 됐다고 할 수 있다.(4)
3.
이들 사상가를 하나로 묶는 것이며 먼슬리 리뷰 초기부터 생기를 불어넣은 핵심 과제는 바론이 "이성의 빛으로 자본주의 질서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라고 부른 것이다.(5)
창간 첫 호부터 먼슬리 리뷰는 당시 지배적이던 생각 곧 관리를 잘 하면 자본주의는 무한하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도전했다. 먼슬리 리뷰는 계급 착취와, 사회적 필요보다는 개인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 조직에 반대했다. 편집자들과 기고자들은 가난함과 부와 수입의 불평등, 인종탄압, 제국주의, 낭비는 자본주의 사회가 물려받은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내재적인 것이며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유지했다. 당시 지배적이던 자유주의적 가정에 반대해서, 먼슬리 리뷰는 사회적 불합리와 부정은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주의적 소유관계 틀 안에서라면 좀더 나은 정책을 편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견지했다. 지식인의 임무는 할 수 있는 한 철저하게 현재의 질서를 비신비화하는 것이다. 바론의 말로 표현하면 "지속적이고 체계적이며 포괄적으로 이성을 통해 현실과 대면"하는 실천인 것이다.(6)
먼슬리 리뷰를 이끄는 빛이 거물 경제학자들이기는 했지만, 또 이 잡지가, 특히 70년대에,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아주 뛰어나다고 알려졌지만, 이 잡지가 스스로의 사회이론을 펴면서 자본주의를 좁은 경제학 용어로만 묘사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조할 값어치가 있다. 이 점은 바론과 스위지의 걸작인 독점자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은 선진 공업국의 자본이 한줌의 거대 기업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성숙한 자본주의 경제를 "독점 자본주의"라고 묘사했다. 이들이 책을 쓸 당시는 비록 장기간의 전후 호황기였으며 주류 분석가들에게 수많은 환상을 심어준 시기였지만, 스위지와 바론은 스태그플레이션(경기는 침체하면서 물가는 오르는 현상 = 옮긴이)으로 향하는 강력한 체계적 추세를 밝혀냈다. 두 사람의 평가가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2차 대전 이후 스태그플레이션 경향을 상쇄하는 요소를 밝혀낸 것이다. 이 요소에는 자동차가 자극한 고속도로와 교외지역의 대규모 성장과 거대한 냉전시대 군비 지출, 광고와 판매 부문의 낭비적인 급증이 포함된다. 이 평가는 스위지가 나중에 표현했듯이 "용어의 일상적인 의미로 볼 때 경제학... 이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7)
핵심은 먼슬리 리뷰의 경제학 접근법이 당황하는 기색 없게도 역사적이고 비판적이며 정치적이라는 것만이 아니다. 스위지가 초기 근대 유럽에 관한 역사적 논쟁을 유발하고 바론은 정신분석학을 섭렵함으로써, 먼슬리 리뷰 그룹이 지성계의 관심에서 멀리 벗어난다는 것은 더군다나 핵심이 아니다. 또 이 잡지가 자연과학에서 인류학까지 넘나들고, 사설이 퀴즈쇼 추문 같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다루는 등 주제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님은 물론이다. 중요한 점은 먼슬리 리뷰가 전체 자본주의 질서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경제적, 문화적, 이념적, 정치적, 사회적 질서 전체 말이다.
이런 태도는 깊은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지식인의 책임은 권력(요즘 유행하는 적절하지만 고상하지 못한 용어를 쓴다면 `정책 벌레(wonk: 공부벌레식 표현 = 옮긴이)')의 상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가의 독립성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바론이 "명확함, 용기, 인내, 사회의 이성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경향의 자발성을 믿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비록 저들이 좌파 지식인들을 라이트 밀스(C. Wright Mills)가 말한 "미국의 축하행사"의 밖으로 몰아낸다고 하더라도, 먼슬리 리뷰가 영향력이라는 신기루를 선택하는 대신 사실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원천은 바로 사회주의자의 포부였다. "약간만 우리의 계획을 완화하자고 우리 스스로를 놀리지 말자"고 후버만은 썼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파멸의 길이다. 우리의 목소리를 드디어 사람들이 듣게 되더라도 우리의 주장이 왜곡되거나 더 이상 귀기울일 가치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우리가 무엇을 지지하는지 정직하고 분명하게 말하자."(8)
4.
하지만 재정적 수단, 재능과 경험, 값진 특성이 있는 조리 있는 전망, 이것만으로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이 첫 호 사설에서 주목했듯이 사회주의가 "더러운 말 이상이 거의 아닌" 시절 먼슬리 리뷰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 역사는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며, 이 잡지의 초기는 20세기 전체를 통틀어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 가장 나쁜 시절과 우연히 맞아떨어졌다. 매카시즘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1950년대에는 사회주의 잡지를 구독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먼슬리 리뷰는 평범한 포장지에 싸서 우편으로 배달됐다. 연합세력이 - 트루먼의 충성서약과 비-미국적 활동에 대한 하원위원회, 에드거 후버(J. Edgar Hoover)와 로전버그 사형집행, 급진적인 책을 쓰레기와 함께 밖에 내던지는 사람들로 이뤄진 - 공식적으로 비난하고 조사하고 죄를 뒤집어씌우는 분위기에서 먼슬리 리뷰는 살아남은 것만도 행운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 이상이며, 역설을 간과하면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모험적 시도 대부분은 열광 속에 시작됐다. 그것도 많은 이들이 급진화해서 충분한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던 시기에 말이다. 또 수많은 거리 행진이 벌어지면서 혁명적 변환이 보통 때보다 훨씬 쉬워 보이던 때에 말이다. 먼슬리 리뷰는 1949년, 좌파가 곤두박질치듯 위축되고 수많이 위협받으며 빠르게 해체되던 때에 창간됐다. 그 결과 먼슬리 리뷰의 독자는 처음 450명에서 1950년 2500명으로, 1954년 6000명으로 늘어났다.
그 결과라고? 그렇다. 이것이 역설이다. 혼란스럽고 분열되고 위촉된 채 포위된 좌파의 좋은 부분이 설 수 있는 것은, 정확하게 말해서 침착하고 이성적인 분석, 단순하며 직설적인 언어, 다양한 부분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자신을 열어놓는 것, 타협 없는 독립성이 필요한 때다. 이것을 먼슬리 리뷰가 빠르게 본보였다. 먼슬리 리뷰의 독립된 마르크스주의는 전국을 휩쓴 바람을 거슬려 갔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하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새로운 표현수단과 새로운 동아리를 찾는 멍든 미국의 좌파들에게 말이다. 이들은 실망과 조직적 실패의 역사까지 안고 있다.
5.
처음에 먼슬리 리뷰는 좌파들을 정확한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깃대였다. 이 잡지는, 대중전선(the Popular Front)이라는 정치적 경험을 함께 나누며 살았으며 어려운 때에 마르크스주의자의 실천과 이론의 다양한 면을 고요히 숙고하면서도 자신들의 사회주의 신념을 계속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이들의 관심과 정치적 신념을 반영했다. 이 독립된 사회주의 무리는 독자, 지지자, 글쓴이의 고갱이를 제공했다. 물론 이들은 이 잡지 성공의 전제조건이었다.
직접적인 배경은, 단지 6개월 전에 불행한 결론을 맺은 헨리 윌리스의 1948년 대통령 선거유세였다.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 밑에서 부통령을 지난 뒤 월리스는 1944년 상무장관으로 지명됐다. 루즈벨트가 숨진 뒤에 해리 트루먼 정부에서도 그는 그 자리에 계속 있다가, 갈수록 심해지는 워싱턴의 반공 대외정책을 비판함으로써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1948년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것은 노동과 좌파와 새로운 진보당(Progressive Party) 자유주의자들의 뉴딜 제휴를 되살리는 시도를 뜻했다.
그는 별로 급진적이지도 않았고 특별히 예리한 정치 사상가도 아니지만, 인권 문제에 관해서 단호히 트루먼의 왼쪽으로 갔고 냉전을 확대하는 것에 반대했다. 초기에 대중의 지지는 상대적으로 실질적이었는데, 이는 노동계의 전투적인 좌파와 뉴딜 지지자가 확장한 것이었다. 이런 이들은 루즈벨트의 개혁을 지지하며 그 개혁을 확대하고 싶어하는 부류다. 대신 대통령선거 유세는 "진보주의"의 분열을 특징지었다. 트루먼은 월리스의 국내 관련 공약을 빼앗아가면서도 훨씬 더 분명하게 냉전시대 전사가 됐다. 이는 20세기 중반 주류 자유주의가 주도한 빨갱이 딱지 붙이기를 감싸안는 것의 전형이다. 결국 월리스는 몇몇이 예상한 5백만 내지 1천만표가 아니라 단 100만표를 얻었다.
먼슬리 리뷰를 창간한 무리는 월리스가 무소속 단독 후보로 나선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민주당 진영의 통탄할 표류는 이들에게 양당체제의 대안을 찾는 노력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만을 확인시켜줬다. 후버만은 심지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독자정당을 세울 것"을 요구했다.(9) 편집자들은, 진짜 문제는 파시즘에 대항한 대중전선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강화된 십자군이 대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십자군은 종종 자유주의자들이 고안하고 실행하는 것이었다. 대공황기와 2차 대전 기간 좌파-자유주의 연합은 냉전 분위기 속에 깨어졌다.
