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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지도위원, 단식 보름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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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단식 보름째가 된다. 한진자본은 여전히 요지부동.
그 동안 집회현장에서의 감동적인 추모사를 통해, 머리에 쏙쏙 박히는 생생한 강연을 통해, 가슴절절한 글들을 통해 알려진 그의 단식투쟁은 승리할 수 있을지...
 
여전히 네이버에는 김진숙에게 반한 사람들이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지만, 나는 물론 가입한 다른 이들도 그 열기가 시들하다. 글을 올리는 횟수로 줄었고... 왜 일까. 아무튼 그의 활동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관련 인터뷰기사를 담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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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일하고 죄인처럼 쫓겨나 사람이 안 죽고도 이겨야 합니다" (레디앙, 2010년 01월 22일 (금) 15:11:23 이은영 기자)
[인터뷰-단식 10일 김진숙] "비정규직 일할 권리 위해 투쟁" 
 
그는 “지난 10년간의 노동운동은 고인 물과 같다”며 “고인 운동이 썩는 걸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본인은 썩은 물에 들어가 있다는 걸 잘 모르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특히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진단의 단골메뉴로 지적되는 ‘이명박 정권 집권’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도 “언제는 적이 강하지 않았느냐”며 “노무현 정권은 노동자를 너무 잘 알아서 위기였고, 김대중 정권 때는 운동권이 정권으로 많이 흡수돼 전선이 쳐지지 않아서 위기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임단협-산재사고-휴가-추석성과급-연말성과급’등으로 1년 365일 공장 안에 갖힌 운동에 대해 “우리 모두는 우물 안 개구리로, 정작 위기는 우리”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이런 상황에서 연대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을 얻을 수 있겠느냐”며 “당장 내일 모이지 않아 다른 사람이 죽는 것보다 내 손가락에 가시 박힌 게 훨씬 아픈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대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산별정신이었다면, 그 방안은 지역이 돼야 한다”며 “한진중공업 사태가 터졌을 때 당장 30분~1시간 내에 달려올 수 있는 부산지역 노조끼리의 연대가 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전노협 당시 민주노총의 1/10도 안 되는 규모였지만 지노협을 중심으로 활동이 이뤄졌기에 운동이 힘을 얻었다”며 “당시에는 노점상, 여성노동자들이 모두 지노협에 들어와 있었기에 철거현장, 노점상 단속 현장에 노동자들이 함께 결합해 투쟁했다”고 되돌아봤다. 하지만 “한 공장 안에 함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도 끌어안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점상과 어떻게 연대하겠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바닥에 나앉아 굶는 이것밖에 할 게 없겠다고 마음을 굳히며 그래도 거창한 꿈을 품었습니다. 민주노총이 당장 천막을 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단위노조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한진중공업 앞에서 태종대까지 천막이 늘어설 것이고 그럼 이길 것이다. 사람이 안 죽고도 이길 것이다. 김주익도 그런 마음으로 홀로 크레인위에 올랐겠지요. 엿새를 이러고 있어보니 김주익은… 우리가 죽였습디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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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눈에 안 보이는 유령이다, 지금 나처럼…" (프레시안, 여정민 기자(=부산), 2010-01-22 오후 5:48:16)
[인터뷰]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 단식 중인 김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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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살 용접공 김진숙씨 “약자 외면한 노동운동 죽은 것” (경향, 부산 | 백승목 기자, 2010-01-26 18:24:20)
ㆍ그는 왜 혹한 속 단식농성을 하나
 
지난해 11월,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명예회복과 부당해고 결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 결정은 법적인 구속력이 없었다. 복직은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해 11월30일부터 출근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더 지독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한진중공업) 측이 정리해고 1000명을 포함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강행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출근투쟁은 곧 단식농성으로 바뀌었다. “‘큰일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안위는 아무 문제도 아니구나라는 생각…. 1000명 선의 정리해고요? 그것도 어쩌면 큰 문제가 아니죠. 2000명에서 3000명에 이르는 비정규직들은 정말 생존권이 걸려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식농성뿐이라는 판단이 들었어요.”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노동운동과 관련해서도 쓴소리를 서슴지 않는다. “노동운동이 과거 십수년간 많이 변질됐어요. 노동운동의 시발점은 세상과, 그리고 약자와 함께하는 겁니다. 그런데 90년대 후반부터 대기업 중심의 노동운동이 되면서 연대가 잘 되지 않고, 그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분위기가 고착화하고 있어요. 노조 내부적으로 패권 다툼만 더해지고 있고…. 비정규직, 노점상, 농민, 철거민을 모른 체하는 노동운동은 소외될 수밖에 없어요. 연대하지 않는 노동운동은 죽은 겁니다.” 그는 “촛불시위는 대중화했는데 최근의 노동운동은 세상과 담 쌓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으며, 이는 대중의 역동성, 운동의 진정성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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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6 20:23 2010/01/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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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학생인권조례는 제정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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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교육청이 작년 12월에 초안을 발표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다. 이것은 경기도 교육청의 다른 사업과는 달리 좌파적인 색채가 있다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 걸? 보수언론에서 연일 이에 대해서도 비난의 화살을 쏴댄다.
 
그래서 정말 문제가 있는 건가 싶어 조례안을 읽어봤다. 도대체 이게 왜 문제가 되는 걸까. 하지만 현장에서는 교사들의 우려가 상당한 듯 하다. 이는 도 교육청이 주최한 마지막 공청회에서 일부 교사들의 토론을 통해 나타나기도 했다.
 
저번 2학기 때 교육대학원에서 행정학교육론을 강의하면서 그 과목을 수강하는 교사들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주위에 안면이 있는 교사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소위 '생매스' - 운동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반대중을 말한다. 이런 말 오랜만에 써본다. 예전엔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이런 말 쓰면 거부감이 들었는데...- 가 아니라서 현장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한다고 보기 어려웠다. 수강 교사들은 학생인권이 강조되는 분위기를 탐탁치 않아 하고, 체벌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학생들에게 애정이 없다면 매를 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해줄 수 없었다. 그게 수업의 주된 내용도 아니었고... '꽃으로도 사람을 때리지 마라'고 하지만, 인간적인 교화만으로는 교육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상은 계속 좋아지고 있는 걸까. 촌지도 없어지고, 가르치는 것 또한 신성한 노동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가는데, 과거보다는 더 자율적으로 되었고, 개방적이며,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권한과 권리도 더 많이 주고 있는 듯한데, 교육현장은 더 어려워지고 있는 걸까.
 
이계삼 님이 쓴 글 마지막 부분에 언급된 '새로운 학교의 전망' 10가지 열쇳말 중 다섯가지가 인상적이다. 항상 현실과 이상을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가 과제인데, 아래 제시된 것이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현실화되고 있는 것을 좀더 구체화한다고나 할까.
 
1. 학생은 존엄한 권리의 주체이다.
2. 학교는 참여와 결정을 훈련할 수 있는 배움터여야 한다.
3. 다양성은 교육의 초석이다. 학교는 차이를 존중하고 차별에 맞서야 한다.
4. 배움은 학생이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감당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5. 책임은 자유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 과정에서 여기에 직접 관여되는 사람은 물론,  관심있는 학생, 학부모, 그리고 시민들이 많이 배우고 토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오히려 가치있는 게 아닐까.

  
2010. 1. 28
찾아 보니 공현님이 인권오름에 쓴 글이 학생인권조례의 의의에 대해 잘 얘기하고 있더라. 그래서 이 글을 추가로 퍼왔다. 내가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의미에 대해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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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학생인권조례, 어떤 의미로든지 중요한 한 걸음 (공현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활동가, 인권오름 제 185 호 [입력] 2010년 01월 06일 15:24:31)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학생인권이 제도화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 우선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은 그동안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 판례, 국제기구의 권고, 인권단체의 주장 등을 통해서 개별적으로 제시되었던 학생인권에 대한 기준을 통합된 법제의 형태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학생인권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조차 부실한 한국 사회 실정에서,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은 학생인권의 구체적 내용과 최소한의 기준을 공식적으로 확인시키는 효과를 지닐 것이다. 이처럼 공식 확인된 학생인권의 기준은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인권침해 문제를 제기하고 싸울 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다. 또한 공식적인 규범의 제정은 그 자체로 사회 전체에 대한 인권교육적 효과가 있다.
 
물론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는 경기도 지역 학생들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는 점이 그 가장 큰 의의이다. 학생인권상황 개선을 위한 계획 수립과 집행, 학생인권 상황에 대한 조사와 평가, 학생인권침해 구제기구 설치 등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경기도 지역은 평준화 지역, 비평준화 지역, 부유층 거주 지역, 빈곤층 거주 지역 등이 뒤섞여 있으며, 두발규제, 강제적 자율학습, 체벌 등의 대표적 학생인권 문제에서도 상대적으로 심한 지역 중 하나로 꼽혀 왔다. 학생인권조례 제정 과정에서 학생들이 보여준 열렬한 환영의 분위기는 이러한 현실을 보여준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는 것은 변화의 완성이라기보다는 변화의 한 계기에 가깝다. 학생인권조례가 실현시키고자 하는 두발자유를 비롯하여 용의복장의 자유, 체벌금지, 강제적 자율학습, 보충수업의 금지, 학생들의 쉴 권리 보장 등은 학생들에 대한 통제와 학교 간이나 학생 간 경쟁을 강화시켜나가고 있는 교육 현실에서 유의미한 견제장치가 될 수 있다.
 
