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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물에 고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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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집에 가는 길에 그냥 [내 눈물에 고인 하늘]이 생각나더라.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가끔씩 이럴 때가 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 노래가 귓가를 맴돌고... 이럴 때는 블로그에 포스팅을 해야 잊혀질 것 같아서 이 글을 쓴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가사가 대충은 기억난다. 워낙 감상적이라서...

 

이 노래는 [조국과 청춘 5집]에 실려 있는데, 조춘 5집에 실린 노래들 중에서 양윤경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이 노래와 [우산], 그리고 [자! 우리 가볼까]를 좋아한다. 양윤경의 목소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후배의 목소리가 양윤경님의 목소리를 빼다박았기 때문이다. 양윤경의 노래를 들으면, 그 친구 생각이 난다.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 그 친구는 이 노래를 모를텐데...

 

이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만 듣고는 이 노래가 민중가요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긴 [조국과 청춘 5집]이 나왔을 때 학생문화예술운동 내부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제국주의 음악인 락을 도입하질 않나, 소부르주아적 감상주의에 물든 가사를 가지질 않나... 역시나 조춘은 그 이후에 다시 NL적 감수성을 회복하였지만, 조춘 5집에 실린 노래들은 대학 노래패들이 공연할 때 한동안 레퍼토리 안에 반드시 포함되곤 했다.

 

지금도 이 노래가 불려지려나.벌써 나온지 15년도 더 지났구나. 쩝... 내가 과거를 먹고 사는 이는 아닌데, 민중가요를 얘기하다 보면 항상 이렇게 되는구나.

 

 

내 눈물에 고인 하늘 (글 채은, 곡 이원경)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위에다
그냥 맑은 그림 하나 그리려 했지만
떠오른 건 먼저 간 벗들의 얼굴
내 눈물에 고인 하늘
 
눈물로 떨어지면 지워지겠지
깜빡이지 않고 그냥 이대로
언제나 네 곁에 있어줄게
바람에 실려온 너의 목소리
 
내 사랑 나의 영혼들이여
기억해주오 나 결코 잊지 않음을
내 눈물 속에 고인 푸르른 하늘
그 위에 떠오는 더 푸른 네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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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7 15:49 2010/04/0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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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기지국 수사를 즉각 중단하고 지금까지의 실태를 공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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쩝... 장난 아니네. 내 통화기록도 분명 저 안에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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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 경찰은 기지국 수사를 즉각 중단하고 지금까지의 실태를 공개하라! (2010년 4월 5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인권운동사랑방, 진보네트워크센터,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한국진보연대)
 
대한민국은 감청공화국인가. 지난 2일 방송통신위원회가 발표한 2009년 감청 통계는 참으로 충격적이다. 수사기관의 감청 건수가 계속 증가하여 지난해 사상 최대치에 이르렀다는 것도 놀랍지만, 경찰이 일명 '기지국 수사'를 자행해 왔다는 사실은 경악스럽기 이를데 없다.
 
전화번호와 아이디에 대한 감청 건수가 사상최대인 9,497건에 달했다. 인터넷 감청 또한 사상 최대치이다. 인터넷 감청에 인터넷 메일 뿐 아니라 회선 전체를 감청하는  일명 '패킷 감청'이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해 보면, 인터넷 이용자의 통신 비밀은 오늘날 큰 위기에 처해 있다. 여전히 국가정보원은 2009년에도 전체 감청의 압도적 다수인 97.7%를 차지하고 있다. 국가정보원법상 국정원의 국내 범죄 수사가 제한받고 있음을 상기해보면 지나친 비율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통계에서 가장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 것은 경찰이다. 이용자의 성명이나 주민등록번호에 대한 통신자료 제공이 전반적으로 급증하여 2009년도 전체적으로 6백만 건을 돌파한 가운데, 그중 경찰이 제공받은 건수가 무려 77.8%를 차지한다.
 
특히 경찰은 '기지국 수사'라는 희한한 명분으로 특정 시간에 한 기지국에서 잡히는 휴대전화번호를 모두 압수하거나 통신사실확인자료로 제공받아왔다고 한다. 경찰이 최소한의 대상자를 특정하지 않고 '투망식'으로 기지국 수사를 해온 것은 편의적이고 위헌적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범죄가 일어난 주변 지역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통화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사대상이 된 국민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특정지역 집회 참석자들을 표적으로 삼아 휴대전화번호 및 위치정보를 경찰이 입수해 왔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경찰은 일명 '기지국 수사'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또한 은밀히 이루어져 온 지금까지의 실태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통신비밀보호법에서 규정한 대로 기지국 수사 대상자에게 그 사실을 통지해야 한다.
 
통신수단이 발달할수록 국정원과 경찰의 감청과 감시가 늘어나기만 하는 비극을 어찌할 것인가. 정보·수사기관의 갖은 편법 속에 통신의 자유와 비밀은 사라져가고 있다. 그런데 한나라당과 국정원은 여기서 한술 더 뜨고 있다. 통신비밀보호법을 개정하여 휴대폰과 인터넷 감청을 더욱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여기 모인 우리 인권단체들은 경찰이 기지국 수사를 중단할 것을 다시한번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며, 통신의 자유와 비밀을 사수하기 위하여 끝까지 함께 투쟁할 것이다.
 
경찰은 기지국 수사 즉각 중단하라!
경찰은 기지국 수사의 실태를 투명하게 공개하라!
통신비밀보호법 개악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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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감청 실태와 ‘기지국 수사’에 대한 입장발표 기자회견
  
<자료> 2009년 하반기 감청 통계에 대한 인권단체 분석
 
I. 통신 감청 (통화 내용, 전자우편 등)
 
○ 방송통신위원회는 2009년 하반기 “통신감청이 전년 동기 대비 감소하였다(전화번호/아이디수 기준)”고 밝혔으나, 같은 기준으로 2009년 전체적으로 보면 지난해에 비해 5.5% 증가하였고 수치상으로 사상 최대 건수를 보임(9,497건).
 
○ 감청 수단으로는 인터넷 감청 증가가 두드러짐(2009년 하반기 전년 동기 대비 문서수 56.2% 증가). 2009년 전체적으로는 통계 발표 이래 최대 건수임(문서수 942건). 이러한 인터넷 감청에 인터넷 메일 뿐 아니라 인터넷 회선 전체를 감청하는 ‘패킷 감청’이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해 보면, 인터넷 이용자의 통신 비밀이 큰 위기에 처해 있음.
 
○ 2009년 하반기에도 여전히 국가정보원은 전체 감청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전화번호/아이디수 전체의 96.4%). 2009년 전체적으로는 감청 9,497건 가운데 국정원 비율이 9,278건을 감청하였음(전화번호/아이디수 전체의 97.7%). 국가정보원법상 국정원의 국내 범죄 수사가 제한받고 있음을 상기해보면 감청 비율이 지나침.
 