월리스의 참패는 먼슬리 리뷰의 설립자들에게 두겹으로 비극적이었는데, 그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진정한 정치적 대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위지와 후버만은 진보당의 전국 강령위원회에서 함께 일했다. 그들은 월리스가 진짜 급진적 공약을 멀리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트루먼이 자신의 국내 정책을 전용하게 놔뒀으며 진보당 지지자들이 사회 체제의 변화 필요성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이끌지 못했다. 월리스는 단순히 3번째 후보, 좀더 나은 후보였다.(10)
좌파에서는 많은 이가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과 같은 생각을 했다. 그들이 변화를 기대한 것은 1930년대 위대한 운동 덕분에 불붙었으며 2차 대전 이후 파시스트 권력의 종말과 미국 국내의 위대한 파업 물결과 함께 다시 불붙었다. 대부분의 급진주의자들은 반동이 그렇게 강하고 빠르게 나타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저항을 중단했으나, 많은 이들은 그 망령을 포기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실업자들의 거리 행진, 노동자들의 점거농성 파업,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 파시즘과 전쟁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집회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많은 것은 1948년 선거에 대해 비슷한 실망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었다. 1948년에 창간된 내셔널 가디언(The National Guardian)은 이런 환경을 언론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었으며, 이런 분위기는 먼슬리 리뷰에서 더 지적이며 분석적으로 가지쳤다.
6.
이런 종류의 의견 곧 사회주의적이지만 독립적이고 정당 때문에 제한 받지 않는 의견이 있다는 것은 10년 전이었다면 생각하기 어려웠다. 이는, 1930년대와 1940년대 말의 차이가 단지 뉴딜 연합의 붕괴가 아니라 공산당이 좌파에 끼치는 영향이 약해진 점이라는 사실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상당히 실질적이던 공산당은 1949년에도 여전히 의미 있었다. 특히 한 때 거대했던 사민당의 찌꺼기와 비교하면 더 그렇다. 그러나 자체 오류와 이에 대한 심한 공격 때문에, 공산당은 당원의 출혈을 겪었다. 소수파는 점점 더 다루기 힘든 존재가 됐다. 먼슬리 리뷰 초기에는 독자가 다양했지만, 많은 먼슬리 리뷰의 독자와 이 잡지에 글쓰는 이들은 공산당이 앞장선 인민전선의 베테랑들이었다. 또 그들은 가끔 이 역사를 자랑스럽게 되돌아본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 지적으로 독립된 좌파의 시대가 왔다는 후버만과 스위지의 견해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물론 동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11)
후버만과 스위지가 보기에, 공산당은 사회주의에 대한 충분한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고, 사회주의자의 정세인식을 너무 자주 잃어버렸고, 자신의 주장을 완전하고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잘못된 버릇이 있었다. 이들의 관점은, 간단히 말하면 언론인 I. F. 스톤(Stone)이 먼슬리 리뷰에 표현한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스톤은 먼슬리 리뷰에 "공산주의자들을 거의 언제나 우스꽝스런 구경거리로 만드는 바보처럼 보이기, 백치 같은 행동, 분열, 이교도 사냥"에 대한 싫증을 표현했다.(12)
그러나 스톤은 이런 말을 하면서 공산당을 진보정당에서 일소할 것을 제의하는 이들에게는 반대했다. 이것은 먼슬리 리뷰가 자연스럽게 도출하는 주장 곧 빨갱이 탄압 반대와 맥이 같은 것이다. 먼슬리 리뷰는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화하려는 정부에 반대했으며, 개별 공산주의자에 대한 편견적인 판결에 저항했으며, 정치적 관계 하나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정치적 연대나 교육기관 설립을 금지하는 것에 맞서 싸웠다. 그 예로, 먼슬리 리뷰의 지면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열려 있었다.(13)
이것은 적어도 단순한 정치적 태도가 아니라 새로운 좌파 문화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였다. 이 잡지 초기 포럼의 첫머리 사설 "좌파의 협동"에서, 편집인들은 빨갱이 사냥과 어떤 좌파세력을 비판의 대상에서 빼주는 것 모두를 거부했다. 협동을 통일과 구별한 뒤 이들은 미국 좌파의 "자본주의 으뜸의 요새를 포위하는 역사적 임무"는 누구에게나 겸손할 것을 요구한다고 썼다. 이 겸손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 비판을 받아들이며, 실수를 인정하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려는 최소한의 의지"다.(14)
7.
협동은 단순히 먼슬리 리뷰의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이 잡지의 초기 집단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은 교우와 상호관련성의 비상한 정신을 말한다.(15)
공동체적 감수성을 누가 만들었나? 두 편집인과 함께, 우리는 두 명의 여성 이야기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초기부터 편집진에 참여했고 생이 끝날 때까지 먼슬리 리뷰에 남으려 했다. 그들은 거트루드 헬러 후버만(Gertrude Heller Huberman)(1902-1965)와 시빌 헌팅턴 메이(Sybil Huntington May)(1893-1978)다.
거트는 12명의 남매 가운데 막내였는데, 부모와 함께 3살에 러시아에서 이민 왔으며, 경리와 구독자 관리 담당이었다. 1925년 리오와 결혼했으며 이 일을 맡기 전에는 학교 선생님이었고 산업민주주의동맹(the League for Industrial Democracy)의 부기 담당이었으며, 노동진보본부(the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의 롱아일랜드 보육학교 교육부 관리자였다. 처음 3년 동안 이 잡지는, 그린위치 빌리지의 배로 거리에 있는 두 사람(후버 부부)의 3층 아파트와 마사 포도원에 있는 그들의 여름 별장에서 발행됐다. 이 때문에 여름별장 차고가 임시 사무실이 되기도 했다. 매달 거트는 잡지가 가득 든 가방을 우체국에 끌고 갔다.(16)
배서 단과대학을 졸업한 시빌 메이는 리오가 그린위치 빌리지의 도농실험학교에서 잠시 가르칠 때 리오를 처음 만났다. 당시 메이는 그 학교에 오랫동안 있었다. 다른 이들보다 나이가 많은 시빌은 먼슬리 리뷰가 창설되자 교사 일을 그만두고 사무기록 관리자와 통신 담당 겸 실수라고는 없는 교열자로 일했다. 그이는 거의 30년 동안 이 잡지를 실수가 사실상 없는 잡지로 지켰다.(17)
다른 말로 하면, 초기 편집진 곧 리오, 폴, 거트, 시빌은 절친한 친구 사이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같은 성향의 집단이 모였다. 콜롬비아대학과 하버드대학의 급진적인 대학원생들과 모임이 구성됐고 오스카 레인지(Oskar Lange), 마이클 캘리키(Michael Kalecki), 맥스 워너(Max Werner), 세드릭 벨프리지(Cedric Belfrage), 제임스 에론슨(James Aronson), 배로스 던햄(Barrows Dunham) 같은 좌파의 지성인, 거물들과 모임이 구성됐다.(18)
"편집자의 노트" 칼럼이 표지 안쪽 면과 맨 뒤 안쪽 면에 고정적으로 실렸는데, 편집국에서는 이를 "재치 있는 말" 약어로 NFTE라고 불렀다. 이 칼럼은 이 연합체에 초점을 맞추고 그를 확장하기 위해 터놓고 쓰는 형식을 띄었다. 편집인들과 친구들의 최근 소식이, 독자들에게 정기구독을 권하고 독자의 친구들에게도 권하라는 내용과 각 지역 도서관들에게 먼슬리 리뷰의 팜플렛과 책을 구입하라고 권하는 내용의 강한 권고와 함께 실렸다. 재치 있는 말들은 몇 년 동안 다른 좌파집단의 행사와 출판물에 대한 이 잡지의 일치운동적 연대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집단은 캐시 부딘의 친구들부터 젊은 사회주의자들까지 다양했다.
1950~1951년 사이 겨울에 이 잡지 지지기반은 먼슬리 리뷰 동인 설립과 함께 더 틀을 갖췄다. 동인은 기부자, 자원봉사자, 시빌 메이가 오랫동안 조율한 정치 동맹으로 구성됐다. 이 집단의 첫 우두머리는 헨리 프래트 페이차일드(Henry Pratt Fairchild)(1880~1956)가 맡았다. 그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뉴욕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쳤으며 `수백만을 위한 경제학(Economics for the Millions)'(1940) 등을 썼다. 기금 회계 담당 앨레인 오스틴(Aleine Austin)은 1940년대 정치의 시대 출신 젊은이 집단을 대표했다. 앤디오크 단과대학을 졸업하고 테네시주의 하이랜더스쿨을 다닌 오스틴은 전쟁기간 전국해운노조에서 후버만을 도왔으며 1947년 콜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또 대중역사서인 `노동 이야기(The Labor Story)'(1949)를 썼으며, 그 후에 박사학위를 받고 몇몇 기관에서 미국역사를 가르쳤다.(19)
먼슬리 리뷰 동인은 꼭 필요한 자금원일 뿐 아니라 친목 모임의 구심점이었다. 한 강좌가 1951년 3월 시작됐는데, 이 때는 조슈아 쿠니츠(Joshua Kunitz)가 "사회주의자 문화의 이해를 향하여"를 거론한 때다. 1958년 가장 인기 있는 토론은 "지금 세계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주제로 영국 사회주의자 G. D. H. 콜(Cole)이 강연한 것이다. 이 토론은 사회주의자 C. 라이트 밀스가 사회를 맡았고 1100명이 참석했다. 1961년 3월에는 유명한 영국 경제학자 조언 로빈슨(Joan Robinson)이 "반미주의"에 대해 연설했다.
