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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8/25
    연애하는 금순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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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8/17
    우리의 사랑(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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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8/16
    네 개의 서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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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8/06
    '아이키우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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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는 금순이

(블로그 분위기 좀 바꿔봤음)

 

오늘 금순이가, 자기를 외면하고 먼저 엘레베이터를 타고 가버리려는 남자에게 "사랑해요"하고 외쳤다.

애 딸린 과부, 미용사 금순이가 총각, 의사를 만나 사랑하려면 얼마나 많은 우연의 장치들이 얽히고 섥히는 설정이라야 가능할까, 싶었더니만 의외로 정공법이라 놀랐다.

 

<굳세어라, 금순아>를 보고있으면 벼라별 애엄마들이 나온다.

애 낳자마자 남편이 죽자 애 놔두고 팔자 고친 여자

남편 없이 애를 낳고 애를 위해 억척같이 살아 이제는 떵떵거리고 살지만 미혼모였다는 것이 최대 콤플렉스인 여자

재혼한 이혼녀(전에 낳은 아들이 하나 있다)

그리고 우리의 금순이,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죽었으나 임신한 아이를 그대로 낳고 시댁에 들어가 시집살림까지 하며 사는.

 

이 각종 애엄마들은 사회적 지위가 어찌되었든 간에(서울에서 제일 큰 미용실 원장이든, 잘 나가는 사업가이든) 애가 딸렸다는 것 때문에 모진 사회적 압박과 시련에 시달린다.

특히 금순이의 동서되는, 재혼한 이혼녀, 이 여자는 전에 이혼했다는 사실과 그 때 낳은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시부모가 몰랐었다는 이유 하나로 극한의 파렴치한으로 몰려있다.

그걸 시부모에게 밝히지 못했던 이유를 말 안 해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사회에 살면서, 인지상정에 측은지심이지, 동정과 위로는 못 할 망정(애 낳은 엄마가 애와 떨어져 살아야하는 아픔, 이혼을 겪은 아픔, 그것을 드러내놓지 못하는 아픔)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는 너무하다. 저런 식이 먹히는 이 사회의 가족권력구도가 섬뜩하다.

 

보고있자면 섬뜩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금순이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듯한 기미만 보여도 으르렁대는 금순이 시형(시동생은 아니고 남편의 형이면 시형인가?).

그리고 전체적으로 화면에는 늘상 적대감이 넘쳐난다. 그래서 툭하면 상대를 노려보고 고함을 지른다. 저게 한국인의 정서인가보다.

 

아무튼 애 딸린 여자가 주인공인 이 드라마는 곳곳에 애 딸린 여자가 포진하여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임신 중이다. (내일 예고편에 이십대 딸을 둔 양희경이 임신진단테스트에서 포지티브 결과에 기절하는 장면이 포함돼있었음) 출산율이 오이씨디 국가들 중 최저라는 국가의 걱정에 반하는 드라마인 건지, 동조하는 드라마인 건지..

 

애 딸린 여자들의 팔자고침을 두고 두 눈에 쌍심지를 켜는 와중에도 금순이의 사랑은 굳세게 지켜가니, 흠, 그건 왤까.

그녀는 굳세게 살았으므로?

온갖 역경에도 반듯하게 꿋꿋하게 살았으므로?

스물한두살 짜리(이 단어에서 나의 선입견이 들어있다고 해도 할 수 없다.)들이 덜컥 임신을 쉽게 사회음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음에도 반듯하게 사회양성적인 방법(결혼, 출산)을 택하였으므로?

그러고도 남편이 죽었으나, 넌 나가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시부모도 만류하며 애도 포기 않고 낳아 키우고 시집에서 살림하고 돈 벌고..여전히 반듯하게 사회양성적인 방법으로 열심히 살았으므로?

 

그래도 (사회음성적인) 불륜을 옹호하면서 (결국) 사회양성적인 빌미를 비빌 언덕으로 깔아놓는 소설,영화들 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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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랑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본다.

상대의 눈 안에 내가 비치는 것을 발견한다.

 

"어, 엄마 눈 속에 내가 있는데!"

"응, 규민이 눈 속에도 엄마가 있어."