<표1> 국정원의 감청 비율
                                                                                             (단위 : 전화번호/아이디수)

연도

국정원감청

전체감청

국정원감청비율(*)

2009 (상반기)

6,294

6,402

98.3%

2009 (하반기)

2,984

3,095

96.4%

2009 (전 체)

9,278

9,497

97.7%

* 방송통신위원회 2010.4.2. 발표자료에서 산출
 
○ 이상의 통계들은 방통위가 통신사업자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의거한 것으로서, 각 기관이 자체적으로 보유한 감청 장비를 사용하는 직접 감청 비율은 누락되어 있음. 실제 감청건수는 발표된 통계건수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됨
 
Ⅱ. 통신자료 제공 (이용자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
○ 통신자료의 제공도 급증함. 2009년 전체적으로는 전화번호/아이디 제공건수가 지난해에 비해 33.4% 증가하였고, 수치상으로는 6백만 건을 돌파하였음(6,879,744건).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통신자료의 제공이 2008년 5백만 건을 돌파한 데 이어(5,155,851건) 2009년 사상 최대기록을 경신하였음.
 
○ 통신자료의 제공에는 법원의 허가나 통제가 불필요하기 때문에 오남용되는 것으로 보임.
○ 특히 통신자료 제공은 경찰의 비율이 압도적임. 2009년 전체적으로 경찰에 대한 전화번호/아이디 제공건수가 지난해에 비해 41.9% 증가하였고, 비율도 77.8%로 압도적임.
 
<표2> 경찰의 통신자료 제공 비율
(단위 : 전화번호/아이디수)

 

경찰제공

전체제공

경찰제공비율(*)

2008 (전체)

3,770,259

5,155,851

73.1%

2009 (전체)

5,351,080

6,879,744

77.8%

* 방송통신위원회 2010.4.2. 발표자료에서 산출
 
III.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 (통화내역, IP주소 등)
○ 2009년 하반기 통계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건수의 급증임. 2009년 하반기 전화번호/아이디를 기준으로 무려 15,778,887건의 제공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236,782건이 제공된 전년도 동기 대비 무려 67배에 달함(6,564% 증가*). 이러한 증가분을 기관별로 살펴 보았을 때, 경찰에 제공된 전화번호/아이디수가 14,366,747건으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함(91.1%). 군수사기관에 제공된 전화번호/아이디수도 1,358,496건에 달함.
(*) 일부 언론은 65배라는 표현을 썼으나 방통위 통계는 증가분에 대한 것이므로 67배가 맞음
 
○ 방통위는 이러한 통계 변화가 그간 방통위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기지국 압수수색이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 방식으로 대체된 데 따른 것이라고 해명하였음. 이로 인하여 그간 경찰이 기지국 단위로 전화번호를 제공받아 온 실태가 드러남(일명 ‘기지국 수사’). 방통위는 2009년 하반기에만 1,257건의 ‘기지국 수사’가 이루어졌으며, 한 수사당 통상 1만2천개의 전화번호 수가 제공된다고 밝힘
 
○ 그러나 경찰이 특정 시간에 기지국에서 잡히는 휴대전화번호를 모두 압수하거나 제공받아왔다는 사실은 충격적임. 경찰이 “실제 수사에 활용하는 전화번호는 그 중 1~2개 정도”라면서도 최소한의 대상자를 특정하지 않은 ‘투망식’ 기지국 수사를 해온 것은 수사편의주의이자 위헌의 소지가 있음. 이러한 방식으로는 범죄가 일어난 주변 지역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통화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사대상이 되거나, 특정지역 집회 참석자들을 표적으로 삼아 휴대전화번호 및 위치정보를 입수해 왔다는 추정도 가능함. 경찰은 일명 ‘기지국 수사’를 즉각 중단해야 함.
 
○ 별도의 통계를 공개하지 않는 압수수색이라는 명분으로 그간 ‘기지국 수사’의 실태가 당사자를 비롯한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은 점은 큰 문제임. 경찰은 은밀히 이루어져 온 ‘기지국 수사’의 실태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함.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에서 규정된 통신사실확인자료 통지의무(제13조의3)에 따라 기지국 수사 대상자에게 그 사실과 기간 등을 서면으로 통지해야 함. 수사기관에서 ‘과거의 위치추적’ 뿐 아니라 ‘실시간 위치추적’ 역시 관행적으로 ‘통신사실확인자료’로서 처리해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압수수색과 통신사실확인자료로 제공된 위치정보의 정확한 시점도 규명되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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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근처에서 전화 통화하면 잠재적 범죄자"?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 2010-04-05 오후 4:01:21)
인권단체 등 "경찰, 통지도 하지 않고 '투망식' 기지국 수사했다"
 
경찰이 '기지국 수사'라는 명목으로 특정 시간에 한 기지국에서 잡히는 휴대전화번호를 모두 압수하거나 통신사실확인자료로 제공받아온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이 대상자를 특정하지 않고 '투망식'으로 기지국 수사, 즉 특정 시간대, 특정 장소에 있던 모든 시민에 대해 수사를 해 왔다는 것.
 
인권운동사랑방, 진보네트워크, 참여연대 등 7개 단체는 5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정 시간에 특정 휴대전화 기지국을 거친 전화번호를 모두 받아서 조사하는 '기지국 수사'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 2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9년 하반기에 전화번호와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을 제공하는 통신자료 제공 건수가 2008년에 비해 33.4퍼센트 증가했다. 수치상으로는 600만 건을 돌파했다(687만9744건). 이명박 정부 들어 통신자료의 제공이 2008년 500만 건을 돌파한 데 이어 2009년 사상최대기록을 갱신했다는 이야기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경찰이 특정 시간에 기지국에서 잡히는 휴대전화번호를 모두 압수하거나 제공받아왔다는 사실이다. 방통위 자료에 따르면 통화 내역 등이 담겨 있는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건수가 2009년 하반기 1577만8887건으로, 이는 2008년 동기 대비 67배(23만6782건)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방통위는 그간 방통위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기지국 압수수색이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 방식으로 대체된 데 따른 수치라고 밝혔다. 시민단체에서는 이를 두고 "그간 경찰이 기지국 단위로 전화번호를 제공받아 온 실태가 드러났다"고 밝혔다.
 
방통위는 2009년 하반기에만 1257건의 '기지국 수사'가 이뤄졌으며 한 수사 당 통상 1만2000여 개의 전화번호 수가 제공된다고 밝혔다. 기관별로 살펴보면 경찰에 제공된 전화번호 등이 1456만6747건으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91.9퍼센트).
 
