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 추억이 다 아름다운 건 아니니까 1
세상 물정 조금 알게 된 후 나름대로 남 앞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로 설정한 몇 가지 주제 중 하나가 어렸을 때 못 먹고 산 이야기다. 이건 뭐 군대이야기나 학교이야기랑 비슷해서, 나 어릴 때 어렵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좌중의 누군가가 꺼내면 곧바로 가난베틀이 진행되는 통에 그닥 뭐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더러, 사실 어릴 때 생각나는게 그다지 기분이 썩 좋은 일도 아닌지라 될 수 있으면 나 어릴 때 못먹고 못살았다는 이야긴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하긴 뭐 못먹고 못산게 자랑도 아니고...
짝지가 "행인의 20대를 찾아서"라는 주제의 동인천 여행을 제안했을 때는 그냥 바람 한 번 쐬고 오는 정도로 생각했었다. 동인천역에서 전철을 내려 원래 계획했던 중구 신포동 방향이 아니라 정 반대로 북구 송현동 쪽으로 발길을 돌렸을 때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송현시장께로 가는 방향에 보인 안내판이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라는 것이었고, 짝지가 저기 한 번 가보자고 제안하는 통에 계획에 없던 길을 가게 되었다.
가다보니 엉뚱한 길로 들어섰는데 그곳은 집집마다 공가표시가 되어 있는 재개발 예정지였다.
골목은 조용했다. 사람들이 모두 나간 집집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수도계량기며 전력량계는 모두 철거되어 있었고, 집의 문마다 출입금지 경고장이 붙어 있다. 낡은 집들도 있었고, 골목이 협소한 곳도 있었지만, 이정도 규모의 동네와 이정도 수준의 집들을 굳이 철거하고 재개발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아했다. 그 속사정이야 모르니 더 말할 게 없지만, 여기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갔을까하는 궁금증은 지울 수 없다. 언젠가 경험했던 강제철거를 돌이켜보면,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원래 다 그 자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들을 가지고 있더랬다. 그 사정을 무시당한 채 쫓겨나는 사람들의 삶은 그래서 더 열악해지기는 쉬워도 더 나아지기는 어려운 게 실상이다.
어떤 트라우마의 편린을 건드린 골목을 빠져나왔다. 이때부터 조금은 숨이 가빠지고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나마 이곳은 그리 높은 산동네도 아니고, 주거환경이 아주 열악하다고 보기도 좀 어려운 곳이었기에 다들 뭐 잘 합의하고 나갔겠거니 생각하려 한다. 보존상태가 썩 괜찮은 걸 보면 거주민들 사이에 아주 심각한 분쟁까진 나가지 않았으려니 자위하기도 하면서.
바로 들어오던 길을 돌아나가 다시 언덕배기를 오르니 수도국산 정상이 나온다. 잘 조성된 공원에 달동네 박물관이 들어서 있었다. 약간의 입장료를 내고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돌아보니 '옛날 생각'이라는 게 뭔지 알겠더라. 이게 또 타임머신을 타고 멀리 돌아가는 느낌도 나거니와 아팠던 기억도 좀 나고, 뭐 그렇더라.
어릴 때 살던 뚝방에는 이런 사진관이 없었다. 어쩌다 동네를 찾는 떠돌이 사진사에게 사진을 찍는 게 다였다. 아니면 오목교 건너 영등포로 나가 사진관을 찾던지. 고향에도 이런 사진관은 없었다. 면사무소 있는 읍내엘 가도 없었고, 양평에나 나가야 이정도 수준의 사진관이 있었다. 전시된 사진은 너무 잘 복원을 해놔서 옛날 사진같이 느껴지진 않았고.