더군다나 현재 발표된 학생인권조례 초안을 살펴보면 학생들의 학교 운영 참여, 교육 정책 수립에 참여 등을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통로를 통해 학생들이 일상적인 학교 운영을 비롯하여 교육 현안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교육에 변화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학생들의 참여를 내세우는 짝퉁스런 교원평가제보다는 훨씬 더!) 또한 학생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질 조직과 기구 등은 학생들의 조직화, 세력화를 촉진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막연하게 전국적인 법률과는 달리 학생인권조례는 경기도 지역 학생들, 경기도 지역 단체들을 인권조례의 당사자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만들고 있다. 아직 학생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외칠 만큼 전국적으로 조직화되어 있지 못한 현실에서,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법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체가 명확한 동시에 피부에 와 닿는 사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상곤 교육감의 임기 중에 학생인권조례를 발의하고 논의하여 제정하려고 하다 보니 생기는 문제도 있다. ‘학생참여기획단’을 통해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고 있지만, 학생인권과 조례 제정 과정에 대해 같이 공부하고 토론하는 시간도 가지지 못하고 온라인을 통해서 학생들의 의견을 모으기에 급급한 상황이다. 연구팀도 고작 2개월밖에 안 되는 연구기간 동안에 설문조사, 면접조사, 외국사례조사를 시행하고 조례 예시안까지 만들어 내려다보니 조사 내용을 충분히 분석하고 논의하지 못했다. 자문위원회 또한 학생인권조례의 내용에 대한 논의는 1달도 못하고 조례안을 내놔야 하는 형편이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학생인권조례 제정 과정에서 경기도교육청이 지역 사회, 청소년단체, 교육단체 등을 충분히 잘 활용했는지도 의문이다.
 
제대로 된 내용으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될 수 있을 것인지 또한 우려스럽다. 경기도 교육위원들 다수와 경기도의회 의원 다수는 무상급식 예산 삭감, 학생인권조례 예산 삭감 등으로 김상곤 교육감의 정책을 막아설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경기도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은 학생인권법안, (학생회 법제화와 학생의 학교운영참여를 포함한) 학교자치법안 등도 제대로 통과시키지 않은 전력이 있다.
 
학교 관리자, 교사, 보호자(학부모 등), 학생들 내부에 존재하는 학생인권에 친화적이지 못한 분위기도 문제다. 연구팀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학교 관리자, 교사, 보호자 등은 학생들의 학교 운영 참여에는 큰 거부감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체벌 금지나 두발자유 등에는 상당히 큰 거부감을 보이거나 반반으로 의견이 갈라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도 체벌금지 등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정도 있다.
 
입시경쟁, 학교서열화, 학벌, 교육예산 부족, 장애차별, 크게는 자본주의․국가주의 등은 ‘도 차원의 조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학생인권 개선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학생인권조례는 이러한 것들을 해결해나가는 과정 없이는 그 한계가 뚜렷하다.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고 통과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것인가? 한 지역에서 두발자유, 체벌금지를 명문화하고 제도화하는 것도 성사시킬 수 없는 사회적 조건과 운동 조건이라면 교육과 학교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학생인권조례는 이후 학생인권을 중심에 두고 학교가 변화해갈 가능성을 여러 가지 면에서 열어두고 있는 조례이며, 그렇기에 학생인권을 위해 충분히 유의미한 한 걸음이 될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가 만약 통과된다면, 학생인권조례를 근거로 하여 이를 지키지 않고 학생인권침해를 일삼는 학교들에 맞선 학생들의 학교 현장에서의 저항과 행동의 불씨들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만약 통과되지 못하더라도, 학생인권조례 추진 과정과 무산은 학생들이 학생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적, 정치적 참여(학생인권조례를 무산시킨 원흉들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도)에 나설 충분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설령 도교육위나 도의회를 거치면서 무산되더라도 학생인권조례가 완전히 좌초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공신력 있는 연구결과가 존재하고, 제대로 된 학생인권조례안이 교육청에 의해 발표되는 것만으로도, 이후의 학생인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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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무슨 '좌파', '포퓰리즘'이 있는가" (프레시안,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2010-01-12 오전 9:49:03)
[학생도 인간이다] "언제까지 '상처와 무기력'만 가르칠 텐가"
 
요즘 학교에는 '그린 마일리지'라는 기막힌 제도가 있다. 기존의 '상·벌점제'에 때 빼고 광 낸 뒤에 영어로 옷을 입힌 것이다. 학생 지도 담당 교사들에게는 대체로 반응이 괜찮은 것 같은데, 아이들에게는 '캐안습'이다. 이 제도를 요약하면 이렇다. 아이들의 선행에는 블루 포인트, 악행에는 레드 포인트를 부여한다. 이를 적립하여 블루 포인트가 많은 아이들은 포상하고, 레드 포인트가 많은 아이들은 블루 포인트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게 함으로써 이를 상쇄시켜 '정상으로' 만들어 주고, 그래도 안 되면 징계를 하는 제도다.
 
선행을 포인트로 적립한다는 것도, 악행을 상쇄하기 위한 선행을 하고 그것을 '인증받아야'한다는 발상도,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가. 인간의 행동이란 상점과 벌점으로 손쉽게 범주화할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선을 드러내어 행하게 하면 반드시 위선이 된다. 악을 드러난 선행으로 상쇄하게 한다고 해서 그 악이 교정되지도 않는다. 체벌 대체라는 신사적인 명분을 갖추고 있지만, 그저 손 안 대고 아이들을 통제하겠다는 의도 말고는 달리 설명이 안 되는 제도인데, '그린 마일리지'는 별다른 저항 없이 학교 현장으로 진입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학생 인권' 문제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준거 기준을 제시한 반가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경기도 교육청이 지난해 12월 초안을 발표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작업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에 대한 보수 언론들의 공격도 연일 이어지고 있다. 법이 보장하고 국제적인 기준이 제시하는 만큼이라도 아이들 숨통을 좀 틔워주겠다는 게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는 일인지, 한숨이 나온다.
 
가장 많은 논란이 벌어지는 것은 역시 두발 부분이다. 하긴, 이 세상에는 짧고 단정한 머리 스타일로 정돈된 아이들을 보면서 안정감을 느끼고, 이를 '모범적'이라 믿는 분들이 참 많다. 그러나, 그게 '모범성'의 척도라면, 한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모범생 집단은 이른바 '깍두기'들이 아닌가?
 
아이들은 늘, 언제나, 떠든다. 아이들은 머리 모양을 가꾸고 싶어하고, 연애를 꿈꾸며 실제로 이를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아이들은 무엇보다 놀고 싶어한다. 이것은 마치 새가 지저귀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이들이 과하게 비싸거나,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는 머리 모양을 할 때, 수업에 방해를 끼칠 때, 바람직하지 않은 연애 관계에 빠져들 때, 그것은 박멸해야 할 '교육적 악'이 아니라 이해와 공감에 바탕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어야 할 '교육적 상황'인 것이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는 이러한 숱한 '교육적 상황들'에 두루 적용될 대단히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원칙들을 모아놓은 것일 뿐이다.
 
권리보다 의무가 우선이라 떠드는 이들이 있다. 서로 배운 바가 다른 것 같으니 따로 할 말은 없지만, 그렇게 말하시는 분들께는 자신의 의무는 잘 이행하고 있는지 살펴보시라고 이야기 드리고 싶다. '맞아봐야 정신차린다'고,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뇌까리는 댓글도 보았다. 그렇게 맞는 것이 좋으면, 계속 맞고 살 일이다. 남들까지 그래야 한다고 떠들 필요 없이 말이다.
 
교권 수호를 외치시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지난 시절로부터 오늘날까지 학생 인권이 없었듯 교권도 없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교권이 군대 지휘관처럼 아이들 앞에서 군림할 수 있는 '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교권이란 교사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존중하고 교원의 교육적 전문성을 발휘했을 때 '부여받게 되는', 지적 도덕적 '권위'이다. 그러나 지난 시절, 그리고 오늘날 교원들에게 요구된 것은 오직 순종과 경쟁에서의 승리 밖에 없지 않았던가.
 
보수 언론과 일부 인사들은 학생 인권 문제는 학교 자율성에 맡기라고 한다. 그동안 자율적으로 학생 인권을 충분히 유린해오지 않았는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는 헌법과 교육기본법이 보장하고 우리나라가 가입한 'UN 아동에 관한 권리 협약'을 따르자는 것일 뿐이다. 이건 그렇게들 좋아라 하시는 바로 '글로벌 스탠다드' 아닌가.
 
학생 인권은 우리들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 사회에 만연한 폭력, 그리고 그 대물림을 누군가는,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20년 전,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선생님을 꿈꿀 때, 나는 내가 교단에 설 때면 두발 단속이나 체벌, 강제 야자나 보충 정도는 당연히 사라져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당시의 민주화 흐름에 대한 분명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부모들은 학교가 아이들 머리를 단속해 주길 학교에 요청하고, 오래오래 붙잡아 두면서 공부를 많이 시켜주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20년 전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공부해야 한다. 밤12시까지 학교에 붙잡혀 공부를 '당하고', 몇 시간 못자고 또 새벽밥 말아먹고 학교에 나와야 한다.
 
아이들은 여전히 두발 단속, 복장 단속을 당하며 학교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자신들의 입장은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부모들도 학창 시절에 이런 일들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폭력을 내면화시킨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적 무기력, 순응적 태도, 남성적이고 군사주의적 사고방식들은 대개 학교와 군대를 통과하면서 내면화된 태도들이며, 지금도 학교 현장에서 이 폭력은 대물림되고 있다. 
 
아이들은 기본권이 유린당하는 공간에서는 절대로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과장한다. 학교 축제에서 몸빼바지를 입고선 코믹댄스로 사람들을 넘어가게 하는 모범생을 볼 때가 있다. 온갖 말썽을 도맡아 일으키는 사고뭉치가 체육대회 때 질풍 같은 드리블로 멋진 골을 성공시키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나는 어쩌면 그것이 그 아이의 '본연의 모습'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그 모습이 아름답고,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동안 모범생은 자신의 '모범성'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 위해, 사고뭉치는 '반항과 일탈'로써 부풀려진 자기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과장하게 된다. 그것은 끝내 상처로 남을 것이다.
 
