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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감정이입

그 유명한 Alan Moore 의 Watchmen 을 최근에 킨들 버전으로 읽었다.

물론 '읽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글씨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사실 2008년 영화로 개봉되었을 때, 갑자기 영사기 고장으로 끝까지 못 봤던 안 좋은 기억이... ㅡ.ㅡ

오프닝 크레딧은 지금 돌이켜보아도 굉장했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음악을 배경으로 삽화처럼 흘러가는 왓치맨들의 성장과 은퇴와 몰락의 장면들..... 그 감독이 잭 스나이더였다는 것은 최근 '맨 오브 스틸'을 보면서 깨달았다. 나에게 그 감독은 300을 만들었던 밑도 끝도 없는 후까시 감독으로 기억되었는데, 사실 영화 왓치맨도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이것도 지나치게 액션영화 스타일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책을 다 보고나서 돌이켜보니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원작에 꽤나 충실했던 것 같다...  

 

 

킨들 버전으로 그래픽 노블을 읽은 건 처음인데, 나쁘지 않았다. 간혹 깨알같은 글씨들이 빽빽해서 책으로 볼 때는 오히려 잘 안 읽히는 대사들이 있었는데, 아이패드 화면의 가독성이 더 좋았다. 그래도 '만화책' 고유의 그 질감은 여전히 잘 안느껴진다는 단점은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작품은 정말 굉장했다... Alan Moore 짱!

이건 전혀 새로운 유형의 영웅담이었다. 여기에는 전혀 초인적이지 않은 히어로들의 등장과 몰락이 있고, 가보지 않은 대안역사가 있고, '왓치맨'을 필요로 하는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가 있었다. 각 장마다 삽입된 문서자료들, 이를테면 신문기사, 일기, 소설 등은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설명하는 새로운 방식의 오브제였고, 극중 극 형태의 코믹스 - 히어로들이 보잘것 없는 시대에는 영웅물이 아닌 해적물 코믹스가 인기를 끈다 - 의 충격적 스토리와 전개는 이야기 안팎의 긴장감을 높이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고담 시 같은 뉴욕에서 질서를 유지한 자경단은 이들 왓치맨이었고, 이 때의  질서란 가족/도덕/법질서 같은 보수주의적 가치였다. 그런데, 선출되지 않은 혹은 합법적 자격을 갖추지 않은 이들 권력에 대해서 '자유주의적' 대중들과 점점 기득권을 정립해가던 경찰은 반감을 키워가고 결국 이들은 '쓸모없고 불법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제 과거의 왓치맨들은 동성애자와 공산주의의 위협이 가득한 세계, 무질서와 방탕으로 오염된 현실을 한탄할 뿐이다. 물론 일부는 보수주의 정부의 오른팔이 되어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끌고, 리버럴한 케네디를 암살하기도 하고,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안전하게 지키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이렇게 보자면, 이들 왓치맨의 정체성은 보수주의를 수호하는 우익 야경단이 틀림없다.  

 

그런데...기묘하게도...

나는 작품을 읽는 내내, 이들 왓치맨이 한국의 70-80년대 운동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으로는 반대 (?)의 입장에 서 있을텐데도 말이다. 한 때, 정의의 이름으로 사회를 수호하던 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그러한 활동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이제는 끊임없이 과거를 추억하며 살아가거나, 정부의 손발로, 혹은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길을 도모하는 자본가로 살아가는 바로 그 지점.... 

딱히 적절한 해석은 아닌 것 같은데, 뭐 느낌은 그랬다.  작품은 각자의 경험과 관점을 반영하는 각자의 해석이 있는 것이니 뭐 틀리고 말 것은 없겠다... 

 

등장인물들 중, 가장 이상하고 또라이 같은 인간은 Adrian (이양반은 megalomania)과 닥터 맨하탄... 아드리안은 그냥 환자라 치고, 닥터 맨하탄은 진짜 우주 최강 쫌생이에 겉으로만 쿨가이... ㅡ.ㅡ

Dan은 만일 이 작품이 Batman 이나 Ironman 이었다면 브루스 웨인, 혹은 토니 스타크 급이었겠지만, 여기에서는 돈과 재능을 가진, 하지만 그냥 머뭇거리는 아자씨... 

가장 애정이 갔던 인물은 Rorschach... 아마도 작품이 로샥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의 관점으로 일련의 사건을 따라갔던 것 같기도 하고, 그의 개인사와 강인함에 대한 매료일수도 있고... 마지막 부분에서 맨하탄이 로샥을 '사라지게' 만들었을 때 정말 털썩... ㅜ.ㅜ

 

하여간...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역사를 이렇게 유기적으로 배치하면서 관계의 복잡성, 가치의 혼돈, 인간세상의 아이러니를 이리도 잘 엮어내는 작가가 또 있나 모르겠다. 그래픽노블이고 뭐고, 정말 대단한 예술작품이라는 말을 거듭거듭 하지 않을 수가 없다.   

V for Vendetta 도 역시 Alan Moore 의 작품이란다.  다른 작품들도 찾아봐야겠음...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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