인권운동사랑방 등 시민단체는 "경찰이 특정 시간에 기지국에서 잡히는 휴대전화번호를 모두 압수하거나 제공받아왔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라며 "최소한의 대상자를 특정하지 않은 '투망식' 기지국 수사를 해온 것은 수사편의주의이자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러한 방식으로는 범죄가 일어난 주변 지역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통화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사대상이 되거나, 특정지역 집회 참석자들을 표적으로 삼아 휴대전화번호 및 위치정보를 입수해 왔다는 추정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들은 "무엇보다 그간 '기지국 수사'의 실태가 당사자를 비롯한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은 점은 큰 문제"라며 "경찰은 은밀히 이뤄져 온 '기지국 수사'의 실태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여경 진보네트워크 활동가는 "통신비밀보호법에서 규정한 대로 기지국 수사 대상자에게는 수사 사실을 통지해야 한다"며 "하지만 경찰은 그 수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통지를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장여경 활동가는 "하지만 이것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어 어떤 대책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장여경 활동가는 "'기지국 수사'로 인해 가장 우려되는 점은 집회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면서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전화통화를 했다는 정황 증거만으로도 연행될 수 있다는 점"이라며 "수사 편의주의인 '기지국 수사'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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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 기지국 ‘투망식 감청 수사’ 논란 (경향, 유정인 기자, 2010-04-05 18:04:33)
ㆍ방통위에 불특정 다수 수만건 통째로 요청
ㆍ시민·인권단체 “위헌적 수사편의” 강력 반발

 
경찰 등 수사기관이 기지국에서 특정시간대 불특정 다수의 통화내역을 통째로 넘겨받는 ‘기지국 수사’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기지국 수사 한 건당 1만2000개꼴로 전화번호가 제공됐다. 시민·인권단체들은 ‘기지국 수사’ 중단과 실태 공개를 요구하고 나섰다.
 
진보네트워크·인권운동사랑방·참여연대 등 7개 시민·인권단체는 5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 앞에서 ‘2009년 감청 실태와 기지국 수사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이 최소한의 대상자를 특정하지 않고 ‘투망식’으로 기지국 수사를 자행한 것은 수사 편의적이고 위헌적”이라며 “경악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기지국 수사’란 수사기관이 강력범죄가 일어난 지역의 기지국에서 특정 시간대의 통화내역 전체를 받고 동일범으로 추정되는 유사 사건이 일어난 지역 기지국의 이 시간대 통화내역 전체와 비교, 중복 전화번호를 추출해 용의자를 압축하는 방식이다. 이때 수사기관이 확인하는 ‘통신사실확인자료’에는 이름을 제외한 휴대폰 번호와 통화 일시, 상대방의 전화번호, 발신 기지국의 위치추적자료 등이 포함된다. 수사기관은 이 통신자료 일체를 법원에 수사기록으로 제출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가 지난 2일 공개한 ‘2009년 하반기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 등 협조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1257건의 기지국 수사가 이뤄졌으며, 모두 1577만8887건의 전화번호·아이디가 수사기관에 제공됐다. 전년도 같은 기간(23만6782건)에 비해 67배 증가한 수치다. 이 중 경찰에 제공된 건이 1436만6747건으로 91.1%를 차지했다. 그동안 수사기관들은 기지국 단위 통신사실을 확인할 때 법원에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집행, 별도의 통계자료로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일부 법원에서 영장 대신 통신비밀보호법상 ‘통신사실확인허가서’로 대체하는 일이 늘면서 방통위 통계가 집계된 것이다.
 
경찰이 기지국 수사 대상자들에게 수사 사실과 기간 등을 서면으로 통지하도록 한 통비법상 통지의무 조항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지적됐다. 진보네트워크 장여경 활동가는 “범죄가 일어난 주변 지역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통화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도 모른 채 ‘잠재적 용의자’로 수사대상에 오른 국민이 부지기수일 것”이라며 “특정지역 집회 참석자들을 표적삼아 휴대전화 번호와 위치 정보를 경찰이 입수하는 데 악용될 우려도 다분하다”고 말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기지국에서) 1만건을 받아도 경찰이 실제 인적사항 등을 추가로 확인해 수사를 진행하는 경우는 1~2개 전화번호에 불과하다”며 “전화번호만 받은 경우 ‘수사대상자’로 지목됐다고 보기 힘들어 통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성명·전화번호·주민등록번호·주소·인터넷 ID 등 통신자료(이용자의 인적정보)가 수사기관에 제공된 것은 2008년보다 33.4% 늘어난 687만9744건, 통신감청은 5.5% 늘어난 9497건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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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감청공화국인가 (2010년 04월 06일 (화) 10:00:04 미디어오늘)
[기고]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대한민국 경찰의 창의력은 참으로 놀랍다. 얼마 전에는 전교조 교사들의 민주노동당 가입 여부를 확인한다며 PC방에서 남의 주민등록번호 80개를 이용해 로그인하였다. 우리가 통상 ‘해킹’이라고 부르는 짓거리이다.
 
지난 2일에는 경찰의 ‘기지국 수사’의 실태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방송통신위원회는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매년 반기별로 감청 통계를 발표해 왔는데, 이번 통계에서는 휴대전화 통화내역이나 위치정보 제공건수가 무려 1577만8887건에 달했다. 이 수치는 전년도 동기 대비 무려 67배에 달한다. 방송통신위원회의 해명인즉슨, 그간 압수수색 방식으로 이루어져왔던 ‘기지국 수사’가 이번 통계서부터 포함되어 수치가 불어난 것이라고 했다. 기지국 수사의 대부분은 경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기지국 수사란 무엇인가. 특정 시간에 한 기지국에서 잡히는 휴대전화번호를 모두 제공받는 것이다. 강력범죄 용의자를 쫓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 2009년 하반기에만 1257건의 기지국 수사가 이루어졌는데, 한 번의 수사마다 통상 1만2000개의 전화번호 수가 제공되었다고 한다. 기지국 수사 방식에 의하면, 한두 명의 용의자를 추출하기 위하여 범죄가 일어난 주변 지역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통화를 했다는 이유로 한번에 1만2000명 가까이 수사선상에 올랐었다는 얘기이다.
 
특정지역 집회 참석자들을 표적으로 삼아 휴대전화번호 및 위치정보를 경찰이 입수해 왔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과거 뿐 아니라 실시간으로 제공받았을 수도 있다. 무서운 일이다.
 
사실 이번 감청 통계에서 놀랄 일은 그 뿐만이 아니다. 사상 최대치인 9497건의 감청 수치와 97.7%를 차지하는 국가정보원의 감청 비중도 경이롭다. 감청 수단으로는 인터넷 감청 증가가 두드러진다. 2009년 전체적으로는 통계 발표 이래 최대 건수이자 전체 감청에서 인터넷이 차지하는 비율이 62.1%를 달하였다. 이러한 인터넷 감청에 인터넷 메일 뿐 아니라 인터넷 회선 전체를 감청하는 ‘패킷 감청’이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해 보면, 인터넷 이용자의 통신 비밀이 큰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다.
 