이런 것이 먼슬리 리뷰를 처음부터 지탱해온 노력과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가운데는 젊은이와 나이든 이가 섞여 있고 익히 아는 사람과 놀랄만한 사람이 함께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집단적인 기획이었으며, 그 정신은 공동 편집작업에 반영되어 있다. 이 공동 편집작업은 이 잡지를 특징짓는 것이다.(언제나 공동 편집됐다) 또 이 정신은 다른 방식 곧 아직도 잡지 사무실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열리는 갈색봉지(미국에선 간단한 점심거리를 갈색 종이봉지에 담아 다니는 것이 흔함 = 옮긴이) 점심에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사무실에서 편집진은 지구 구석구석에서 이날 뉴욕을 우연히 방문한 어떤 손님이라도 맞는다.
이 모두를 설명하는 다른 방법도 있다. 스위지, 후버만, 바론 - 1968년 이후 해리 매그도프(Harry Magdoff)도 똑같은 비중이며, 오늘날은 엘런 메익신스 우드(Ellen Meiksins Wood)도 같은데 - 이 세 사람은 먼슬리 리뷰에서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잡지의 생각과 임무와 범위를 정교하게 하는 것을 책임졌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각종 사업이 제대로 되도록 해준 가족이 없었다면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가족은 친구들, 편집진, 위원회 구성원, 기부자, 기고자, 지지자, 독자, 정기구독자들이다.
시간이 가면서 초기 소집단에 새로운 사람들이 참여했고 새롭게 이어나갔다. 일부는 스쳐 지나갔고 일부는 계속 남았다. 이들의 경험 전체 곧 친교, 갈등, 재능, 불운, 반감, 욕구 등은 다음과 같은 기억 속에서만 엿볼 수 있다. 1962년 대학 여름 방학 기간에 나는 최저 임금을 받고 사소한 일을 하는 조건으로 먼슬리 리뷰에 들어갔다. 내 기억으로 주로 한 일은 책을 우편으로 보내고 송장을 보내는 것 등이었는데, 나는 그러면서 사무실의 분위기에서 묻어나는 마르크스주의의 지혜에 함빡 젖었다. (리오의 아랫입술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담배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에도 흠뻑 젖었을 것이다.) 가끔 폴 스위지가 사무실에 나타나면 나는 욕망으로 말을 잊었다. 폴이 과연 젊은 인턴 사원의 머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기미라도 느꼈을까 싶다. 물론 나 또한 들어내지 않았지만.(20)
편집진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이들 가운데 보비 오티즈(Bobbye Ortiz)(1918~1990)와 쥬디 루번(Judy Ruben)(1931~1997)이 있다. 오티즈는 아칸사스의 중류 유대인 가정 출신이며, 1933년 버나드에 다니기 위해 집을 떠났다. 여기서 이 여성은 반전, 반파시즘 집단에 참여했고 시카고대학으로 옮길 때까지 이 활동을 계속했다. 시카고에서는 철강노동자들의 조직화 운동을 지원했다. 1939년부터 1950년대까지 이 여성은 멕시코와 영국에 살았으며 미국으로 돌아와 1957년부터 후버만의 보좌역으로 일했다. 1968년부터 1983년까지 준편집인으로 있으면서 이 잡지를 남미 및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 조류와 연결하는 일을 도왔다. 루번은 먼슬리 리뷰와 가깝고 그래서 리오, 시빌과 친구 사이인 좌파 가정에서 자라서 1974년에 합류했다. 그이는 자신의 임무 범위를 넘어 더 넓은 밖의 세계에서 이 기관의 대사가 됐다.(21)
간단히 말하면, 먼슬리 리뷰는 밑에서부터 일어난 중요한 활동의 산물인 것이다. 이 활동의 상당 부분은 여성들이 맡았지만, 이 사실은 이 전체 기획을 설명하는 역사적 접근, 언론적 접근에서 무시됐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자원자부터 준편집인까지 많은 이들은 중요한 일을 맡음으로써 이 잡지의 역사에 기여했다. 그들이 한 일은 계속 울려대는 전화 받기, 원고 읽기, 광고와 판촉활동에 참여하기, 편지에 답장을 쓰기, 잡지 편집하기, 위원회에 참석하기 등이다.(22)
8.
편집진의 단결과 도덕적 헌신이 얼마나 컸든 간에, 1949년은 미국에서 독립계 사회주의 잡지를 창간하기 어려운 때였다. 이 잡지의 정치관 - "사회주의적이며 마르크스주의적이며 공산주의가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를 포함해 누구와도 목표와 방법에 합의하면 협력할 용의가 있는" - 그것은 빨갱이 위협이 온 나라의 상상력 속에 퍼져있을 때에 이 잡지를 예외적인 것으로 만들었다.(23)
1949년의 몇 가지 일을 고려해 보라. 워싱턴대학 평의원들은 1월에 공산주의 배경이 있다고 의심받는 3명의 교수를 해고하는 데 표를 던졌다. (이 때 스위지는 교수위원회에서 마르크스주의 전문가 자격으로 증언했다.) 캘리포니아대학에서는 6월에 평의원들이 대학 교수들에게 충성서약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스미스법 재판이 1월부터 10월까지 열렸고, 거기서 11명의 공산당 지도자가 정부의 폭력적 전복을 "가르치고 옹호하기로" 공모했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전직 외무부(국무부) 관리인 앨저 히스(Alger Hiss)가 전 공산당원 위태커 챔버스(Whittaker Chambers)에게 비밀 문서를 넘겨줬다는 혐의로 소송에 휘말린 과정에서 위증 혐의로 법정에 서자 여론은 집단 광기 수준에 이르렀다. 픽스킬을 벗어나 뉴욕시의 허드슨강 위쪽에서 1949년 9월 폴 로버슨(Paul Robeson)의 음악회에 참석했다가 나오던 사람들이 "유태인 새끼" "더러운 껌둥이" "모스크바 흠모자"를 외치면 1마일이나 늘어선 폭도들에게 맞아 피를 흘렸다. 많은 먼슬리 리뷰 기고자들이 자기를 "한 대학의 사회과학 전공 교수"식으로 표현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49년 9월호에는 모든 기고자들이 익명으로 쓰기를 원했다.
억압은 1949년 여름 매카시주의의 모양을 완전히 드러냈다. 이 때는 중국과 소련을 휩쓴 혁명이 핵폭탄을 터뜨린 때다. 1950년 웨스트버지니아의 윌링에서 한 연설에서 조세프 매카시(Joseph McCarthy) 상원의원은 중국을 "잃은" 원인은 루즈벨트와 트루먼 정부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한 때문이라고 비난하려고 애썼다. 이교도 사냥이 이어졌다. 이는 깊어지는 냉전, 미국 제국을 확장하려는 시도, 노동과 뉴딜로 얻은 이익을 과거 수준으로 다시 떨어뜨리려는 산업계의 욕망, 전통적인 두 당의 대결구도 덕분에 더욱 기승을 부렸다.(24)
반공 정서 확대 시도와 그것의 실제적인 효과는 사회의 모든 구석에서 미국 좌파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급진적인 반대의견을 "전복"의 기미로 더럽힘으로써, 노조, 정부, 출판계, 영화, 텔레비전, 교육에서 힘을 제거하자는 것이다. 모든 급진주의자들은 생존 자체를 두려워하도록 내밀렸다. 빨갱이 탄압의 포괄적인 성격과 그것의 상징적인 의식은 공산당에 참여한 적도 없는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에게 찾아든 공격에서 잘 나타난다.
1953년 리오 후버만은 매카시의 정부 운영에 관한 상원 조사 소위원회에 소환됐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책에 대해 조사 받았다. 조사 대상 책의 상당 부분은 외무부가 도서관 비치를 위해 구입했다. 다른 많은 증인들이 하듯이,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기 않을 헌법의 권리에 호소하는 대신 그는 공산당원인 적이 전혀 없다는 말 이외에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이는 헌법의 언론의 자유 부분에 기초한 행위였다. 그의 태도는 `브리티시 뉴 스테이츠먼 앤드 네이션(the British New Statesman and Nation)'에게 칭찬을 받았다.
이런 일은 아주 드문 것이다. 만약 전례가 있다면 말이다. 헌법 제5 수정조항을 내세우는 증인들에게 상원의원들은 모독 발언이라고 위협했다. 의원들은 자신들의 법적인 권한을 넘어섬으로써 헌법 제1 수정조항을 훼손한다는 공격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점에 후버만의 힘과 중요성이 있다. 정부 소속이든 대학이나 사기업 고용인이든, 솔직하게 말했다고 해서 자신의 고용이 위협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단자, 특히 마르크스주의자의 언론 자유를 공개적으로 내세우려면 용기가 필요하지만 후버만은 누군가 시작해야 할 일이라고 느꼈다.(25)
스위지가 심문자들에게 나간 때는 1954년, 진보당에 관여한 것과 뉴햄프셔대학에서 강사 일을 한 것에 대해 뉴햄프셔 검찰총장에게 소환된 뒤다. 스위지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은 정부의 심문 대상이 안된다는 점을 들어 답변을 거부했다. 그는 카운티 차원에서 패소해 구속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법 절차에 따라 항소가 진행됨으로써 3년의 보석 결정으로 석방됐다. 1957년 미국 대법원은 기술적인 이유로 유죄판결을 뒤집었다. 이는 매카시 시대의 최악 상황을 개선하는 연이은 판결의 하나다.(26)
9.