아이들 본연의 모습은 유희의 공간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충분히 놀아야 한다. 그리고, 충분히 인격적으로 대우받아야 하며, 자신에게 찍힌 '낙인'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충분히 '섞여 있는' 환경 속에서 자라나야 한다. 그때서야 아이들은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아이들을 변호해 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아야 한다. 되바라진 아이들의 철없는 소리라고 미리 낙인찍지 말고 그 발언들 속에 담긴 중요한 인간적 진실들에 귀 기울이고, 거기에 도사린 상처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 아니, 그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논란으로써 이 중요한 문제가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이끌려 나왔으니, 조례의 초안(http://human.kerinet.re.kr)이라도 한 번 정독해 보자. 거기에 무슨 좌파가 있고 포퓰리즘이 있는지, 앞뒤 없이 내지르는 이야기 말고 사실에 입각해서 토론해 보자.
 
마지막으로, 나는 '학생인권조례제정자문위원회'가 제시한 '새로운 학교의 전망' 10가지 열쇳말 중 다섯을 소개하고자 한다.
1. 학생은 존엄한 권리의 주체이다.
2. 학교는 참여와 결정을 훈련할 수 있는 배움터여야 한다.
3. 다양성은 교육의 초석이다. 학교는 차이를 존중하고 차별에 맞서야 한다.
4. 배움은 학생이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감당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5. 책임은 자유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이 다섯은 오늘날 학교 교육이 사실상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내면 깊은 곳에 안고 있는 어떤 상처, 무기력과 깊이 관련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이 땅 민주주의의 훼절은 학교가 이 덕목들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 다섯 줄 문장을 읽으면서 정말 가슴이 뭉클했고, 그리고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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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교육청 "두발 제한 금지·체벌 금지·야자 선택" (프레시안, 강이현 기자, 2009-12-17 오후 5:52:18)
학생 인권 조례 초안 발표…2010년 2월 최종안 제출
  
"생머리는 '모범 엄마', 파마머리는 '불량 엄마'입니까?"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 2010-01-25 오전 10:17:31)
[현장] '경기도학생인권조례' 공청회…청소년이 말하는 인권 실상
 
"사명감에 아이들을 때렸고, 그런 악역을 즐겼다"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 2010-01-26 오전 8:58:26)
[현장] '경기도학생인권조례' 공청회…어느 학생부 교사의 고백
 
현직 교사이자 '좋은교사운동본부' 정책위원인 김성천 교사는 "학생의 인권을 무시하는 체벌이 빈번히 발생하는 이유는 시스템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김 교사는 "교사들이 체벌을 포기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데, 체벌까지 가하지 않는다면 학교가 아예 무너지게 될 거라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며 "이는 학교에서 체벌 말고 다른 방식의 징계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성천 교사는 "학교 폭력 사안이 발생했을 때 나름 매뉴얼이 제시돼 있듯이, 학교에서도 그런 절차와 시스템이 필요하다"며 "시스템의 부재는 교사로 하여금 체벌에 집착하게 만들며, 학생들에게는 몇 대 맞고 몸으로 때우면 된다는 식의 도덕적 해이를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성천 교사는 이번에 경기도교육청에서 준비하는 인권조례가 이러한 시스템을 논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효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심우근 교사도 동의했다. 심 교사는 " 매일 교문을 지나가는 아이들과 마주보며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왜 교육적이지도 않은 잡다한 규정을 가지고 교사와 학생이 서로 눈을 부라리며 이른 아침부터 맞서야 하는가'이다"라고 밝혔다. 심우근 교사는 이러한 규칙으로 인해 "교사와 학생 사이에는 쓸데없는 소모전과 맞서기가 빚어지고 있다"며 "학생들 마음속으로 전혀 수긍하지 못하는 규정을 대폭 정리하기 위해 조례가 제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동진 교사는 "학생의 일탈 행동에 법적인 측면에서 강력한 처벌이 뒷받침 되어야 학교에서 학생의 인권을 정당하게 보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며 "우리나라의 경우 청소년 범법 행위에 대한 처벌이 미흡하다"고 밝혔다. 자유를 주장하기 전에 책임부터 먼저 이행하라는 주장이다. 김동진 교사는 "인권조례가 생길 경우 교사들은 앞으로 학생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과 위기감을 가지고 있다"며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영란 교사는 "인권조례가 제정되면 아이들은 이걸 무기로 삼아 교사들을 공격할 것"이라며 "자정적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은 학생에게 인권조례를 적용하기는 무리"라고 언급했다. 김영란 교사는 "정 조례를 추진하고자 한다면 전체 교사의 의견을 수집해야 한다"며 "거기서 과반수의 동의가 이뤄질 때 조례가 통과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란 교사는 "제도는 법만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다"며 "환경이 제대로 마련된 뒤 제정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심우근 교사는 "현실적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억압받는 학생 다수를 방치하고 이대로 가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며 "현재 학생들은 강력한 통제로 인해 분노를 느끼고 있다. 이런 것을 바꿔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주의는 20살이 됐다고 갑자기 실현되는 게 아니라 학교에서 미리 준비시켜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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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관련기사
<표> 학생인권조례 초안 경기도교육위원 의견
<경기 학생인권조례 3차 공청회..찬반 공방 여전>
<학생들이 말하는 학생인권..경기교육청 공청회>
경기교육청 "학생 교내집회 허용 재검토"(종합)
<경기교육청 학생인권조례 도교육위서도 논란>
학생인권조례 필요성은 '공감' 교권엔 '우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교육위 통과 '불투명' (수원=연합뉴스, 김경태 기자, 2010/01/26 10:39)
교육위원 다수 부정적 의견..초안 손질여부 주목
 
연합뉴스가 26일 의장을 제외한 도교육위원 12명 전원을 상대로 조례안 초안에 대한 의견을 전화로 물은 결과 조례 초안에 대해 대다수가 반대하거나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조례안 초안에 대한 종합의견을 묻는 질문에 최운용 교육위원 등 10명은 시기상조, 시범운영 필요, 제도화 불필요 등을 들어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나머지 최창의 교육위원은 "취지와 목적에 동감하지만 제정시기의 완급조절이 필요해 지방선거 이후 추진해야 한다"고 했고, 이재삼 교육위원은 조례제정 자문위원으로 적극적인 찬성의견을 냈다.
 
논란이 된 조항에서도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이 중 수업시간 외 교내집회 보장 조항의 경우 10명이 반대 입장을 보였고 1명만 도입에 찬성했다. 이 조항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보인 최창의 교육위원은 "매우 민감한 문제"라고 언급했다. 체벌금지 조항의 경우 사랑의 매나 현행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7명이었고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5명으로 나와 체벌금지 원칙에 동의하면서도 허용수위를 놓고는 의견이 조금씩 달랐다. 최대 관심사안 중 하나인 두발.복장 자율화 조항에 대해서는 찬성 의견이 2명이었고 10명은 자율화에 반대하거나 조례 조항이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조례안이 도교육위를 통과해도 도의회 '심의장벽'을 또 한번 넘어야 한다. 도교육청과 도의회가 무상급식 예산, 교육감 조사특위, 교육국 설치 등을 놓고 사사건건 갈등을 겪고 있어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산 넘어 산' 형국이다.
 
교육청은 자문위 제출안을 검토한 다음 별도 공청회와 입법예고를 거쳐 이르면 3월 도교육위원회에 조례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도교육청은 교내 집회 허용 등 논란이 된 일부 조항을 손질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어 그 결과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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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10대들보다 더 무서운 것은… (프레시안, 홍성태 상지대 교수·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 2010-02-17 오후 12:10:47)
[홍성태의 '세상 읽기'] 학생 인권 조례를 위하여
 
2010년 2월 10일 경기도 교육청이 의뢰한 '경기도 학생 인권 조례 결과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경기도 학생 인권 조례 자문위원회는 많은 회의와 여러 논란 끝에 모두 5개 절의 49개 조로 이루어진 '경기도 학생 인권 조례 최종안'을 마련해서 경기도 교육청에 제출했다.
 
마침 경기도 학생 인권 조례안이 발표될 즈음에 이 나라의 학생들이 얼마나 무서운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경기도에서 또 발생했다. 이른바 '막장 졸업식 뒤풀이'가 그것이다. 10여 명의 남녀 학생들이 옷을 홀랑 벗은 채로 피라미드를 쌓고 담장 앞에 모여 서서 사진을 찍는 등의 모습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예전에는 '막장 졸업식 뒤풀이'는 없었지만 그 원천으로 지목되고 있는 학교 폭력은 예전에도 역시 심각했다. 나는 국민학교 때 이미 슬리퍼로 따귀 때리기와 몽둥이로 발바닥 때리기를 경험했고, 중학교에서는 펜치로 꼬집기, 원산 폭격, 원산 철교 등의 폭력을 겪었으며, 고등학교에서도 따귀 때리기, 손바닥과 허벅지 때리기 등의 다양한 폭력을 겪었다.
 
폭력의 문화를 육성하고 유포하는 데 학교가 큰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 한국의 학교에서 학생들은 '이중의 폭력' 속에서 살아간다. 하나는 교사의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의 폭력이다. 교사들은 보통 손바닥 때리기로부터 시작해서 실로 다종다양한 구타의 방식을 가르쳐주고, 무릎 꿇고 손들기부터 시작해서 더욱 더 다종다양한 기합의 방식을 가르쳐준다.
 