통신 이용자의 성명이나 주민등록번호가 수사기관에 제공된 건수 역시 2009년 전체적으로 6백만 건을 돌파하였는데 그 중 경찰이 무려 77.8%인 535만1080건을 제공받았다. 경찰이 범죄수사를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촛불시위 당시부터 경찰이 대통령이나 정부를 비판하는 게시물을 사찰하고 있다는 의혹이 계속되어 온 것을 상기해보면 찜찜하기 이를 데 없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인터넷 실명제가 경찰의 사찰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형국이다.
 
최근 스마트폰을 비롯한 통신수단의 발달로 일반 시민의 의견 발표와 소통이 만개할 것이라는 기대가 일고 있다. 그러나 통신수단이 발달할수록 국정원과 경찰의 감청과 감시가 늘어나고 있다. 참으로 비극적이다. 사람 대신 쫓아오는 통신 미행은 대상자가 전혀 그 낌새를 알아챌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음침하다.
 
인터넷 패킷 감청도, 기지국 수사도, 상관없는 사람들의 통신 비밀을 너무 많이 침해한다는 점에서 지독한 인권침해이다. 수사 편의를 위해 갖은 편법이 횡행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실태를 이제 겨우 더듬더듬 알아가고 있을 뿐이다. 한나라당과 국정원은 여기서 한술 더 떠 통신비밀보호법을 개정하겠다고 한다. 휴대폰과 인터넷 감청을 더욱 확대해야 한단다. 이대로라면 대한민국은 사상 최대의 감청공화국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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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6 01:57 2010/04/06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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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제임스 페트라스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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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쓸만한 서평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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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사망 선고는 시기상조” (한겨레, 조일준 기자, 2010-04-02 오후 08:40:10)
잠깐독서 /〈제국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공저 <제국> (2000년)에서 20세기 후반 세계질서를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의 식민경영과 영토전쟁으로 집약되는 고전적 제국주의가 사라진 대신 탈중심·탈영토적 자본권력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율적 시스템으로 규정했다. 제국주의의 종언을 선언하고 지배자본이란 유령을 육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실제로 사망했는지는 의문이다. 미국·이탈리아·멕시코의 사회·경제학자 4명이 쓴 <제국은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하트/네그리가 제국적 국가의 역할을 심각하게 저평가하거나 무시했다”고 정면으로 반박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세계화 동력학’이란 부제가 달린 이 책에서 지은이들은 라틴아메리카, 러시아, 이라크 등 세계 곳곳의 사례를 바탕으로, 제국적 권력의 경제적 기초와 제국을 유지·확장시키는 국가의 활동을 분석한다. “제국적 국가는 오늘날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및 제국주의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힘들이 적대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전 지구적 각축장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제국>은 “좋게 말해도 이상한 책이다.” 패권국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이고, 국가가 정교한 무역장벽과 협약 등으로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보장하고 파산위기에서 건져주는 이 시기에 제국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들은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권위주의가 대중민주주의, 무장저항, 미국 공화국의 쇠퇴라는 근원적 방해물에 직면해 있는 점에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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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는 제국의 질서 구축을 위한 도구 (세계, 신동주 기자, 2010.04.02 (금) 21:40)
제국은 어떻게 움직이는가/제임스 페트라스 외 지음/황성원·윤영광 옮김/갈무리/1만9000원
 
안또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제국’(이학사)에서 지금의 세계가 ‘제국주의’ 시대에서 ‘제국’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새로운, 유동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제국의 개념이다. 따라서 미국뿐만 아니라 맥도널드나 마이크로소프트도 제국이고,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세계무역기구(WTO), 세계은행, 유엔 등 초국적 기구들도 제국인 셈이다.
 
‘세계화의 가면을 벗겨라’를 쓴 제임스 페트라스 뉴욕 빙햄턴대학 사회학과 명예교수 등이 쓴 ‘제국은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시장과 다국적 기업만이 지배하는 자율적인 제국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자본주의적 발전이 취하는 형태에 있어서 제국적 국가의 기능이 핵심적이라는 것이다.
 
제국과 제국주의 간의 논쟁은 자본주의의 역사 및 성격과 관련된 고전적인 쟁점이라면, 세계화와 국가의 역할 간의 관계와 관련된 논쟁은 최근 세계화라는 현상이 급부상하면서 제기된 새로운 쟁점이다. 책은 라틴아메리카, 러시아, 중국, 이라크를 비롯한 세계 곳곳의 사례를 바탕으로 한 폭넓은 논의를 통해 제국적 권력의 경제적 기초와, 제국을 유지하고 확장시키는 국가의 활동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한편, 저자들은 흔히 대외원조라 불리는 공적개발원조를 원조자의 이익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보면서 1940년대 이래로 대외원조가 제국 질서 구축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어 왔음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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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공허함의 완전한 종합판? (레디앙, 2010년 04월 17일 (토) 11:23:34 황진태/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객원연구원)
[서평] 『제국은 어떻게 움직이는가?』…제국론 vs 제국주의론 
 
2000년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공저한 『제국』이 출간되면서 국외서 상당한 반향이 있었다. 국내서도 대표적인 자율주의 전도사인 조정환이 2002년 펴낸 『지구제국』을 통해서 논쟁이 이어졌다. 좀 냉소적으로 말하면 제국주의 시각이 중요하다고 보는 전통 맑스주의자들은 『제국』을 물고 늘어져 논문업적 쌓는 데 도움 받았고, 자율주의자들은 촛불집회를 기회로 상당한 주목을 받아 양측이 손해 본 건 없었다.
 
언론에서까지 관심을 보여 몇 년 전 <한겨레>에서는 제국이냐 제국주의냐에 관한 기사를 기획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일장일단이 있는데 바로 제국-제국주의의 대립각을 세우고, 각 측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정작 대립각을 줄이고, 소통하기 위한 별 다른 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소개하는 『제국은 어떻게 움직이는가?』(제임스 페트라스 등 공저)는 어느 정도의 소통에 기여가 있을까? 이 책을 만든 출판사의 대표는 다름 아닌 제국주의론에 비판적인 조정환이다. 출간기획의 의도를 추측하면 첫째, 『제국』에 대한 제국주의론자들의 비판이 조악하다는 것을 보여주든가 둘째, 국내에서 이미 제국-제국주의 양자구도를 부각시키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서구학계에서의 『제국』 비판 서적을 소개하는 게 생산적 논쟁을 위해서 필요해서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특히, 그간 국내 『제국』 비판 논의는 일찍이 2000년대 초부터 있었지만 논쟁은 학술논문에 한정되었고, 대중을 대상으로 한 단행본 출간이 전무했다. 2007년 번역된 『제국이라는 유령』은 학술논문이기보다는 서평 수준의 글들을 짜깁기한 거라서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이번에 출간된 『제국은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제국』 논의에 관심 있는 학자나『제국』만 읽은 독자들에게는 나름의 균형추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한다.
 
