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집행유예?
법정에는 눈물이 없다는 말이 있다. 냉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곳이 법정이라는 뜻이리라. 법관은 법으로 말한다고 하는데 사실 그렇게만 법이 집행되면 좋을 것 같기도 하지만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래서 양형에 있어 사정을 참작하게 되고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형량에 경중을 두게 된다. 눈물이 흐르는 법정을 만들 수 있는 여지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관의 자의에 의해 좌우되는 법정은 존재의 가치를 잃고 만다. 법의 눈물은 그 단호함 옆에 배치되어야 하는 것이지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법보다 권력과 돈이 양형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다면 세상은 법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쫓게 된다. 그리하여 정의는 실종되고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금언은 쪽박을 차고 법정 밖으로 밀려난다.
정몽구와 김승연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판사들은 법의 정의를 실현하기 보다는 "국가의 경제"를 걱정하는데 몰두했다. 일반의 상식으로라면 이런 류의 파렴치범들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이 오히려 국가신용도를 높이는데 더욱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러나 법관의 상식은 정 반대다. 재벌 회장님을 처벌하면 국가 경제가 위태로워진다는 보다 높은 차원의 발상들을 한국 법관들은 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정몽구와 김승연은 집행유예라는 법의 아량을 받게 된다.
그 반대편에서, 벼랑끝에서 절규하던 사람들은 단호한 법의 심판을 받는다. 또는 법의 사각지대에서 법의 보호로부터 소외당한다. 이동권쟁취를 위해 거리로 나왔던 장애인들은 엄청난 벌금고지서를 부여안고 애를 태운다. 그저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달라는 단순한 요구를 들고 나왔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불법파업과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처벌된다. 거기엔 추호의 망설임도 없는 법정의 엄정함이 도사리고 있다.
법관 뿐만이 아니다. 집회현장에는 무수한 전의경들을 보내 불법행위 차단의 의지를 보이는 경찰은 철거촌 현장에서 벌어지는 폭력사태에 대해선 별로 개의치 않는다.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이 있음에도 '구속사유 아니다'는 말을 하는 경찰에게 묻고 싶은 것은 도대체 니들이 생각하는 구속사유, 즉 범죄(폭행 또는 상해)의 구성요건이 뭐냐는 거다. 그거 법전에 다 나와있는 이야기 아닌가? 경찰이 들고다니는 형법전은 '대~한민국 형법전'이 아니란 말인가?
아주머니 한 분이 거구의 용역깡패에게 주먹으로 구타당하고 있다. 주변에 있던 아주머니들은 질려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다. 이 용역깡패들, 부른 넘이 누군지 다 알고 있는 상황이고 그넘들 족치면 이게 어떤 넘들인지 다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구속사유가 아니'라니? 어떻게 해야 이 양아치들을 구속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니 애들에게 "돈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가르칠 수가 있을까? 무슨 소리! 돈이 세상의 전부다. 돈만 있으면 뭔 짓을 해도 집행유예 정도로 끝날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용역깡패들에게 주어 터져도 하소연할 곳도 없다. 안 죽으면 다행이다.
요즘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다보니 도대체 내가 왜 법을 공부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법이 뭔 소용있나? 차라리 돈을 벌어볼까? 그게 낫지 않을까?
현대차 수장 정몽구가 집행유예를 선고 받던 날, 현대차 간부들은 만세 삼창을 외쳤겠지만 보통 시민들은 무력감에 시달린 하루였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어느 한 개인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다고 배웠거늘, 어째서 늘상 재벌들의 죄는 윤리적인 이슈를 무시하고 경제적 이슈를 들먹이며 축소되는 것일까. 재벌들의 이러한 경제적 악행을 묵인하는 사법부의 침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영국의 경제지인 FT(파이낸셜 타임즈의 약어)는 이러한 재벌들의 치외법권적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