매카시 시대의 의도하지 않은 유산 하나가 먼슬리 리뷰 출판부의 탄생이다. 출판부는 I. F. 스톤이 한국전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를 내줄 출판사를 찾지 못한 것에서 시작됐다. 유머와 신랄한 비판을 섞어 쓴 이 글은 한국전이, 당시도 진행되고 있었는데, 아무런 선동 없이 북한이 남침한 단순한 전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으로는 침묵을 통해 충동했으며, 군사적으로는 수세적인 편제로 침략을 불러들이고, 마지막으로 국경에서 사소한 자극을 함으로써 시작됐다"고 내비쳤다. 또 이 전쟁의 정확한 근원에 대한 진실은 "친 공산주의자와 반공산주의자간의 논쟁의 어두움 속에 감춰져 있다"고 내비쳤다.(27)
스톤은 1933년부터 1939년까지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에서 일했으며 1940년에서 1946년까지는 `더 네이션'의 워싱턴특파원이었다. 또 1942년부터 1952년까지는 `피엠'(PM), `더 스타(The Star)', `데일리 컴패스(the Daily Compass)' 등 뉴욕 지역 일간지에 글을 썼다. 풍부한 경험과 능력과 기존 독자가 있는 언론인이 자신의 책을 출판할 수 없었다는 것은 문화계에서 냉전이 영하로 떨어졌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스위지와 후버만은 이 책이 햇빛을 봐야한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한국전의 감춰진 역사(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1952)는 먼슬리 리뷰 출판부가 낸 첫 번째 책이 됐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또 다른 아시아의 전쟁으로 양심이 형성됐으며 냉전시대 정설의 지혜를 덜 받아들일 학생들과 학자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 스톤의 것 같은 책들은 비판적 학문의 숨은 고전으로 명성을 얻었다. 스톤의 책은 이 책을 낸 출판사에도 틀을 형성해줬다. 먼슬리 리뷰 출판부는 초기 15년 동안 스위지와 후버만의 밑바탕이 되는 작품 외에도 주류 출판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미국 외교정책 비판서들을 출판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책에는 하비 오코너(Harvey O'Connor)의 `석유제국(The Empire of Oil)'(1955), 폴 바론의 `성장의 정치경제학(The Political Economy of Growth)'(1957),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William Appleman Williams)의 `미국, 쿠바, 카스트로(The United States, Cuba, and Castro)'(1963) 등이 포함된다.
추방된 책들이 주 출판물이었다는 점이 먼슬리 리뷰 출판부가 출판의 관점에서 볼 때 "패배자"였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윌리엄 힌턴(William Hinton)이 쓴 `판션(Fanshen)'을 보자. 힌턴은 1947년부터 1953년까지 중국에서 살았는데, 처음에는 국제연합 관계자로 일했다. 1949년 혁명 이후 그는 농촌의 토지 개혁을 목격하고 1천쪽 이상을 메모했다. 그가 매카시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 귀국하자, 그의 메모를 세관이 즉각 압수했다. 오랜 법정 싸움 끝에 힌턴은 1958년 메모를 되찾았고 곧바로 필라델피아에서 트럭 수리공으로 일하면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책을 1964년 초 모두 썼지만 3년 동안 보스턴과 뉴욕의 무역 출판사들에게 보여주고 퇴짜를 맞았다. 몇 사람은 솔직하게 책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해줬다. 그가 이 글을 먼슬리 리뷰 출판부에 넘겨준 뒤, 양장본은 품절 됐다. (그렇게 되자) 빈티지(Vintage)가 페이퍼백의 출판권을 힌튼과 먼슬리 리뷰에게 저작권료를 절반씩 주는 조건으로 샀다. 빈티지는 20만권이나 팔았고 이 책은 아직도 캘리포니아대학 출판부에서 나오고 있다.(28)
1960년대 중반까지 먼슬리 리뷰 출판부는 완전한 관리자인 후버만이 감독했다. 하지만 규모가 커지고 리오가 건강이 나빠지면서 그와 스위지는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섰다. 1967년 자신들이 찾던 사람을 드디어 발견했다. 해리 브레이버먼(Harry Braverman)(1920-1976)이다. 그전 7년 동안 그는 뉴욕의 그로브 프레스에서 편집인, 부사장, 총관리자를 거치며 성장했다. 브룩클린에서 나서 성장한 그는 조선 및 철강업에서 노동자로 일한 경력이 있다. 그는 그 때 노조조직책이었고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사회주의노동자당(the Socialist Workers Party)의 당원으로 트로츠키주의자였던 그는 버트 코크런(Bert Cochran)이 이끄는 노조운동가로 주로 구성된 소모임에 참여했다. 이 모임이 1953년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갈라선 이후 그는 이 모임이 해체된 1960년까지 기관지 `미국 사회주의자'를 편집했다. (먼슬리 리뷰와 `미국 사회주의자(the American Socialist)'는 1958년 7/8월호 "미국의 노동 현실(American Labor Today)"을 공동으로 낸 적도 있다.) 노동계급과 사회주의 경험의 깊이 덕분에 브레이버먼은 자신의 역작 `노동과 독점자본(Labor and Monopoly Capital)'(1974)을 쓸 수 있었다. 이 책은 관리자들의 통제와 노동현장에서 기술이 자리잡을 여지를 없애기를 훌륭하게 비판했는데 먼슬리 리뷰 출판부 전체 기간 내내 잘 나가는 책이 됐다.(29)
브레이버먼은 10년 동안 먼슬리 리뷰 출판부를 이끌면서 창조적인 특징을 찍었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니콜라이 부카린(Nikolai Bukharin), 칼 코쉬(Karl Korsch) 같은 이들의 마르크스주의 고전을 번역해 출판하고 영향력 있는 영어판 "소총"을 출판하면서 전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급진적 책 출판사가 된 것이다. 이런 소총에는 앤드리 군더 프랭크(Andre Gunder Frank)의 `자본주의와 라틴아메리카의 저개발(Capitalism and Underdevelopment in Latin America)'(1967),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쿠바혁명전 회고록(Reminiscences of the Cuban Revolutionary War)'(1968), 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의 `마르크스 경제이론(Marxist Economic Theory)'(2권 짜리, 1970), 크와메 느크루마(Kwame Nkrumah)의 `양심주의(Consciencism)'(1970), 다니엘 게랭(Daniel Guerin)의 `아나키즘(Anarchism)'(1971), 루이 알튀세(Louis Althusser)의 `레닌과 철학(Lenin and Philosophy)'(1971), 에임 세이세르(Aime Cesaire)의 `제국주의론(Discourse on Colonialism)'(1972),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의 `라틴아메리카의 열린 혈관(Open Veins of Latin America)'(1973), 애밀커 카브럴(Amilcar Cabral)의 `근원으로 돌아감(Return to the Source)'(1973), 사미르 아민((Samir Amin))의 `세계적 규모의 축적(Accumulation on a World Scale)'(1974), 레이너 라이터(Rayna Reiter)가 엮은 `여성 인류학을 향한 시선집(the anthology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1975), 샤를 베텔랭(Charles Bettelheim)의 `소련의 계급투쟁(Class Struggles in the USSR)'(2권 짜리, 1976) 등이 포함된다.
브레이버먼의 `미국 사회주의자' 시절 동지이며 그로브 프레스와 랜덤 하우스에서 일한 줄스 겔러(Jules Geller)(1913-1990)가 1976년 출판부 관리자 자리를 이어받아 1983년까지 일했다. 겔러 시절에 출판부는 중요한 책들을 내놨는데, 할 드레이퍼(Hal Draper)의 `칼 마르크스의 혁명이론(Karl Marx's Theory of Revolution)'(4권 짜리, 1976-1990), E. P. 톰슨(Thompson)의 `이론의 빈곤(The Poverty of Theory)'(1978), 다니엘 싱어(Daniel Singer)의 `그다니스크로 가는 길(Road to Gdansk)'(1981) 등이 그런 것들이다.
겔러를 이은 이는 수전 로스(Susan Lowes)다. 그는 1995년까지 일은 했다. 로스는 브레이버먼과 함께 그로브 프레스에서 먼슬리 리뷰 출판부로 왔으며 겔러 밑에서 실무 편집자로 일했다. 그 때 몇가지 좋은 연재물을 내놨다. 새 여성주의 총서, 모퉁이돌 총서 등이다. 그이가 책임자로 있던 시기, 먼슬리 리뷰 출판부는 명성이 높은 책들을 계속 내놨는데, 앤 스니트나우(Ann Snitnow), 크리스틴 스탠슬(Christine Stansell), 쉐런 톰슨(Sharon Thompson)이 얽은 `욕망의 힘 전집(the collection Powers of Desire)'(1983), 엘리자베스 유언(Elizabeth Ewen)의 `달러의 땅에 이민 온 여성들(Immigrant Women in the Land of Dollars)'(1985), 코널 웨스트(Cornel West)의 `마르크스 사상의 윤리적 차원(The Ethical Dimensions of Marxist Thought)'(1991),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의 `허약한 행성(The Vulnerable Planet)'(1994), `부드러운 분노의 그림자: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과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편지와 성명(Shadows of Tender Fury: The Letters and Communiques of Subcomandante Marcos and the Zapatista Army of National Liberation)'(1995) 등이 그런 것들이다.
