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생님의 [하고 싶은게 많은 사람의 병] 에 관련된 글.
저번 글에 썼듯 작년 말부터 쫓기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마음의 여러 부담 중 사실 가장 컸던 것은
뭔가 대단한 일을 앞으로 계속 하게 될 것 같은데 내 자신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감당 못할 일을 하다가 중간에 퍼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쓸데 없는 힘만 들어가 있었고 자연히 하루를 마칠때는 극심한 피로감에 흔들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몸은 기운이 없고 마음은 명랑하지 못했다.
사실 저 생각은 평소 내가 지향하던 철학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 대단해 보이는 일이 한번에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작은 변화가 여럿이, 서로 겹치며, 오래 계속되며 결국 세상을 바꾼다고 믿고
* 훌륭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운동과 혁신은 훌륭한 사람들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쉽상이니
* 그 한몸에 지식과 능력을 많이 갖고 있는 것보다는 잘 연결시키고 소통시키는 '비어 있는' 사람이 되자.
30년 넘게 주변부에서, 궁핍한 환경 속에서 쪼그라든 마음으로 살아올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작년 한 해 그것도 가을부터의 '눈에 띄는 성과'를 접하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하는 일이 생각보다 대단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구석에서-조용히-흘러가며-거리두고 사는 게 익숙하고 좋은데, 앞으로 그렇게 살기 어려워지는 건 아닐까? 앞으로 가려는 마음이 커질수록 날 붙잡고 주저 앉히려는 내면의 떨림도 커졌다.
역시나 이럴때는 바닥을 한 번 찍는게 특효약인 듯 싶다. 일 하나 치른 후 방에 틀어 박혀 게임만 하며 며칠 동안 햇빛을 못보는 생활을 했다.(지금 내가 쓰는 방은 창문이 없다), 내 자신이 대단하지 않고 찌질하다는 것은 다시 입증됐는데, 그런 나를 스스로 버릴 수는 없으니 이런 상황에 대해 설명이 필요했다. 나는 계속 살아갈 것이고, 어찌 됐던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계속 할거다. 결국 다시 기억이 났다. 나는 '대단할 것 없는 어중간한 IT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어쩌면 그런 사람들만 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 어떤 흐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은 불행히도 그 분야에 갇히기 쉽다. 한 가지 방식으로 오래 해오고 정통한 사람은 여러 관계속에서 계속 그 방식을 유지하게끔 되기 쉽다. 어떤 면이던 '상당히' 훌륭한 능력 혹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의 감성으로 다른/낮은 세상을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IT인도 마찬가지여서 능력 있고 경험이 쌓일 수록 세상과 만나는 접점은 좁아지고 스스로 어떤 고정된 틀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한 분야에서 이름 있는 실력자는 그 이름을 '나를 위해 팔아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 속에 갇히게 되진 않는지.
나는 IT가 계속 발전하길 원하지만 그 방향은 좀 더 약하고 핍박받는 사람에게 힘을 주는 방향이길 원한다. 그러려면 그런 사람들 혹은 가까운 사람들이 IT 기술변화에 관여해야 한다.
IT가 발전하는 만큼 중요한 것은 지금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적시에 적절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직접 다가가 만나야 한다.
적시에 적절하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심정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시장질서로는, 영리에 기반한 시스템만으로는 아무리 잘 포장해도 안되는 부분이다. 비영리적인, 공동체적인 움직임이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것은 저 높은 곳에 있는, 먼 곳에 있는, 훌륭한 사람들보다는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나누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며 가치가 있다.
IT자원활동가네트워크, IT품앗이, 움직이는 NGO IT교육장, 그리고 앞으로 구상하는 여러가지 모든 일들은 다 평범한 IT노동자들을 만나서, 작은 마음과 에너지를 나누게 하려는 활동이다. 훌륭한 사람들의 대단한 창작물도 나름의 역할이 있는 것이지만 그것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협력이 존중받고, 그런 활동을 하는 것이 당연스럽게 여겨지는 것, 이 사회의 분명한 문화로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원래는 다른 방식으로 말을 하려 했지만 또 자기 고백 형식이 되버렸는데, 어쨌든
이런 생각을 다시금 스스로 확인하면서 '내가 대단하지 않음, 그러나 하려는 일은 대단해 보임'으로 인한 압박감. '내가 만나고 있고 앞으로도 만날 사람들의 저마다의 훌륭함'이 주는 부담감을 겨우 얼마간 극복하고
다시금 움직이게 됐다는 것, 이걸 다시 잊어 먹지 않기 위해, 그리고 혹시나 이런 활동들에 관심이 생긴 사람들에게 내 밑바탕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또 부끄러운 글을 쓴다.
덧. "비영리 정보통신활동"에 대한 사이트를 만들고 IT자원활동(IT품앗이, 이동식교육 등)에 대한 글은 앞으로 그곳에 올리려 합니다. 그 전까지는 http://www.facebook.com/npict 이 곳에 제일 많이 업데이트 하게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