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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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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에 관한 기획글이 실린 「민주사회와 정책연구」2008 상반기 (통권 13호)를 다시 보다가 그 뒤에 실린 글들도 짬을 내서 읽었는데, 특히 종엽형이 쓴 글이 인상적이었다. 요약글에서도 나오듯이 개념의 신자유주의화가 성공적일 경우 비판적 의도를 가진 사회이론가 - 여기서는 부르디외를 예로 든다 - 조차 보수적인 개념을 학문적 상식의 형태로 수용하게 되고, 비판적 사회이론이 주변화되는 결과를 야기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를 위해 논하는 것이 게리 베커의 인적 자본과 콜만의 사회자본, 그리고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개념이다. 
 
게리 베커의 인적 자본 개념은 경제학이 경제 외의 다른 거의 모든 영역에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고 휘젓고 다니게 만든, 경제학의 제국주의화를 이끈 주범이기에 특히 관심이 갔고, 서술된 내용은 예상한 대로였다. 이런 것에 대한 심층적인 비판이 필요했다.
  
운동의 대중화, 설득력의 확산을 위해 차용하는 다양한 개념들, 여러가지 대중문화의 코드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선상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패러디를 하면 대중들도 잘 알고, 유머와 풍자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출광고의 카피를 쓰는 모습들이 전형적인 것 아닌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변명하는 이들은 이 두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수용했다는 비판을 듣게 되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면서 이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곤 한다. 행정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양 정부의 행정개혁, 정부혁신이 신자유주의에 기반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례들을 몇 개 언급할 수는 있겠지만, 정부 정책 및 혁신의 기조나 사용했던 언어/개념이 신자유주의에 토대를 두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있을까.
 
대표적인 것이 정부조직에 대한 경영진단이었고,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명칭변경한 것이었다. 행정이라는 말 대신 경영이라는 말을 서슴 없이 사용하고, 인간/학생을 활용되고 개발되어야 할 인적자원으로 보는 시각을 당연시한 것에서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기여한 그들의 공적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인사행정도 인적자원관리로 변했다.
 
종엽선배는 사회이론에서의 자본 개념이 확장되는 것을 비판했는데, 이와 유사하게 정부조직의 신설/개편과 함께 명멸하는 명칭의 변경 또한 좋은 연구거리가 아닐까 싶다. 기획재정부에 민영화과가 존재하고, 행정안전부의 경우 공무원노조를 통제할 목적으로 윤리복무관실에 ‘공무원 단체과’, 지방행정국에 '지방공무원 단체지원과'를 신설하여 노조라는 말을 지우고 있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아래에 논문을 발췌해왔는데, 관심이 있는 이들은 여유가 되면 전문을 읽어보길 권한다. 원문 링크는
 http://www.adsp.or.kr/book/13/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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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2008. 개념의 신자유주의화: 사회이론에서의 자본 개념 확장 비판.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2008년 상반기(통권 13호).
요약 
신자유주의적 이론이 헤게모니를 가지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것 전반을 경제적인 것으로 재서술하고, 비판적 사회이론의 기초 개념을 침식하며, 자신의 이론과 개념을 학문적 어휘와 상식 속에 각인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개념의 신자유주의화라고 할만한 이런 작업이 성공적일 경우 비판적 의도를 가진 사회이론가조차 보수적인 개념을 학문적 상식의 형태로 수용하게 된다. 이 논문은 이런 개념의 신자유주의적 변형을 최근 사회이론에서 발견하게 되는 자본 개념의 인상적인 확장 속에서 확인하고 그것이 가진 문제점을 비판하고자 하였다.
자본의 개념적 확장에 중요한 일보를 내디딘 것은 게리 벡커의 인적 자본 개념이다. 이 개념은 노동에 대한 질적 분석을 시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인데, 그는 그것에 자본 개념을 결부시켰다. 이런 개념 구도는 노동의 숙련과 학습을 인적 자본의 투자로, 노동자를 스스로에 대해 투자하는 기업가로 재서술하게 된다. 노동이 범주적으로 부인되는 것이다.
인적 자본에 뒤이어 등장한 사회자본 개념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 전반을 자본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사회자본은 그것의 소재지가 개인 행위자인지 아니면 집합적 실체인지에 따라 다르게 개념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모호한 개념이다. 이런 모호성으로 인해 오히려 논쟁을 유발하고 다양한 사회현상의 분석에 적용되며 확산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비판적 사회이론의 핵심 개념인 연대 개념이 포괄하던 이론적 대상을 흡수함으로써 연대 개념을 침식하였다.
문화자본은 부르디외가 제기한 개념이며, 그의 이론적 의도는 매우 비판적인 것이다. 하지만 문화자본에 대한 부르디외의 경험적 연구가 가진 폭로적이고 비판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비판적 사회이론의 규범적 토대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정통화된 문화에 대한 비판이 문화 일반에 대한 상대주의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사회이론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런 자본 개념의 확장 속에서 약화된 노동, 연대, 비판의 규범적 토대를 더욱 공고하게 하고 이론과 경험적 연구를 통해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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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부르디외는 「신자유주의의 본질」(Bourdieu, 1988)이라는 글에서 신자유주의의 근본 특징을 “집합적인 것의 철저한 파괴”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는 그것의 이론이 실현되는 동시에 기능하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낸다. 신자유주의적 사회이론은 지배계급의 행동을 향도하고 그런 실천의 산물로 재구조화된 사회가 신자유주의적 사회이론을 검증해준다(김종엽, 2008: 254).
신자유주의적 사회이론은 신자유주의 정치보다 훨씬 먼저 등장하여 신자유주의적 정치 세력을 응집하고 그것에 방향을 부여했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만의 이론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념을 보수적 경제이론과 다시 접맥하려는 시도이며, 경제학 진영 내부에서의 권력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 신자유주의적 이론이 헤게모니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들이 요청된다. 헤게모니 형성을 위해서는 예컨대 사회적인 것 전반을 경제적인 것으로 재서술하려는 시도, 비판적 사회이론의 기초개념의 침식과 해체, 그리고 자신의 이론과 개념을 상식 속에 안착시키는 것 등이 필요하다. 개념의 신자유주의화라고 할 만한 이런 작업이 성공적일 경우 비판적 의도를 가진 사회이론가조차 보수적인 개념을 학문적 상식의 형태로 수용하게 된다.
초점이 주어질 개념은 인적 자본, 사회자본, 문화자본으로, 이 세 가지 개념은 보수적 사회이론의 좁은 범위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학문 세계 안에 착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비판적 사회이론의 중심 개념을 사회이론의 외곽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했다(김종엽, 2008: 255).
 
