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카게 살자~!"

별로 블로깅하고싶지는 않았던 주젠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이번에 유신 당시 긴조관련 판결을 내린 법관들의 명단을 공개한 것에 대한 설왕설래가 그것이다. 왜 이 주제로 블로깅을 하고싶지 않았냐 하면, 이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당연한 것을 하는데 굳이 이래 저래 말을 덧붙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실은 블로깅을 하고싶다 하고싶지 않다의 문제가 아니라 할 필요성을 못느꼈던 거다.

 

점심 째지게 먹고 잠깐 틈을 내어 이곳 저곳 둘러보다보니 이 주제와 관련해 일정한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 예상 했던 대로 과거정권과의 끈을 통해 부귀영화를 누렸거나 그 옆에서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었거나 내지는 그 떡고물 얻어먹은 넘들과 쬐끔이라도 커넥션이 있거나 한 측은 죄다 명단공개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인 입장. 다른 측에서는 당연히 명단공개해야하며 더 나가서는 당시 그러한 판결을 내린 사람들에 대해 심판까지도 필요하다는 주장.

 

나치치하 프랑스의 부역자들을 어떻게 처단했느냐를 거론하면서 유신시대 긴조판사들에 대한 처단을 주장하고싶지는 않다. 다만, 그들의 이름을 널리 널리 알려서 차후 인민들이 법률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될 수 있는 한 이들을 찾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그건 그렇고...

 

명단공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이것 저것 찾다보니 묘한 글 하나를 보게 된다. 풀네임 "박근혜를 지지하는 애국시민단체의 모임", 줄여서 "박애단"이라는 단체의 카페에 이와 관련된 글이 하나 올라와 있는데, 간단명료하면서도 아주 명확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있어 행인의 관심대상이 되었다. 참고로, 이 박애단은 행인이 재미로 순례하는 우익사이트 중 하나다.

 

"긴급조치 판사 '명단공개'의 파장"이라는 제목의 글인데 아마도 이번 사건에 대한 '박애단'의 공식 입장인듯 하다. 글을 다 볼 필요는 없는데, 이 짧은 글 안에서 보여주는 이들의 혼란한 정신상태는 행인에게 또다른 "분석의 재미"를 맛보게 한다.

 

이들은 "실정법에 도전하려면 법관을 포기하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수십년이 지난 지금 책임논란을 확대하려면 악법도 법이라는 법언을 부정하는 부동의 가치판단이 선행돼야 한다"고 선언한다. 아주 멋있는 말인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히 뜯어보면 이정도 아전인수를 하기 위해선 낯짝이 상당히 두꺼워야함을 알 수 있다.

 

당시 긴조판사들이 "긴조위반사범"들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실정법"은 긴급조치만이 있었던 게 아니다. 1975년 5월 13일부터 발효된 긴급조치 제9호를 보자.

 

제1조 다음 각호의 행위를 금한다.

가. 류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

나. 집회, 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전파수단이나 문서, 도화,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청원, 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다. 학교당국의 지도, 감독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의례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 시위 또는 정치관여행위

라.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제7조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한다. 미수에 그치거나 예비 또는 음모한 자도 또한 같다.

 

제8조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금, 압수 또는 수색할 수 있다.

 

제12조 국방부장관은 서울특별시장, 부산시장 또는 도지사로부터 치안질서 유지를 위한 병력출동의 요청을 받은 때에는 이에 응하여 지원할 수 있다.

 

제일 중요하게 살펴보아야할 부분은 제1조 각목의 사항들이다. 예컨대, 어떤 엿장사가 "박정희는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했다가 제1조가목 위반 혐의 즉, 유언비어 날조, 유포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법정에 끌려왔다고 해보자. 판사는 어떤 판결을 할 수 있을까?

 

지금 "그 때 실정법이 그랬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법관이나 이를 옹호하는 분들, 이 규정을 잘 보시기 바란다. 이 규정에 따라 판사는 "박정희는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엿장수의 발언에 대해 언제나 1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할 수밖에 없을까?

 

제 정신 박힌 판사라면, "박정희는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발언이 단지 엿장수 맘대로 나온 개인적인 소회일 뿐이며 이를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한 행위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더 똑똑한 판사라면 이런 말을 했다고 엿장수를 잡아온 수사기관 종사자들에게 "여러분들의 닭짓이 법정을 모독하고 있다"는 충고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엿장수에게 징역 2년이라는 선고를 내린 어떤 법관은 '실정법'이 그러했으므로 어쩔 수 없다는 닭소리를 계속 해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닭소리에 부응한 '박애단'같은 수구집단은 법관이 지 밥그릇을 위해선 '실정법'을 지킬 수밖에 없었겠지 않았냐는 닭같은 변호를 해댄다. 도대체 '실정법'의 해석과 그에 따른 판단을 태엽감긴 인형마냥 태엽 감아논 만큼만 해버리는 판사는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공부를 했던 걸까, 아니면 손바닥 부비는 연습을 했던 걸까?

