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꼴찌들의 반란

행인이 최홍만과 K-1에서 붙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99.999% 행인이 골로 갈 것이다. 그 큰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괴적인 펀치에 행인의 머리가 부딪치는 순간, 잘하면 사망이요 못해도 대낮에 은하수가 보이는 기적을 겪게 되리라. 다행인 것은 행인과 최홍만이 결코 링 위에서 부딪칠 일이 없다는 점이다. 아, 물론 링 밖에서도 부딪칠 없을 것으로 믿는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는 것은 그래서 신화로 남게 되고 신의 의지를 행사한 것으로 성경에 남게 된다. 거인증을 앓고 있는 골리앗의 두개골에 짱돌을 던짐으로써 심각한 충격을 주어 골로 가게 만들었다는 과학적(?) 분석도 있지만, 그 이전에 골리앗에게 개기기로 마음먹은 다윗의 의지는 높이 평가할만하다. 뭐 신이 시키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문하면 할 말 없다. 감독이 시키면 배우는 연기를 할 따름이니까.

 

오늘 새벽, 영국축구 FA컵 대회에서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프리미어쉽 2위를 달리고 있는 멘유가 5부리그 팀에게 단 한 점도 얻지 못하고 무승부로 비겼다. 토튼햄은 2부리그 하위권의 레스터시티에게 3대2로 무릎을 꿇었다. 이영표, 다비즈, 킹이 빠진 토튼햄은 2-0으로 앞서나가던 경기를 허무하게 놓쳤다. 토튼햄의 패배도 충격적이었지만 멘유의 무승부는 거의 경악을 일으키게 만들 정도였다.

 

5부리그 팀인 버튼 알비온(Burton Albion FC)의 홈구장 트렌트 피넬리 경기장에서 벌어진 멘유의 경기는 우선 몇 가지 핸디캡을 안고 시작한 경기였다.

 

첫째, 그라운드의 사정이 멘유의 선수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내지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잔디는 군데 군데 지 나고 싶은 곳에 몰려 있는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잔디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경기장은 거의 진흙창에 가까울 정도로 물기가 많았고, 배수를 이유로 경기 직전 경기장에 다량의 모래를 퍼부은 탓에 멘유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적응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둘째, 멘유의 선수들에게는 정규리그에서 사용하던 공과 상당히 다른 공을 사용해야 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명필이 붓가리냐는 말이 있지만 축구에서만큼은 매우 공을 가려야 한다. 평상시 차던 공의 반발력과 회전력 등에 자신의 감각을 맞추어 놓은 상황에서 그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공을 가지고 경기를 할 경우 평상시의 실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진다.

 

셋째, 트렌트 피넬리는 불과 6천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매우 아담한 경기장이다. 게다가 적진이었다. 그런데다가 더 재밌는 것은 관객들의 반응이다. 후반에 루니와 호나우두가 교체되어 들어올 때, 이 관객들 반응은 마치 멘유 홈팬들이 열광하듯 엄청난 호감을 보이기도 했다. 연습구장 같은 경기장과 긴장감을 주지 않는 팬들의 반응은 그동안 리그에서 경기를 해왔던 멘유선수들에게는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었을 거다.

 

넷째, 5부리그 팀과의 경기인만큼 멘유의 선발출장은 상당히 느긋하게 짜여진 감이 있었다. 물론 멘유의 선수들이 벤치워머라고 해서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동안의 암살자'라는 별명이 붙은 솔샤르가 오랜 부상을 딛고 오랜만에 출전해서 오른쪽 윙의 역할을 해주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긱스, 스콜스, 퍼디난드, 박지성, 반니스텔루이 등 선수들을 빼고 루니와 호나우두를 후반 교체멤버로 기용하는 등 퍼거슨은 이 경기를 한템포 쉬어가는 경기로 생각했던 듯 하다.

 

이렇게 멘유가 가지고 있었던 핸디캡만으로 볼 때 어쩌면 무승부의 원인이 있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멘유의 핸디캡이 무승부라는 경기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는 없다. 버튼 알비온의 선수들이 보여준 경기능력은 감탄할만한 것이었다. 마치 유로 2004 결승전에서 포르투갈과 맞붙었던 그리스 국가대표의 경기운용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만큼 버튼의 선수들은 전후반 90분을 끊임없이 뛰어다니며 멘유 선수들을 괴롭혔다.

 

멘유가 후반에 투입한 루니의 경기능력은 누가 보더라도 탁월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오늘 새벽 버튼의 선수들은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던 10명의 선수 모두가 루니처럼 뛰어다녔다. 누가 수비고 누가 공격인지 도저히 분간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들은 온 경기장을 마음껏 누비고 다녔다. 멘유 선수들이 공을 가질 때마다 버튼의 선수들은 강력한 압박수비를 펼쳤고 그 덕분에 멘유 선수들은 패스타임을 자꾸만 놓치게 되었다.