2. 본론
 
1) 인적 자본: 노동 개념의 대치
인적 자본 개념을 경제학적 분석의 기본 개념으로 확립한 것은 게리 벡커의 1964년 저작인 『인적 자본』(Becker, 1993). 인적 자본 개념은 통상 개인들이 수행하는 학습과 직업훈련, 그리고 건강관리(medical care)를 이런 실천에 대한 투자수익에 대한 분석으로 전환했다. 간단한 개념적 전환으로 보이는 벡커의 시도는 의외로 심도 깊은 효과를 가진 것이며, 그것의 핵심은 사회분석에서 노동 개념이 누리고 있던 특권적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다(김종엽, 2008: 255-256).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초기 부르주아의 자기 정당화 근거였던 노동 개념을 노동계급의 정당성으로 이전시키고자 하는 시도인 동시에, 19세기 중반에 사회적으로 일반화된 용어로 정착해갔던 자본 개념을 노동이라는 고전적 범주로 환원하고자 한 시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본론』에서 항상 자본을 죽은 노동이라고 서술하며, 자본주의를 죽은 노동에 의한 산 노동의 침탈과정으로 묘사한다. 물론 『자본론』 안에는 노동을 자본 개념으로 환원하는 논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가변자본 개념이 그런 예를 보여준다. 하지만 가변 자본 개념에도 노동에 대한 긍정적 입장은 흐르고 있다. 노동력인 가변자본은 가치량에 변화가 없는 불변자본과 달리 가치를 생산하고 가치량을 변화시키는 부의 원천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김종엽, 2008: 257).
노동사회라는 개념에서 보듯이, 노동 개념은 초기 부르주의 자기정당화와 긍정의 근거로 활용되는 것에서 시작하여 노동계급의 수적 증가, 일터와 가정의 분리, 직업적 정체성을 자아 정체성의 핵으로 삼는 문화, 그리고 노동자들의 정치적 성장으로 인해 전체 사회의 속성을 규정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은 적어도 전체 사회의 노동사회로부터의 탈피가 사회이론의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되고 포드주의 축적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한 시점까지는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노동 사회로부터의 탈피와 전후 사회민주주의적 사회 합의의 약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런 이행의 행로를 보수화하는 개념적 ‘혁신’을 이룩한 것이 게리 벡커가 제시한 인적 자본 개념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구체적 노동의 질을 분석하기 위해서 만든 이 개념에 ‘자본’ 개념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구체적 노동의 질 형성에 자본 개념이 부여되는 한에서, 모든 개인 행위자는 한 사람의 자본가 또는 기업가로 재서술된다(Gordon, 1991: 44). 예를 들어 교육기관에 등록해서 학습하는 행위는 자신을 특정한 유형의 소비자로 만드는 자신에 대한 기업적 행위가 된다. 벡커는 계량적 분석을 위해서 학위 취득이나 직무 훈련, 그리고 건강관리를 예로 들지만 그의 주장의 논리적 귀결은 개인을 직업 훈련이나 치과 치료는 물론이고 아침에 일어나 조깅하는 행위를 비롯하여 성행위, 심리적 안정을 위한 명상 그리고 성형수술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 영역을 투자와 수익률의 관점에서 재조정하는 기업가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식의 개념 구도의 변화가 야기한 결과는 심층적이다. 인적 자본 개념과 더불어 노동자라는 범주 자체가 내부로부터 해체되기 때문이다. 이제 구상하고 실행하며 협동하여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 대신에 다양한 방식의 투자전략을 가지고 위험과 비용 그리고 편익을 계산하는 존재로서의 자본가 내지 기업가가 사회적 존재에 대한 표상을 지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고용하고 있는 기업가가 된다. 그리고 노동자의 기업가로의 대치와 더불어 노동 개념 또한 심각한 실추를 겪게 된다.
문제는 노동자의 기업가로의 대치와 노동 개념의 실추가 대가 없는 과정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노동 개념이 자본으로 대치될 때, 우리는 노동 개념에 내장된 인간학적 차원을 잃게 된다. 노동에는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의 자기실현과 자기초월의 계기가 들어 있다. 우리가 어떤 기술과 지식을 배울 때, 그것은 우리 내부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자기 도야의 과정에 있는 것이며, 인류의 협동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노동 개념이 자본으로 대치될 때 우리는 내재적 가치 영역의 파괴 내지 약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김종엽, 2008: 259).
 