솜 트는 기계다. 목화솜 이불을 주기적으로 한 번씩은 틀어줘야 보온력도 좋고 느낌도 좋다. 뚜껍게 목화솜을 채운 이불은 어릴 때는 무겁게 느껴졌는데, 난방도 잘 안 되던 집에서 그나마 두꺼운 목화솜 이불은 겨울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솜 틀 일이 생기면 어느 집으로 솜을 틀러 가야 하는가를 놓고 동네 사람들이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아주머니들이 모여 시장통 어디에서는 솜을 바꿔치기 한다던가 솜을 덜어낸다던가 또는 '카시미롱'을 섞어서 주기도 한다던가 어느 집에 가면 양심적으로 해준다던가 하면서 설왕설래가 많았더랬다. 그렇게 보면 목화솜도 재산 중의 재산이었던가보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저 모자 썼었지. 저 상태는 청색이지만 뒤집으면 흰색이고. 청군이 되면 저렇게 쓰고 백군이 되면 뒤집어 쓰고. 오재미에 곤봉에 호루라기에 그러고보니 그 땐 운동회라는 게 참 재밌었다. 한번은 시골에 갔을 때, 거기 학교에 다니지도 않으면서 우연찮게 그 학교 운동회에 참여하게 된 적이 있었는데, 시골 운동회는 그냥 동네 잔치였더랬다. 할배할매들이 술 한 잔 거하게 걸치고 춤도 추고 육자배기도 하고...
'벤또' 도시락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내 밥도시락이 저기 있는 도시락 다 합친 것만큼 크기였더랬다. 반찬통은 또 따로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가방은 내나 밥통과 반찬통 넣으면 다 들어찼고, 학교는 도시락 까먹으러 가는 곳이 되어버렸다능...
추억돋는 하드통. 저거 두어개씩 매고 동네 돌아다니면서 '아이스깨끼'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목동 뚝방에도 한 여름이면 하드통 들고 다니는 하드장수들이 들락거렸다. 비닐 우산도 오랜만. 그러고보니 요샌 우산 고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저거 우산 고장나면 따로 고이 모셔뒀다가 살이 부러지면 살을 빠구고 비니루 빵꾸나면 비니루 덧대던 일도 잦았다.
우리 또래가 저 교복 마지막 세대다. 여기도 보니까 하복은 샘플이 없네... 암튼 모표에 학교배지에 학년장에 명찰 등등 달고 가야 할 필수항목들이 있었다. 이름표 및에 리본 단 거 보니 저놈의 리본 때문에 고생한 게 한 두번이 아니라서 짜증이. 뭔놈의 리본이 시시때때로 바꿔달아야 하는데 귀찮기도 하거니와 달아야 하는데 안 달고 가거나 바꿔야 하는데 모 바꾸면 또 뭔 말을 듣고 기합받고...
그러고보니 교복을 이렇게 집안식구들 사진 아래 이렇게 걸어놓는 집들이 있었다. 친척 집에도 이런 구도가 잡힌 집이 꽤 됐는데, 하나같이 장남교복이 저 위치에 걸린다. 딸래미들은 학교도 제대로 보내지 않았더랬고. 그러고보니 그렇더라...
내 삶의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저 주민증과 관련된 것인데, 그러다보니 흥미롭게 봤던 전시물. '반장신분증'은 처음 본다. 연탄구매권은 저렇게 생긴 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뚝방에서도 그랬고 뚝방에서 쫓겨나 자리잡았던 곳에서도 교환권인지 구매권인지 그거 받아서 챙겨뒀던 일이 있었다.
난 지금도 무슨 '연탄구이집' 등 뭐 이렇게 탄 때는 음식점들은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저 연탄 볼 때마다 숨이 막힌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두 번을 죽다 살았다. 자잘하게 가스중독 되었던 건 뭐 이루 헤아릴 수도 없고.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연탄가스 먹고 죽을 뻔한 경험만 안 했더라도 내가 지금 천재로 남았을텐데... 아쉽다. 아무튼 연탄이라는 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지만 앞으로는 절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그런 존재다.
동네 점방. 뚝방 아래 동네에 이런 점방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쌀이며 콩나물 두부 같은 것들까지 다 팔았다. 어린 주제에도 뭐 하나 먹고싶은 거 사달라고 하면 그게 어른들에게 부담이라는 걸 알았는지라 나도 그렇고 내 동생도 그렇고 과자 하나 사달라고 칭얼거린 적은 없더랬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점방엘 갈 일이 있었는데, 여기 전시물 보면 그 때 봤던 것들도 꽤 있다. 그런데 저 남양분유는 기억에 있는데 서울분유는 어째 본 기억이 없다.
그러고보니 이거 이 박물관에서 본 것만으로도 너무 길어지네. 사진이 많아서 그런가 좀 버벅거리는 듯도 하고. 암튼 이래 저래 볼 게 많은데, 나머지는 다음 기회로 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