오늘날, 먼슬리 리뷰 출판부는 상근 총 책임자가 없고, 자율적인 부서들과 편집진 공동 편집위원회가 결합해 관리하고 있다. 출판부는 지금도 먼슬리 리뷰 편집인들의 중요한 저작과 다른 능력 있는 작가들의 글을 주로 출판하고 있다. 능력 있는 작가 가운데 올해 출판물 목록에서 4명만 꼽는다면 엘런 메익신스 우드, 다니엘 싱어, 폴 불(Paul Buhle), 아돌프 리드(Adolph Reed)가 있다.
10.
출판부의 성장은 이 기관의 좀더 일반적인 사실들을 반영하고 있다. 먼슬리 리뷰는 트루먼-아이젠하워 시대를 뒤로 하고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번영했다. 심한 침체기, 상대적인 자본주의의 안정과 성장기, 정치적 침묵기, 자유주의 이념의 공감대가 지배한 10년의 시기를 견딘 뒤 먼슬리 리뷰는 옛 좌파의 붕괴와 새 좌파의 출현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를 제공했다.(30)
먼슬리 리뷰가 좀더 옛 좌파적인지 새 좌파적인지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둘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말이다. 아마도 이는 이 명칭이 어느 정도는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먼슬리 리뷰가 새 좌파에 공감하며 처음부터 새 좌파의 핵심 신조를 똑같이 갖고 있었으며, 1960년대의 운동과 사건들과 상호 작용하면서 오랜 시간동안 그 것을 더 확고히 함으로써 서로 겹쳐지는 좌파 몇 세대를 융합하는 장소를 제공한 옛 좌파 잡지라고 하는 것이 공정할 듯하다.
명백하게도 편집인, 독자, 기고가들은 옛 좌파 출신이다. 1950년대 먼슬리 리뷰 지면에 등장한 이들은 케리 맥윌리엄스(Carey McWilliams), 앤 브래든(Anne Braden), 애그니스 스메들리(Agnes Smedley), 애나 루이 스트롱(Anna Louise Strong), 에드거 스노우(Edgar Snow), 스탠리 무어(Stanley Moore), 조셉 스태러빈(Joseph Starobin) 등이며 가끔은 장 폴 사르트르같은 외국의 권위자들도 등장했다. 절충적인 독립계 급진주의자 스코트 니링(Scott Nearing)의 칼럼 "세계의 사건"이 1953년부터 1972년까지 실렸고 옛 좌파적 배경이 있는 기고가들 곧 어네트 루빈슈타인(Annette Rubinstein)과 칼 마르자니(Carl Marzani) 같은 이들도 1990년대까지 글을 계속 썼다. 물론 먼슬리 리뷰의 편집자들은 사회주의에 회의적이며 마르크스주의를 경제적 조잡함과 연결시키는 새 좌파 부류와는 다르다.(31)
반면 잡지에 몇 가지 새 좌파적 특성도 있다. 1956년 먼슬리 리뷰 편집자들은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하고 후루시초프가 스탈린의 범죄에 대해 폭로하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1955-1956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에 즉각 반응했고 후속 시민권 운동에 고무됐다. 또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W. E. B. 뒤 브와(Du Bois), 설리 그래험(Shirley Graham), 올리버 크롬웰 콕스(Oliver Cromwell Cox), 제임스(James)와 그레이스 리 보그스(Grace Lee Boggs), 콘래드 린(Conrad Lynn), 러레인 핸스베리(Lorraine Hansberry)의 글을 출판했다. 물론 1960년 말콤엑스도 인터뷰했다. 정당의 조정에서 벗어난다는 잡지의 신조는 새 좌파의 문화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또 빨갱이 사냥에 반대하고 좌파 누구든 지원한다는 신조는 전체를 끌어안는다는 신념 및 "반 반공주의" 신조와 맥이 같은 것이었다. 뒤의 두 신조는 냉전시대 자유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초기 새 좌파가 내세운 것이다.
그래서 새 좌파의 괜찮은 부문에서 이 잡지를 필독 잡지로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실로, 이 잡지가 과거 좌파 경험의 자연스런 발전인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초기 새 좌파의 핵심 인물 몇 명이 이 잡지에 글을 쓰게 된 과정은 놀라운 것이다. 스토턴 린드(Staughton Lynd),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가 먼슬리 리뷰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을 1952년이다. 사람들이 그랬을 거라고 기대한 1962년부터가 아니라 훨씬 이전인 것이다. C. 라이트 밀스는 1958년 먼슬리 리뷰에 심리학에 대해 글을 썼다. 그 뒤 2년 동안 이 잡지 편집인들은 레이몬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와 랄프 밀리밴드(Ralph Miliband)의 글을 실음으로써, 당시까지는 두 사람식 영국 사회주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미국 독서계에 둘을 소개했다. "그는 언제나 약간 떨어져 있었고, 어떤 부분에도 거의 `속하지' 않았다." E. P. 톰슨이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숨졌을 때 쓴 글이다. "그는 60년대 말 나에게 미국의 먼슬리 리뷰가 가장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했다."(32)
다른 말로 하면, 아주 초기부터 먼슬리 리뷰는 국내외 새 좌파와 연결될 수 있었다. 니나 세라노(Nina Serrano)가 회상하듯, 이 잡지는 1950년대 말에 이미 위스콘신주 매디슨에서 불어오는 변화의 한 부분이었다.
공동 편집인인 경제학자 폴 스위지는, 물론 좌파 대학생들에게 다가가기는 했지만, 대학 밖에서 말하게 됐는데도 영향력이 심대했다. 우리 대부분은 그를 만나고 헤어질 때 먼슬리 리뷰의 구독자가 되어 있었다. 그 뒤 몇년 동안 이 잡지의 글들은 자주 생동감 넘치는 토론의 중심에 있었다. (스위지의 동료 편집인은 리오 후버만이었는데, 그의 책 `사람의 세속적인 재화'는 내가 10대 때 감동을 줬다. 1960년대 그가 숨지기 몇년 전에 만났을 때 나는 참으로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을 만났다고 확신했다.)(33)
이 잡지와 젊은 급진주의자들이 만나는 지점은 대외정책이었다. 새 좌파처럼 먼슬리 리뷰는 냉전에 반대하고 뜨거운 논쟁을 벌이면서 스스로를 갖춰갔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베트남 이야기를 듣기 훨씬 전에, 또 베트남전쟁이 완전히 미국의 전쟁이 되기 전에, 편집인들은 동남아 분쟁의 방향을 정확하게 내다봤다. "우리는 반공주의가 식민주의, 다른 나라에 대한 간섭, 침략 등을 포함한 행동을 정당화한다는 태도를 취할 것인가? 이 길에는 - 이에 대해 확실히 하자 - 마침내 온 나라를 완전한 재앙으로 이끌어 가는 전쟁이 있다."(34) 마찬가지로 1960년 7/8월 특별호 "쿠바: 혁명 해부(Cuba: Anatomy of a Revolution)"에서 - 나중에 책으로도 나왔다 - 후버만과 스위지가 1959년 혁명 뒤 몇번 방문해서 이 섬나라의 변화상을 아주 빨리, 적시에 묘사했다. 쿠바가 전통적인 공산주의와 미 제국을 동시에 벗어나는 길을 대표할 여지에 흥미를 느끼는 많은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이 특별호를 필수적인 읽을거리로 여겼다.
새 10년이 모습을 드러내자, 다른 새 좌파의 이름들이 등장했다. 제임스 와인슈타인(James Weinstein)(1963), 토드 지틀린(Todd Gitlin)(1964), 칼 오길스비(Carl Ogelsby)(1966) 말이다. 나중에 우파로 돌아선 로널드 러도쉬(Ronald Radosh)와 데이비드 호로위츠(David Horowitz) 등의 글도 등장했고, 지금도 여전히 좌파의 길을 지키고 있는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의 글도 나타났다. 대중을 대상으로 지식인들이 만드는 혁명적인 사회주의 잡지로서, 먼슬리 리뷰는 새 좌파 학생들에게 호소력을 얻었다. 이런 이들은 고학력이지만, 나름의 지적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데는 보통 실패한 이들이다. 이에 대응해 먼슬리 리뷰는 자신들의 분석을 발표할 진지한 매체를 찾는 새 좌파 작가들도 끌어들였다. 실로, 새 좌파는 즉각적으로 스위지와 바론의 `독점자본'(1966)을 받아들였고, 조앤 바컨(Joanne Barkan)은 이에 대해 "표준 문서, 학습 모임에서 `모두' 읽고 토론하며 급진적인 친구들에게 권하는 책 가운데 하나"라고 썼다.(35)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노동 계급에 대한 이 잡지의 태도는 새 좌파의 태도처럼 복합적이었다. 이 주제를 먼슬리 리뷰에서 이끄는 작가들은 - 후버만, 스위지, 브레이버먼 -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전후 미국 노동계급의 보수주의와 타협했다. 물론 점차 노동계급이 급진화할 가능성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몇몇 중요한 경우 이 잡지의 작가들은 노조가 체제에 흡수됐다고 여기고, 혁명적 변화의 원천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예를 들어 이미 많이 논의된 1963년 특별호에서, 제임스 보그스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조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막을 당겼다"며 "이 노조는 너무 오래 유지하면서 유용성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또 노조가 "러시아의 노조가 러시아 정부를 위해 하는 기능과 똑같은 기능을 오늘날 수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전갈은 - 계급투쟁이 노조 밖에서 노조에 반해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 - 설득력 있는 혁명적 흑인 생산직 노동자가 제시함으로써 더욱 힘있는 것이었다.(36)
11.
