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는 너는 누군가?

#0

그래, 그 때가 아마 고등학교 2학년 가을 무렵이었던 거 같다. 비닐코팅된 주민등록증을 마빡에 붙이고 교실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그리곤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 쉑덜, 다 민쯩 까~!"

 

그렇게 국민됨을 기념하였고, 누군가는 함께 축하씩이나 해줬고, 누군가는 그것을 부러워 했다. 그리고 며칠 후부터 만17세의 고삐리는 학교 근처 소주집에 "민쯩"을 맡기고 외상술을 먹을 수 있었다. 그땐 그랬다.

 

#1

1995년, 나이 먹을만큼 먹고 대학이란 곳에 들어가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것도 아마 가을 쯤이었던 듯 하다. 친구 집들이에 가서 밤을 꼬박 새우며 고돌이를 쳤다. 거의 타짜수준인 녀석들인지라 돈 따먹을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재미로 놀았던 건데 이상하게 뒷패가 짝짝 붙는다. 차비 빼고도 꽤 쏠쏠한 수입이 있었다. 의기양양 자취방으로 귀가...

 

동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났나 했더니 방문이 뜯겨 있고 방 바닥에는 커다란 식칼이 놓여 있었다. 도둑이 들었더란다. 빈집털이였던가, 다행히 사람 없을 때 일이 터져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누구라도 다쳤더라면 어떻게 할 뻔 했는가?

 

뭐 없어진 거 찾아보라는 동생들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어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곱게 모셔놨던 카메라 가방이 보이질 않는다. 당시 시가로 거의 500만원 상당에 달하는, 행인의 공장생활, 사회생활 7년 동안에 남긴 전 재산이었다. 그걸 도둑님께서 통째로 들고 가신 게다.

 

방바닥에 있던 약 20만원 상당의 동전이 들어 있는 PET병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무거워서 못 가져 갔던 걸까?

 

암튼 그 이후 카메라만 보면 그 생각이 난다. 손 때 묻은 카메라들이 눈 앞에 어른 거린다. 그래서 지금까지 마음만 있고 카메라를 사지 못하고 있다...(사실은 돈이 없다)

 

#2

자취방 바로 앞에는 파출소가 있었다. 화양동파출소...

 

신고를 하러 갔다. 사건 신고를 받은 경찰의 표정이 매우 찝찝하다. 경찰관 둘을 대동하고 자취방으로 갔다. 아무 것도 건드리지 말라고 동생들에게 얘기해놨기 때문에 현장은 제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자취방에는 옆 방에 사는 아주머니도 와 있었다.

 

범행에 사용된 식칼은 옆 방 사는 아주머니의 것이었다. 아주머니 집도 털렸다. 귀중품이 몇 가지 없어졌단다. 경찰은 대충 둘러보더니 가서 신고서를 작성하란다.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현장의 증거물이었던 식칼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거다. 이거 증거물인데 안 가져 가느냐고 묻자 그런 거 필요 없단다.

 

파출소에서 신고서를 작성했다. 아까웠던 카메라 이름들과 렌즈들과 기타 중요 부속물들을 주욱 기입하고 나자 경찰이 파일에 끼워 넣는다. 그리곤 가보란다. 증거물에 있는 지문 같은 거 조사하지 않냐고 물어봤다. 경찰의 말이 가관이다.

 

그거 애들이 한 짓이다.

지문 조회해봐야 나오지도 않는다.

신고는 받겠지만 카메라 찾을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럼 뭐하러 신고 받았나? 지문감식조차 하지 않으면서 무슨 수사를 하나? 수사 하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질문을 했더니 이 경찰들 갈수록 더한다.

 

아저씨가 수사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린데, 얘들 벌써 튀었다.(그걸 모르나?)

애들이라 수집된 지문도 없다.(지문이 문젠가? 현장조사도 그렇게 엉망으로 하면서)

장물 신고라도 되면 그 때 알려 주겠다.(지들은 암 것도 하지 않겠다는 거 아닌가?)

 

카메라만 아까울 뿐이었다.

 

#3

한참 지문날인 반대운동에 열을 올리던 2001년, 그 때도 가을이었다. 평소 행형관련해서 특별한 업적을 쌓고 있는 형법 교수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교도소에서 지문을 위조해 돈을 빼돌린 사건이 있었다는 거다. 사건의 정황에 대해선 별로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아무튼 그 당시 들었던 지문위조의 방식은 상상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지문 위조 방식은 바로 껌종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교도소에서는 돈을 수령한다던지 물품을 인도받는다던지 할 때, 수형인의 지문을 요구한다. 지문날인을 하지 않으면 아예 돈이나 물품 자체를 받지 못하는 거다. 그런데 이 와중에 누군가가 어떤 수형인의 지문을 위조하여 돈과 물품을 가로챘다는 거다.