책의 구성을 간단히 소개하면, 1장에서는 제국주의론의 입장을 견지하고서 『제국』이 깔고 있는 전제들을 꼼꼼히 비판하고 있어서 독자들이 가장 흥미롭게 읽을 부분이다. 2~3장은 권력은 어느 곳에 있다는 『제국』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실제 존재하는 제국의 경제적 기초(가령, 다국적 기업 본사의 입지)가 제국(특히, 미국)에 몰려 있다는 통계를 통해서 반박하고, 이러한 제국의 경제적 기초를 닦는 주체는 다름 아닌 국가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4~6장은 저자들의 관심 지역인 라틴아메리카와 미국의 관계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제국의 수탈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제국주의적 시각의 중요성을 밝혔다. 7장은 반제국주의 정치의 계급 역학이라는 장의 제목에서 보듯이 제국주의 구도에서 여전히 계급이라는 개념의 유용성을 강조하면서 『제국』에서 말하는 다중(multitude)에 내포된 불명확함을 비판하고, 반제국주의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8~11장까지는 유럽, 중국, 러시아 등의 분석을 통해서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역학을 살피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의 가장 칭찬할 만한 부분은 저자들 스스로 밝히듯이 “『제국』의 수많은 불확실한 주장들을 뒷받침할 만한 역사적이며 경험적인 근거가 부족한 것에 대한 학문적 검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면서 자신들은 다양한 통계자료들을 끌어들여서 이러한 『제국』의 허점들을 논박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균형추 역할 이상으로 제국-제국주의 양자구도의 소모적 지점들을 허무는 데 얼마나 일조했는가를 생각하면 내가 보기에는 이 책도 『제국』에 대한 안티테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제국』에서 네그리와 하트가 민족투쟁, 계급의 역할을 간과했듯이, 본서의 저자들은 세계화가 형성되는 다양한 역동성의 계기들을 제국주의라는 틀에 무리하게 끼우기 위해서 외면하고 있다. 저자들은 1장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트와 네그리의 책은 전 지구적 발전의 동학을 분석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저자들에 따르면 과학과 기술력의 결과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오늘날 시장과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자율적인 '제국'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 논제에 직접반대하면서 자본주의적 발달이 취하는 형태를 결정하고 그 체계를 보존하며 그것을 변화하는 조건에 적응시키는 제국적 국가의 역할을 하트와 네그리가 심각하게 저평가하거나 무시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혁신과 과학, 그리고 기술이 자본주의 생산성에 미치는 경제적 영향이 과대평가되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제국』은 과학과 기술력의 혁신을 지구적 발전의 중요한 추동력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다소 기술결정론적 시각에 대한 비판은 이전부터 있어왔다.(대표적으로 마뉴엘 카스텔에 대한 평가) 기술력이 뒷받침되어 거리와 시간의 마찰을 극복한 다국적 기업들을 통하여 그야말로 초국가적 자본가 계급이 출몰하고 있다.
 
하지만 하트, 네그리의 기술에 대한 긍정을 기술결정론으로 낙인찍는 것은 과하다. 하트, 네그리는 기술발전이 단순히 자본가의 혜택일 뿐만 아니라 -‘계급’이라 부르든 ‘다중’으로 부르든- 밑으로부터 다양한 저항 또한 초국가적으로 발생하면서 자본에 맞서고 있는 지점을 통찰하고 있다.
 
저자들은 반제국주의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어떻게 계급의식이 불분명하고, 교통과 인터넷이 발전한 오늘날을 읽는 데에는 경직되어 있다. 저자들은 『제국』의 한계와 더불어 의의도 지적하는 대화를 시도했어야 했다(이는 하트, 네그리에게도 해당한다). 하지만 그러한 의의는 침묵하고, 저자들은 하트, 네그리 논의를 수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율주의를 수용한 좌파 학자들을 싸잡아서 비판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그런데 책에서 그들이 누구인지 이름이 없다).
 
저자들의 비판처럼 『제국』 논의를 무비판적으로 넙죽 받아먹는 학자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트, 네그리가 바라보는 밑으로부터의 초국가적 운동이 서구인들에 한정된 점을 비판하면서 서구 이외의 초국가적 사회운동을 조망하는 등의 논의를 발전시키고 있는 학자들도 있다. 즉, 나름대로 『제국』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새로운 사회현상을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이러한 좌파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제대로 된 검토도 없이 선언적으로 싸잡아 비판하면서 제국-제국주의 구도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자들의 시각은 기존 세계화 논의와도 연결되어 실로 ‘무지’를 보인다. 저자들은 전지구적 발전의 동학을 보는 세 가지 관점으로 첫째, 국제적 발전(근대화론), 둘째, 세계화 셋째, 제국주의로 구분하면서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보았을 때 “발전과 세계화는 모두 '제국주의'라는 전혀 다른 기획과 의제에 씌워진 이데올로기적 가면”으로 일축해버렸다.(20쪽)
 
이렇게 발전과 세계화 논의를 싸잡아서 비판하는 것은 자신의 입장을 뚜렷하게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과연 얼마나 제국-제국주의 양자구도를 허무는 데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저자들이 바라보기에 “세계화 이론가들은 제3세계 국가를 힘없고, 국가의 속성들을 결여하고 있으며 세계화의 힘에 저항할 수 없다고 묘사”(92쪽)한다.
 
저자들의 선의를 십분 헤아려 볼 때 저자들은 세계화 이론가 중에서 일부를 두고서 말하는 듯싶다. 저자들이 바라보는 소위 세계화 이론가란 토마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오마에 겐이치의 『국경 없는 세계』, 『국민국가의 종말』 등으로 대표되는 과대세계화론자들을 지칭한다. 이러한 과대 세계화론자들의 논의가 주류 언론, 경영학계서는 주류적 인식일지 몰라도 세계화를 연구하는 지리학, 사회학에서는 단순히 현재의 중심-주변의 구도를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러한 구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곳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의 역동성을 살펴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오히려 저자들이야 말로 세계화를 밖(제국)으로부터 주어지는 것(pre-given)으로 이해하지만, 지리학에서는 다양한 규모(scale)에서 활동하는 행위자들과 제도, 역사 등이 우발적/필연적으로 경합하면서 구성되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다규모적(multi-scale) 인식은 제국주의적 시각보다도 유연하게 대안적 시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식론적 틀을 제공한다. 본 서평에서는 지리학적 입장에서 사소한 문제 제기지만 다양한 분야의 시각에서 비판적 읽기가 가능하겠다.
 