미국 좌파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회주의와 혁명으로 돌아선 것은 모순적이었다. 자본주의 밑에서 해방이 불가능하다는 이성적 인식을, 무자비한 모험주의와 분파적인 동료 죽이기 경향과 결합한 것이다. 기민함과 병적임은 당시 제대로 분리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외국의 반식민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시선을 돌린 흑인 해방투쟁에 의해 부분적으로 촉진됐고 1968년의 전세계적 분출의 힘을 얻은 새로운 수준의 급진화는 먼슬리 리뷰의 성장을 더욱 촉진했다고. 많은 이들이 1968년에서 1973년 사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로 돌아섰는데, 마르크스주의가 세계적 사건을 이해하는 틀을 제공하고 저항할 수 없는 정치적 행동 지침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또 새 좌파의 조직적 붕괴는 견고한 소수 활동가들에게 좀더 진지한 마르크스적 분석과 사회주의 정치학을 찾도록 자극했다. 이 두 현상 덕분에 먼슬리 리뷰의 유료 구독 부수는 1970년 9072부로 늘었고 1977년에는 1만1500으로 꼭대기점에 이르렀다.
이 잡지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호소력을 높인 것은 부분적으로 대중의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 뿌리가 있다. 이는 더 젊은 독자들에게 좀더 세련된 제국주의 분석을 찾도록 자극했다. 미국이 왜 동남아시아에서 전쟁을 벌이는지 대답을 찾는 학생들의 욕구가 바로 해리 매그도프가 자신의 책 `제국주의 시대'(1969)에 쓴 것을 바탕으로 먼슬리 리뷰에 한 묶음의 글을 쓰도록 자극했다. 외국개입을 특정한 나라와 관련한 물질적 이해를 엄밀하게 계산한 결과로 거칠게 해석하는 것에 반대함은 물론 미국 외교정책의 경제적 바탕을 무시하는 주류에 반대하면서 매그도프는 제국주의가 (여러 대안 가운데서) 선택한 정책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본질의 한 부분이며, 전세계에 대한 투자 방안을 계속 유지하려는 욕구를 필연적으로 유발하는 국제적 틀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37)
후버만이 숨진 뒤 매그도프가 스위지와 공동 편집인이 되자, 잡지의 경제 문제 관심과 이전에 이미 인상적인 수준이던 제국주의 분석과 제3세계 문제에 대한 헌신이 더욱 강화됐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앤드리 군더 프랭크, 사미르 아민, 기타 먼슬리 리뷰와 관계하는 이들은 종속이론을 더 확대했는데, 이 이론은 폴 바론이 처음 주창했다. 그는 이를 주창하면서 제3세계가 개발이 덜 된 것은 그들이 자본주의 전 단계이거나 근대 이전 단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곧 근대 제국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북쪽의 놀라운 풍요와 남쪽의 빈곤은 무관하지 않다. 제3세계는 자본주의 체제의 필수적인 주변부이기 때문에 뒤진 것이지, 이들이 마술적인 "도약"에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뒤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혁명적인 제국 이탈만 제3세계를 저개발에서 해방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런 견해 덕분에 먼슬리 리뷰는 전세계에서 독자를 끌어들였고 명성을 얻었다. 많은 먼슬리 리뷰 독자는 앨런 영과 유사한 경험이 있다. 그는 스탠포드대학에서 바론에게 배웠으며 "남미의 좌파 그룹 어디에든지" 바론의 이름만 제시하면 "즉각적인 칭찬과 존경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38)
미국의 새 좌파들이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의 무장 투쟁을 더 인식할수록 먼슬리 리뷰가 민족해방투쟁과 혁명 전략의 원천으로 인식됐다. 영향력이 큰 문서 하나로 "혁명 내부의 혁명?(Revolution in the Revolution?)"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리지스 데브레이(Regis Debray)가 책 한권 분량으로 쓴 게릴라 전술 설명인데 1967년 여름 특집호에 처음 등장했으며 다음해 여름 특집호는 그에 대한 대단히 비판적인 반응들로 채워졌다. 잡지 편집인들의 라틴아메리카 정치 발전에 대한 평가 가운데 특히 날카로운 것은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의 당선 이후 칠레에 대한 논문이었다. - 아옌데의 취임식에는 스위지와 오티즈가 참석했다. 편집인들은, 1973년 쿠데타가 아옌데를 포함한 칠레의 좌파 전체에 대한 비극적 학살을 부르기 전에 칠레 정부에 군대에 대항할 민간 무장세력을 형성하도록 많은 이들과 함께 촉구했다.(39)
12.
20세기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던진 최대 딜레마는 소련 같은 나라의 등장일 것이다. 이런 나라는 대규모 혁명적 분출 이후 형성됐으며 계급구조, 이념, 사회조직에서 자본주의와 전혀 다르지만 노동계급 민주주의는 없었다. 먼슬리 리뷰는 이런 규정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나?
한 측면에서, 편집인들의 사회주의 개념규정은 50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됐다.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부정이며 소유관계의 철저한 변화이며, 생산의 조직적 법칙으로 작용하는 사적 이윤의 폐지다. 여기, 저기서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먼슬리 리뷰는 단호히 사민주의 개혁론의 왼쪽에 있었고 자본주의 기구, 제국주의와 정치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자멸적 타협이라며 반대했다.
먼슬리 리뷰의 사회주의 정의가 포괄적으로는 이런 식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히 성숙했다. 창간 사설 "우리가 서있는 곳"에서 편집자들은 공공이 경제를 조망할 위치를 차지하는 것과 포괄적 계획의 존재를 사회주의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어느 나라든 비판하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소련에서 1차 5개년 계획을 수립됨으로써 사회주의가 구현됐다고 믿었다. 그래서 "해가 지나면서 힘을 얻고 열기를 더하며 실제로 작동하는 사회주의 체제"라고 자신 있게 썼다.(40)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며 편집인들은 공적 소유와 계획이 사회주의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변화의 원인 하나는 1956년부터 나타난 소련에 대한 더 비판적인 태도다. 탱크가 헝가리로 밀려들어간 뒤 편집인들은 "소련이 세계 사회주의 운동에서 도덕적 지도력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고 썼다. 먼슬리 리뷰는 이를 혁명의 확대 사례로 본 미국 외무부와 공산주의자에 정확히 반대로 평가했다. 1960년대 중반에 편집인들은 소련이 탈정치화했으며 그래서 비혁명적인 사회라고 주장할 채비를 했다. 또 소련이 "한편의 정치적 관료와 경제 관리자로 구성된 지배층과 반대편의 대중 사이가 크게 벌어진" 심하게 계급이 분리된 나라라고 주장할 채비를 했다.(41)
이런 관료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에 대한 명백한 비판은 편집인들을 먼슬리 리뷰 창간호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다음과 같은 도전에 다시 직면하게 했다.
... 계획 경제는 아직 사회주의가 아니다. 이런 계획경제를 개인의 완벽한 노예화가 뒤따를 수 있다. 사회주의의 성취는 극히 어려운 사회-정치적 문제 몇 가지에 대한 해답을 요구한다. 정치, 경제 권력의 원대한 중앙집중화의 관점에서 관료주의가 전능하고 오만해지는 것을 막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하며, 그것으로 관료주의의 힘에 대항하는 민주적 대항세력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나?(42)
아인슈타인처럼 편집인들은, 특히 이 문제를 가장 광범하게 다룬 스위지는, 스위지가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 샤를 베텔랭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언급한 "실제 생산자가 자신들의 생산활동의 조건과 결과를 지배하는 사회"를 사회주의가 필요로 한다고 결론 맺게 됐다.(43)
이런 이해에 입각할 때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 체계는 과도기적이었다. 자본주의를 넘어섰지만 아직 사회주의는 아닌 것이다. 실제로 많은 것이 자본주의 쪽으로 되돌아왔다. 대표적인 것이 시장을 조절자로 보고 다시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나라 특히 쿠바와 중국이 좀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편집인들은 생각했다. 중국의 문화혁명을 편집인들은 혁명을 겪은 사회에서 떠오르는 특권 계급의 위험에 대한 모범적 대응으로 여겼다. 그들은 체 게바라를 따라서 도덕적 또는 집단적 자극을 강제와 개인적 욕심의 대안으로 보고 옹호했다.(44)
바로 이런 감성이 1970년대를 위한 전략으로 여겨진 유럽공산주의에 대한 편집자들의 비판을 자극했다. 서방의 이론 속에 자리잡고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덩의 중국 같은 나라의 전략으로 자리잡은 시장 사회주의에 반대하고, 1989년에서 1992년까지 소비에트 진영의 붕괴가 사회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주장에 저항한 것도 바로 이 감성 때문이다. 이런 감성은 또 후버만과 스위지에게 각각 다른 방식으로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반대하게 했다. 후버만은 이를 가리켜 "도덕적, 정치적, 이념적" 재난이라고 선언했다. 1982년 스위지는 폴란드의 노동자 운동 연대노조(솔리타르노스크) 탄압에 항의했다. 이 사건은 두고 "소련 진영의 공산 정권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근대 노동계급 운동의 목표로 늘 설정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완고한 계급구조의 구현인 동시에 그 구조의 지킴이"라는 점을 "의심의 그림자를 벗기면서" 증명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1989년 이 잡지 창간호의 사설 "우리가 서있는 곳"을 되돌아보면서, 스위지와 매그도프는 당시의 제안 대부분을 지지한 뒤 이런 명백한 규정을 덧붙였다. "사회주의의 잠재성을 키우고 개발하며 실현하려면 민주주의라는 말의 본래적인 의미 바로 그대로 민주적이어야 한다."(45)
이 잡지의 사회주의 평가 변천은 독자들이 이 잡지를 높이 평가하게 하는 특징 상당수를 반영한다. 특히 경험에 맞춰 변화할 수 있는 능력과 자본주의 폐지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헌신을 반영한다. 많은 독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양한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이 잡지의 장기적인 태도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먼슬리 리뷰가 공산주의 세계의 이 부분 또는 저 부분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기울어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다른 이들은 공산주의 국가와 그 나라의 정책에 대한 먼슬리 리뷰의 가장 조심스런 비판조차 정당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편집인들의 평가가 독립적이며 성실하다는 점을 의심하는 이는 드물었다.(46)
13.