2) 사회자본: 연대 개념의 침식
사회자본 개념은 인적 자본 개념으로부터 자극을 얻었다는 점만 같을 뿐 이론가에 따라 다르게 개념화되었다. 부르디외의 경우 사회자본은 경제자본의 전환형태의 하나로 파악된다. 그는 사회자본을 “지속적인 네트워크 혹은 상호면식이나 인정이 제도화된 관계, 즉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획득되는 실제적인 혹은 잠재적인 자원의 총체”(Bourdieu, 2003: 75)라고 정의한다. 즉 사회자본은 특정 개인이 소유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는 “특정한 행위자가 소유하고 있는 사회자본의 양은 그가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연결망의 크기와 그와 연결된 각각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경제적, 문화적, 상징적 자본의 양에 달려 있다”(Bourdieu, 2003: 76)고 말하는데 “행위자가 소유하고 있는 사회자본의 양”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사회자본은 명백히 한 개인이 자신의 자원을 사회관계나 집단 소속에 투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수익으로 이해된다.
이에 비해 콜맨은 사회자본을 “다른 형태의 자본과 달리 … 둘 혹은 다수의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의 구조 안에 내재하고 있다”(Coleman, 2003: 93)고 본다. 그에 의하면 사회자본은 “그것의 존재가 개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 실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Coleman, 2003: 96). 요컨대 콜맨은 사회자본의 소재지를 개인 혹은 행위자가 아니라 사회관계 자체로 파악한다. 사회자본을 사회가 가진 자본으로 이해할 경우 사회 자체를 실체화할 위험이 있다. 사회가 스스로 자신에게 자본을 투자하고 그것으로부터 수익을 얻는다는 말은 하기 곤란하다.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콜맨은 사회자본을 사회관계의 속성 내지 특성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렇게 행위자의 행동에 의해 사회관계의 속성에 변화가 오는 현상에 사회자본이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이 모호성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콜맨에 의하면 “사회자본은 그것을 형성하려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하고 발전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Coleman, 2003: 120). 이 경우 사회자본은 사회적 행위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도 형성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회자본이 행위자가 아니라 관찰자에 의해서 판정되는 현상이 될 뿐 아니라, 그렇게 된 경로와 무관하게 사회적 행위자의 행동에 의해 사회관계의 속성에 변화가 오고 그것이 그 행위자에게 도움을 주는 경우를 왜 굳이 자본이라고 불러야 할지가 매우 불투명하다. 그저 “그것이 없으면 이룩하기 어려운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Coleman, 2003: 93)이라는 정도의 정의로는 그것을 자본이라고 불리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김종엽, 2008: 261-262).
콜맨의 사회자본 개념이 부르디외에 비해 불안정하게 개념화되었다는 것은 사회자본이 거래 비용 감축과 정보소통의 통로로서의 연결망에서부터 기대와 규범 그리고 연대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광범위하게 포괄한다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사회자본이 전반적으로 유용하고 긍정적인 것처럼 파악되는 것 또한 이론적으로 정확히 정당화되지 않는다. 사회자본을 형성하는 네트워크는 폐쇄적이고 전근대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회적 네트워크에 내장된 자원과 그런 네트워크의 구성원으로서 자원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구별하지 않는다. 사회자본과 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동어반복적일 뿐이다(Portes: 2003: 148; 김종엽, 2008: 262).
하지만 이런 개념적 모호성이 약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두 가지 효과를 가지고 있다. 우선 개념적 모호성은 도리어 논의의 활력으로 작용했다. 연구자 각자가 새롭게 재개념화할 수 있는 자유도를 높임으로써 논쟁과 연구를 촉발했으며, 네트워크 분석 기법과 접맥됨으로써 각종 네트워크와 정보전달, 거래 비용, 그리고 신뢰의 수수 등을 분석 대상으로 끌어들여 다양한 경험적인 조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동시에 퍼트남에서 보듯이 사회자본은 전체 사회의 문화적·조직적 특성을 파악함으로써 거시적인 분석에 활용되기도 한다(Putnam, 2000).