 

더구나 이들의 조직력은 프리미어쉽 어느 구단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수비에서 보여준 정교한 패스들은 미드필드들이 앞으로 치고나가기 쉽게 경기를 만들어주었고, 이러한 패스능력때문에 멘유선수들은 번번히 버튼의 골대 앞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버튼의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할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끈기와 열정이었다. 버튼의 선수들은 멘유의 선수들과 비교할 때 그 처지 자체가 다르다. 구단과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선수가 드물고 오히려 비정규 계약직 선수들이 다수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극적인 방어를 해낸 골키퍼 디니(Saul Deeney)는 기간을 따로 정하지 않고 구단과 계약을 맺었다. 선수들의 구성 역시 다양하다. 은퇴한 프로선수, 운전기사, 건축노동자 등이 파트타임 선수로 계약되어 있고, 경기가 없을 때 생업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멘유 선수 두어명의 몸값이면 구단 전체를 운영할 수 있을 정도의 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근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경기 내내 그들의 몸에 뿜어져 나오는 정열, 그건 다른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바로 축구를 하고 싶다는 것,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거기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긍지를 가진다는 것. 동료들과 공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이를 보면서 환호하는 팬들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 하는 것.

 

멘유와 리그가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버튼의 선수들이 보여준 모습은 감동적인 것이었다. 특히 경기 종료를 몇 분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결정적인 슛을 반대편으로 넘어지면서 발로 걷어낸 골키퍼 디니의 선방은 경기를 보던 사람들 모두를 벌떡 일어나게 만들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의 축구를 하고싶다는 의지, 생애 단 한번 뿐일지도 모르는 강팀과의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결국 1월 19일 멘유 홈에서 재경기를 가져야하는 기적을 일구어 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낳은 버튼의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올 시즌 우리나라 축구 FA에서 결승까지 올랐던 현대미포조선의 선수들처럼 버튼이 영국 FA에서 결승까지 올라가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멘유와의 재경기에서 버튼이 이길 확률은 버튼의 홈구장에서 멘유에게 다시 무승부를 기록할 확률보다 더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버튼은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역사가 되었다. 프리미어리그 공식홈페이지에서조차 소개되지 않는 팀이 보여준 뜨거운 정열은 1등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매우 식상한 결론을 뜨겁게 전해준다.

 

그리하여 오늘의 결론, "열심히 살자!"

 

덧) 버튼 알비온(Burton Albion FC)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들은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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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9 23:13 2006/01/09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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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몇 년전 프랑스 FA컵에 파란을 몰고왔던 칼레가 생각나는군요. 그건 그렇고 울 축구협회도 제발 FA컵을 제대로 진행했으면 합니다. 항상 대표팀, 프로팀 정규일정 다 끝나고 하지말고 날씨 따뜻할때 정규시즌 중에 차근차근했으면 한다는 소망이... FA컵 그거 한나라 최고의 축구경기인데.

  2. 저두 우연히 이 경기 봤는데요(잠이 갑자기 안 와서리^^). 버튼 선수들 정말 잘 하데요... 근데 난 버튼 팀이 프랑스 클럽인 줄 알았어요. 아나운서가 자꾸 알비옹이라고 해서리^^... 근데 5부 리그 팀이었구나(너무 놀람). 5부 리그면 우리나라에선 거의 조기 축구회 수준인데... 야!!! 저두 5부 리그쯤 속하는 사람인데...희망을 가지고 살아야겠네요...ㅎㅎㅎ...

  3. bto/ 구랴, 맞어. 현대미포조선이 FA준우승을 할 때 '칼레의 기적'이 생각나더라구. 버튼이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객관적으로 어렵지만 아무튼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램을 숨길 수는 없더라구. 울나라 축협은 그래서 욕먹는 거여... 명색 프로축구라면 보고 즐기는 경기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얘네들 하는 거 보면 탁상앞에 앉아서 지들끼리 뭘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이재유/ 엇, 축구좋아하시는군요. 5부리그씩이나... 나중에 날 좀 풀리면 학교에서 한 게임 했으면 좋겠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

  4. 행인께서 축구해설가로 나서 보심은 어떨런지...ㅎㅎ

  5. 산오리/ 저는 그냥 즐거울줄만 알아서요 ^^;;; 해설은 무리고 그냥 제가 느낀 점만 써보려구요. 그나저나 산에 한 번 쫓아가야 하는데 게을러서 못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