사실 우리가 폭력으로 인지하는 것들은 공식적으로는 대체로 거부되는 것이며 우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와 달리 공식적으로 거부되지 않으며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폭력도 있다. 두발과 복장에 대한 규제, 소지품 검사,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규제가 그것이다. 학생들은 특히 두발에 민감하다.
 
두발과 복장, 소지품 검사,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규제는 그 자체로 반교육적일 뿐이다. 내가 알기에 그 뿌리는 사소한 규율들을 끝없이 강제해서 병사들을 '순응하는 주체'로 만들고자 했던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규율 방식에 있다. 우리의 학교에서 학생들은 '이중의 폭력'이 아니라 '삼중의 폭력' 또는 '사중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그야말로 '새벽별 보기 운동'의 수준에 이르러 있는 학벌 경쟁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제도적 폭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태에 대해 학생들이 자유롭게 저항하는 것은 고사하고 발언하는 것조차 강력히 규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0대는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장 발랄한 때이다. 10대들이 이 시기를 '보호'의 명목으로 각종 규제 속에서 보내게 하는 것은 10대의 발전을 억압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폭력에 순응하며 폭력을 활용하는 주체로 만드는 것이다. 10대들이 정말 이 나라의 미래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무엇보다 지독한 학벌경쟁 폭력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다양한 폭력에서 벗어나서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서 자유롭게 살도록 해야 한다.
 
경기도 학생 인권 조례안은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새로운 출발이다. 아무쪼록 폭넓은 토론이 이루어져서 훌륭한 조례로 제정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성과가 경기도에 머물지 않고 전국으로 퍼져나가 '정글고'의 상태에 있는 이 나라의 학교와 교육이 크게 개선되기를 바란다. 학생을 당연한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아니라 단순한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보호 이데올로기'의 문제도 이참에 전면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란다. '보호 이데올로기'는 학생을 위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학교와 국가를 위하는 논리의 문제를 안고 있다. 학생들은 꿰뚫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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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6 20:06 2010/01/2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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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피언스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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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피언스가 3월에 발표할 앨범 ‘스팅 인 더 테일’을 끝으로 활동을 마치기로 했단다. 사실 스콜피언스의 노래를 많이 아는 것도 없지만, 괜히 해체한다고 하니까 기분이 좀 거시기하다. 80년대가 전성기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노래를 한번쯤은 다들 들어봤을 터이다. 경향에 전설적 록밴드라고 했으니 제대로 전설이 되려면 이쯤해서 사라져주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5월부터 마지막 월드투어를 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한국도 들릴까.
예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스콜피언스 관련 글을 담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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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rpions - Hurricane 2000  2004/10/08 02:40
 
오늘 날씨도 꾸질꾸질하고 해서 오랜만에 경쾌한 노래 하나 올린다. 스콜피온스가 2000년  발표한 앨범 [Moment of Glory]에 수록된 [Hurricane 2000]이 그것이다.
 
올해로 데뷔 35주년을 맞은 독일 출신의 록밴드 스콜피온스(Scorpions)는 9월 중순 내한하여 열정적인 공연을 보여준 바 있다. 'Always Somewhere', 'Holiday', 'Still Loving You', 'You & I', 'When the Smoke is Going down', 'Wind of Change' 등 흘러간 옛노래도 있고, 또한 최근에 새 앨범도 발매하였지만, 스콜피온스의 노래 중에서 요새 나에게 착 와닿는 노래는 이 [Hurricane 2000]이다. 울적할 때 기분전환하는 짱이다. 모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기에 귀에 익숙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앗싸!
Rock You Like A Hurricane!
 
Scorpions, 'Moment of Glory' - Hurricane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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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러빙 유 제멋대로 부르기  2005/11/07 19:46
 
예전에 한참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 홈(Comeback Home)>을 제멋대로 불러서 유명해진 '음치가수' 이재수가 있었다. 그 데뷰앨범 이름이 <스틸 러빙 유>였는데, 서태지 쪽에서 인격권 침해로 형사고발과 동시에 음반판매 금지 가처분신청을 당해, 결국 빛을 보지 못했다.
 
그 이재수가 처음에 유명해진 것은 스콜피온스의 <스틸 러빙 유>를 패러디하여 음치 수준의 목소리로 부른 것을 온라인상에 올린 다음에였다. 특히 참새가 전기줄 위에서 노래부른 것은 엄청 알려졌었고, 예전 내 홈페이지에도 올려져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링크가 없어져서 아쉬웠는데, 최근 쥬느님의 블로그에서 이를 발견했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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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5 21:16 2010/01/25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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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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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에 관한 기획글이 실린 「민주사회와 정책연구」2008 상반기 (통권 13호)를 다시 보다가 그 뒤에 실린 글들도 짬을 내서 읽었는데, 특히 종엽형이 쓴 글이 인상적이었다. 요약글에서도 나오듯이 개념의 신자유주의화가 성공적일 경우 비판적 의도를 가진 사회이론가 - 여기서는 부르디외를 예로 든다 - 조차 보수적인 개념을 학문적 상식의 형태로 수용하게 되고, 비판적 사회이론이 주변화되는 결과를 야기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를 위해 논하는 것이 게리 베커의 인적 자본과 콜만의 사회자본, 그리고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개념이다. 
 
게리 베커의 인적 자본 개념은 경제학이 경제 외의 다른 거의 모든 영역에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고 휘젓고 다니게 만든, 경제학의 제국주의화를 이끈 주범이기에 특히 관심이 갔고, 서술된 내용은 예상한 대로였다. 이런 것에 대한 심층적인 비판이 필요했다.
  
운동의 대중화, 설득력의 확산을 위해 차용하는 다양한 개념들, 여러가지 대중문화의 코드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선상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패러디를 하면 대중들도 잘 알고, 유머와 풍자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출광고의 카피를 쓰는 모습들이 전형적인 것 아닌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변명하는 이들은 이 두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수용했다는 비판을 듣게 되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면서 이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곤 한다. 행정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양 정부의 행정개혁, 정부혁신이 신자유주의에 기반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례들을 몇 개 언급할 수는 있겠지만, 정부 정책 및 혁신의 기조나 사용했던 언어/개념이 신자유주의에 토대를 두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있을까.
 
대표적인 것이 정부조직에 대한 경영진단이었고,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명칭변경한 것이었다. 행정이라는 말 대신 경영이라는 말을 서슴 없이 사용하고, 인간/학생을 활용되고 개발되어야 할 인적자원으로 보는 시각을 당연시한 것에서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기여한 그들의 공적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인사행정도 인적자원관리로 변했다.
 
종엽선배는 사회이론에서의 자본 개념이 확장되는 것을 비판했는데, 이와 유사하게 정부조직의 신설/개편과 함께 명멸하는 명칭의 변경 또한 좋은 연구거리가 아닐까 싶다. 기획재정부에 민영화과가 존재하고, 행정안전부의 경우 공무원노조를 통제할 목적으로 윤리복무관실에 ‘공무원 단체과’, 지방행정국에 '지방공무원 단체지원과'를 신설하여 노조라는 말을 지우고 있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아래에 논문을 발췌해왔는데, 관심이 있는 이들은 여유가 되면 전문을 읽어보길 권한다. 원문 링크는
 http://www.adsp.or.kr/book/13/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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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2008. 개념의 신자유주의화: 사회이론에서의 자본 개념 확장 비판.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2008년 상반기(통권 13호).
요약 
신자유주의적 이론이 헤게모니를 가지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것 전반을 경제적인 것으로 재서술하고, 비판적 사회이론의 기초 개념을 침식하며, 자신의 이론과 개념을 학문적 어휘와 상식 속에 각인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개념의 신자유주의화라고 할만한 이런 작업이 성공적일 경우 비판적 의도를 가진 사회이론가조차 보수적인 개념을 학문적 상식의 형태로 수용하게 된다. 이 논문은 이런 개념의 신자유주의적 변형을 최근 사회이론에서 발견하게 되는 자본 개념의 인상적인 확장 속에서 확인하고 그것이 가진 문제점을 비판하고자 하였다.
자본의 개념적 확장에 중요한 일보를 내디딘 것은 게리 벡커의 인적 자본 개념이다. 이 개념은 노동에 대한 질적 분석을 시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인데, 그는 그것에 자본 개념을 결부시켰다. 이런 개념 구도는 노동의 숙련과 학습을 인적 자본의 투자로, 노동자를 스스로에 대해 투자하는 기업가로 재서술하게 된다. 노동이 범주적으로 부인되는 것이다.
인적 자본에 뒤이어 등장한 사회자본 개념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 전반을 자본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사회자본은 그것의 소재지가 개인 행위자인지 아니면 집합적 실체인지에 따라 다르게 개념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모호한 개념이다. 이런 모호성으로 인해 오히려 논쟁을 유발하고 다양한 사회현상의 분석에 적용되며 확산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비판적 사회이론의 핵심 개념인 연대 개념이 포괄하던 이론적 대상을 흡수함으로써 연대 개념을 침식하였다.
문화자본은 부르디외가 제기한 개념이며, 그의 이론적 의도는 매우 비판적인 것이다. 하지만 문화자본에 대한 부르디외의 경험적 연구가 가진 폭로적이고 비판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비판적 사회이론의 규범적 토대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정통화된 문화에 대한 비판이 문화 일반에 대한 상대주의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사회이론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런 자본 개념의 확장 속에서 약화된 노동, 연대, 비판의 규범적 토대를 더욱 공고하게 하고 이론과 경험적 연구를 통해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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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부르디외는 「신자유주의의 본질」(Bourdieu, 1988)이라는 글에서 신자유주의의 근본 특징을 “집합적인 것의 철저한 파괴”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는 그것의 이론이 실현되는 동시에 기능하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낸다. 신자유주의적 사회이론은 지배계급의 행동을 향도하고 그런 실천의 산물로 재구조화된 사회가 신자유주의적 사회이론을 검증해준다(김종엽, 2008: 254).
신자유주의적 사회이론은 신자유주의 정치보다 훨씬 먼저 등장하여 신자유주의적 정치 세력을 응집하고 그것에 방향을 부여했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만의 이론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념을 보수적 경제이론과 다시 접맥하려는 시도이며, 경제학 진영 내부에서의 권력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 신자유주의적 이론이 헤게모니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들이 요청된다. 헤게모니 형성을 위해서는 예컨대 사회적인 것 전반을 경제적인 것으로 재서술하려는 시도, 비판적 사회이론의 기초개념의 침식과 해체, 그리고 자신의 이론과 개념을 상식 속에 안착시키는 것 등이 필요하다. 개념의 신자유주의화라고 할 만한 이런 작업이 성공적일 경우 비판적 의도를 가진 사회이론가조차 보수적인 개념을 학문적 상식의 형태로 수용하게 된다.
초점이 주어질 개념은 인적 자본, 사회자본, 문화자본으로, 이 세 가지 개념은 보수적 사회이론의 좁은 범위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학문 세계 안에 착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비판적 사회이론의 중심 개념을 사회이론의 외곽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했다(김종엽, 2008: 255).
 