다른 한편 사회자본 개념의 모호성은 자본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자장을 확대하는 역할을 했다. 콜맨의 경우 사회자본은 인적 자본을 형성하는 사회적 토대로서 파악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가족가치와 종교적 가치를 강조한다. 신자유주의적으로 구성된 인적 자본 개념을 문화적 보수주의와 연계되고 있는 것이다(Coleman, 2003: 108-120). 퍼트남에서 보듯이 사회자본은 신뢰, 일반화된 호혜성, 시민적 참여와 네트워크로 정의되며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로 논의된다(Putnam, 2000: 제6장). 사회자본의 진보적 어법이라고 할 만한 이런 식의 접근으로 인해 사회자본 개념은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지향의 신자유주의적 아말감으로서 기능하며 사회과학의 공통어휘로 자리 잡아갔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의 진보적 학자로 분류되는 이들 상당수가 별다른 거리낌 없이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사회자본 형성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되었다(김종엽, 2008: 263).
사회자본 개념 또한 사회 이론의 중심 개념가운데 하나인 연대 개념을 침식한다. 특히 공유지의 비극과 죄수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유효한 자원이라는 식으로 정의되는 퍼트남식 사회자본 개념은 연대 개념과 별로 구별되지 않는다(김종엽, 2008: 263).
연대와 사회자본 개념 사이에는 쉽사리 유화되기 어려운 차이가 있다. 두 개념은 모두 행위자를 네트워크 속의 존재로 이해하며, 익명적이고 제도화된 시스템에 의해서 운행되는 근대 사회 안에서도 그것을 촘촘히 채우는 사회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그것을 사회 분석의 중심으로 이끌어 들인다. 또한 사회자본 개념과 연대 개념은 모두 신뢰와 기대와 의무 개념을 분석의 중심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왜 사회 ‘자본’ 개념을 굳이 사용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퍼트남의 경우 사회를 실체화하거나 사회구성원이 각자 가진 사회적 연대의 자원 총합을 사회자본으로 정의해야 하는 이론적 난점에 빠질 뿐이다. 다른 경우에서는 여전히 사회자본은 그것이 자본의 일종인 한에서 투자하고 수익을 거두는 행위자를 전제하며, 양화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김종엽, 2008: 264).
이에 비해 연대 개념은 사회적 행위자가 모두 이미 연대의 망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연루되어 있다고 본다. 연대 개념은 개별적으로 위험과 비용과 편익을 고려하는 행위자 자신이 이미 하나의 행위자로서 형성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으로서 자리 잡는다. 연대 개념은 모든 사회적 행위자를 투자자 혹은 기업가이기 이전에 사회에 대해 도덕적 채무를 진 자이며 따라서 사회에 대해 도덕적 의무를 가진 것으로 이해한다(김종엽, 1998: 제3장). 연대 개념의 견지에서 보면 개인은 자신의 행동 귀결의 유일한 결정인이자 책임 단위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사회적 실패 혹은 성공 모두 사회적 결사의 형식에 의존하며 그 안에서 구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연대의 정신은 사회적 실패자를 도덕자 실패자로 보지 않고 사회의 조직 방식의 실패의 산물로 파악한다. 따라서 연대의 원리에 입각하면 개인의 사회적 실패는 공동체가 함께 책임질 사안으로 파악되는 동시에 사회적 성공 또한 개인이 전적으로 전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연대의 정신은 단순히 공동체 정신이 아니라 공동체 자체가 정의 규범에 매개된 정의공동체(justice community)일 것을 요구하며 정의로 포괄되지 않은 윤리적 문제에 대해 자선의 윤리가 작동할 것을 요청한다(김종엽, 2008: 265).
사회자본과 연대 개념은 그것이 분석 대상으로 삼는 단위에서도 차이를 드러낸다. 사회자본 개념이 사회관계 안에 축적된 자본을 분석하고자 할 때, 그 사회관계는 언제나 구체적 타자들 사이의 연계(분석단위가 개인이 아니라 조직 또는 기업이라면 그것은 구체적 기업이나 조직 사이의 연계로)로 이해된다. 이에 비해 연대 개념은 구체적 타자뿐 아니라 일반화된 타자를 그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예컨대 연대 개념은 국민적 연대 개념을 제안할 수 있으며 그것을 분석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며, 국제적 연대로까지도 개념적 확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회자본 개념이 국민국가를 분석단위로 삼기는 어려우며, 국제적인 수준에서 사회자본의 축적과 활용을 논의하는 것이 개념적으로 어렵다.
또한 한 인간의 타자에 대한 연대감은 그 타자와의 직접적 접촉 그리고 그와의 교류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편익을 통해서도 형성되지만 그와 나와의 차이를 추상하고 공통성을 지각하는 지적·정서적 작용을 통해서도 형성된다. 연대는 그와 나 사이에 어떤 정보의 상호교류 없이 그의 존재 양상에 대한 나의 지각만으로도 예컨대 미디어를 통해서 본 타자의 존재양상에 대한 지각만으로도 형성되지만 그런 지각이 사회자본을 형성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사회자본은 분석적 협애화를 거친 개념이며, 이런 협애화는 사회적이라는 수식에도 불구하고 ‘자본’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다. 사회자본은 곧잘 사회적 연대나 신뢰 등을 자신의 구성 요소로 편입시키려 하지만, 기껏해야 사회자본 개념은 연대 개념(그리고 신뢰 개념)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을 뿐 그것을 자신의 하위 요소로 규정할 수는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사회자본 개념이 사회이론에서 중심성을 획득하는 그만큼 우리는 연대 개념이 열어주는 분석적 시야를 놓치며, 그 결과 사회 자체를 더욱 신자유주의적으로 혹은 문화적 보수주의에 입각하여 서술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김종엽, 2008: 266).
 