무엇이 먼슬리 리뷰가 다양한 좌파와 더 넓은 집단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게 했나? 적어도 5가지 성격이 떠오른다.
첫째, 평이하고 어리석지 않은 마르크스주의다. 처음부터 먼슬리 리뷰의 논조는 중용을 지키고 신중하며 종교적 성향이라기 보다는 합리적인 것이었다. 다른 것과 구별되는 이 잡지의 지식 생산 방식 - 대학이나 정당에 의존하지 않고 자원봉사자들의 지원을 받는 기관 - 은 지면이 전문용어, 교조, 위선적인 말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유지되는 데 도움을 줬다. 정보를 제공하지만 현학적이지 않으며 사상이 세련됐지만 양식은 단순하고 신중한 명료함에 충실하면서 이 잡지는 투명함과 성실함을 추구하려 애썼다. 후버만이 1950년에 썼듯이, "정보를 밑바탕으로 하는 선동은 지속력이 있는 사회주의 개종자를 만들지만, 훈계를 바탕으로 한 선동은 그렇지 못하다."(47) 편집인들의 합리적인 성향은 마르크스주의에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마르크스주의 밖에서 작업하는 급진적 사상가들과 마르크스주의 안의 다양한 관점에 개방적인 데서 그대로 나타난다.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은, 훨씬 더 훌륭하게도, 자신들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할 용의가 있었으며, 자신들의 기대와 다른 세상에 대한 설명을 위해 종종 자신들의 관점을 수정할 용의도 있었다. 이들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한 이들조차 이들이 결코 허황되고 교조적인 동기를 고수하지 않았음은 인정할 것이다.
둘째로, 모범적인 용기다.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은 20세기 후반 내내 미국 내 반대세력의 첫 번째에 섰다. 이것에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특성이라는 힘이 필요하며, 역사적으로 공감을 유지한 정부나 운동에조차 비판적이 되는 용기가 필요하다. 전통 사회의 무자비한 비난에 맞서 50년 동안 사회주의적 원칙을 지키는 용기가 필요하다. 먼슬리 리뷰는 매카시 시대부터 레이건 시대, 소련 붕괴, "역사의 종말" 때까지 자신의 길을 지켰다. 이 잡지는 꾸준히 그리고 또 두려움 없이 배고프고 소외된 이, 자본주의와 인종주의, 기타 다른 형태의 억압에 반대하는 인류 대부분의 이익을 옹호해왔다.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재능 있고 업적을 쌓은 이 잡지의 편집인 모두는 더 쉽고 더 존경받으며 더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는 상당한 압력과 변덕스런 유행, 또 시간이 지나면서 종종 생기는 자기만족에 맞서면서 고집스럽게 헌신했다.
셋째로, 정치경제학의 기민한 실천을 꼽을 수 있다. 먼슬리 리뷰는 허버트 긴티스(Herbert Gintis)가 썼듯이 "관심 있는 독자가 미국 토착의 마르크스 경제학을 향할 수 있는" 장으로는 1960년대 중반 이전에 사실상 유일했다. 요즘도 가끔은 똑같은 것 같다. 하지만 먼슬리 리뷰의 경제 관련 글의 가치는 드물다는 데 있다기 보다는 구별되는 데 있다. 스위지, 바론, 매그도프의 훈련과 전문적 지식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가공할 만 하다. 그들의 글이 중요한 것은 단지 20세기 경제에 대한 독특한 명제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먼슬리 리뷰의 경제 관련 글은 단순히 그 종합적인 감각에서도 훌륭한 모범을 세웠다. 이런 감각은 경제 전문가들이 쉽게 빠지는 모형 만들기, 전문성, 수학적 추상화를 피하는 것이다. 물론 "합리적 선택" 이론과 자유시장이라는 교조 같은 바보스런 개념을 피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편집자들은 현실에 개입하고 통계를 잘 다루며, 경제적 주장들을 날카롭게 평가하고, 경제 현상을 사회 정치 문화의 역사적 관점에 연결시킴으로써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이론에 빠져 표류하는 것을 피했다.(48)
넷째로, 현재를 장기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순간적인 사건에 대한 평가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저작에서는 극히 어려운 도전이며 아마도 가장 어려운 것일 수도 있는데,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은 이 일에 아주 능숙했다. 그들은 이론적 변덕과 중심 응시를 피하고 역사의 장기적 관점을 키웠다. 이 잡지 목록은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진행형 평가나 다름없는 것으로 이뤄져 있다. 또 많은 경우는 영구적인 가치에 대한 설명으로 이뤄져 있다. 정책 결정자들이 경제 안정화 수단으로 군사지출 대신 사회복지 지출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 창간호의 스위지 글을 고려해 보라. 그는, 군사 지출이 지배계급에게 건전한 이익을 주며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소득을 재분배하고 노동자의 사회적 자신감을 확대하는 문제점이 전혀 없다는 점 때문에 그들에게는 완벽하게 합리적이라는 점을 간파해서 지적했다. 50년이 지난 뒤에, 이 지적은 유용한 냉전시대 국가론일 뿐 아니라 소련이라는 핑계가 사라진 뒤에도 군사지출이 너무나 높은 이유를 생생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49)
다섯째, 증명된 국제주의다. "우리가 서있는 곳"이 미국 사회주의자의 첫 번째 책임을 미국 안에서 사회주의가 번창하게 하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라고 쓰기는 했지만, 먼슬리 리뷰는 금방 전세계를 다루게 됐다. 이는 외국의 혁명적 발전에 대한 관심과 미국이 지휘하는 전후 자본주의 체제의 범위가 전세계적이라는 깨달음 때문에 촉진됐다. `타임' `라이프' `포춘'의 창립자인 헨리 루스(Henry Luce)가 1941년에 지적했듯이, 20세기는 "미국의 세기"가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먼슬리 리뷰는 단지 미국의 군사, 경제, 정치적 외국 지배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용어로 말하면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와 중동의 개발에도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이 잡지는 인디아에서 과테말라까지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체 게바라, 카를로스 푸엔테스(Carlos Fuentes),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이 잡지를 위해 쓴 글을 출판했으며, 혁명론자들이 4개 언어판을 제작하기도 했다. 4개 언어는 스페인어(1963-1970, 1977), 이탈리아어(1968-1987), 그리스어(1973-1975, 1983, 1987-1988), 독일어(1974-1975)다. 어떤 잡지도 미국의 급진주의자들에게 외국의 투쟁과 발전에 대해 알리는 기능을 이 잡지처럼 하지 못했다. 또 어떤 미국 좌파의 정기간행물도 이 잡지처럼 국제적인 명성을 얻지 못했다. 외국의 혁명가들이 먼슬리 리뷰를 종종 자신들의 잡지로 여길 정도의 인지도와 존경을 말이다.(50)
14.
이런 특징과 업적에도, 역사적인 50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는 없을 것이다. 더 오래 지속된 마르크스주의 출판물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런 것들로는 1936년에 창간된 학술 계간지 `과학과 사회'가 있다. 다른 급진적 정기간행물들을 죽인 위험요인 곧 재정 문제, 정부의 탄압, 편집자가 숨지는 일, 운동의 쇠퇴가 모두 먼슬리 리뷰를 포위했었다. 각 단계마다, 이 잡지는 크고 작은 문제에 맞서 생존을 위해 싸웠다. 또 자연스런 독자 감소 때문에 주기적으로 독자를 확충해야 했다. 주 독자층은 자주 휘청거리는 미국의 좌파였다. 매 호가 언제나 제 때에 나오지는 못했는데, 여건이 가장 좋을 때도 그랬다. 현금이 부족할 때는 종종 긴급 호소를 해야했다. 틀림없이, 먼슬리 리뷰가 지금 직면한 핵심 문제는 창간 때 직면했던 바로 그 문제 곧 생존이다.