 

자꾸 실정법 운운하는 것에 대해 결단주의의 문제점이나 사법소극주의의 한계 등 어려운 이야기를 마구 꺼내면서 어쩌구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거 필요 없다. 그냥 당시 '실정법' 법조문만 봐도 그 때 판사들의 문제가 뭔지 알 수 있으니까.

 

게다가 박애단이 이야기하는 "악법도 법이라는 법언을 부정하는 부동의 가치판단이 선행돼야"한다는 주장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이 논리에 따르면 "악법도 법"이라는 것은 일종의 가치판단이다. 그리고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악법도 법"이다. 따라서 '실정법'이 악법이라도 법은 법이며, 이를 지키려고 했던 판사들의 행동은 법을 지킨 것이므로 정당한 것이 된다. 이 논리를 깨려면 우선 "악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가치전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박애단의 말씀이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악법은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널리널리 퍼진 시대적 배경이 바로 박정희 유신정권 당시인데, 불쌍한 소크라테스는 실제 그런 이빨은 깐 적이 없다는 것이 이미 90년대 중반에 학술논문들을 통해 증명되었고, 결국 "악법도 법"이라는 논리는 소크라테스의 가면을 쓴 박정희의 말씀이었다는 것.

 

"악법도 법"이라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악법도 법이니까 지켜라라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런 법을 지킬 수 없다면 뒤집어 엎으라는 것. 전자를 주장할 수 있는 자들은 그 악법에 의해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자들이다. 반면 후자를 주장하는 자들은 그 악법에 의해 피해만을 입는 사람들이고.

 

위의 긴급조치 각 규정들을 보라. 저걸 지켜서 이익을 얻는 자는 누굴까? 전시도 아닌데 군대를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고, 단지 말 한마디 잘 못했다는 이유로 최하 1년 이상의 징역을 살아야 하고, 적법절차를 무시한 채 테러범도 아닌 사람들을 영장도 없이 압수, 수색, 체포할 수 있도록 한 저 규정들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은 오직 박정희와 그 수족들 밖에 없다.

 

다른 인민들은? 그저 입 닥치고 눈치껏 알아서 기어야 한다. 자유고 나발이고 필요 없다. 개기면 죽음 뿐이다. 1년 빵에 들어가 사는 것은 별 일이 아닐 정도다. 그 와중에 연좌제로 인해 가족이 고생해야 하고 재수 없으면 혹독한 고문이 뒤따를 수도 있다. 김홍신에게 달려가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꿰매달라고 통사정을 해야할 상황이 된 거다.

 

이런 말같지도 않은 '실정법'에 걸터앉아 자신의 부귀영화를 꾀했던 법관들을 변호하기 위해 "악법도 법"이라는 박정희식 논법을 강조하는 것은 박애단의 출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순간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지만, 이런 꼴같잖은 말을 공공연하게 내뱉고 있는 이들을 보면 남한 사회에서 파시즘이 부활할 날도 머지 않았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긴급조치 각 규정들을 들여다보면 볼 수록 박정희에게 향수를 가진 사람들의 사고구조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런 내용의 긴조를 발동하는 정권, 이건 아무리 봐도 파시스트다. 아무리 봐도 독재정권이며 아무리 봐도 인권이나 인민의 자유 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들이다. 이 시대로 회귀하고 싶어서 박정희를 그리워하나?

 

그 밑에서 빌어붙어 잘 먹고 잘 살아왔던 법관들... 언젠가는 이렇게 이름이 밝혀지면서 치욕을 당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박정희 시대가 영구불변 계속 되리라고 생각했을까? 화무십일홍이나 권불십년이란 말은 들어보지 못했던가?

 

어쨌든 이번 사건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상기한 사실은...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거다. 언제 뭔 일로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지 모른다. 민폐끼치면서 산 넘, 반드시 그 댓가를 받게 되어있는 거다. 행인아... 착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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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1 13:58 2007/02/0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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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 길어- 프린트프린트;;
    법을 공부하는 행인님이 있어 행복한 당고-

  2. 당고/ 프린트까정... 죄송...

  3. 박애단 압박스럽네요ㅎㅎ 어쨋든 결론은 차카게 삽시다*^^*

  4. 차카게 사는 것과 더불어 똑똑하게도 삽시다 ㅋ
    어제 밤엔,
    보름달 좀 보라는 소리였고
    또 형이 칭찬해마지 않던 아침 감기기운의 제 목소리가 감기안녕- 덕으로 인하야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는 보고였음.
    한글 번역 싫어효 OTL

  5. NeoPool/ 박애단 처음 봤을 때 혼자 키득거리기도 했습니다. ㅎㅎ

    정양/ 오오... 보름달... 항상 달님한테 뭔가를 비는 행인인데. ㅎㅎ
    감기기운 떨어진 것은 아주 좋은 현상이고...
    한글번역... ㅋㅋ 죄송... 똑똑하질 못해서리... ^^;;;

  6. 열심히 읽는데.. 막 상상이 되는거에요..
    검찰들한테 판사가 "여러분들의 닭짓이 법정을 모독하고 있다" 라고 추궁하는 모습이...ㅋㅋㅋ

  7. pilory/ ^^ 검찰한테는 못하지만 이런 식으로 잼있게 판결을 하는 판사님들이 가끔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