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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히치콕은 계급투쟁을 보여준다. part2

지하조직님의 [알프레드 히치콕은 계급투쟁을 보여준다. part1] 에 관련된 글.

 

 

다시 돌아가, 마리온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연하게 사이코패스의 모텔로 들어가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사이코" 노먼 베이츠는 계급 침략의 배경에서 보면 좀 다르게 보인다. 그는 단순한 정신이상자가 아니다. 그는 그의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환경-그가 "처분"할 수 없는 사업의 실패-에 의해 스스로 덫에 걸린다. 동시에 그는 체제의 "집행자"로써 기능한다. 이 세상의 캐시디들을 안전하게 하는 숨겨진 폭력, 책임감도 없고 그들이 좋아하는것 외에는 어떤 누구도, 어떤 것도 돌보지 않고도 라스 베가스를 소비하는 것이 가능한 숨겨진 폭력으로서 기능한다. 그는 캐시디 편에서 행동하는것 없이 캐시디 편에서 행동한다. 집행자로서, 노먼은 안성맞춤의 정신이상자이다. 정신이상자라는 것은 당신이 권위적 요구들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에게 완전히 자유롭게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살인을 할 라이센스를 갖고 있다. 그는 친구가 된다는 생각으로 저항력이 없는, 벗은 여자를 주저 없이, 제지 없이, 거리낌 없이 성폭행할 수 있다. 그의 범죄는 계급 사회의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필요한것을 훔친 마리온의 충동적 행동은 식량폭동(food riot) 처럼, 자연발생적 저항 시위와도 같다. 시위자들을 공격하는 암살단들처럼, 경찰서 지하 감옥의 고문자들 처럼, 사람들을 어떻게 해치는지 알고있는 이들 처럼, "미친" 사람들처럼 노먼은 그렇게 기능한다. 마리온은 노먼에 의해 "사라진다". 그녀는 마치 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배수구로, 늪 속으로 사라진다. 그녀는 교정된 에러이다.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는 정말 모든 것이었지만, 계급사회의 가치에 따르면, 다른 그 어떤 누구도 아니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사이코>가 여자를 죽인 사이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억압과 소외, 보이지 않는 반란에 관한 영화이다. 다시 말해, 자본의 권력과 그 체제에 저항했을때의 끔찍한 결과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반항을 하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범죄에 관한 영화이다. 이러한 현실들, 억압, 소외, 보이지 않는 반란, 자본 권력과 힘없는 노동자들은 이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 현실들이이다. 그렇다, 이 영화가 미친 사람에 관한 호러 영화라는 기존의 시각도 맞지만, 이 영화는 다른 무언가에 대한 영화라는 현실적 시각도 있다. <사이코>는 사이코이다. 왜냐하면, 이는 사회, 사회적 서열, 즉 "사이코"이기 때문이다.-Harry Braverman의 말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경과민에 걸리는 것은 정상적인것이며 사회적으로 사회의 기능적으로 당연하다." 물론 "사회"란 자본주의 계급을 이야기한다.

 

아마도 가장 명백한 계급 투쟁 영화는 히치콕의 가난한 노동자-그리고 도둑이 되는-에 관한 <누명쓴 사나이 The wrong man>일 것이다. <누명쓴 사나이>는 히치콕에게 있어서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까메오로 나오는 대신, 그는 드라마적 나레이션으로 영화를 시작한다.-그는 또한 이 영화를 위해 어떤 돈도 받지 않았다.-<누명쓴 사나이>는 불운하게도 강도로 오인을 받은 한 남자의 실화를 기초로 한다. 이후 그 남자의 삶은 파괴되었다. 주인공 매니 발레스테로 (헨리폰다 분)는 아버지의 전형이다. 책임감이 강하고, 열심히 일하며 두 아이와 아내를 부양하는 가장이며, 민감하고 친절한 뮤지션이다. 시련은 시작부터 시작되는 악몽-<새>나 <사이코>와는 다른 타입의 "호러"쇼-이다. 이 노동자와 그의 가족은하루 벌어먹고 산다. 그러나 마리온처럼 그들은 잘 대처한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치통이다. 그의 아내 로즈의 현명한 이가 경제 위기를 일으킨다. 그 흔해빠진 치과 치료비를 내기 위해 매니는 보험회사에서 돈을 빌러야만 한다. 보험회사에서-또다른 황량한 일터 장면, 신경과민인 사람들과 불행해 보이는 직원들이 있다-정신없는 직원들이 실수로 그를 조금 전 도둑질을 한 도둑으로 지목한다. 그들은 그를 심문하고, 증거를 찾아내고, 그를 구속시킬 경찰에게 전화를 한다. 재판(판사, 배심원, 검사, 변호사, 서기)을 포함해서, 최악의 시련이 시작된다. 아내의 불가피한 치과 치료비를 위한 "소액 대출"을 얻으려다, 그는 더 더욱 좁혀오는-이 영화의 끔찍한 감옥 씬들에서, 문자 그대로 좁혀온다는 말을 한다-그 자신에게 걸려든 덫을 발견한다.