『제국은 어떻게 움직이는가?』의 한계는 『제국』의 안티테제로서 목적이 강한 나머지, 『제국』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의 생산적 논의를 간과하고, 세계화 이론가들을 협소하게 규정하면서 소통창구를 막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저자들이 『제국』에 붙인 “지적 공허함의 완전한 종합”은 실로 『제국』의 안티테제로 만족하는 제국주의론을 포함해야만 비로소 지적 공허함의 완전한 종합이 만들어진다. 이는 저자들이 강조하는 실천적 관점에서도 별로 영양가가 없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각자의 진영을 탄탄하게 하기 위한 적대적 공존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저자들이 행동하는 지성이라는 것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아무래도 제국이냐 제국주의이냐는 틀 자체가 N극과 S극처럼 이상화된 잣대(idealized standard)를 제공하고, 그 사이에서 경험적인 연구를 통해서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독자들의 몫인지 모르겠다. 일단은 나침반부터 갖추어야 하는 거라면 『제국』과 함께 상극인 본서의 일독을 권하지만, 독자들은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양 진영의 논리에 휘둘리기 보다는 자신의 사고로 유의미한 부분을 창조적으로 발견했으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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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5 22:37 2010/04/05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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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미역을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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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꿀꿀하던 차에 이 글 보고 엄청 웃었다. 

미역의 속성을 떠올려보면 대략 짐작이 가는 상황이다. 근데 이게 실화일까.

여간해서는 트위터에서 화제가 된 것을 옮겨오는 일은 없었는데, 이건 진보블로그의 다른 이들과도 공유하고 싶어 옮겨온다.

 

꿀꿀하던 차에 뻥 터졌어요. 제 블로그에도 옮겨갑니다 RT @leftjap @yuno815 엄청 웃고 싶은 분들을 위한 글. '미역을 조심하세요.' 참고로 저 지금 웃다가 실신할 지경입니다.http://bit.ly/bTDKLT @tattermedia

 

http://clien.career.co.kr/cs2/data/file/image/1270200427_jc20udBG_mee.jpg

 

예전에 자취할때 집에먹을게 아무것도 없어서 컵라면으로만 연명했던 적이 있었다
근데그것도한3일지나니깐 라면조차떨어져서 끗..
월초에나 늘 돈이 들어오는데 그때거하게 질러버린게 있어서.......
통장잔고 레알3천2백 얼마 있었고...
그걸로 한 일주일은 더 버텨야 하는 상황이였지
냉장고를 뒤졌다 뭔가 퍼런걸로 잔뜩뒤덮인 마늘하고 액체화 되어가는 버섯나부랭이뿐!!
조미료 넣어두던 찬장을 뒤졌다 소금 후추 다시다이런것들뿐........근데 그 조미료 병들 뒤에서 말린 미역봉지를 발견했다!!
평소처럼 오덕질하면서..그거 옆에다 두고 오독오독씹어먹었다 한참집어먹다 잤다..
그런데.........앀ㅋㅋㅋㅋㅋㅋㅋㅋ발ㅋㅋㅋㅋㅋ
새벽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역이 뱃속에서 불어섴ㅋㅋㅋㅋㅋㅋㅋㅋ
자다말고 엉청난 토기를 느껴서 일어나보니
베게와이불에 갓 따다말린듯한 촉촉한 미역들이 널부러져있고 바로 달려가서 변기에다 미친듯이 토하는데.........
레알!!내뱃속에서악마가자라는줄알았다ㅋㅋㅋㅋ
토해도 토해도 퉁퉁불은 미역이계속나와..나참ㅋ
결국 119에신고하는데 뭐 말만할라고하면 계속 토나와서..미역질질흘리면서 살려달라고 외치면 울었다ㅋㅋㅋㅋ
무슨일이냐고 하시는데 이걸 뭐라그래야될지
모르겠고 너무 무섭고정신이 없어서......
"미역을 계속 토하고있어요"라고 했는데....
전화받은사람이웃더라 Aㅏ~~.............
응급실 실려가고 그 엠뷸란스안에서도 
계속 토했음 무슨사발 같은걸받쳐주는 그거들고있는사람이"이거....미역맞죠?".....그래서또한번울었다.....
응급실에서 사정설명하면서 토하는데 의사도울고 나도울고 뒤늦게오신 부모님도울었다.....

미역은 무서운 음식이다
다들 미역을 조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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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3 01:33 2010/04/03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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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정치학을 하는 문제에 관하여(최장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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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최장집 교수가 쓴 '한국에서 정치학을 하는 문제에 대하여'라는 글을 읽었다. 정치학이라고 하였지만, 다른 사회과학에도 적용될 수 있고, 특히 행정학, 정책학을 하는 이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글이다.

 

이 글이 예전 학진의 웹진, 지금의 한국연구재단 웹진에 실렸는데, 한국연구재단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 찔리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이 글을 읽지 않았을 테고...

 

의외로 상당히 긴 글이고, 연구재단에서 저작권 운운하길래 발췌해서 담아왔다. 이 정도도 문제가 될까. 원문은 제목의 링크를 따라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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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정치학을 하는 문제에 관하여

최장집(고려대학교명예교수. 민주주의교육연구센터소장), 한국연구재단 웹진 2008년 2호(12월)
  

1. 문제의 두 측면
‘한국에서 정치학을 하기’라는 주제는 두 의미의 말이 결합된 것이다. 하나는 ‘정치학을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한다’는 것이다. 
사회과학 일반에 대해서도 해당될 수 있겠지만, 정치학은 기본적으로 가치중립적이기 어렵다는 특성을 갖는다. 학문의 성격을 이론적 이성과 실천 이성의 구분으로 나누어 볼 때, 정치학은 후자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말이다. 정치학이 실천적 학문이라는 점 때문에 두 가지 요소가 더 지적될 수 있겠다. 하나는 정치학은 특정 정치공동체와 관련된 역사적, 경험적 문제를 포괄하며, 그 사회가 해결해야 할 중심적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학을 하는 사람들이 그 자신의 학문적 혹은 지적 행위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여 사회에 대한 책임 윤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2. 정치학을 한다는 것
가치의 권위적 배분으로 정의되는 정치는 인간 행위의 개별적이고 사적인 영역이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집단적 인간 행위와 사회적 힘의 관계를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행위는 개별 정치인들의 행위라기보다는 집단(합)적 행위와 이를 둘러싼 경쟁, 갈등, 투쟁이 중심이 된다. 그러므로 이스턴의 정의는 지나치게 가치중립적이다.정치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윤리적 문제와 결부되어있기 때문에,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 이루어지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이를 어떻게 ‘좋게’ 이루어지도록 할 것인가 하는 가치의 문제를 포괄하는 행위이다. 
정치를 서술적으로 말한다면 집단과 집단, 신념과 신념 사이에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을 둘러싼 갈등 내지 경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민주적 가치의 추구라는 점에서 정치는 힘의 차이가 유발하는 통치와 피통치, 지배와 피지배, 민중과 엘리트 간 갈등 내지는 모순으로부터 발생하고, 이 과정에서 사회 세력 간, 사회 집단 간 힘의 차이가 좁아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정치학은 이와 같은 정치의 두 측면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특히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볼 때, 그 가치는 인간의 평등이라는 대전제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고, 이 중심 가치로부터 차별과 배제, 소외, 억압에 대한 부정과 같은 가치들이 정의의 원리로서 파생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치들을 실현코자하는 끊임없는 운동이야말로 민주화를 추동하고, 또 정치변화를 가져오는 동력이 아닐 수 없다.
 
