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분 토론, 장윤석 의원

하긴 뭐 공안검사 출신에게 헌법의 기본 이념에 대한 고뇌를 바란다는 거 자체가 전경에게 방패로 찍힐 일이다만, 실정법에 대해선 법전을 들고와서 줄줄이 읽는 인간이 해당법률의 기본원칙조차 왜곡하는 건 무슨 개념인지 모르겠다.

 

조금 전 100분 토론 쭈욱 봤는데, 토론 전반적으로 맘에 차지 않는 패널이며 발언들이었다만 한나라당 장윤석 의원, 이 사람 발언 중에 몇 가지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집시법의 문제. 장의원이 계속해서 현행 집시법의 규정을 들고 나와 헛소리를 하는데, 정작 문제는 현행 집시법이 위헌적 법률이며 불법행위를 조장하는 법률이라는 점이다.

 

헌법이 집회시위의 허가를 금지하고 있는 것은 시민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국가공권력이 부당하게 제한하지 못하도록 함이다. 그런데 현행 집시법은 이 헌법의 원칙을 부정한다.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되는 신고제 방식, 경찰의 자의를 광범위하게 보장하는 집회제한규정, 야간 집회금지, 일정 기관 100m 거리제한, 소음규제 등등.

 

예컨대 경찰은 집회장을 빽빽하게 막아놓은 차벽을 선진형 폴리스라인이라고 자랑에 겨워한다. 주접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닌데, 현행 집시법에는 폴리스라인의 형태를 일정하게 정한 규정이 없다. 그러나 헌법의 원칙에 비추어볼 때 이 차벽이라는 것은 일종의 집회시위의 효과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다.

 

집회시위를 하는 이유가 뭔지를 생각해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사람이 따땃한 방구석을, 아니 요즘은 여름이니까, 선풍기나 에어컨 틀어놓은 션~한 방구석을 박차고 나와 비지땀 흘려가며 거리에서 악다구니를 쓰는 이유는 자신들의 사정과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기 바래서이다.

 

헌법이 집회시위를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행위가 부당하게 방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찰의 차벽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행동을 외부와 차단시켜 버린다. 차벽 밖에서는 차벽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헌법의 기본권은 차벽 안쪽에서 무릎 꿇는다.

 

이번 촛불집회와 관련해서 국제 엠네스티는 긴급 조사관을 파견했는데, 이 조사관이 조사할 대상에는 경찰이 그토록 선진형 폴리스라인이라고 설레발을 떨었던 차벽까지 포함된다. 국제적 개망신이다.

 

경찰은 차벽도 모자라 광화문 네거리에 컨테이너 박스까지 쌓았다. 센스발랄한 네티즌들이 곧장 이 컨테이너 박스 무더기를 "명박산성"이라고 명명했으나 이 21세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구조물은 경찰 스스로가 법률을 위반한 명백한 증거다.

 

특히 집시법에 따르면 시위대는 청와대 앞 100m까지 접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박산성은 청와대하고는 무려 도보로 25분 거리인 1.6km나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여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장윤석 의원, 그건 합법이며 특히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에 다 정해져 있는 거라고 강변한다.

 

장윤석 의원이야 워낙 다급하니까 이런 이야기를 한 거겠지만, 지금 경찰이 청와대로 향하는 시위대를 광화문에서 막거나 시청광장을 차벽으로 둘러싸는 것은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하고는 전혀 상관없다. 기본적으로 이 법은 대통령 경호실의 구성과 경호임무범위에 관한 것을 규정한 법일 뿐이다.

 

이 법률 제5조 제2항에 따르면 "경호구역의 지정은 경호목적의 달성을 위한 최소한의 범위로 한정"하도록 되어 있다. 그 범위가 법률에 특정되어 있지는 않다. 현행 집시법 제11조에는 대통령 관저(청와대)도 그 경계로부터 100m 이내에서 집회를 불허한다. 두 법률의 규정은 충돌하는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충돌할 일이 없다.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집무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청와대 일대가 경호업무의 대상이 된다. 청와대 외곽과 청와대 진입로 일부 정도가 될 거다. 대통령이 이동할 때는 이동하는 경로 전체가 경호의 대상이 된다. 대통령이 참여하는 행사는 대통령을 직접 경호할 수 있는 반경 내의 도로와 건물 등이 된다.

 

즉, 촛불집회가 열리는 밤중에 특별한 사안이 없다면 이명박은 청와대에 있는 거고 그 경우 대통령 경호의 범위는 청와대 일대가 된다.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범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집시법이 "경계지점으로부터 100m"라고 규정한 것을 보면 평시 청와대 경호의 범위는 아무리 넓게 잡아도 청와대 경계지점으로부터 100m 이내임을 알 수 있다.

 

장윤석 의원은 실정법에 정해져 있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초지일관 촛불집회의 불법성에 대해 떠든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봐도 현행 집시법은 지나치게 위헌적이며 그 법을 집행하는 정부와 경찰의 행위는 보편적 법원칙의 한계를 과도하게 위반한다. 그것도 주권자인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완전하게 묵살하는 방법으로 민주주의의 대의를 짓밟으면서.

 

법철학자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는 "민주주의의 최선의 특징은 바로 민주정치만이 법치국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하면서 "정의의 핵심을 이루는 평등이 실정법의 제정에서 의식적으로 거부되는 곳에서는, 그 법률은 단지 '부정의한 법'일 뿐만 아니라 전혀 법적 성격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더불어 라드부르흐는 법 실증주의를 비판하면서 "(법률이 자신을 관철시킬수 있는) 실력 위에서는 필연(Mussen)은 기초놓아질 지언정 결코 당위(Sollen)과 효력은 기초놓아질 수 없다. 당위와 효력은 오히려 법률 속에 내재하는 가치 위에서만 기초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라드부르흐의 논리를 따르면 민주정치가 실현되지 않는 한 법치국가는 허상에 불과하다. 또한 라드부르흐의 논리를 확장하면 실정법의 제정에서 정의가 거부될 뿐만 아니라, 그 실정법을 근거로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정의가 거부되는 곳에서는 그 법이 이미 불법이다. 결국 법이 보편적 정의의 관념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그 법의 이념이 반영될 수 있도록 집행될 때만 법률의 당위와 효력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원칙에 비추어볼 때 장윤석 의원의 발언은 죽으나 사나 악법도 법이라는 것을 외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30년을 득세했던 군부정권의 법이념은 한나라당 장윤석 의원에 의해 부활한다. 아직도 소크라테스의 가면을 쓰고 주권자를 허수아비로 아는 사람이 있다니 어이가 없다. 더구나 이런 사람이 명색이 법률을 공부해서 법집행의 최전선을 달린 검사 출신이라니 할 말이 없다. 게다가 이젠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씩이나 하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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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4 03:39 2008/07/04 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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