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들에 불을 놓아
농민들이 불을 지른다.
자기 생명같은 나락 가마니를 풀어 헤치고
불을 지른다.
저 기름진 쌀들이 제 흰 몸을 검게 태운다.
숱덩이가 되어 흐트러지는 쌀을 보며
농민의 가슴이 재가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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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상 10월 27일 부산일보 만평
저 들에 불을 놓아
정태춘/박은옥
저 들에 불을 놓아 그 연기 들판 가득히
낮은 논둑길 따라 번져가누나
노을도 없이 해는 서편 먼산 너머로 기울고
흩어진 지푸라기 작은 불꽃들이
매운 연기 속에 가물가물
눈물 자꾸 흘러 내리는 저 늙은 농부의 얼굴에
떨며 흔들리는 불꽃들이 춤을 추누나
초겨울 가랑비에 젖은 볏짚 낫으로 그러모아
마른 짚단에 성냥 그어 여기 저기 불 붙인다
연기만큼이나 안개가 들판 가득히 피어오르고
그 중 낮은 논배미 불꽃 당긴 짚더미
낫으로 이리저리 헤집으며
뜨거운 짚단 불로 마지막 담배 붙여 물고
젖은 논바닥 깊이 그 뜨거운 낫을 꽂는다
어두워가는 안개 들판 너머
자욱한 연기 깔리는 그 너머
열나흘 둥근 달이 불끈 떠오르고
그 달빛이 고향 마을 비출 때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농부의 소작 논배미엔
짚 더미마다 훨 훨 불꽃 높이 솟아오른다
희뿌연 달빛 들판에 불기둥이 되어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