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축구와 동네빵집

전철역 사거리에 있던 작은 빵집이 어느 순간 사라진 그 자리엔

속옷 떨이 떴다방이 벌써 점포정리 구호를 내걸었다.

식빵 한 덩어리 사려고 옮겼던 발걸음이 서먹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바로 옆 이마트를 향한다.

그런데 이게 왜 이리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걸까...

 

그렇게 맛있던 빵집, 제과점, 까페가 하나 둘씩 없어지고

어느틈엔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서는 던킨이며 빠리바게뜨며 엔젤인어스며...

 

덩어리가 되는 것들은 서로 거리를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덩어리가 적은 것들은 제 자리를 지키기도 버겁다. 서대문 농업박물관 근처에 있던 독일식 제과점, 여의도 의사당 근처에 있던 피자집, 학교 병원 앞에 있던 조용한 커피숍, 이런 기억들이 가물거리는데 그들이 떠나간 어딘가에서 다시 뭔가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시장통에서 자그마한 가게를 하던 아주머니 한 분을 어떤 마트의 캐쉬어로 만났을 때의 당혹감이라는 거, 줄 뒤에 밀려있는 손님들 덕에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회원카드 있는지, 현금영수증을 할 건지 물어보는 기계적인 질문과, 됐다는 답변을 연거푸 하면서 바코드 기계를 거쳐나온 물건을 챙기기에 바쁜 나머지 안부는 나중으로 미룬다.

 

한 달을 달뜬 마음으로 살게 만들었던 월드컵 기간 동안, 독점중계로 말썽을 일으켰던 씨방새(sbs)는 '실리축구'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해설을 담당했던 차범근은 쉴 새도 없이 실리축구를 운운했는데, 애초부터 듣기에 민망했던 용어일 뿐만 아니라 실컷 공격을 하고 있는 팀들을 분석하면서 실리축구 어쩌구를 남발하는 데는 신경질이 날 정도였고.

 

가만 보면, 이 '실리축구'라는 용어는 아주 명확하게 사태를 규정한다. 그 용어의 본래 뜻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면 그만이라는 목적의식을 담고 있다. '안티축구'라는 오명을 감내하면서도 목숨 건 토너먼트에서 승리를 쥐기 위해 축구 본연의 아름다움을 폐기하는 것, 이것이 '실리축구'의 본연이다.

 

도대체 움직이기를 거부한듯이 보였던 무링요의 인테르밀란이 결국 챔스 우승을 거머쥐는 모습에서 축구 볼 맛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술이라는 것이 가지는 그 오묘함이라는 것은 날고 기던 바르셀로나의 호빗들을 완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는 점에서 무조건 못된 것이라고 혐오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실리축구'로 둔갑하고 축구의 대세가 되어버린다면 축구는 즐길 이유가 없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세심한 특징의 분류 없이브라질과 네델란드와 심지어 우루과이와 북한 축구를 '실리축구'라고 뭉뚱그려버리는 건 시청자를 우롱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해설자의 자질마저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게다가, 축구가 시대상황을 반영한다는 사회학적 분석까진 아니더라도, '실리축구'를 대세로 용인하는 분위기는 돈만 벌면 장땡이라는 현실과 맞물려 행인을 매우 서글프게 만든다. 빵 봉투에 단팥빵 한 두개를 덤으로 넣어주던 동네 빵집은 '실리'에 밀려 사라졌다. 오랜만에 찾아갔던 작은 국수집이 건물 한 층을 다 티워 확장한 고깃집으로 변해있을 때, 국수사리 한무더기를 채반에 받쳐 내오며 서비스라고 하던 주인아저씨의 얼굴까지 망각의 골짜기로 사라져버린다.