2. 본론
 
1) 인적 자본: 노동 개념의 대치
인적 자본 개념을 경제학적 분석의 기본 개념으로 확립한 것은 게리 벡커의 1964년 저작인 『인적 자본』(Becker, 1993). 인적 자본 개념은 통상 개인들이 수행하는 학습과 직업훈련, 그리고 건강관리(medical care)를 이런 실천에 대한 투자수익에 대한 분석으로 전환했다. 간단한 개념적 전환으로 보이는 벡커의 시도는 의외로 심도 깊은 효과를 가진 것이며, 그것의 핵심은 사회분석에서 노동 개념이 누리고 있던 특권적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다(김종엽, 2008: 255-256).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초기 부르주아의 자기 정당화 근거였던 노동 개념을 노동계급의 정당성으로 이전시키고자 하는 시도인 동시에, 19세기 중반에 사회적으로 일반화된 용어로 정착해갔던 자본 개념을 노동이라는 고전적 범주로 환원하고자 한 시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본론』에서 항상 자본을 죽은 노동이라고 서술하며, 자본주의를 죽은 노동에 의한 산 노동의 침탈과정으로 묘사한다. 물론 『자본론』 안에는 노동을 자본 개념으로 환원하는 논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가변자본 개념이 그런 예를 보여준다. 하지만 가변 자본 개념에도 노동에 대한 긍정적 입장은 흐르고 있다. 노동력인 가변자본은 가치량에 변화가 없는 불변자본과 달리 가치를 생산하고 가치량을 변화시키는 부의 원천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김종엽, 2008: 257).
노동사회라는 개념에서 보듯이, 노동 개념은 초기 부르주의 자기정당화와 긍정의 근거로 활용되는 것에서 시작하여 노동계급의 수적 증가, 일터와 가정의 분리, 직업적 정체성을 자아 정체성의 핵으로 삼는 문화, 그리고 노동자들의 정치적 성장으로 인해 전체 사회의 속성을 규정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은 적어도 전체 사회의 노동사회로부터의 탈피가 사회이론의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되고 포드주의 축적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한 시점까지는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노동 사회로부터의 탈피와 전후 사회민주주의적 사회 합의의 약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런 이행의 행로를 보수화하는 개념적 ‘혁신’을 이룩한 것이 게리 벡커가 제시한 인적 자본 개념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구체적 노동의 질을 분석하기 위해서 만든 이 개념에 ‘자본’ 개념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구체적 노동의 질 형성에 자본 개념이 부여되는 한에서, 모든 개인 행위자는 한 사람의 자본가 또는 기업가로 재서술된다(Gordon, 1991: 44). 예를 들어 교육기관에 등록해서 학습하는 행위는 자신을 특정한 유형의 소비자로 만드는 자신에 대한 기업적 행위가 된다. 벡커는 계량적 분석을 위해서 학위 취득이나 직무 훈련, 그리고 건강관리를 예로 들지만 그의 주장의 논리적 귀결은 개인을 직업 훈련이나 치과 치료는 물론이고 아침에 일어나 조깅하는 행위를 비롯하여 성행위, 심리적 안정을 위한 명상 그리고 성형수술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 영역을 투자와 수익률의 관점에서 재조정하는 기업가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식의 개념 구도의 변화가 야기한 결과는 심층적이다. 인적 자본 개념과 더불어 노동자라는 범주 자체가 내부로부터 해체되기 때문이다. 이제 구상하고 실행하며 협동하여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 대신에 다양한 방식의 투자전략을 가지고 위험과 비용 그리고 편익을 계산하는 존재로서의 자본가 내지 기업가가 사회적 존재에 대한 표상을 지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고용하고 있는 기업가가 된다. 그리고 노동자의 기업가로의 대치와 더불어 노동 개념 또한 심각한 실추를 겪게 된다.
문제는 노동자의 기업가로의 대치와 노동 개념의 실추가 대가 없는 과정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노동 개념이 자본으로 대치될 때, 우리는 노동 개념에 내장된 인간학적 차원을 잃게 된다. 노동에는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의 자기실현과 자기초월의 계기가 들어 있다. 우리가 어떤 기술과 지식을 배울 때, 그것은 우리 내부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자기 도야의 과정에 있는 것이며, 인류의 협동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노동 개념이 자본으로 대치될 때 우리는 내재적 가치 영역의 파괴 내지 약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김종엽, 2008: 259).
 
