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발이

수염에 고드름이 열려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는 것으로 선비의 지조는 형상화된다. 물론 행인은 당장 얼어죽지 않기 위해 곁불 아니라 아예 화로를 끌어 안을지도 모른다. 선비되기는 글렀나보다...

 

어문학자인 고 이희승 선생이 남산골 샌님, 즉 딸깍발이를 이야기하면서 선비의 지조를 이야기할 때는 비록 가난에 쩔었으되 그 신심을 변치 않던 고인들의 풍모를 숭상하였음이다.

 

이희승은 이 딸깍발이의 지지리 궁상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두 볼이 야윌 대로 야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에는 양 볼의 가죽이 입 안에서 서로 맞닿을 지경이요, 콧날은 날카롭게 오똑 서서 꾀와 이지만이 내발릴 대로 발려 있고, 사철 없이 말간 콧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진다."

 

먹은 것이 없으니 살이 찔리 만무하다. 게다가 어린 아이들처럼 허구한 날 콧물을 질질 흘린다. 그래도 어르신의 체모를 살리느라 담배모금이나마 빨아 대는데, 연기를 빨 때마다 볼이 쏙쏙 들어가는 모양새가 뼉다구에 거죽만 씌운 모양새다.

 

이 딸깍발이들, 궁상떠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글줄이나 읽을 줄 아는 것 외에 먹고 사는 것에 전혀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희승은 계속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런 친구들은 집안 살림살이와는 아랑곳 없다. 가다가 굴뚝에 연기를 내는 것도, 안으로서 그 부인이 전당을 잡히든지 빚을 내든지, 이웃에서 꾸어 오든지 하여 겨우 연명이나 하는 것이다. ... 청렴개결(淸廉介潔)을 생명으로 삼는 선비로서 재물을 알아서는 안 된다. 어찌 감히 이해를 따지고 가릴 것이랴. 오직 예의, 염치가 있을 뿐이다. 인과 의속에 살다가 인과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이 떳떳하다."

 

부인이 무슨 죄냐... 선비고 나발이고 나같으면 당장 이혼이다. 허나, 어찌 되었건 인과 의를 따르는 것 하나만큼은 평가해줄만 하다. 이희승 역시 딸깍발이들의 생활에 있어 무능한 일면까지 미화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꼬장꼬장한 기개만큼은 본받을만 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실 선비의 길이 어찌 그리 쉽겠는가? 행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말 중에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있다. 대학과 중용에 나오는 이야긴데, 말 그대로 혼자 있을 때조차 그 신실함을 지킬 것을 말하는 거다. 이게 말처럼 쉬워야 말이지...

 

일단 정신무장에 있어서는 딸깍발이가 되기 진작에 어려웠음을 자각한 행인, 한 때 다른 곳에 눈을 돌렸다. 무술이다. 물론 어릴적 이야기다.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도장도 다니고 체육관도 기웃거리고 했는데, 진득하지 못한 성격이라 일가를 이루는 것은 애저녁에 때려 치고 그 겉멋에만 취했었다.

 

그러다가 관심이 갔던 종목이 '경당'이라는 무예였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24반 무예인데, 한 때 두고 두고 십수회독을 한 바 있는 장길산이라는 소설에서 묘사된 무술장면이 실은 작가 황석영이 무예도보통지를 숙독하고 응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엄혹한 군사독재시절에 쌍무기수였던 어떤 사람이 감옥 안에서 빗자루를 들고 재현한 전통무예가 바로 이 24반 무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흥미는 더욱 진진해졌다.

 

허나, 이 게으름의 극단을 달리는 행인이 뭐 별 수 있겠는가? 그냥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 알고 '경당'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이 '경당'을 다시 생각케 한 사건이 터졌으니, 바로 민주노동당 신임 당기위원장 인선사태다. 이번에 물의를 일으킨 당사자가 바로 '경당'의 창시자, 24반 무예의 복원자이자 그 유명한 쌍무기수 임동규였다.

 

사퇴한 임동규 전 당기위원장(출처 : 당 홈페이지)

 

민족경제학자 박현채와의 인연이 화제가 되면서 얼마전 언론사 지면을 장식하기도 했던 이 사람. 통혁당 재건사건, 남민전 사건으로 두 번의 무기 징역을 선고받아 일명 '쌍무기수'로 통했던 이 사람이 민주노동당의 신임 당기위원장이 되었던 거다.

 

그런데, 이 분이 그동안 해왔던 모습을 보면 이번 인선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게 된다. 임동규는 민주노동당원으로서 광주지역에서 활동을 했는데, 그 와중에 친여적 활동을 병행해왔다. 그는 경당의 홈페이지에 꾸준히 정치관련 글을 쓰면서 노무현 정부를 옹호하는 발언을 해왔다.

 

더 재밌는 것은 지난 황우석 사태 당시 임동규는 당의 방침과는 전혀 반대로 황우석을 민족적 영웅으로 추켜 세우면서 황우석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마치 반민족주의자인냥 매도했다.

 

"황우석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서 그동안의 민주 민족운동의 모든 성과들을 날치기 당해 버렸다는 허탈감에 빠지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현실적 이해관계에 얽히고 설킨 국내의 기득권 세력과 그와 연결된 그 몸통의 실체조차 파악할 수 없는 그 힘에 밀려 세기적 영웅을 사기꾼으로 매도하면서 연구의 계속조차 못하게 하는 그런 어이없는 현실 앞에 경악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운운...