(아, 연애할때 조차도 이런 대사는 구사해본 적 없었다.)

 

이런 사랑이 정말 있다.

보면 볼수록 샘솟는 사랑.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5분도 5초 같고, 50분도 5시간도 닷새도 다섯달도 하염없이, 하염없이, 손으로 턱을 괴고 그 얼굴만 바라볼 수 있는 사랑.

연애의 유효기간은 2년이라는데, 유효기간 1년을 넘기면서 오히려 새로운 절정기를 새삼 맞고있는 사랑.

절정기의 고개를 넘어 구름을 타고, 또 구름을 타고 높아높아만 가는 사랑.

 

아침에 눈을 뜨고 내 얼굴을 발견한 그녀, 생긋 웃는다.

숨이 막힐 듯이 아름다워, 너.

그녀도 나에게 건네는 말, "엄마, 엄마는 왜 그렇게 이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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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개의 서명

아주 오랜만에 본 셜록 홈즈.

 

그녀와 놀러갔던 친구네 집. 우리는 한 다발의 셜록 홈즈 씨리즈가 책장에 꼽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와~ 탄성을 질렀다. 곧바로 한 권씩 뽑아 읽기 시작, 읽기 시작한다고 할 때부터 약 한두어시간 가량 단 한마디 말도 서로 안 하고 책장만 넘기고 있었는데, 이제와서, 이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처음으로 입 밖에 꺼내어 고백하자면, 난 그 때 내가 뽑은 셜록 홈즈의 책의 단 한 줄도, 줄은커녕 단 한 글자도 읽지 못 했다.

책상의자를 방 한가운데 쪽으로 돌려놓고 앉아있던 나의 발치에 앉아, 그 날 그 집에 같이 갔던 그녀가 나에게 기대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손등에 규칙적으로 닿던 숨, 팔뚝을 스치던 단발머리, 이런 것들 때문에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팔을 비키지 않았다. 한시간 이상을 아무 말도 않은 채.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린 참으로 애절한 사랑을 하였다.

그런 감정을 어떻게 보이고 다루는지 몰라, 서로를 슬프게 하기만 했다.

나는 그녀 앞에서 다른 아이와 귀속말을 하며 장난을 쳤고, 그녀는 내 앞에서 다른 반 아이를 데리고 와 서로 가장 친한 친구 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그로부터 십년이 좀 모자른 시간이 흘러 어느날, 아주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던 그녀는 예수쟁이가 되어가지고 언제 만나 술먹자는 내 말에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던졌다.

 

오랜만에 본 셜록 홈즈 얘기를 하려는데 어쩌다가 한 줄도 읽지 않은 셜록 홈즈 책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불어과외를 하러 갔던 집에 셜록홈즈의 완역 씨리즈가 있었다. 또 와~하고 탄성을 질렀다. 당장 한 권을 뽑고, 이제부터 올 때마다 하나씩 빌려갈께,했는데, 처음에 뽑았던 그 한권이 첫권이자 마지막권이 되어버렸다.

<네 개의 서명> 숨겨놓은 보물을 둘러싼 살인, 복수, 추격.

 

인도에서 디립다 고생하던 남자가 숨겨놓은 보물을 갈취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제안자 셋과 이 남자는 종교적 맹세를 통해 서로에게 굳은 믿음과 신뢰를 갖고 이를 끝까지 배신하지 않는다. 배신하는 사람은 영국장교들.

보물을 갈취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죽인 네명이 감옥에 가게되는데,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들이 간수인 영국장교들과 거래를 타협한다. 보물의 얼마만큼을 떼어주는 대신 네명 모두의 탈출. 그러나 보물지도를 가지고 사실 확인을 나갔던 영국장교 하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보물을 가지고 사라진 것이다.

이 때부터 응징과 복수의 칼을 세운 남자, 간신히 감옥을 탈출하여 영국으로 와 보물을 되찾으려하는데...

 

당연히 셜록 홈즈의 추리로 남자의 복수극은 실패한다.