2) 사회자본: 연대 개념의 침식
사회자본 개념은 인적 자본 개념으로부터 자극을 얻었다는 점만 같을 뿐 이론가에 따라 다르게 개념화되었다. 부르디외의 경우 사회자본은 경제자본의 전환형태의 하나로 파악된다. 그는 사회자본을 “지속적인 네트워크 혹은 상호면식이나 인정이 제도화된 관계, 즉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획득되는 실제적인 혹은 잠재적인 자원의 총체”(Bourdieu, 2003: 75)라고 정의한다. 즉 사회자본은 특정 개인이 소유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는 “특정한 행위자가 소유하고 있는 사회자본의 양은 그가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연결망의 크기와 그와 연결된 각각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경제적, 문화적, 상징적 자본의 양에 달려 있다”(Bourdieu, 2003: 76)고 말하는데 “행위자가 소유하고 있는 사회자본의 양”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사회자본은 명백히 한 개인이 자신의 자원을 사회관계나 집단 소속에 투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수익으로 이해된다.
이에 비해 콜맨은 사회자본을 “다른 형태의 자본과 달리 … 둘 혹은 다수의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의 구조 안에 내재하고 있다”(Coleman, 2003: 93)고 본다. 그에 의하면 사회자본은 “그것의 존재가 개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 실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Coleman, 2003: 96). 요컨대 콜맨은 사회자본의 소재지를 개인 혹은 행위자가 아니라 사회관계 자체로 파악한다. 사회자본을 사회가 가진 자본으로 이해할 경우 사회 자체를 실체화할 위험이 있다. 사회가 스스로 자신에게 자본을 투자하고 그것으로부터 수익을 얻는다는 말은 하기 곤란하다.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콜맨은 사회자본을 사회관계의 속성 내지 특성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렇게 행위자의 행동에 의해 사회관계의 속성에 변화가 오는 현상에 사회자본이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이 모호성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콜맨에 의하면 “사회자본은 그것을 형성하려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하고 발전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Coleman, 2003: 120). 이 경우 사회자본은 사회적 행위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도 형성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회자본이 행위자가 아니라 관찰자에 의해서 판정되는 현상이 될 뿐 아니라, 그렇게 된 경로와 무관하게 사회적 행위자의 행동에 의해 사회관계의 속성에 변화가 오고 그것이 그 행위자에게 도움을 주는 경우를 왜 굳이 자본이라고 불러야 할지가 매우 불투명하다. 그저 “그것이 없으면 이룩하기 어려운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Coleman, 2003: 93)이라는 정도의 정의로는 그것을 자본이라고 불리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김종엽, 2008: 261-262).
콜맨의 사회자본 개념이 부르디외에 비해 불안정하게 개념화되었다는 것은 사회자본이 거래 비용 감축과 정보소통의 통로로서의 연결망에서부터 기대와 규범 그리고 연대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광범위하게 포괄한다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사회자본이 전반적으로 유용하고 긍정적인 것처럼 파악되는 것 또한 이론적으로 정확히 정당화되지 않는다. 사회자본을 형성하는 네트워크는 폐쇄적이고 전근대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회적 네트워크에 내장된 자원과 그런 네트워크의 구성원으로서 자원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구별하지 않는다. 사회자본과 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동어반복적일 뿐이다(Portes: 2003: 148; 김종엽, 2008: 262).
하지만 이런 개념적 모호성이 약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두 가지 효과를 가지고 있다. 우선 개념적 모호성은 도리어 논의의 활력으로 작용했다. 연구자 각자가 새롭게 재개념화할 수 있는 자유도를 높임으로써 논쟁과 연구를 촉발했으며, 네트워크 분석 기법과 접맥됨으로써 각종 네트워크와 정보전달, 거래 비용, 그리고 신뢰의 수수 등을 분석 대상으로 끌어들여 다양한 경험적인 조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동시에 퍼트남에서 보듯이 사회자본은 전체 사회의 문화적·조직적 특성을 파악함으로써 거시적인 분석에 활용되기도 한다(Putnam, 2000).
다른 한편 사회자본 개념의 모호성은 자본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자장을 확대하는 역할을 했다. 콜맨의 경우 사회자본은 인적 자본을 형성하는 사회적 토대로서 파악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가족가치와 종교적 가치를 강조한다. 신자유주의적으로 구성된 인적 자본 개념을 문화적 보수주의와 연계되고 있는 것이다(Coleman, 2003: 108-120). 퍼트남에서 보듯이 사회자본은 신뢰, 일반화된 호혜성, 시민적 참여와 네트워크로 정의되며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로 논의된다(Putnam, 2000: 제6장). 사회자본의 진보적 어법이라고 할 만한 이런 식의 접근으로 인해 사회자본 개념은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지향의 신자유주의적 아말감으로서 기능하며 사회과학의 공통어휘로 자리 잡아갔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의 진보적 학자로 분류되는 이들 상당수가 별다른 거리낌 없이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사회자본 형성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되었다(김종엽, 2008: 263).
사회자본 개념 또한 사회 이론의 중심 개념가운데 하나인 연대 개념을 침식한다. 특히 공유지의 비극과 죄수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유효한 자원이라는 식으로 정의되는 퍼트남식 사회자본 개념은 연대 개념과 별로 구별되지 않는다(김종엽, 2008: 263).
연대와 사회자본 개념 사이에는 쉽사리 유화되기 어려운 차이가 있다. 두 개념은 모두 행위자를 네트워크 속의 존재로 이해하며, 익명적이고 제도화된 시스템에 의해서 운행되는 근대 사회 안에서도 그것을 촘촘히 채우는 사회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그것을 사회 분석의 중심으로 이끌어 들인다. 또한 사회자본 개념과 연대 개념은 모두 신뢰와 기대와 의무 개념을 분석의 중심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왜 사회 ‘자본’ 개념을 굳이 사용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퍼트남의 경우 사회를 실체화하거나 사회구성원이 각자 가진 사회적 연대의 자원 총합을 사회자본으로 정의해야 하는 이론적 난점에 빠질 뿐이다. 다른 경우에서는 여전히 사회자본은 그것이 자본의 일종인 한에서 투자하고 수익을 거두는 행위자를 전제하며, 양화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김종엽, 2008: 264).
이에 비해 연대 개념은 사회적 행위자가 모두 이미 연대의 망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연루되어 있다고 본다. 연대 개념은 개별적으로 위험과 비용과 편익을 고려하는 행위자 자신이 이미 하나의 행위자로서 형성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으로서 자리 잡는다. 연대 개념은 모든 사회적 행위자를 투자자 혹은 기업가이기 이전에 사회에 대해 도덕적 채무를 진 자이며 따라서 사회에 대해 도덕적 의무를 가진 것으로 이해한다(김종엽, 1998: 제3장). 연대 개념의 견지에서 보면 개인은 자신의 행동 귀결의 유일한 결정인이자 책임 단위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사회적 실패 혹은 성공 모두 사회적 결사의 형식에 의존하며 그 안에서 구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연대의 정신은 사회적 실패자를 도덕자 실패자로 보지 않고 사회의 조직 방식의 실패의 산물로 파악한다. 따라서 연대의 원리에 입각하면 개인의 사회적 실패는 공동체가 함께 책임질 사안으로 파악되는 동시에 사회적 성공 또한 개인이 전적으로 전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연대의 정신은 단순히 공동체 정신이 아니라 공동체 자체가 정의 규범에 매개된 정의공동체(justice community)일 것을 요구하며 정의로 포괄되지 않은 윤리적 문제에 대해 자선의 윤리가 작동할 것을 요청한다(김종엽, 2008: 265).
사회자본과 연대 개념은 그것이 분석 대상으로 삼는 단위에서도 차이를 드러낸다. 사회자본 개념이 사회관계 안에 축적된 자본을 분석하고자 할 때, 그 사회관계는 언제나 구체적 타자들 사이의 연계(분석단위가 개인이 아니라 조직 또는 기업이라면 그것은 구체적 기업이나 조직 사이의 연계로)로 이해된다. 이에 비해 연대 개념은 구체적 타자뿐 아니라 일반화된 타자를 그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예컨대 연대 개념은 국민적 연대 개념을 제안할 수 있으며 그것을 분석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며, 국제적 연대로까지도 개념적 확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회자본 개념이 국민국가를 분석단위로 삼기는 어려우며, 국제적인 수준에서 사회자본의 축적과 활용을 논의하는 것이 개념적으로 어렵다.
또한 한 인간의 타자에 대한 연대감은 그 타자와의 직접적 접촉 그리고 그와의 교류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편익을 통해서도 형성되지만 그와 나와의 차이를 추상하고 공통성을 지각하는 지적·정서적 작용을 통해서도 형성된다. 연대는 그와 나 사이에 어떤 정보의 상호교류 없이 그의 존재 양상에 대한 나의 지각만으로도 예컨대 미디어를 통해서 본 타자의 존재양상에 대한 지각만으로도 형성되지만 그런 지각이 사회자본을 형성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사회자본은 분석적 협애화를 거친 개념이며, 이런 협애화는 사회적이라는 수식에도 불구하고 ‘자본’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다. 사회자본은 곧잘 사회적 연대나 신뢰 등을 자신의 구성 요소로 편입시키려 하지만, 기껏해야 사회자본 개념은 연대 개념(그리고 신뢰 개념)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을 뿐 그것을 자신의 하위 요소로 규정할 수는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사회자본 개념이 사회이론에서 중심성을 획득하는 그만큼 우리는 연대 개념이 열어주는 분석적 시야를 놓치며, 그 결과 사회 자체를 더욱 신자유주의적으로 혹은 문화적 보수주의에 입각하여 서술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김종엽, 2008: 266).
 
3) 문화자본: 경험적 통찰과 규범적 맹목
부르디외의 자본에 대한 이론은 마르크스가 그렇듯이 자본 비판이라는 프로그램 안에서 구성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경제학자들은 “각 행위자나 사회 계급마다 경제적 투자와 문화적 투자에 배분하는 자원의 비율이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양한 시장이 이들 행위자나 계급들에게 자산의 크기와 구성의 차이에 따라 제공하는 차별적인 ‘이윤 기회’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학자들은 학교교육에 대한 투자전략을 전체적인 교육전략과 재생산 전략의 체계에 연결시켜서 생각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 가장 잘 은폐되어 있고 사회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교육 투자, 즉 가정 내의 문화자본 상속이라는 중요한 점을 간과해버렸다”(Bourdieu, 2003: 66).
그가 보기에 인적 자본 개념은 교육적 성취를 선천적 요인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옳았지만 그것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인적 자본 개념은 ① 교육이나 문화적 전수 등을 계급 재생산의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하며, 이런 ② 교육이나 문화적 전수의 심층적 차원을 간과하고 그것을 투자 화폐량이나 시간 등으로 단순하게 계량화하고자 했으며, ③ 문화자본 자체가 가진 특유한 은폐의 효과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김종엽, 2008: 267-268).
사실 문화자본이 수익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예술이나 과학 같은 장에서 지속적인 활용할 수 있는 수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문화자본의 전수는 매우 다층적인 수준을 가진다. 그것은 신체적 특성, 몸가짐과 자세, 언어적 습관 그리고 행동양식과 같이 육체 안에 구현되는 수준에서부터 책과 음반, 미술품과 같이 물질적으로 객관화된 문화적 생산물 따위의 소장과 활용, 그리고 학력과 같이 제도화된 형태를 취한다. 인적 자본의 투자란 이런 다층적 경로를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형성된 계급별로 상이하게 형성된 하비투스(habitus)가 교육적 성취에서도 차이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런 문화자본의 전수는 특유한 은폐의 효과를 지닌다. 문화자본은 성향과 취향 그리고 근대적 작위인 학력 같은 것으로 개인 안에 통합됨으로서 물려받은 재산이라는 혐의를 피한다. 이런 은폐는 그것을 소유한 이의 자기인식에까지 침투해 자신이 가진 문화자본을 권위 혹은 정당한 능력 또는 생래적인 성향으로 인식하게 된다(김종엽, 2008: 268).
이런 부르디외의 주장은 그의 문화자본이 한편으로는 인적 자본 개념의 한계를 비판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문화적 권위와 취향, 즉 문화 자체가 자본임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의 이런 분석은 전방위적인 폭로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부르디외의 면밀하고 통찰력이 넘치는 폭로적 분석의 규범적 토대가 그렇게 견고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의 문화자본에 대한 논의가 인적 자본 개념을 비판적으로 심화하고 문화적 성향과 능력이 자본 투자의 산물임을 비판하는 것에 더해 문화 자체가 자의성을 가진 것이며, 이런 문화적 자의성을 정당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구성하는 작업은 상징적 폭력을 수반한다고 비판하는 데까지 심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심화된 비판은 너무 나간 것이다(김종엽, 2008: 269).
그는 우리가 정당하고 숭배할 만한 문화, 예컨대 고급 예술 또는 대학이 연구 대상으로 제도화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정통화된 예술이 그런 내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심화된 비판의 효과는 비판을 정당화할 준거의 상실로 이어진다. 우리에게 전수된 문화적 자산 일체가 자의적인 것이라면 문화적 생산은 단지 여러 계급이 참여하는 상징적 투쟁의 결과로 환원된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진정한 것이 문화적 자의성의 외피로 겹겹이 쌓인 문화적 생산물 속에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잔여물의 형태일지언정 가늘게라도 숨쉬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진정한 것을 발굴하고 규명하는 작업이 없다면 비판과 폭로 너머의 작업을 기획하기는 어렵게 된다. 문화적으로 진정한 것이 야만적인 문화적 자의성을 경유하지 않고는 생산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양자가 진정으로 풀기 어렵게 뒤얽혀 있지만 그런 매듭을 풀어내고 진정한 것을 증류하려는 노력이 없는 한 부르디외가 궁극적으로 지향할 문화적 재구성의 토대는 허약해지기 때문이다.
비판 작업은 그 비판의 준거조차 비판 대상으로 삼는 심화된 성찰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런 비판의 심화가 비판의 절대화에 이른다면 이는 자가당착에 이를 뿐이다. 비판적 작업은 경험적으로 심화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비판과 정당화의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김종엽, 2008: 270). 이 긴장의 상실로 인해 부르디외의 비판적 의도는 오직 수사적이고 애매한 형태로만 제시될 수밖에 없다.
그의 발언은 자신의 작업, 예컨대 문화자본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이 피지배계급의 문화적 자력화(self-empowerment)를 의도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이런 문화적 자력화로 인해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에 대한 환상을 깨고 더 자신감 있게 상징적 투쟁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문화적 장들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문화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자신의 문화가 가진 더 가치 있고 진정한 것을 증류해낼 개념적 수단을 얻는 것은 아니다. 사회세계를 투쟁과 자본의 언어로 번역하는 비판적인 탈신비화의 작업이 규범적 맹목이라는 대가를 요구한 것이다(김종엽, 2008: 271).
 