 

카프카와 비교해서, 그의 악화되는 상황처럼, 치통이 있는 그의 부인도 파탄에 빠진다. 그녀는 그녀의 모든것을 비난한다. 만약 그녀가 이를 치료하려 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자신을 비난 하는가! 그녀는 비극적 결말이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어떤것도 초래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가족에게 불행을 가져왔다. 그녀의 남편이 마침내 무죄선고를 받았을때, 그녀는 과거를 돌아보며 무가치함을 느낀다. 예상외의 그녀의 평범한 노동계급의 억압적 반응은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불합리한 요소-피해자를 비난하는-를 보여준다. Braverman의 "일반화된 사회적 정신이상"이란 용어에서, 고통을 겪는 이들은 그들 자신을 비난하고 억압과 박탈의 대가를 내면화하는 상태에 놓인다. 합리적 사회에서 단지 치과 치료에 대한 걱정은 바늘이 고통을 주는것과 마찬가지 일것이다. 자본의 영역에서, 그것은 외침에 의해 발생한 눈사태 처럼, 상상하지 못한 영역의 재앙이다. 살아가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발생한 문제라고, 혹은 막을수도 회복할 수도 없는 사고라고 생각하게 되는 상태에 놓인다. 그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얘기할수 있다. 엄격함이나 단순함과는 거리가 먼 계급적 분석은 교활하며, 학계를 지배하는 접근법에 의해 애매하거나 혼란스럽기 까지 한 복잡성을 드러낸다. 자본주의에 의해 악화되거나 야기되지 않은 문제가 있는가! 아마도, 광고가 그 메세지를 넌지시 행하도록 하게 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영화는 전복적 메세지를 넌지시 드러낸다. 또한, 그저 현실 사람들의 경험인 현실 세계의 팩트들을 보여줌으로써 그 메세지를 전달한다.

 