여전히, 먼슬리 리뷰는 단지 급진적인 정기간행물이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을 위한 노아의 방주 같은 것이다. 폴 한쌍, 해리 한쌍, 후버만 한쌍과 배 한척 말이다. 이는 급진적 사회 변화에 대한 희망을 사실상 멸절시킨 이념의 물결 속에 사회주의자들이 휩쓸리지 않고 살아남게 해줬다. 먼슬리 리뷰 이야기는 이 잡지가 유지된 기간동안 미국 좌파 전체의 역사에 다름없다는 느낌이 있다. 잡지 지면에서 미국 좌파의 큰 약점 여러 가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내 파시즘의 위협에 대한 과장, 노조를 잘못됐다고 단정한 것, 먼 나라에 대한 잘못된 희망, 과장된 혁명적 판단 말이다. 좌파의 장점도 찾을 수 있다. 인종주의와 성 억압에 대한 반대, 타협 없는 국제주의, 계급 연대, 용기와 성실함, 유연성과 지성, 가장 착취당하는 이들의 이익에 대한 헌신, 완고하고 빈틈없는 분석, 평등적이고 민주적인 열망 말이다.
본사 위치 등 많은 것이 50년 동안 바뀌었다. 역설적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먼슬리 리뷰는 자본의 휘황찬 기념물인 월스트리트, 매디슨 애비뉴, 뉴욕 미드타운에서 멀리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주 옮겨다녔다. 처음에 배로 거리 66번지 후버만의 아파트를(1949-1951) 떠나서 웨스트 10번가 218번지에 자리잡았고(1951-1961), 6번 애비뉴 33번지에서 `더 네이션'과 사무실을 함께 썼다.(1961-1966) 냉혹한 맨해튼에 자리잡은 곳은 웨스트 14번가 116번지 북쪽(1966-1974), 웨스트 14번가 62번지(1974-1982), 웨스트 23번가 155번지(1982-1987) 등이다. 마지막에 머문 곳이 지금의 웨스트 27번가 122번지 건물의 10층 넓은 사무실이다. 사무실을 옮겨 다닌 것은 언제나 먼슬리 리뷰의 특징이었던 지칠 줄 모르는 개입의 은유로 볼 수도 있겠다. 이 특징은 먼슬리 리뷰가 결코 안식하지 않고 계속 살아남게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30년 동안 매그도프와 스위지의 수많은 경제 관련 글을 보자. 두 사람은 수많은 글과 책을 위해 함께 일했는데, 이 작업은 1970년대 초에 2차 대전 이후 경제호황이 막을 내린 뒤 선진 경제에 다시 찾아든 저 성장의 유형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특히 혁신적인 것은 그들이 "재정 폭발"이라고 부른 것 곧 부채와 신용, 금융 및 재정 시장이 월스트리트에서 제3 세계까지 엄청나게 확장한 것에 대한 설명이다. 두 편집인은 이런 개발을 생산 정체의 부산물 곧 자본이 출구를 찾으면서 생긴 것으로 봤다. 또 이들은 이 과정을 어느 정도는 정체에 대항하는 것이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가 점점 더 투기적이 되면서 불안정을 더욱 생산하는 과정으로 봤다. 이들이 이런 문제를 전통적인 경제 지혜와 달리 자본 축적 과정 자체 내부 문제로 자리 매겼기 때문에, 이들은 자본주의 규칙을 제거함으로써만 바로잡을 수 있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개혁은 부적당하다는 견해를 유지했다.
레이건, 부시, 클린턴으로 이어지는 시대는 편집인들의 기본적인 경제 전망 몇 가지를 확인해주는 시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는 좌파에게는 패배와 후퇴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불리함에도 먼슬리 리뷰는 참신한 생각으로 새로운 도전에 맞섰다. 예를 들면 1984년에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미국내의 신앙에 기초한 근본주의(급진주의)의 성장에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특집호 `종교와 좌파'로 대응한 것이다. 이 잡지는 산디니스타 혁명과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와 제시 잭슨의 선거유세, 세계개발의 점증하는 위기에 실질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또 몇몇 중요한 글들을 최초로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언론인 크리스토퍼 히천스(Christopher Hitchens), 반전 운동가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 과학자들인 리차드 루원틴(Richard Lewontin)과 리차드 레빈스(Richard Levins), 노동운동가 빌 플레처(Bill Fletcher)와 제인 슬로터(Jane Slaughter), 역사학자 에릭 포너(Eric Foner), 로빈 켈리(Robin D. G. Kelley), 메릴린 영(Marilyn B. Young), 사회비평가 코널 웨스트(Cornel West)와 매닝 매러블(Manning Marable), 경제학자 더그 헨우드(Doug Henwood) 등의 글이 있다.
최근에 먼슬리 리뷰는 온건하지만 뚜렷한 부활을 맞았다. 잡지의 판매 부수가 1996년 4853부로 바닥에 달했는데, 이는 20년 동안 지속된 좌파의 후퇴와 동유럽 공산 정권의 붕괴, 중도 정치와 신자유주의 경제의 명백한 승리가 축적된 결과다. 그러나 몇몇 주도적인 행동이 이 경향을 뒤집었다. 이 행동은 (1996년) 여름호부터 재정비해 자본주의와 정보시대, 전세계 노동과 환경, 농업의 새로운 약동 같은 지금 시대의 중요한 주제를 연간 기획으로 집중 탐구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먼슬리 리뷰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 잡지의 장기 전망과 일치하는 관점을 갖고 있으면서 기존 편집인들이 함께 건설적으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는 젊은 세대를 확보하려는 오랜 탐색 끝에, 스위지와 매그도프가 마르크스주의 학자이며 `계급에서 후퇴'(1986)를 쓴 엘런 메익신즈 우드를 1997년 공동 편집인에 합류하도록 요청함으로써, 먼슬리 리뷰는 새로운 편집인을 얻었다. 유료 정기구독 부수는 최근 몇 년 동안 계속 늘어, 지난해에는 1991년 이후 최고 수준인 5795부에 달했다. 이런 변화를 상징하기라도 하듯, 잡지는 1998년 표지와 판형, 글꼴을 모두 키움으로써 역사상 첫 편집개편을 시도했다.
새로운 독자, 새로운 판형, 새로운 활력, 새 편집인, 이런 변화는 오직 원칙의 연속을 강조하는 데 다소간 기여한다. 이 잡지의 창간 때 정치관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은 물론이고, 현실에 더 적합해질 수 없을 정도로 옳다. 어떤 점에서는, 스탈린주의가 불신을 받고 사민주의가 실천에서는 자본주의와 구별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좌파의 좌파로 남아있는 우리 모두는, 지금 독립된 사회주의자들이다. 전세계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개울물이 약해지고 있는 동안, 이들은, 심지어 조직적 표현에서조차, 20세기 중반의 좌파들보다 연대의 방식에서 훨씬 복합적이고 다원적이며 평등적인 장점이 있다. 미국 좌파 행동가와 사상가 대부분은 전통과 전망이 이해심 있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다른 이들과 상호작용 해야함을 인정한다. 이런 가치를 촉진하는 것이 바로 먼슬리 리뷰의 애초 목적이기 때문에, 또 자본주의와 제국의 불평등과 불안정이 여전히 깊이 있는 사회 재건설의 절박한 필요성을 야기하기 때문에, 먼슬리 리뷰가 지난 50년 동안 그랬던 것과 똑같이 다가오는 새 천년에도 전세계 해방투쟁과 연대하는 미국 마르크스주의의 깃대로 계속 봉사할 것이라고 기대할 충분하고도 넘치는 이유가 있다.
<주석> [1] Francis Otto Matthiessen (1902-1950), afflicted by a profound sense of isolation and hopelessness as a gay man and a radical in the context of deepening Cold War anti-radicalism, committed suicide in 1950. His life and work were commemorated in Monthly Review 2 (October 1950), the first of such extra-thick special issues; see also the superb appraisal by Leo Marx, "Double Consciousness and the Cultural Politics of F. O. Matthiessen," Monthly Review 34 (February 1983): 34-55. The executors of his estate honored the original pledge at the slightly reduced level of $ 4,000 in each of the remaining two years. The story of Matthiessen's crucial role was recounted by Paul Sweezy in his address at MR's thirtieth birthday celebration, May 1979, tape recording, Oral History of the American Left, Tamiment Institute, New York University.
[37] Harry Magdoff, The Age of Imperialism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69).
[38] Allen Young, Gays Under the Cuban Revolution (San Francisco: Grey Fox, 1981), 66.
[39] These editorials are collected in Paul Sweezy and Harry Magdoff, eds.,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in Chil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74).
크리스토퍼 펠프스는 먼슬리 리뷰 출판부의 편집책임자이며 `젊은 시드니 후크: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코넬대학 출판부, 1997)의 저자이다. 그는 1991년부터 먼슬리 리뷰에 글을 썼다.
원문: www.monthlyreview.org/599phelp.htm
번역: 신기섭
김로디 2016/03/05 06:57
근데 오타가 있어서요. 사소한 거지만 "세상은 얻되,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잃다가 읽다로 오타난듯요..
김로디 2016/03/05 09:16
진짜 50년 간의 미국 좌파 운동의 맥락을 훑는 듯한 글이네요. 여러 정치 풍파 속에서 노련미가 돋보이는... 특히, 다른 글인 '뉴 레프트 지의 자살'을 보고 난 후라 더 비교가 되는 것 같네염.
marishin 2016/03/09 09:19
오자를 수정했습니다. 글도 읽어주시고 오자도 지적해주시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