3) 문화자본: 경험적 통찰과 규범적 맹목
부르디외의 자본에 대한 이론은 마르크스가 그렇듯이 자본 비판이라는 프로그램 안에서 구성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경제학자들은 “각 행위자나 사회 계급마다 경제적 투자와 문화적 투자에 배분하는 자원의 비율이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양한 시장이 이들 행위자나 계급들에게 자산의 크기와 구성의 차이에 따라 제공하는 차별적인 ‘이윤 기회’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학자들은 학교교육에 대한 투자전략을 전체적인 교육전략과 재생산 전략의 체계에 연결시켜서 생각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 가장 잘 은폐되어 있고 사회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교육 투자, 즉 가정 내의 문화자본 상속이라는 중요한 점을 간과해버렸다”(Bourdieu, 2003: 66).
그가 보기에 인적 자본 개념은 교육적 성취를 선천적 요인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옳았지만 그것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인적 자본 개념은 ① 교육이나 문화적 전수 등을 계급 재생산의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하며, 이런 ② 교육이나 문화적 전수의 심층적 차원을 간과하고 그것을 투자 화폐량이나 시간 등으로 단순하게 계량화하고자 했으며, ③ 문화자본 자체가 가진 특유한 은폐의 효과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김종엽, 2008: 267-268).
사실 문화자본이 수익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예술이나 과학 같은 장에서 지속적인 활용할 수 있는 수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문화자본의 전수는 매우 다층적인 수준을 가진다. 그것은 신체적 특성, 몸가짐과 자세, 언어적 습관 그리고 행동양식과 같이 육체 안에 구현되는 수준에서부터 책과 음반, 미술품과 같이 물질적으로 객관화된 문화적 생산물 따위의 소장과 활용, 그리고 학력과 같이 제도화된 형태를 취한다. 인적 자본의 투자란 이런 다층적 경로를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형성된 계급별로 상이하게 형성된 하비투스(habitus)가 교육적 성취에서도 차이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런 문화자본의 전수는 특유한 은폐의 효과를 지닌다. 문화자본은 성향과 취향 그리고 근대적 작위인 학력 같은 것으로 개인 안에 통합됨으로서 물려받은 재산이라는 혐의를 피한다. 이런 은폐는 그것을 소유한 이의 자기인식에까지 침투해 자신이 가진 문화자본을 권위 혹은 정당한 능력 또는 생래적인 성향으로 인식하게 된다(김종엽, 2008: 268).
이런 부르디외의 주장은 그의 문화자본이 한편으로는 인적 자본 개념의 한계를 비판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문화적 권위와 취향, 즉 문화 자체가 자본임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의 이런 분석은 전방위적인 폭로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부르디외의 면밀하고 통찰력이 넘치는 폭로적 분석의 규범적 토대가 그렇게 견고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의 문화자본에 대한 논의가 인적 자본 개념을 비판적으로 심화하고 문화적 성향과 능력이 자본 투자의 산물임을 비판하는 것에 더해 문화 자체가 자의성을 가진 것이며, 이런 문화적 자의성을 정당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구성하는 작업은 상징적 폭력을 수반한다고 비판하는 데까지 심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심화된 비판은 너무 나간 것이다(김종엽, 2008: 269).
그는 우리가 정당하고 숭배할 만한 문화, 예컨대 고급 예술 또는 대학이 연구 대상으로 제도화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정통화된 예술이 그런 내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심화된 비판의 효과는 비판을 정당화할 준거의 상실로 이어진다. 우리에게 전수된 문화적 자산 일체가 자의적인 것이라면 문화적 생산은 단지 여러 계급이 참여하는 상징적 투쟁의 결과로 환원된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진정한 것이 문화적 자의성의 외피로 겹겹이 쌓인 문화적 생산물 속에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잔여물의 형태일지언정 가늘게라도 숨쉬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진정한 것을 발굴하고 규명하는 작업이 없다면 비판과 폭로 너머의 작업을 기획하기는 어렵게 된다. 문화적으로 진정한 것이 야만적인 문화적 자의성을 경유하지 않고는 생산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양자가 진정으로 풀기 어렵게 뒤얽혀 있지만 그런 매듭을 풀어내고 진정한 것을 증류하려는 노력이 없는 한 부르디외가 궁극적으로 지향할 문화적 재구성의 토대는 허약해지기 때문이다.
비판 작업은 그 비판의 준거조차 비판 대상으로 삼는 심화된 성찰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런 비판의 심화가 비판의 절대화에 이른다면 이는 자가당착에 이를 뿐이다. 비판적 작업은 경험적으로 심화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비판과 정당화의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김종엽, 2008: 270). 이 긴장의 상실로 인해 부르디외의 비판적 의도는 오직 수사적이고 애매한 형태로만 제시될 수밖에 없다.
그의 발언은 자신의 작업, 예컨대 문화자본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이 피지배계급의 문화적 자력화(self-empowerment)를 의도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이런 문화적 자력화로 인해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에 대한 환상을 깨고 더 자신감 있게 상징적 투쟁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문화적 장들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문화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자신의 문화가 가진 더 가치 있고 진정한 것을 증류해낼 개념적 수단을 얻는 것은 아니다. 사회세계를 투쟁과 자본의 언어로 번역하는 비판적인 탈신비화의 작업이 규범적 맹목이라는 대가를 요구한 것이다(김종엽, 2008: 271).
 