3. 결론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은유적 연관과 확장을 지닌다. 레이코프가 잘 분석했듯이, 우파가 세금구제(tax relief)라는 말을 쓰게 되면, 그것은 구제라는 단어가 가진 함의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다. 학문 세계에서 쓰이는 개념들은 이보다는 훨씬 정교하게 구성된다. 학문적 장의 특성으로 인해 학자들은 자신의 개념을 더 중립적으로 규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학문적 개념이라고 해서 은유적 연관을 아예 피할 수는 없다.
지난 몇십 년간 인적 자본, 사회자본, 문화자본 같은 개념이 주조되어 학문 세계에 착지했다. 이런 개념들이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분석할 조망점을 줄 수도 있지만 그런 개념들 모두가 자본 개념을 확장함으로써 구성된 것인 한에서 자본이라는 말이 가진 속성을 피할 수 없다. 자본은 그것이 얼마나 모험적이든 얼마나 면밀하게 계산된 것이든 항상 전략적 투자와 이윤추구를 함축하며, 자본가, 즉 자본을 운용하는 주체를 전제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개념을 경유하여 사회세계를 분석하는 그만큼 우리는 사회의 전체 양상은 자본의 양태로서 그려지게 될 것이다. 이런 개념들이 나름의 통찰과 생산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개념들의 부상은 그것의 대가로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담론의 약화를 초래했다. 인적 자본 개념은 노동 개념을 대치했으며, 사회자본 개념은 연대 개념을 침식했고, 문화자본 개념은 사회이론의 규범적 토대를 약화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개념이 학문 세계에 안착할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언어 속으로 스며들어가 있는 현실은 우려할 만한 것이다(김종엽, 2008: 272).
다른 한편 새롭게 유행하는 사회과학의 개념이 자본 개념의 확장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징후적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사먄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상동성을 가진 과정이 학문의 장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상동성의 강화가 신자유주의적 프로젝트에 강인함을 더해준다는 것을 함축한다. 부르디외는 사회세계 전반의 자본화에 대항하기 위해 자본 개념의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그것을 통해 비판적 의도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그런 폭로 작업의 계몽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사회세계를 탈규범화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공명하게 된다. 그의 분석 역시 사회세계를 거듭해서 탈규범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과도한 자본개념의 수용으로 인해 이론의 규범적 토대가 허약해지면, 도처에서 자본의 논리를 발견하는 비판적 분석이 독자를 문화적 투항으로 이끌지 아니면 분노와 투쟁의 정신을 고무할지는 진정으로 모호하다.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야만이라면 그것과 투쟁해야 할 것이다. 부르디외의 경우는 그런 쟁투에서 과연 빌려온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개념의 신자유주의화에 대해서도 저항해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과 연대와 규범 개념을 재활성화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세계에 대한 더 공정하고 총체적인 묘사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김종엽, 2008: 273).
 
참고문헌
김우식. 2006. 연결망, 불평등, 위법행동. 「한국사회학」, 40집 5호. → 사회자본의 부정적 효과에 대한 경험적인 연구
김종엽. 1997. 자아정체성과 정치: 푸꼬와 기든스를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제35호
박영도. 1994. 현대 사회이론에서의 비판 패러다임의 구조 변동.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비판과 정당화의 변증법적 관계, 그리고 근대 사회이론에서 비판의 절대화와 정당화의 절대화가 낳은 이론적 병리에 대한 치밀하고 탁월한 논증
유석춘·장미혜. 2003. 사회자본과 한국사회. 『사회자본』. 유석춘 편. 그린비.
이재열. 1998. 민주주의, 사회적 신뢰, 사회적 자본. 「계간 사상」, 10권 2호.
이재혁. 2006. 신뢰와 시민사회. 「한국사회학」, 40집 5호.
Bourdieu, Pierre. 1994. 『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문경자 옮김. 솔출판사.
_____. 1996a.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상)』. 최종철 옮김. 새물결.
_____. 1996b.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상)』. 최종철 옮김. 새물결.
_____. 2003. 자본의 형태. 『사회자본』. 유석춘 편. 그린비.
_____. 2005. 『호모 아카데미쿠스』. 김정곤·임기대 옮김. 동문선.
Bourdieu, Pierre et al. 2000. 『세계의 비참 I』. 김주경 옮김. 동문선.
Coleman, James. 2003. 인적 자본 형성에 있어서의 사회자본. 『사회자본』. 유석춘 편. 그린비.
Gordon, Colin. 1991. “Governmental rationality: an introduction.” Graham Burchell et al. ed. The Foucault Effect,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ortes, Alejandro. 2003. 사회자본 개념의 기원과 현대 사회학의 적용. 『사회자본』. 유석춘 편. 그린비. → 162-167쪽. 부정적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사회자본이 가진 문제점을 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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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5.31

관련이 있는 글인 듯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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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나오는 경제용어의 편향성 (한겨레21, 한광덕 기자, 2009.08.21 제774호)
[한광덕의 구시렁 경제] 작명 집단의 이해관계 반영…
‘구조개혁’ ‘노동 유연성’ 등 긍정적 은유 통해 노동자 압박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오규원 시인이 패러디한 앞 두 구절이다.
 
대상의 의미를 규정하는 이름엔 부르는 사람의 주관과 이해가 투영되게 마련이다. 대중적 말길의 소통이 쉽지 않은 경제용어는 굴절의 각도가 더 커진다.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사건이 발생해 각계의 반응을 전달하는 기사 중엔 아직도 ‘경제계’라는 표현이 제법 나온다. 그런 기사의 상당수는 ‘삼성그룹 고위 간부는 이렇게, LG그룹 관계자는 저렇게 말했다’는 식으로 끝난다. 노동자 혹은 민주노총의 반응은 빠져 있다. 그렇게 쓰면 경제계가 아닌 ‘재계’의 반응이 된다. 또 경제계의 반응으로 자주 인용되는 ‘경제 5단체’란 이름은 아예 공식용어의 지위를 굳혔다. 하지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를 포함한 이들 5개 단체는 ‘사용자 5단체’ 정도로 부르는 게 제격이다.
 
인지언어학을 창시한 조지 레이코프는 언어의 본질을 해독하기 위해 ‘프레임’이라는 분석 도구를 사용했다. 그는 제한된 범위의 정신 구조인 프레임이 ‘사실’을 이긴다고 봤다. 미디어에 의해 되풀이되는 프레임과 은유는 대중의 머릿속에 성공적으로 주입된다는 것이다. 경제용어를 작명할 만한 지위에 있는 집단은 기존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하기도 한다. 그들은 대중이 그 의미에 익숙해지게 한 뒤 이해관계를 관철한다.
 
1997년 외환위기 뒤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구조조정’(restructuring)이란 말은 기업의 사업이나 조직구조를 효율적으로 재편하는 작업을 뜻한다. 당연히 경영의 투명성과 책임성 강화를 수반해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구조조정은 노동력만의 구조조정, 즉 감원과 동의어가 된다. 나아가 ‘구조개혁’이라는 당위성을 가진 용어로 승격되면서 노동자를 압박했다. 그러면서 구조조정의 궁극적 지향인 경영혁신이란 개념은 사라졌다.
 
시카고 학파의 ‘노동+유연화’란 접합의 기술도 기발하다. 중학교 1학년생에게 ‘노동 유연화’가 무슨 뜻일 것 같으냐고 물어봤더니 “일만 계속하지 말고 쉬엄쉬엄 맨손체조를 하면서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것”이란 나름의 해석이 돌아왔다. 은유를 통해 긍정적 이미지를 부여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7일 “사회 취약 계층에 대한 고용 창출 프로그램을 지속할 것이며 기업 구조조정 개혁을 신속하게 효과적으로 취할 것”이라면서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에도 노력하겠다”고 설명했다.(<연합뉴스> 8월7일치 보도) 윤 장관에게 기업의 구조조정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으로 통한다. 그리고 구조개혁과 유연성의 프레임을 해체하면 ‘정리해고’라는 실체가 드러난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12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는 발언으로 노동계의 반발을 사는 등 논란을 부르고 있다. 윤 장관은 이날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하는 것은 …효율성 향상의 혜택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논평을 내어 “윤 장관의 발언은 ‘노동 유연성’ 때문에 해고된 노동자의 현실을 외면한 사용자 위주의 발언”이라고 비판했다.(<한겨레> 8월13일치 보도)
 
노동시장도 다른 생산물이나 생산요소 시장처럼 수요와 공급에 의해 균형점을 찾는다. 따라서 시장이 유연하려면 노동의 공급뿐만 아니라 노동의 수요도 유연해져야 한다. 그런데 노동력의 수요자인 자본의 유연성은 왜 촉구하지 않는 걸까?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방해하는 자본의 경직성은 왜 탓하지 않는 걸까?
 