<누명쓴 사나이>의 에필로그에서, 관객은 실제 삶에서 로즈 발라스테로가 좋아졌다는 점에 안심한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머물고 있는것은 파괴된 참상이다.-히치콕은 스스로 이 에필로그를 가짜로 여겼다. 그는 그녀가 회복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아내는 정신 이상을 보였으며 보호소에 수용되었다"라고 그는 Truffaut에게 말했으며, "그녀는 아마 지금도 그곳에 있을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누명쓴 사나이>에서, 히치콕은 로즈 발라스테로가 수용된 보호소에서의 총격씬에서 조차 리얼리즘을 위해 놀랄만한 노력을 기울인다. 히치콕은 그 장면에서 실제 의사를 출연시켰다- 가족이 충분한 돈을 갖고 있지 않을때, 그 결과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에게 비극적이 될 수 있다. 로즈의 정신 분열은 사회적 분열과 유사하다. 매니의 알리바이를 입증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는 애써서 그들을 찾아나섰지만 그들은 모두 도망가거나 죽는다. 그의 변호사는 성실했으나 일을 완수하지는 못한다. 매니의 세계에서, 사랑하는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회적 연결점-사회적 지원이 아닌-은 모두가 다른 모두로 부터 분리되는 <사이코>에서 보다도 더 없다. <사이코>에서의 예외는 마리온을 혼자 돌보는 릴라 (베라 마일스 분)이다. 그러나 <누명쓴 사나이>에서는 가족 조차 무능하다. 매니의 가족은 도와주려 노력하지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랑만으론 충분치 못한다. 매니는 우연하게-기적적으로-무죄가 된다. 이제 감옥에 갈, 무표정하며 매니와 닮은 농아인 진짜 도둑이 잡힌다. 한명의 노동자는 어쨋든 다른 누군가와 같다. 마리온이 교체될것 인것 처럼 매니는 대체될 수 있다. <누명쓴 사나이>의 노동자 사회에서, 어떤 나쁜일이 벌어질때 더 좋은 것을 갖고 있는 당신은 기적을 가질 수가 있다. 왜냐하면 당신을 위한 어떤것도 거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매카시의 암운 위에서 만들어진 <누명쓴 사나이>는-매카시는 1954년 12월에 비난을 받았다. 히치콕은 1955년에 <누명쓴 사나이> 작업에 들어갔고, 1956년에 개봉했다-잘못 지목된 사람의 아이러니, 무작위적 유사성, 혹은 평범한 존재의 무의미성이나 우연성 혹은 운명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가난'에 대한 영화이다. 또한 평범한 노동자라는 존재가 함정에 빠지는 이야기 이지만 함정수사에 관한 영화도 아니다. "카드는 (나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다"라고 매니는 말한다. 이는 계급사회에서 명백하게 사실이다. 이는 명백하게 공포 영화이지만, 그 공포가 끌어들인 것은 당신의 노동력을 팔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히치콕은 이러한 일은 누구에게나-노동력을 팔아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나-일어날수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 그의 길에서 벗어났다. 그 캐릭터들은 단순히 개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개인들이면서 동시에 개인들 그 이상이다. 그들은 사회에서의, 그들의 선택과 행위를 결정하는 사회체제에서 어떤 특정한 위치에서의 어떠한 상황을 대변한다. 그것은 그들은 특정한 인격적 특성, 욕구와 관계를 가진 개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정신분석학적으로 고립된, 그들이 살고있는 세상과 분리된 배우들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배우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히치콕의 영화들에서 두려움에의 몰두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존재라는 중요한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노동계급은 직장을 잃는다는 두려움, 취업을 하지 못한 두려움, 일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직장에서 요구하는 것들, 특에 박힌 일들과 그 일이 지루하다는 두려움, 월급 삭감, 불충분한 임금, 부족한 건강보험 그리고 부족한 연금에 대한 두려움 등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도움을 필요로 할지만 도움이 될수 없는 친척, 부양가족, 혹은 친구들을 두려워한다. 기록은 자본이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것이라는, 또한 노동계급의 고통을 돌봐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한다. 민주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에게서 방해받지 않을때, 자본은 형언하기 어려운 끔찍한 잔악함을 행한다. 이는 보통 무시되는 사실이다. 게다가 자본과 자본의 미디어는 공포, 특히 노동 계급과 다른 그룹-그리고 그들 자신의 본성-에 대항하는 하나의 그룹을 분열시키는 공포를 조성한다. (노동계급의 공포는 자본이 갖는 공포와는 질적으로 다른다. 공포는 자본에게 있어서 두번째 본성이다. 이는 자본이 전체적 영역에서 경계심을 보인다는것이 그 증거이다.) 한편,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분리시키고 제정신이 아니게 하는것은 자본의 주요한 역할이다.

 

<누명쓴 사나이>의 첫 장면은 또 다른 일터 장면이다. 매니는 활기가 넘치는 Stork Club에서 밴드 연주자이다. 그는 일할때 침울하지만 부자들은 쾌활하다. 대조는 전형적인 히치콕의 반어법이지만 여기에서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계급적 대립을 보여준다. 히치콕의 영화는 종종 유한계급이라 불릴수 있는 것들을 그린다. 그리고 그들은 전형적으로 존경을 받지 않는다. <새>에서 멜라니는 다른이들 (살기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VIP이고, 그래서 그녀는 누구에게나 어떤짓도 할수있기 때문이다. <오명>, <파괴 공작원>, <39계단>, 혹은 심지어 <의혹의 그림자>와 같은 초기 영화들에서, 부자는 종종 파시스트들이다. <현기증>에서, 이야기는 부인에게 실증을 느끼는 게빈 엘스터라는 부유한 비지니스맨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는 <의혹의 그림자>에서의 삼촌 찰리와는 달리, 그의 부인을 처리하고 그녀의 돈을 차지하길 바란다. <현기증>에서 스카티가 그가 사랑한 죽은 여자를 다시 만들어내려 노력하지만 실패-비평가들에 의해 공언되고 이론화되고 정신분석화된 터무니 없는 주제-하는 전체적 줄거리는 계급 적대 행위에서 발생한것이다.

