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지법 할머니
밤 9시경. 날씨 맑음. 쌀쌀한 바람이 내내 불어서인지 공기도 깨끗한 밤. 정말 좋아 이거, 정말 좋아. 이런 날씨면 사정없이 뛸 수 있겠군. 옷 단단히 챙겨 입고, 00초등학교 운동장에 진입하여 슬슬 자리를 잡고 몸을 풀기 시작했다.
운동을 조금 하기 시작하면, 으레 그 망할놈의 호승심이 불끈 솟구친다. 이게 다 지금 생각은 못하고 과거의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심해지는데, 아 옛날이여 백날 해봐야 소용없다는 거 뻔히 알면서도, 왕년에 말야, 응? 내가 그래도 왕년엔 말야, 하프를 1시간 40분대 주파를 하고, 엉? 풀코스를 3시간 20분대 들어왔는데, 그때 내가 당 활동만 안 했어도 서브 3를 끊는 건데 말여, 응?
이따위 노스탤지어에 빠져설랑 마치 지금도 그냥 뛰면 그까이꺼 하프 쯤이야 두 시간 안에 들어올 것처럼 막 심장이 벌렁벌렁... 하면 안 되는데... 난 심장병 환자라구... 암튼 그런데, 그나마 천만 다행인 건 이제 그래도 몸 움직이는 거보다 생각이라는 걸 먼저 하게 된 나이가 되다보니, 아뿔사, 이러다가 지난번처럼 또 햄스트링 작살나거나 아킬레스건이 토막나거나 발바닥이 찢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설라무네 그래도 페이스 조절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거.
어제 밤도 마찬가지. 그냥 대고 뛰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몸도 뒤로 한 번 젖혀보고, 운동장 흙바닥의 냄새도 맡으러 앞으로도 한 번 숙여보고, 유연성은 거의 내다 팔아먹은 주제에 그래도 스트레칭이랍시고 팔다리도 쭉쭉 뻗어보면서 호승심을 달래고 있었더랬다. 몸을 어느 정도 풀었다 생각하고 슬슬 달리기 시작. 이건 러닝 수준은 안 되고 조깅수준, 그것도 걷는 거보다 조금 빨리 가는 수준에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러고선 여남은 바퀴 돌았을까. 문득 뒤에서 뭔가 중얼중얼 하는 소리와 함께 심상찮은 기운이 매우 빠르게 접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섬뜩한 느낌이 들어 한 편으로 몸을 비키는 순간, 어스름 달빛에 아무리 봐도 연세가 칠순은 넘었을 듯한 할머니 한 분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주문을 외우면서 쉭-하니 지나가신다. 뛰지도 않고 걸어서.
그런데 그 속도가 가히 빛의 속도. 마치 전철에서 빈자리를 발견한 초로의 어른들이 순간이동을 해 어느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본듯한 신비한 경험을 반추하게 만들만큼 빠른 속도로 염불 할머니는 내 곁을 지나쳐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져갔다.
감탄도 잠시, 저 노인네도 저렇게 빨리, 그것도 뛰는 것도 아니고 걸어서 날듯이 짖쳐가는데, 나는 아직 젊었거늘 이게 뭔 꼴인가, 심각한 자책과 함께 내가 이러려고 운동장에 나왔나 하는 자괴감에 번민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힘을 주게 되고 조금 속도를 내게 되고, 당연히 그여파로 허벅지가 따끔거리고 장딴지가 단단해지는 느낌이 온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속도를 줄이는데...
그 순간, 또다시 뒷목 언저리에서 들려오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소리에 화들짝 하여 다시 몸을 비키자 역시 예의 그 할머니께서 잔영을 남기며 날듯이 지나쳐가신다. 아아... 저분은 어쩌면 전생에 삼장법사와 천축을 향해가던 일원 중 한 분이 아니었을까...
세상엔 뛰고 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닌 거다. 겸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겠다. 뉘신지 모르겠사오나, 관세음보살 할머니,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