 

국대경기가 가지고 있는 일정한 집단적 마력을 차치하고라도, 이번 월드컵에서 건진 건 칠레의 지칠줄 모르는 공격과, 16강 우루과이전을 즐겼던 한국과, 벽돌을 쌓아가듯 경기를 만들어가던 스페인이 보여준 화려함 등이 될 거다. 하긴 '실리'라는 걸 무시할 수는 없을 게다. WC라고 쓰고 돈지랄이라고 읽는 월드컵에 걸린 돈이 얼만데, 이기는 걸 목적으로 하지 말라고 감독이며 선수들에게 요구하긴 어렵겠지. 게다가 축구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선수들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던가.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것이 있다. '실리'라는 것에 얽매이는 순간 속물이 되어버린다는 거. 축구야 까짓거 뭐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물론 팬의 입장에선 이것도 용납하기 어려운 것일 테지만) 먹고 사는 데 있어서까지 실리가 목적이 되서 없는 놈 빤쓰까지 벗겨먹어야 한다면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 내겐 동네빵집에서 서로 잡담을 하며 에누리를 흥정하던 그게 삶이다. 시장통에서 천원짜리 한 장에 못생긴 상추를 검은 비닐 봉다리에 꽉차게 받아올 수 있었던 것이 왜 옛날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가?

 

너무 '실리'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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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3 14:33 2010/07/1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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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Acryllian
    • At 2010/09/05 16:28

    http://blog.jinbo.net/hi/1302 "실리축구와 동네빵집"

  1. 서대문 농업박물관 근처에 있던 독일식 제과점...
    혹시 강북삼성병원 맞은편. 수타자장면집 옆에 말하시는 건가요?
    저도 거기 엄청 좋아했었는데ㅠㅠㅠ없어져서 너무 슬펐어요ㅠㅠ거기 은근 유명했던 것 같은데, 대체 왜 없어진건지...

    • 오오... 맞아요. 지금은 톰앤톰슨가 하는 대형 커피숍이 들어가 있더군요... 거기 케익들은 겉보기엔 매우 투박한데 맛을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더라구요... 어쩌다가 그 앞을 지나갈때면 혹시 다른 데 개업하진 않았을까... 궁금해서 몇 번 찾아보기도 했는데 종내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 해요... 자꾸만 하나 둘씩 사라져가네요. ㅠㅠ

  2. 스페인 우승에 박수를 보냅니다.

  3. silly 축구~

  4. http://blog.naver.com/202xender?Redirect=Log&logNo=140110009243

    간판포쓰쩌는 빵집...살아남는 집도 있네요(사장님이 동경제과학교 출신이라 그런 건가--)

  5. 김밥을 먹을땐 1000원짜리면 천국에서 대접 받는다.
    천국보다 더 좋은 음식점이 있을까?
    그런데 요즘 천원짜리로는 엄감생심이다.
    천국에서 1천원짜리로 김밥을 먹으면 오백원정도를 더내야 한다.
    화가난다,정말 화가나지 않을수 없다.
    어느 시인의 국밥집에서 분노는 동포의 분노보다 시국의 분노보다 못하였는가!
    일상의 1천원짜리 서정은 시장의 법칙을 모르는 "나만의 실리"는 아닐까?

    "모든 전략에서 구조에서" 전술만 섬세하게 분리할수 있을까?
    그렇다고 또한 각각의 특징을 무시하고 시류의 합집합으로 하나로 규정할수 있을까?

    2010년 월드컵은 끝났다.
    이번 월드컵의 특징은 해설가의 말로 실리축구라면 축구의 전술에서는 실리축구를 잊어야 한다.
    그래야 축구가 살아날수 있을 것이다.
    북한과 남한은 브라질과 그리스전에서 대등함과 승리에 자만에 빠졌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나름의 특징이 있는 축구가 필요하다.

    어려울수록 기본기와 아마추어 정신이 필요하다.
    이런점에서 추계고교축구대회는 2012년 유럽보다 더 위대한 그 무엇을 줄수있다

    진보축구는 투지있게 주장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