 

사람을 처분하는것은 자본주의에서는 당연한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기증>의 토대이다. 엘스터는 그의 계급적 시각에서는 쓸모없는 한 노동자를 비도덕적으로 속인다. 마치 그가 "고용"할 다른 어떤 노동자도 쓸모없는 것 처럼. 그가 스카티를 "고용"한것은 단지 속임수가 아니다. 그것은 공격 행위이다. 스카티는 엘스터의 도구(명확하게 그가 불운한 매들린을 도구로 사용한것 처럼)로 전락한다. 이용당한 뒤에, 스카티의 대단한 의지는, 말그대로, 매들린에 대한 열망으로 타락할 것이다. 스카티는 엘스터 때문에 고통을 받을 것이다. 다른이들을 위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힘은 자본의 특징이다. 캐시디는 세금을 내지 않지만 마리온은 납부한다. 다시 돌아가, 엘스터는 (라스베가스에서의 캐시디 처럼) 단지 그가 원하는 여자를 얻는것 만이 아니라 그가 제거하기를 원하는 여자, 그의 아내, 자본의 세상에서 교환할수 있고 버릴수 있는 사람들의 재산을 차지할 것이다. 매들린의 충동적 자살은 (마리온의 충동적 도둑질과 비교해서) 일종의 절망적 항변, 로즈 발라스테로의 과장된 반응인 자기파괴를 떠올리게 하는 절망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다. 절망은 미칫짓을 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현기증>은 '자본주의'의 비극이다. 이 점이 고려되지 않으면, 스카티의 우울증과 강박증을 포함해서 그 영화에 관한 다른 모든 것들은 곡해된다.

 

이들 영화에서 개인의 문제들은 엄밀하게는 개인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계급'적 문제이다. 그 문제들은 계급 억압에 의해 발생한다.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개인의 억압이 계급과 관계가 있으며, 그것은 계급투쟁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문제들은 개인적 특이성으로 보일수 있다 (노먼의 살인적 광기는 성도착자로 다루어져 치료될 수 있고, 매니의 불행은 누군가를 닮아서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은 왜곡이다. 그것은 이러한 문제들을 야기하고, 스토리적으로 캐릭터들의 전망을 결정하는 배경을 배제한다. 이러한 왜곡은 계급적 칩략행위와는 관계되지 않은것처럼 보이는 특징들과 부합한다. 예를 들어, 히치콕이 경찰을 싫어한다-그의 영화들에서 경찰에 대한 그의 부정적 묘사-는 잘 알려진 사실은 항상 개인적 편애, 특성 혹은 개인적 특질이라고 다루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히치콕의 시각은 계급 사회에서 지배와 통제의 행위자로서의 경찰 역할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점에서, 그들은 정말 위협적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권력은 히치콕에게서 어떤 특별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 그의 마지막 영화 <가족음모>에서 조차, 히치콕은 사회의 중심인물들-그의 호

화로운 사무실의 거물 사업가와 그의 근사한 성당의 주교-을 교양없는, 심지어 불쾌하고 무례한 사람으로 그린다.-Murray Pomerance에 따르면, "우리가 히치콕에게서 항상 배우는 것은 그가 취급하는 자원을 개조하는 방법이다. 그는 그 자원들을 그가 가진 시각과 배치하는 능력,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되지 않은 반향으로 이해하고 인지하는 능력을 적용한다

 