 

그 방식은 아주 간단하다. 일단 껌 속포장지를 꺼낸다. 은박지와 하얀 코팅지를 잘 분리한다. 은박지와 붙어 있던 코팅지의 한쪽 면을 지문이 찍혀 있는 문서에 대고 문지른다. 잘 문지르면 지문이 그대로 코팅지에 찍혀 나온다.

 

다시 이 코팅지를 다른 문서에 대고 문지른다. 그러면 먼저 찍혀있었던 문서의 지문과 거의 유사한 지문이 다른 문서에 찍히는 거다. 이 사건이 발각되면서 해당 교도소가 발칵 뒤집혔단다. 흥미로운 사건이기에 교수님께 그 사건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부탁했으나 지금까지 받지 못하고 있다.

 

#4

한겨레 신문에 껌종이로 위조되는 지문에 대해 기사가 떴다. 기사에 따르면 껌종이 지문위조는 애들 장난 거리도 되지 않는다. 이 외에도 석고로 지문을 본떠 실리콘으로 옮기기, 동판과 화학약품을 사용해 지문을 본뜨는 방법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소개되고 있다.

 

문서위조사건으로 인한 법정다툼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대검 과학수사과는 문서의 지문이 본인의 지문이라고 했단다. 위조방식을 밝혀낸 전문가는 같은 문서의 지문에 대해 위조된 것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자, 어떤 결론이 나올 것인가?

 

이미 미국은 2002년 초에 지문의 법정 증거능력을 제한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물론, 그런 판결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테러방지한다는 미명하에 다른 나라 사람들 지문을 무차별 수집하고 있지만 서도...

 

당시 지문의 증거능력에 의문을 제기한 미국 판사는 "지문은 주관적이고,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으며, 실수할 확률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범죄현장의 지문과 피고인의 지문이 어느 정도 합치해야 동일인의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고 했다.

 

하긴 지문에 대해 무오류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타당한지는 처음부터 의문이다. 다른 모든 것 역시 마찬가지다. DNA라고 해서 다를까...

 

#5

헌법재판소가 2005년 5월에 지문날인제도를 합헌으로 결정한 것은 차라리 희극이다. 헌재의 결정문은 아무리 봐도 소설이다. 그것도 가상소설... 날아오는 '북괴'의 미사일을 지문으로 막아라! 이게 지금 말이 되는가?

 

경찰에 있는 한 동생녀석, 이런 소리를 한다.

 

"형, 사고 치더라도 지문만 남기지 마요. 그럼 절대 안 잡혀!"

 

이게 만17세 이상 전국민 지문날인제도를 두고 있는 남한사회의 현 주소다. 전국민의 지문을 찍어서 얻는 효용은 과연 뭔가? 한국 검경은 이상하게 '과학적 수사'라는 것을 지들이 앉아서 편하게 수사하는 것으로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오직 수사의 편의를 위해서 전 국민 지문을 수집하고 유전자정보를 수집하려 한다. 그럴바에야 검찰이나 경찰을 둘 필요가 있나? 아무라도 자리에 앉혀 놓고 데이터베이스만 훑어보게 하면 될 일을...

 

그렇게 내 지문을 가져간 자들, 나를 알고 있나?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나 자신도 모르는 나를 니들은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 알량한 지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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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9 11:55 2006/09/1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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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민등록과 지문에 관해서 현재 조사, 공부 중인게...그걸로 뭐 좀 써야해서리 아하하 ^^; 그러고보니 지문날인반대연대였던가요? 거기 활동도 하셨던 걸로 안다는 >_<

  2. 행인님.. 지난 번 점심 고마웠어요. 그 날 당에서 회의비를 받았는데 (무려 5만원!!!) 화악~ 깨는 것이.. 글쎄 회의비 수령 확인 서식에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하게 되어 있더라는...ㅡ.ㅡ 아마 나중에 세금과 관련한 행정문제 때문에 그런 서식을 사용하는 거 같은데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그러니까)... 그래도 당이라면.. 뭔가 설명이라도 한 마디 붙여놓는게 어떨까 싶었어요...

  3. 에밀리오/ 지문날인 반대연대 활동에 뜸한 요즘은 열심히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에게 항상 미안합니다. 원내에서 하루 속히 지문날인에 관한 논의를 일으켜야 하는데...

    홍실이/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하도록 하는 것은 선관위의 지침과 정당법 등 관련법률 때문입니다. 회의비 수령증 같은 곳에 그러한 말을 집어 넣도록 제안하겠습니다.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