3. 결론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은유적 연관과 확장을 지닌다. 레이코프가 잘 분석했듯이, 우파가 세금구제(tax relief)라는 말을 쓰게 되면, 그것은 구제라는 단어가 가진 함의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다. 학문 세계에서 쓰이는 개념들은 이보다는 훨씬 정교하게 구성된다. 학문적 장의 특성으로 인해 학자들은 자신의 개념을 더 중립적으로 규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학문적 개념이라고 해서 은유적 연관을 아예 피할 수는 없다.
지난 몇십 년간 인적 자본, 사회자본, 문화자본 같은 개념이 주조되어 학문 세계에 착지했다. 이런 개념들이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분석할 조망점을 줄 수도 있지만 그런 개념들 모두가 자본 개념을 확장함으로써 구성된 것인 한에서 자본이라는 말이 가진 속성을 피할 수 없다. 자본은 그것이 얼마나 모험적이든 얼마나 면밀하게 계산된 것이든 항상 전략적 투자와 이윤추구를 함축하며, 자본가, 즉 자본을 운용하는 주체를 전제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개념을 경유하여 사회세계를 분석하는 그만큼 우리는 사회의 전체 양상은 자본의 양태로서 그려지게 될 것이다. 이런 개념들이 나름의 통찰과 생산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개념들의 부상은 그것의 대가로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담론의 약화를 초래했다. 인적 자본 개념은 노동 개념을 대치했으며, 사회자본 개념은 연대 개념을 침식했고, 문화자본 개념은 사회이론의 규범적 토대를 약화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개념이 학문 세계에 안착할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언어 속으로 스며들어가 있는 현실은 우려할 만한 것이다(김종엽, 2008: 272).
다른 한편 새롭게 유행하는 사회과학의 개념이 자본 개념의 확장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징후적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사먄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상동성을 가진 과정이 학문의 장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상동성의 강화가 신자유주의적 프로젝트에 강인함을 더해준다는 것을 함축한다. 부르디외는 사회세계 전반의 자본화에 대항하기 위해 자본 개념의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그것을 통해 비판적 의도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그런 폭로 작업의 계몽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사회세계를 탈규범화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공명하게 된다. 그의 분석 역시 사회세계를 거듭해서 탈규범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과도한 자본개념의 수용으로 인해 이론의 규범적 토대가 허약해지면, 도처에서 자본의 논리를 발견하는 비판적 분석이 독자를 문화적 투항으로 이끌지 아니면 분노와 투쟁의 정신을 고무할지는 진정으로 모호하다.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야만이라면 그것과 투쟁해야 할 것이다. 부르디외의 경우는 그런 쟁투에서 과연 빌려온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개념의 신자유주의화에 대해서도 저항해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과 연대와 규범 개념을 재활성화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세계에 대한 더 공정하고 총체적인 묘사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김종엽, 2008: 273).
 