히치콕이 계급 억압을 폭로하거나 사회주의를 지지할 의도가 없었다거나, 혹은 혁명을 외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적 성향은 아니라고 하는것은 반대에 부딪히게 될것이다. 그러한 점들은 명백하게 사실이다. 히치콕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그는 다소 리버럴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공포를 살아가기 위해 노동을 하는 이들의 실존적 두려움과 연결하는것은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어떤 공포물도 자본주의처럼 그렇게 가혹하지는 않다. 자본주의의 역사와 일상이 이를 증명한다. '자본주의'는 공포스럽다. 히치콕의 매우 전문적인 기술, 그의 일에 대한 헌신은 필연적인 계급 대립을 제시했다. 계급 대립은 쉽게 무시될수 없는 아주 강력하고 아주 명백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계급 대립을 묵살하기 위해서 특별한 교육이 시행된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는, 그리고 그가 본것, 아마도 우리가 예술가와 창작자한테 가장 많이 요구하는 것-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즉,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것을 우리가 보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사용하는 외부사회의 어떤이의 눈을 가졌다. 우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봐야만 한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시각으로 그것을 볼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실 이러한 이해의 행위는 혁명 사상의 기본이다.

 

여기에 중요한 암시가 있지만, 다음과 같이 짧은 설명으로 간단하게 다룰수 있을 뿐이다.그 암시들은 다소 간단한 질문들의 형태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왜 계급 침략이란 주제는 비평가들에게 있어서 비가시적이며, 왜 비평가들은 전형적으로 복잡한 정신분석적 혹은 후기구조적 이론들을 더 좋아하는가? 둘째, 히치콕은 계급 침략을 제시하지만 계급 침략을 보는것은 한가지이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이해하기 위해서 보는것을 벗어나 우리가 어떻게할것인지, 관객이 어떻게 할것인가? 비록 우리가 직면한 것을 계급 침략이라고 인식하지 않거나 혹은 그 시기에 발생하는 계급적 공격을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에게 제시된 계급 침략을 인지하는것 우리의 인식을 바꿔놓을 것인가? 마지막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투쟁에서 히치콕의 영화들 처럼 영화의 기능은 무엇인가? 조금더 그럴듯하게 바꾸면, 더 좋은 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술의 모든 테크닉들은 세뇌, 계급투쟁의 의미로서,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어마어마한 광고와 공적 관계가 이를 증명한다. 말하자면, 세뇌가 역전될수 있는가? 세뇌를 위한 도

구들이 자각을 위한 도구가 될수 있는가?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들을 하는것이 이에 답을 하는것 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질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것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다른 질문들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비평가들이 좀처럼 히치콕에게서 (혹은 다른 어떤 것에서) 계급 침략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는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계급 침략과 같은 일은 없다. 단지 서로 그리고 그들 스스로와의 다양한 상호작용-다양한 개인적 성격의 특징, 근심, 그리고 상태에 의해 강요된-에 몰두할 분리된 사람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계급적 분석-'우리 사회에 매일 존재하는 기본적 리얼리티'인 계급 투쟁과 적대라는 인식-이 허용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는 계급적 분석을 조금 서투르게 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에는 금기사항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인지하는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저항의 행위들을 하게 되고 저항하는 이들은 때로는 엄한 처벌을 면하기 어렵다. 학계는 집중해야 할것과 집중하지 말아야 할것에 대한 고도의 훈련을 받는다. 그들은 받아들일 만한 사상에서 벗어나는 어떤것을 탐지하는 대단한 민감성을 보여준다. 학계는 카스트 제도 처럼, 카스트 사회의 특징에 복종할 것을 강조하면서, 사회에서의 특권계급의 영역을 차지한다. 복종하라. 아니면 떠나라. 그들은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복종에 불복하는 이들은 드물다. 그러나 자유 이데올로기를 지배하게 하는 것은 그럴듯해 보인다. 특히 인식하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의 눈에는 말이다.

 

계급 침략을 보는 것은 어렵다. 이는 그것이 숨겨져 있거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것을 금기시하기 때문이다. 한번 우리가 관심을 갖게되면, 히치콕 같은 사람이 만든 영화들은 시야를 가린 학문적 분석의 흔히 존재하는 편향적 양상을 폭로한다. 그런 영화들은 다르게 보인다. 거기에는 인식의 변화가 있으며, 만약 우리가 위에서 한 질문들의 답을 찾는다면 그것은 특히 중요한 인식의 변화이다. 히치콕의 걸작중 하나인 <의혹의 그림자>가 특히 이러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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