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영웅이 많다

황우석 교수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놓고 누군가가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심성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영웅은 없을 수록 좋다는 행인과 같은 입장에서라면 몰라도 종교에 빠지거나 황박에 빠지는 사람들의 심리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볼 여지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소시민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세계를 뒤흔들 가능성도 없고, 역사에 뻑적지근할 만큼 이름을 남길 가능성도 없다. 그러나 영웅은 그걸 해준다. 그 영웅과 자신을 동화시킴으로서 소시민은 대리만족을 얻을 뿐만 아니라 영웅의 영웅적 족적에 자신이 일부 동참했음을 자부한다. 남이 알아주건 말건 간에.

 

이 영웅은 특정한 이해관계와 결합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특히 '조국과 민족'의 이해관계에 이 영웅께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판단이 들 경우 해당 국가와 민족의 구성원들에 의해 절대적 지지를 받을 수도 있다. 박정희 신도들에게 박정희는 조국과 민족을 반만년만에 굶주림에서 구원하시고 세계적 선진국의 대열로 입성할 기초를 다듬어주신 초인류적 영웅이다. 유신교 교주 박정희는 그래서 사후에도 2대 교주 박근혜에 의해 신성화된다. 그 밑에 뉴라이트 전도사, 조선일보 전도사 등등 무궁무진한 포교인력을 갖춘 채.

 

황우석 교수 역시 잘 하면 그런 반열에 오를지도 모르겠다. 광화문 앞에 모여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촛불집회를 열던 사람들에게 황우석 교수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기적을 준비하던 인물이요, 이 열악한 땅에 33조원의 부를 가져다 줄 영웅이었다. 졸지에 안티세력들에 의해 고난을 받으사 지금 곤두박질을 쳤으나 앞으로 화려하게 부활하시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일 분으로 그들은 믿고 있다.

 

"처음으로 제가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만든 분입니다"라는 한 신도의 고백은 가슴이 미어질 정도다. 그동안 대한민국이 이 분에게 어떤 자부심을 심어주었는지 단 한구절로 요약된다. 황교수가 나타나기 전까지 대한민국은 이분에게 눈꼽만큼도 자부심 가질만한 것을 해주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 땅의 국민들, 이렇게 불쌍하게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질구질한 국가는 공허한 구호로 헛된 자부심을 채워주는데 급급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국기에 대한 맹세.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이렇게 되어있는 국기에 대한 맹세. 황우석 교수로 인해 대한민국에 태어났음을 처음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이분은 교사다. 50줄에 든 이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애국조회때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셨거나 하도록 학생들에게 시켜왔으리라. 그런데, 그런 분조차 쥐뿔이나 자랑스러운 거 하나도 없었단다. 즉, "자랑스러운 태극기"는 그냥 시키니까 하는 소리일 뿐 개코나 한번도 태극기가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다는 신앙고백이다.

 

그것 뿐일까?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이렇게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이 있다. 50줄에 들어선 이분, 역시나 국민교육헌장 외워야만 점수주는 시대에 교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그 직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오셨으리라. 직업상 어쩔 수 없이 학생들에게 국민교육 헌장을 외우도록 했던 시대에 교직생활을 하신 분이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그런 헌장 외우도록 시킬 위치에 계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이 분 조상의 빛난 얼이고 나발이고 그런 것에 자랑스러운 적 한 번도 없었단다.

 

사실, 이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심리상태의 본 모습일 수도 있다. 먹고 살기 좋아졌다고는 하나 빈부의 격차는 오히려 증가하고, 21세기 대명천지에 굶어죽는 인간들이 속출하며, 직업이 없어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이 무릇 기하고, 살길 막막하여 생을 버리는 사람들이 또 얼마인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돈은 널렸다고 하는데 내 손에 쥐어지는 돈은 한 푼도 없는 사람들의 상실감이라는 거 이거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개뿔이나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울 이유가 한 개도 없는 거다. 이 와중에 혜성처럼 나타나 뭔가 보여준 황우석 교수에게 관심은 집중된다. 그리고 순간 국민영웅으로 탈바꿈되어 추종세력들에게 둘러싸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잃어버렸던 희망이라는 놈을 황우석 교수를 통해 되찾았으며, 구원의 손길이 그의 안광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고 조석으로 시간맞춰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워봐야 손톱만큼도 가슴에 와닿지 않던 자랑스러움이 황우석 교수로 인해 가슴 구석 구석 모세혈관에 피가 차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던 거다.

 

그런데, 이런 측면에서 행인은 유달리 자랑스러운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87년 6월 항쟁 당시 시청앞 광장과 서울역 광장, 명동 거리에서 있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은 아직도 감동과 흥분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96년 연말 노동법 날치기 저지투쟁 때 그 추운 겨울, 거리거리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아직도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남들 다 손 떼고 떠나갈 때 끝까지 남아서 지금까지도 지문날인 철폐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영웅? 그 거리를 메웠던 그 사람들이 내겐 모두 영웅이다. 국가의 부당한 강요를 거부하고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는 지문날인 거부자들이 내겐 영웅이다. 그들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고 그들이 내가 신뢰해야할 사람들이다. 그렇게 많은 영웅을 가지고 있는 행인에게는 그래서 한 사람의 영웅이라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두려운 존재다. 게다가 조국과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허구성은 경멸의 대상이 될 뿐이다.

 

태극기 앞에서 그 태극기가 자랑스럽다고 허구한 날 신앙고백을 해봐야 남는 것은 공허함 뿐이다. 개뿔 자랑스러운 게 뭐 있어야 자랑스럽기라도 하지. 그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영웅을 찾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가 심어준 공허한 자랑스러움부터 탈피하는 것이 중요할 듯 싶다. 진짜 자랑스러워해야하는 것은 내 주변의 사람들이고 조국이니 민족이니 이런 거창한 이야기에 앞서 삶 자체를 진지하게 궁구하며 살아가는 자세다.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행인의 모든 영웅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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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6 05:31 2006/01/16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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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6/01/16 14:58

    행인님의 [나에겐 영웅이 많다] 에 관련된 글. 순수 과학도로서, 어린시절 부유 하지못했으나 학문적인 꿈을 위한 집념어린 이력을 상기할때 터져버린 황의 단순사기는 코메디보다 더한 코메

  1. [그 거리를 메웠던 그 사람들이 내겐 모두 영웅이다. 국가의 부당한 강요를 거부하고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는 지문날인 거부자들이 내겐 영웅이다. 그들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고 그들이 내가 신뢰해야할 사람들이다] 라는 말에 감동 같은 걸 느껴서 글 잘 보고 간다고 남기구 갑니다 >_< 그 거리를 메웠던 그 사람들이 내겐 모두 영웅이다 라는 말 명심해야할거 같아요 ^^

  2.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