참고문헌
김우식. 2006. 연결망, 불평등, 위법행동. 「한국사회학」, 40집 5호. → 사회자본의 부정적 효과에 대한 경험적인 연구
김종엽. 1997. 자아정체성과 정치: 푸꼬와 기든스를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제35호
박영도. 1994. 현대 사회이론에서의 비판 패러다임의 구조 변동.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비판과 정당화의 변증법적 관계, 그리고 근대 사회이론에서 비판의 절대화와 정당화의 절대화가 낳은 이론적 병리에 대한 치밀하고 탁월한 논증
유석춘·장미혜. 2003. 사회자본과 한국사회. 『사회자본』. 유석춘 편. 그린비.
이재열. 1998. 민주주의, 사회적 신뢰, 사회적 자본. 「계간 사상」, 10권 2호.
이재혁. 2006. 신뢰와 시민사회. 「한국사회학」, 40집 5호.
Bourdieu, Pierre. 1994. 『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문경자 옮김. 솔출판사.
_____. 1996a.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상)』. 최종철 옮김. 새물결.
_____. 1996b.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상)』. 최종철 옮김. 새물결.
_____. 2003. 자본의 형태. 『사회자본』. 유석춘 편. 그린비.
_____. 2005. 『호모 아카데미쿠스』. 김정곤·임기대 옮김. 동문선.
Bourdieu, Pierre et al. 2000. 『세계의 비참 I』. 김주경 옮김. 동문선.
Coleman, James. 2003. 인적 자본 형성에 있어서의 사회자본. 『사회자본』. 유석춘 편. 그린비.
Gordon, Colin. 1991. “Governmental rationality: an introduction.” Graham Burchell et al. ed. The Foucault Effect,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ortes, Alejandro. 2003. 사회자본 개념의 기원과 현대 사회학의 적용. 『사회자본』. 유석춘 편. 그린비. → 162-167쪽. 부정적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사회자본이 가진 문제점을 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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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5.31