결국 배신한 영국장교 하나만 잘먹고 (잘 살지는 못함, 언제 배신의 칼을 맞을까 두려워하며 살았지) 그 아들들은 잘 먹고 잘 사는데, 나는 인도에서 디립다 고생했던 남자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너무나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셜록 홈즈, 이럴땐 아무리 정의가 어쩌느니 해도 결국 영국놈이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남자도 보물을 갈취하려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바 있다.

그 보물도 애초에 그런 식으로 빼앗은 것이다. 그걸 뺏겼다고 누구에게 복수할 처지가 그 놈도 아닌 것이다.

결국 무언가 찜찜한 일을 하면 그것은 나중에 몇배 몇십배 더 찜찜하게 나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역으로, 내키지 않아도 찜찜한 일이 되지 않도록 애쓰면 당장은 헛고생처럼 보일지라도 나중에 몇배 몇십배 보람찬 일로 나에게 돌아오기 마련인 것이다.(라는 생각을 국민학생처럼 혼자서 가만히 하고있었음)

 

마지막 장면

왓슨 박사: 나는 사랑을 얻고,  존스 경사는 범인을 잡았는데, 홈즈, 자네는 사건을 다 해결하고도 얻은 게 아무 것도 없으니 어쩌나..

셜록 홈즈: 나에겐 이것 밖에 없지, 코카인,하며 그 쪽으로 손을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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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키우기란'

씨리즈를 기획했다가 3탄 쓰고 꺽어졌던 게 기억이 난다.

 

할 말 다 한 것은 물론 아니고, 이렇게 욕바가지 퍼붓는 식은 아니겠다, 싶었던 것도 있고, 아이가 시시각각 자라면서 보이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내 생각도 시시각각 색깔이 달라졌던 것도 있고.

하여간에 아무튼 난 여전히 속에 할 말이 많다.

 

오늘 한겨레 신문의 오한숙희 인터뷰를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런 인터뷰는 오한숙희 쯤 되는 유명인이니까 통하는 거지, 그야말로 애 둘 있는 (그 중 하나가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사회적 의미를 더 가질 수도 없는) 아무개씨였다면 인터뷰가 나올 리도 없고(왜 인터뷰가 안될까, 이 인터뷰가 홍승현 녹음테이프보다야 불행히도 정치적 쑈로선 덜 유행하겠지만, 적어도 생방송에서 바지 내렸단 얘기보다는 재밌고 사회적 의미 인간학적 의미 오만배 더 많은데), 그냥 어느 수다 이상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 사회의 미성숙과 그로 인한 사회적 인간적 역사적 불행과 비애가 고대로 드러나는 것인 것을....

 

 

규민이 어린이집의 장애아 통합교육 소위원회에 끌려들어갔다. 생각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저녁에만 모일 수 있는 모임 성격때문에 내 일은 아니고 남이 알아서 잘 해주길 바라는 일이었다가(저녁 시간이 자유롭다는 그 사회적 의미여!) 어찌어찌...

거기서 나는 많은 충격을 경험하였다. 당연한 일이다. 비장애의 몸을 갖고 삼십년을 넘게  한국사회에 (다른 곳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살면 장애에 관한 모든 것이 충격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를 키우는 모든 이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100% 동감할 것은, 그 아이가 건강하다는 것 하나로 새삼, 새사 새오 새륙 ...새오천만팔십구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는 것일 것이다.

건강하다는 것 그 자체는 물론 긍정도 만점짜리, 인간 인생의 요소이지만, 그것이 결여됨은 일파만파 엉뚱생뚱 다르고 다른 맥락으로 파생하여 그 사람이 사는 데 불편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이미 아니다.

 

아이를 키우고 난 후에 생명에 대한 사랑, 존중, 공감의 깊어짐을 말한다.

사실이다.

이라크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전쟁을 반대한다는 모성애를 암시하는 평화운동은 욕을 먹기도 하고 욕을 먹을만 하기도 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모성애가 특정 성(性)(혹은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굳어져서 문제이지, 모성애는 실재하는 심리이고, 아름답고 심오하고 철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키우고 나니, 아이를 키운다는 게 무언지 알고 나니 이렇다.

기형아검사, 유전질환검사, 나는 다음에 또 임신이 되어도 그런 검사들을 받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까. 대단히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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