3. 한국에서 한다는 것
보편적 이성, 보편적 학문 이론이 더 넓고 더 깊게 한국사회에 수용되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에서 학문의 보편성을 확대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학문이 그것이 발 딛고 있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문제의식에 기초하지 못할 때 학문의 발전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기여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 및 정치와 관련하여 우리가 배울 것이 더 많은 부분은, 미국에서 1960~70년대와 그 이전 시기에 발전한 이론에 있다는 생각이 크다. 나의 경우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때늦게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로마/르네상스 공화주의, 17,8세기의 자유주의, 미국 헌법 등을 공부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의 정치학에서 학문발전의 사이클은 한국 정치현실의 전개와 병행하고 미국의 이론 및 방법론과는 병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정치가 안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것, 보다 큰 문제는 한 세대 훨씬 이전의 이론에서 더 중요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 다른 사회와 역사적 경험에서 발전한 이론에 대하여 그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그 이론과 동일한 문제에 대한 경험을 갖지 않을 때 그는 그 이론의 의미와 진실을 이해할 수 없거나, 한다하더라도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높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이론과 실천』, 『지식과 관심』을 통하여 인간의 지식이 경험적, 역사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인지적 관심, 그 관심이란 이데올로기와 권력 구조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성찰하는 자기 성찰적, 지적 행위라고 이해한다. 내가 미국 이론에 대해 가졌던 관심은 그러한 문제의식과 유사하다. 자본주의 산업화와 노동문제,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정당체제나 선거 경쟁, 노동운동의 경험과 이론에 대해 자기 성찰적, 지적 관심을 가질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중요한 기준은, 한 나라의 정치학자는 그 사회와 대면하는 중심적인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느냐, 그리고 현실 속으로 들어가 얼마나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그 문제와 씨름하느냐, 그로부터 얼마나 그 사회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좋은 이론을 만들고, 그에 기초하여 얼마나 좋은 대안을 제시하느냐 하는 것이다. 한 정치학도가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정치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 정치학의 중심이라 할 미국에서 정치학을 하는 경우에도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성장배경인 모국의 경험과 문제의식을 지닐 때, 그는 그로부터 세계의 보편적인 문제를 보다 더 깊이 있게 천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학계의 대가들, 주요 이론가들, 그들이 외국에 성장 배경을 갖는 사람인 경우, 예외 없이 그러하다.
학문이 이루어지는 대학생활, 제도가 학문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임은 물론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제도와 대학생활, 영어교육의 강화와 같은 교육내용은 신자유주의적 시장원리가 주도하는 세계화의 영향 하에서 빠르고도 과격하게 미국화되고 있다. 제도 변화와 학문 내용의 변화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학문하는 사람에게 있어 먼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현실로부터 문제를 발견하고, 경험적 자료들을 이론화하고,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결코자 시도하는 것은 사회과학, 정치학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현실에서 현실로부터 이론을 만드는, 현실 우선의 현실-이론관계를 유지하는 학문적 태도를 견지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외래의 이론을 끌어와 구조와 성격이 다른 사회에 그 이론을 발전시킨 맥락을 제거하고 무매개적으로 이를 적용하여 그 사회의 현실을 분석하고, 그로부터 문제해결의 대안을 위한 이론을 끌어올 때 그렇게 수용된 이론이 얼마나 그 사회의 학문발전이나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은 일종의 주객전도 현상이고 이론에 의한 현실의 소외 현상이다. 즉 이론을 수용한 사회가 그 이론에 의해 소외되는 것이다. 한국학계에서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에 그리고 정책 커뮤니티의 전문가들이 외국의 이론을 무차별적으로 들여와 이를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는 현상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4. 연구 환경의 변화와 학문하는 자세
제도의 외양적 측면 이외에 실제로 미국 체제가 갖는 경쟁적이고 개방적인 성격, 그리고 성과주의 원리에 기초한 연구업적에 대한 보상체계가 그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한국에서도 20세기 초 독일의 대학 체제에 대해 베버가 말했던 현상, 즉 전통적인 소규모 장인적 제도들이 미국식 경쟁과 대규모 체제로 전환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대학과 전문 연구영역에 대한 많은 투자와 그로 인한 규모의 비약적 팽창과 외양적 발전이 얼마나 대학과 학문영역에서의 내적 발전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양적 팽창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학문 발전은, 사회과학에 한정해서 말할 때 후퇴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그에 비례하여 발전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해답의 하나는 학문의 성격 또는 특성, 학자나 연구자들의 학문하는 태도에서 발견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학문의 발전이 아무리 개인적 노력의 결과라 하더라도, 학문 연구가 지속되고 권장될 수 있는 학문적, 사회적 조건이나 제도가 이를 뒷받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은 학문을 위한 중요한 인센티브가 된다. 그러므로 한 사회의 학문과 연구의 발전이 있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학자와 연구자가 가져야할 개인적 요소에 해당하는 진실을 탐구하고자 하는 정신, 말하자면 어떤 생명력을 갖는 힘 내지 동적 의지만큼 중요한 요소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학자와 연구자 개인이 학문하는 행위에 대한 헌신, 진정성, 몰입, 열정을 수반하는 내적 동인으로부터 발생한다. 학자의 이러한 내적 동인이 단지 경험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탐구에서만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그 사람의 학문과 연구를 추동하는 가치, 그것이 사회정의의 실현을 뒷받침하고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가질 때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두 번째로 학문과 연구를 지원하는 사회적 환경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문과 연구결과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평가,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보상체계의 발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자나 연구자 개인과 관계된 사적, 공적 관계에 있어서의 네트워크나 연줄관계, 또는 친소관계에 영향받음이 없이 학문의 내용과 연구 결과에 대해 그 자체를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학문 공동체나 학문의 제도적 발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보다 넓은 사회적 환경, 즉 연구와 사상의 자유, 이데올로기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정치적 권력으로부터의 자율성과 같은 사회적 조건들이 형성되고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환경적 조건은 반드시 연구비의 규모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정치적, 사회적 환경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그들이 오늘의 보수적 지배질서에 도전하지 않는 한, 그로부터 얻게 되는 보상이 너무 크며, 그 지위는 이미 너무 높고 특권적이기 때문에 다른 학문적 행위에 천착할 특별한 인센티브를 갖지 못한다. 이 학문적 성과의 부족분을 메꾸어 주는 것은 학술진흥재단이나 그 외 단체의 여러 연구비 자원을 통하여 양산되는 연구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루어지는 학문과 연구행위는 현실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과정에서 갖게 되는 주제설정과 문제해결에 대한 어떤 절박성에서 나오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학문탐구에서 열정을 갖기 어려우며, 갖는다 하더라도 지속되기 어렵다. 그것이 지적 관심이든, 현실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는 것이든 열정을 갖지 않는 학문연구는 살아 생동하는 연구를 만들어낼 수 없다. 정신없이도 학문과 연구는 얼마든지 가능하고, 돈이 연구에 투여되는 것만큼 논문 수의 증가를 가져오고, 그로 인해 학문의 양적 발전은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로부터 진정한 그리고 창의적인 학문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사례는 전통적인 장인적 도제제도가 그 틀을 유지하는, 즉 작은 돈, 작은 수의 연구자 풀을 가진 소규모 연구체제를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연구체제에 적응할 수 있는, 그 사회에 적합한 모델을 훌륭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의 사례에 비춰볼 때, 한국의 경우 상대적으로 많은 연구비를 투자하면서도 연구자 개개인의 정신에 있어서나 사회적 연구 환경 조건에 있어 만족스러운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일본이나 유럽의 대학들은 외양적으로는 초라할 정도로 소박한 대학의 캠퍼스와는 달리 많은 내실 있는 세계적인 학문적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대학들은 화려한 외양이나 연구비 규모와는 달리 그 내실은 무척 빈곤한 실정이다. 
 