(윤증현 장관이) 인간으로서의 노동자를 무슨 밀가루나 과일, 야채와 같이 시장 상황에 따라 가격 폭락과 폭등을 반복하는 상품과 똑같이 바라보니 그런 발언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진보신당 8월12일 브리핑 중)
 
노동자를 물화시키려는 자본 진영의 언어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억압기구로 작동하고 있다. ‘네가 노동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노동은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네가 유연화란 이름을 불렀을 때 노동은 곧 네에게로 가서 정리해고로 모습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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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5 16:21 2010/01/2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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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지진을 보는 어떤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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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길님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마이크 데이비스, 2007) 정리 ] 에 관련된 글.
 
 

아이티 지진을 보면서 아래 글에서 언급된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명색이 행정학을, 그것도 공기업론을 주된 전공으로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아이티의 재난에서 국가의 역할과 공공부문의 문제를 심도 있게 살펴보지 못했다. 이럴 때 보면 도대체 나는 독서를 왜 하나, 무슨 공부를 했나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것은 아이티의 정확한 현실에 대한 확인에서부터 시작한다. 여전히 미국의 준식민지와 같은 상황에 있다든지, 공공부문이 과연 얼마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인지, 제도화의 정도는 어떠했는지 등의 사항도 제대로 모르면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티 보도에서 트위터의 위력을 확인했다는 이들이 있다. 그건 처음 며칠 재난속보가 요구될 때의 일이다. 트위터 또한 사회인프라가 갖추어져야 작동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더욱이 지금은 좀더 심도 있는 현실 인식과 진단, 대책이 필요한 때이고, 전후맥락을 파악하는데에는 트위터의 한계가 명확하다. 좀더 장문의 소통이 필요하다.
 
아래 Z매거진의 글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남겨 주었다. 번역해준 전소희 동지와 이를 실어준 참세상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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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아이티에서의 ‘계급지진’
[번역] 세계화와 미국 개입으로 더 심각해진 계급지진
Jeb Sprague(캘리포니아주립대 산타바바라 사회학 박사과정) 번역(전소희) 출처: www.zmag.org / 참세상, 2010년01월25일 11시53분
 
지난 1월 21일 강도 7.0 지진이 포르토프랭스를 강타하기 닷새 전, 아이티 정부 산하 공기업현대화위원회(CMEP)가 아이티 공영 통신사인 텔레코 지분의 70%를 매각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오늘날 포르토프랭스는 파괴됐고 수 천 명 또는 수십 만 명이 사망했다.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가 차단됐고, 많은 사람들이 생매장 당했다. 레오간 등 남부 반도에 걸쳐 있는 도시는 완전히 붕괴되어 피해자 수조차 파악할 수 없다고 한다. 르네 프레발 아이티 대통령과 정부는 여전히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포르토프랭스에 나타나지도, 라디오에 출연하지도 않고 있다.
 
수도의 보아베르나(Bois Verna) 지역 퐁모랑(Pont Morin)에 있는 텔레코 건물은 심하게 무너진 상태이다. 포르토프랭스에서 올라온 한 트위터 메시지는 건물 주축대가 파괴됐기에 주민들은 대피해야 한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핵심 의료서비스, 생수나 기타 생필품 등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 지역 공공 인프라와 인력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알 수가 있다.
 
그 동안 미국과 국제금융기구들은 아이티 정부에 압력을 가해 특히 이번 재앙과 같은 사태에서 포르토프랭스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법한 사회복지 사업과 공공 인프라에 투자하기보다는 기간산업을 매각하고, 정부의 무상 식량배급 사업을 폐지하고, 농촌경제를 부추겨 온 관세를 낮추도록 했다.
 
지난 수십 년 간 아이티 인구구성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면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어떠한 효과를 미쳤는지 알 수 있다. 농촌지역에서 포르토프랭스 빈민촌으로 이주한 수많은 사람들은 언덕 기슭에 허술한 집에서 산다.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는 “빈민촌은 잘못된 지질학에서 시작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빈민촌 세상 (Planet of Slums)”이라는 저서를 통해 데이비스는 오늘날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빈민촌이 급증한 현상을 설명한다. 세계 수십억명이 환경적, 지질학적 재앙을 항상 마주한 채 생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007년 중반, 아이티 기자 와드네르 피에르와 나는 아이티 공영 통신사가 해체된 과정에 대해 인터프레스서비스(IPS)에 기고를 했다. 우리는 줄줄이 해고된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인터뷰했다. 당시 정부는 텔레코 직원 수를 3,293명에서 1,000명 이하로 줄일 계획이었다. 2010년 현재, 프레발 대통령이 임명한 텔레코 임원들은 노동자의 3분의 2를 정리해고 했다. 프레발 대통령은 1996년-2001년 초임 기간 중 이미 국영 제분소 미노테리(Minoterie)와 국영 시멘트 기업을 매각한 바 있다.
 
프레발 대통령은 그의 미선출 전임자(제라르 라토르투 임시정부)가 고안한 거시경제 구조조정 프로그램인 임시협력기본계획을 국제 원조기관 및 아이티 관련 단체 등과 함께 계속 추진하고 있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아이티는 외국산 쌀에 대한 관세 인하를 강요받았고, 지역경제를 그나마 보호하고 있던 제도를 폐지해야 했다. 농촌에서 살기 힘들어진 아이티인들은 수도로 계속 이주했다. 수십만 명이 카르푸(Carrefour)와 같은 언덕 기슭의 허술한 빈민촌에 정착했다.
 
아이티 정부는 자본주의적 정책을 이행하면서 국민의 관심을 호도하기 위해 낡은 민족주의 논리를 동원했고, 국제금융기구와 엔지오들, 외국 정부로부터 온 자문과 전문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잔인한 쿠데타, 무역재제 등이 가해졌고, “올바른 국정운영”을 확립한다는 명목 하에 외국 시민단체들이 들어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지진 발생 후, 국가로서 아이티는 사라졌다. 경찰은 자기 가족 찾는데 혈안이고, 정부 부처 건물과 유엔기지는 폐허가 됐다. 많은 고위 관료들은 콘크리트 더미 아래 매장돼있다. 지진 직후 며칠 동안 피해주민들을 방문하거나 라디오를 통해 연설조차 하지 않아 비난을 사고 있는 프레발과 냉담한 아이티 정부 관료들은 도시 외곽지역 경찰서로 거처를 옮기고 외국 정치인들과 기자들을 만나고 있다. 지난 화요일 프레발은 인근 도미니카공화국에 있는 산토도밍고에 가 해외 원조 기관들을 만났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정부는 농업경제학자인 프레발을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관료(technocrat)로서 지난 수십 년 간 아이티를 분열시킨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재앙이 닥쳐 국가 전체를 재건해야 하는 상황에서 프레발이 계속 국민을 회피하면서 수백만 아이티인들은 과연 정부가 있긴 한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다”고 보도했다.
 
수백 명의 기자가 포르토프랭스에 쏟아져 들어왔고, 미군은 폐허가 된 공항을 기지로 사용하고 있으며,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현장에 급파된 상태이다. 미군은 대형 무기를 실은 항공기를 우선 착륙시켜야 한다며 의약품과 구조용 기기를 실은 대형 항공기 여러 대를 거절해 프랑스와 베네수엘라, 국경없는의사회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국제 언론사들은 붕괴된 건물 콘크리트 더미를 손으로 파고 있는 아이티인들의 모습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어떤 언론사들은 기아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먹을 것을 찾아 도심지역을 헤매고 있는 빈민들을 ‘약탈자’라고 부르고 있다. 도시 다른 쪽에서는 무장한 사설 경호원들이 큰 시장을 지키고 있다.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을 제대로 대처하려면 사회기간시설에 투자하거나 무상 식량배급 사업을 운영하고 빈민촌 주거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보다 큰 정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간 아이티에 강제된 긴축 정책 때문에 이런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2001년부터 2004년 타도될 때까지 집권한 아리스티드 정부는 무역재제, 엘리트계급과 반대파가 사주한 암살 기도 등 위협에도 불구하고 사유화 정책을 거부했고, 국가 무상 식량배급소와 문맹퇴치학교 등을 만들었고, 빈민촌을 부분적으로나마 개조해줬다.
 
이런 미미하지만 반가운 조치들은 이제 과거사이다. 민주적 절차를 통해 발언하고자 하는 국민들의 노력을 짓밟고 국가경제를 지구적 자본주의에 강제적으로 종속시킨 지배엘리트는 그들이 지배하고자 하는 민중들로부터 괴리되어 있다. 이들은 사회학자인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이 그의 저서 “지구적 자본주의 이론 (A Theory of Global Capitalim)”에서 “초국가화된 남반구 토호 지배세력으로서... 때로는 ‘현대화하는 부르조아지’로 불리며, 대대적인 사회적·경제적 구조조정과 지구적 경제 및 사회로의 통합을 주도한 자들”이라고 한 사람들이다. 폐허 더미에서 아이티인들이 이제 이 모든 것을 거부하겠다 해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지리학자 케네스 휴잇(Kenneth Hewitt)은 2만3천명의 생명을 앗아간 1976년도 과테말라 지진을 조사하면서 ‘계급지진(classquake)’라는 말을 만들었다. 당시 지진이 유독 빈민촌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아이티에서의 ‘계급지진’은 자본주의적 세계화와 미국 개입과 맞물려 훨씬 더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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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5 14:40 2010/01/2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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