 

그러더니 결국 신임 당기위원장이 되자 마자 반한나라당 연대를 다시 천명하기도 했다. 이 지긋지긋한 비지론의 망령이여... 반한나라당 연대의 위험성은 바로 '적의 적은 동지'라는 부당전제의 오류를 합리화시키는 데 있다. 즉, 한나라당과 동류인, 아니 실제로는 한나라당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회전체를 수구로 몰아부치고 있는 노무현과 열우당을 마치 민중진영이 함께 해야할 집단으로 미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가치관의 혼란이 일어나는 것일까? 한 때 그를 보면서 '딸깍발이'란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은 행인의 착각이었던 것인가?

 

임동규가 미국에서 했던 강연 중 이런 내용이 있다.

 

"선비는 재물에 의리를 팔지 않고, 죽음을 보더라도 지조를 바꾸지 않으며 무거운 솥을 끌고 맹수가 후려치더라도 그 용기를 헤아리지 않는다. 지난 날을 후회하지 않고 장래의 일을 예측하지 않으며, 잘못된 말을 되풀이하지 않고, 뜬 소문을 추적하지 않으며, 그 위엄을 잃지 않고, 그 책모를 연습하지 않는다. 그 홀로서기를 이와 같이 한다."

 

예기에 나오는 이야기란다. 이런 강연을 했던 분이 어째 그렇게 세류에 영합하고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잘못된 말을 자꾸 반복했던 걸까?

 

퇴계의 명언이라는 "思無邪 毋不敬 毋自欺 愼其獨", 즉 "삿된 것을 생각지 말고, 불경하지 말고,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홀로 있을 때 신실하라"라는 말인 즉슨, 바로 딸깍발이정신 그 자체를 일른 말이리라. 선비되기를 포기한 행인이라면 모를까, 예기를 들어 선비정신을 이야기할 정도의 임동규 선비라면 그 "홀로서기"를 이야기할 때 신독의 무서움을 몰라서 그러지는 않았으리라.

 

임동규는 스스로 민주노동당 당기위원장을 사퇴했다. 사퇴의 변은 아주 간단하다.

 

"위 사람은 2006. 8. 20.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외람되게 당기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당해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사료되어 사퇴하고자 합니다"

 

물론 본인이 사퇴한다고 하여 이 사태가 그대로 마무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평당원들을 중심으로 해당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의 일은 여하히 하더라도 다시 평당원으로 돌아간 임동규 당원에게서 예전에 느꼈던 딸깍발이의 정신을 보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참으로 암담한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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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5 02:43 2006/09/05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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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뉴스는 보았는데, 결국 사퇴로 결말지어졌군요.자기 자리를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지언데...

  2. 이 양반은 노무현을 위해 일편단심, 딸깍발이의 정신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죠..존경받아 마땅할 듯..
    그런 일편단심을 위해 민주노동당도 확실하게 노무현편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아예 민주노동당 대표로 출마하실 일이지..ㅎㅎ

  3. 아주 예전에 ... 전O협이라는 단체에서 ... 의장님 의장님 우리 의장님이니 옹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던 것에 학을 땐 적이 있는데 ... 쩝 ... 이 분도 다물군의 영광을 부르짖는 주몽이라는 TV 속의 상상의 세계에 너무 몰입한 것 같습니다.

    참 ... 이 분들 볼 때마다 솔직히 짠합니다. 그들이 뚜벅뚜벅 걸어온 길은 정말 안스럽지만 ... ... 결국, 김구의 망령이예요. 박정희, 김구, 이승만의 망령이 한국이라는 도시를 배회하고 있어요 ... ...

  4. 극우 혹은 우파의 이슈인 민족문제를, 나름 좌파 들이 이야기하고, 이야기 해야하는 현실이, 난감할 때가 있어요. 난감하죠.

  5. 전김/ 자기 자리 찾는 것이 젤 어렵던데요... ㅜㅜ

    산오리/ 그런 차원에서 딸깍발이를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요... 이런 분들은 그냥 솔직하게 열우당으로 가주시는 것이 아름답죠. 왜 안 가고 이렇게 속을 썩일까나...

    손윤/ "옹립" 그 단어 지금도 계속 이어집니다. ㅋㅋ 암튼 남한사회가 망령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 망령들의 오묘한 조합이 또 이해하기 힘든 사회현상을 낳고 있구요.

    박노인/ 그러게 말입니다. 물론 좌파라고 민족이슈를 이야기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이정도 되면 이건 완전 우파의 논리지 좌파의 논리는 아니거든요... 저 역시 난감합니다...

  6. 결국 사퇴했군요. 전엔 짜증나서 당게에 거의 안갔거든요. 요즘은 가끔 가보는데 전보다는 많이 좋아진 것도 같고, 민노당 내부사정이야 짜증나긴 하는데 재미?도 있어서 한참을 보게 되더군요. 아무것도 모르고 걍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게 낫다 싶기도 하다가 가끔 궁금해서 당게에 가보면 재미는 있는데 동시에 우울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