5. 학문 발전을 저해하는 학문 외적인 문제
한국에서 대학교수들의 지위나 역할이 더 크게 느껴지는 까닭은 정치, 경제, 관계, 언론 등 다른 영역으로부터 나오는 엘리트 공급 기능이 상대적으로 엷다는 사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쟁과 세계화 시대, 지식정보산업 시대의 도래라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환경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나아가 민주화 역시 교수-전문가집단들의 역할을 축소하기보다는 확대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정책 형성과 결정이 정치참여의 이름으로 사회의 보다 광범한 전문가들의 정책투입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교수 및 전문 지식인들은 사회적 역할을 갖는 사회집단으로 접근될 수 있다. 교수와 전문가집단의 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국내의 좋은 학교 배경은 물론 나아가 외국대학, 특히 최근에는 좋은 미국대학의 배경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최근 년에 이르러 그러한 배경을 갖는 일은 점차 좋은 가정, 사회계층의 위계구조에 있어 상층에 속하지 않고서는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상 유지를 강화하는 지배적 가치와 담론을 공유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을 쉽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의 대학교수, 정치학교수, 또는 전문가지식인들이 한국현실, 민중문제로부터 쉽게 괴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치학, 나아가 사회과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는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탈냉전과 민주화 이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갖는 냉전반공이데올로기와 깊은 상관관계를 갖는다. 이데올로기는 학문발전, 특히 정치학에 유해한 효과를 창출한다. 권력이 동반하는 이데올로기는 권력을 평가하고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문제를 어렵게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정치학은 이데올로기의 비판을 중요한 기능으로 갖는다.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것이 효능을 갖기 위해서는 일정한 억압적 보조기능을 수반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론, 이념, 독트린, 가치체계 등의 여러 형태를 가질 수 있지만, 이러한 인지적 틀이 현실로부터 괴리되면서도 사실이나 현상인식, 그에 대한 판단력을 형성하면서 독자적인 신념이나 가치의 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특히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권력 작용의 정당화 기제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정당성의 어떤 원천이 될 수 있는 외국이나 외부적 자원으로부터 불러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또한 개인이 사회문제를 보는 인식과 비전을 형성함에 있어 특정의 요소를 극히 긍정적으로, 특정의 요소를 극히 부정적으로 보게 하는 가치선호의 선별기능을 통하여 인식작용, 지식의 학습, 판단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현실인식을 오도하거나 왜곡하도록 한다. 이데올로기가 강한 환경 하에서 지식인 일반, 특히 정치학자들은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능력, 이를 벗어나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사회의 정치학자, 사회과학자가 가질 수 있는 학문, 지적 탐구의 주된 관삼사로 등장할 수 있는 문제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사회에서 정치와 사회의 중심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탐구하고, 그 문제를 적시하면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오늘의 중심문제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와 사회 운영의 중심원리로서 군림하는 시장근본주의가 가져온 부정적 효과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조건으로부터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한국의 사회경제적 현실이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이 만들어낸 결과를 그 중심에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경험적이고 이론적으로 탐구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로 통칭되는 시장경쟁의 가치나 성장 지상주의는 그것이 전제하는 가치 자체도 문제려니와 그 이념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과정에서 수반하는 이데올로기적 전체주의화가 더 큰 문제라 하겠다. 그것은 다른 인간적, 사회경제적 가치에 대해 극히 적대적 태도를 가지고, 다른 이념과 가치에 대한 논의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강한 이데올로기적 공격성을 갖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비판적 사회과학, 비판적 정치학이 있다면, 그것은 경제성장의 가치, 부의 총량적 증가를 유일가치로 하여, 모든 다른 인간적 가치, 즉 사회성원의 경제적 물질적 가치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정치와 사회 발전에 따라 확대되는 사회적 시민권의 가치, 휴머니티의 가치를 부정하는 오늘의 획일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제어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을 창출하는데 기여하는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외국의 사례로부터 한국사회에 대한 어떤 비교의 준거나 발전을 위한 모델을 발견하려고 시도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현실을 중심으로 한 준거로부터 그 중요성과 장단점이 평가될 뿐인 것이다. 
 
6.학문 연구에 있어서 용기와 책임성
결론적으로 말해, 한국의 사회과학자, 정치학자가 취할 수 있는 바람직한 태도는 어떤 것일까? 하나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에 맞설 수 있는 학문하는 것의 용기라고 할 수 있다. 헤게모니에 맞선다는 것은, 그가 향유할 수 있는 특권적, 또는 기득적 지위나 사회적 보상으로부터의 소외나 그에 대한 포기를 감내할 수 있는 내적 결의와 그러한 자세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막스 베버의 말대로 ‘목적 윤리’와 ‘책임 윤리’를 함께 가질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학자와 전문가들의 목적 윤리란 진실을 탐구하는 정신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책임 윤리의 중요성이다. 물론 아무리 민주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보통 학자들에게 책임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늘의 현대사회에서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자들 역시 사회에 책임질 것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사회를 볼 때 학자/지식인 전문가들의 학문 행위는 반드시 학문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학문의 결과물과 지적 작업들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정책 자문과 대안의 형태로 투입되고 많은 경우 그것은 정책 내용에 영향을 미쳐 사회와 시민 일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식인들의 직접적인 정책 투입의 결과가 많은 경우 부정적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다. 사회가 학자와 전문가들에 의존하는 바가 클 때, 이들의 정치적 역할과 정책 참여의 결과는 보다 직접적으로, 그들의 학문의 결과와 지식은 간접적으로 사회 전체에,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삶의 조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지식인의 책임 윤리는 윤리라는 말이 뜻하듯, 어디까지나 도덕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정치적, 사회적 제재를 수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 측면만큼 한 사람의 학자 혹은 지식인에게 중요한 책무는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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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30 23:24 2010/03/30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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