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제한구역과 반려견
북한산 둘레길을 달리다보면, 머리통이 웬만한 수박통보다 큰 개와 조우하는 경우가 있다. 한 마리만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지만 두세마리가 함께 돌아다니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달리는 길 저 멀리에서 미리 보이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속도를 늦추게 된다. 하지만 갑자기 풀섶에서 뛰어나오게 되면 대응을 못하는 건 둘째치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이 썅, 난 심장도 안 좋은데... 심장에 박은 스탠트가 요동을 치는 게 느껴질 정도다. 마찬가지로 내가 놀라면 머리를 내민 놈도 놀란다. 서로 궁합이 안 맞는 녀석과 마주치면 대략 난감하다.
애초부터 들개 내지 산개가 따로 있을리가 없다. 얘들도 한 때는 누군가의 '반려'였을 거다. 난 짐승에게 '반려'라는 말을 붙이는 것에 대해서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어쨌든 '반려'라는 말이 통용되니 그렇게 호칭하겠다. 암튼. 그런데 몇 번 얘들하고 부딪치다보면 이미 산에서 대를 잇고 있는 종족도 꽤 많은 듯하다. 대가 계속 이어지게 되면 아마도 선대가 겪었던 '반려'의 기억은 소거되고 야생성만 남은 말 그대로 '들개'가 되어 돌아다니게 될 거다.
난데없이 놀라더라도 별 일 없이 서로 갈 길 가면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매사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되는 게 아니라서 문제다. 산길이라고는 하지만, 북한산 둘레길은 많은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는 곳이다. 길이 동네 대로처럼 넓은 것도 아닌데 사람은 많다. 운동을 하겠다는 욕심에 그런 길을 달리는 건 나야 좋지만, 조용히 여가를 즐기며 호젓하게 산책을 하러 나온 사람들에게는 민폐다. 그러다보니 될 수 있으면 사람이 없을 시간을 골라 달리게 되고 경험이 쌓이다보니 대충 그 시간을 맞출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더 커진다. 사람들이 많은 시간에는 산의 개들이 길로는 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 시간은 이제 개들의 시간이다. 얘들은 곧잘 사람 다니는 길로 나온다. 앞뒤로 아무도 없는 길을 달리다가 얘들과 혼자 맞부닥치게 되면 때론 등줄기에 식은 땀이 죽 흐르는 일도 많다. 안 그래도 달리느라 땀이 범벅이 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뛰어서 나는 땀과 쫄아서 나는 땀은 그 느낌 자체가 다르다. 내가 엔간헤서는 개들에게 놀라고 하진 않지만, 어지간히 간이 부은 사람이라고 해도 쎄빠지게 뛰고 있다가 덩치가 송아지만한 개가 이빨을 드러내며 화들짝 거리면서 달려들면 부었던 간이 오그라드는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북한산은 일대가 국립공원인데가 개발제한구역이다. 그러나 한글을 읽을 수 없는 개들은 개발제한이라는 국가권력의 엄포에도 아랑곳 없이 산길을 개발로 수놓고 돌아다닌다. 세종대왕이 아무리 누구라도 쉽게 글을 배우고 익혀 쓰일 수 있도록 과학적인 글자를 만들었다고 한들, 개들에게까지 글을 익혀 개발제한구역에는 개발을 들이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얘들이 애초 이 구역에 발을 들이게 된 건 전적으로 인간이 초래한 문제이니 얘들에게 끝내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런데 간혹 한글을 충분히 읽을 줄 앎에도 불구하고 개발제한구역으로 개발을 끌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개들의 집사들이다. 이들 중에는 특히 집사로서 '반려견'들의 입장에 충실한 사람들이 있다. 어찌나 충실한지 개가 달리는 사람에게 달려드는데도 이를 크게 문제삼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집사들이 끌고 온 개들 중에 대형견들은 야생화된 개들보다 더 위험한 경우가 있다. 야생화된 개들은 달리기를 멈추고 최대한 그들과 다툴 의향이 없음을 표하면 대충 상황이 정리된다. 겁을 먹고 화들짝 거리면 오히려 더 위험하고. 그런데 집사들과 함께 나들이 온 대형견중에는 집사빽을 믿는 건지 뭔지 개피를 볼 때까지 개기는 개가 있다.
오늘 이렇게 잡설을 길게 늘이는 건 집사 믿고 하염없이 개기는 덩어리 큰 개때문에 빡쳐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뭐 개가 그런 걸 어쩌겠나? 난 개에 대해서는 참 관대하다. 아니 모든 생명에 대해 관대하다. 모기랑 바퀴만 빼고. 하지만 집사들이 될 수 있으면 개 끌고 등산로나 둘레길로는 좀 안 나왔으면 싶다. 대충 산길로 나오면 개똥도 안치우더라. 개는 개발제한구역이라는 말을 못 읽는다고 하지만 집사들은 읽을 줄 알지 않겠나? 개발제한구역은 제발 개발을 제한했으면 싶다. 물론 이것도 아직 내가 인간이 우월하다는 오만을 버리지 못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