관련이 있는 글인 듯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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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나오는 경제용어의 편향성 (한겨레21, 한광덕 기자, 2009.08.21 제774호)
[한광덕의 구시렁 경제] 작명 집단의 이해관계 반영…
‘구조개혁’ ‘노동 유연성’ 등 긍정적 은유 통해 노동자 압박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오규원 시인이 패러디한 앞 두 구절이다.
 
대상의 의미를 규정하는 이름엔 부르는 사람의 주관과 이해가 투영되게 마련이다. 대중적 말길의 소통이 쉽지 않은 경제용어는 굴절의 각도가 더 커진다.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사건이 발생해 각계의 반응을 전달하는 기사 중엔 아직도 ‘경제계’라는 표현이 제법 나온다. 그런 기사의 상당수는 ‘삼성그룹 고위 간부는 이렇게, LG그룹 관계자는 저렇게 말했다’는 식으로 끝난다. 노동자 혹은 민주노총의 반응은 빠져 있다. 그렇게 쓰면 경제계가 아닌 ‘재계’의 반응이 된다. 또 경제계의 반응으로 자주 인용되는 ‘경제 5단체’란 이름은 아예 공식용어의 지위를 굳혔다. 하지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를 포함한 이들 5개 단체는 ‘사용자 5단체’ 정도로 부르는 게 제격이다.
 
인지언어학을 창시한 조지 레이코프는 언어의 본질을 해독하기 위해 ‘프레임’이라는 분석 도구를 사용했다. 그는 제한된 범위의 정신 구조인 프레임이 ‘사실’을 이긴다고 봤다. 미디어에 의해 되풀이되는 프레임과 은유는 대중의 머릿속에 성공적으로 주입된다는 것이다. 경제용어를 작명할 만한 지위에 있는 집단은 기존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하기도 한다. 그들은 대중이 그 의미에 익숙해지게 한 뒤 이해관계를 관철한다.
 
1997년 외환위기 뒤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구조조정’(restructuring)이란 말은 기업의 사업이나 조직구조를 효율적으로 재편하는 작업을 뜻한다. 당연히 경영의 투명성과 책임성 강화를 수반해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구조조정은 노동력만의 구조조정, 즉 감원과 동의어가 된다. 나아가 ‘구조개혁’이라는 당위성을 가진 용어로 승격되면서 노동자를 압박했다. 그러면서 구조조정의 궁극적 지향인 경영혁신이란 개념은 사라졌다.
 
시카고 학파의 ‘노동+유연화’란 접합의 기술도 기발하다. 중학교 1학년생에게 ‘노동 유연화’가 무슨 뜻일 것 같으냐고 물어봤더니 “일만 계속하지 말고 쉬엄쉬엄 맨손체조를 하면서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것”이란 나름의 해석이 돌아왔다. 은유를 통해 긍정적 이미지를 부여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7일 “사회 취약 계층에 대한 고용 창출 프로그램을 지속할 것이며 기업 구조조정 개혁을 신속하게 효과적으로 취할 것”이라면서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에도 노력하겠다”고 설명했다.(<연합뉴스> 8월7일치 보도) 윤 장관에게 기업의 구조조정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으로 통한다. 그리고 구조개혁과 유연성의 프레임을 해체하면 ‘정리해고’라는 실체가 드러난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12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는 발언으로 노동계의 반발을 사는 등 논란을 부르고 있다. 윤 장관은 이날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하는 것은 …효율성 향상의 혜택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논평을 내어 “윤 장관의 발언은 ‘노동 유연성’ 때문에 해고된 노동자의 현실을 외면한 사용자 위주의 발언”이라고 비판했다.(<한겨레> 8월13일치 보도)
 
노동시장도 다른 생산물이나 생산요소 시장처럼 수요와 공급에 의해 균형점을 찾는다. 따라서 시장이 유연하려면 노동의 공급뿐만 아니라 노동의 수요도 유연해져야 한다. 그런데 노동력의 수요자인 자본의 유연성은 왜 촉구하지 않는 걸까?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방해하는 자본의 경직성은 왜 탓하지 않는 걸까?
 
(윤증현 장관이) 인간으로서의 노동자를 무슨 밀가루나 과일, 야채와 같이 시장 상황에 따라 가격 폭락과 폭등을 반복하는 상품과 똑같이 바라보니 그런 발언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진보신당 8월12일 브리핑 중)
 
노동자를 물화시키려는 자본 진영의 언어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억압기구로 작동하고 있다. ‘네가 노동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노동은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네가 유연화란 이름을 불렀을 때 노동은 곧 네에게로 가서 정리해고로 모습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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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5 16:21 2010/01/2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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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0/02/1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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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새벽길 2010/02/11 20:40

    님도 다시 한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저도 확실히는 모르지만, "매우 소수의 사람들이 위와 비슷한 얘길 하긴 하는데 대다수는 관심도 없거나 또는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흘려보내는... 뭐 그런 분위기"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그런 학회나 집단은 없는 듯 해요. 언어나 담론 관련 학회에서 위의 문제를 다룰 텐데, 그 쪽은 잘 모르겠거든요. 이게 레이코프가 말한 '프레임이론'과도 관련이 있을 듯한데, 이를 연결해서 다룬 것은 잘 모르겠네요. 소개해주신 글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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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비밀방문자 2010/02/1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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