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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백 | 집행위원
α. 여성
여성문제에 대한 역사적 유물론의 접근은 가족의 기원이나 여성 억압의 기원을 선사시대 혹은 ‘문명’의 기원 등 단순 연대기적으로 묻지 않는다. 주어진 생산양식 속에서 생산의 두 측면들 사이의 접합을 특징짓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구조·과정·모순들을 검토한다. 이 일차 과제가 완수된 후에야 세 가지 부차적 과제가 남는다: 첫째는 “기저에 깔린 토대의 구조·과정·모순과 사회적 혹은 시장관계적 수준에서의 그 표출 형태 사이의 관계를 이론적·경험적으로 확립”하는 것; 둘째는 “기저에 깔린 직접적으로 관찰되지 않는 생산양식의 차원과 지배 이데올로기, 법적·정치적 구조, 의식 형태들 상호간 관계를 이론적·경험적으로 확립”하는 것; 셋째는 “성 불평등의 … 선재하는 이데올로기, 의식 형태, 사회적 관습 등의 효력성(effectivity)을 보장하는 독특한 자본주의적 조건과 결부”된 것과 관련된 효력(efficacy)들, 즉 “전자본주의적인 성적 불평등이 계속될 수도 있고 새로운 형태가 출현할 수도 있으며, 그 모두가 양성 관계의 구체적 모습”일 수 있음이 사실이라면, “남성과 여성을 불평등한 관계에 놓는 자본주의의 물절 조건이 그러한 유형들의 효역을 결정”해 가는 발전 추이를 연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유형들이 “그것들의 존속과 소멸이 이해되기 위해서 확립되어야 하는 생산양식의 구조와 운동 속에서 ‘이상적 내력’”을 가질 때, “일단 성 불평등의 ‘이상적 내력’이 개괄되면 주어진 생산양식(예컨대 자본주의)에서 그 구성 요소들의 출현을 둘러싸고 있는 조건들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세 번째의 중요한 과제이다.1
이처럼 파악된 생산양식의 규정적 운동에서 여성문제가 특수한 정치적 조건과 함께 돌출하였을 때 여성운동의 등장하기에 이른다. 여성운동은 전체 인구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으로서, 부문 운동에서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노동운동과도 연관성이 매우 깊다. 여성운동은 크게 (ⅰ)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사이 초기 자본주의 형성기의 양태; (ⅱ) 19세기 초중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 약소한 긴장이 형성된 시기의 양태; (ⅲ) 19세기 말 독점자본주의 시기의 양태와 식민지 특수성 속에서 피압박민족의 이해관계와 결합을 이룬 채 전개된 양태; (ⅳ) 20세기 초 이후 전반적 위기하의 양태로 나누어진다. 오늘날의 여성운동은 제국주의 시대 규정 하 19세기 말의 내용의 지양을 이룬 20세기 전반의 양태와 연속성을 지닌다.
여성운동의 초기 발전 추이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사이 잉글랜드와 프랑스 등지의 정치적 급변과 관련된다. 이 시기 낙후한 봉건제 생산양식은 질곡에 달해 있었으며, 이를 반영한 부르주아의 반봉건투쟁이 두드러졌다. 특히 잉글랜드에서 봉건제 생산양식의 해체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의 출현이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셰일라 로버덤(Sheila Rowbotham)은 『숨겨진 역사』에서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수공업으로 인해 폐쇄적인 지방 공동체는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생산을 효율적으로 하게 하는 분업과 전문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이제는 본격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전에는 생산 조직에서나 분명하게 나타났었던 사회적 분화가 특징적으로 되고 있었다. 시골이나 도시 할 것 없이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은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 점차 커지고 있었으며 그들 스스로도 자기들의 존재를 의식하기에 이르렀다. 분업이 조금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됨에 따라 부유한 자작농의 부인들은 농업 노동에서 손을 떼어도 좋게 되었지만, 가축을 키운다든지, 함께 기거하는 농장 하인들에게 음식을 장만해 준다든지 하는 일들을 계속해야 했으므로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냈다. 도시에서는 생산의 단위가 커짐에 따라 영세상인이 사업을 시작하는 데 드는 자본 규모가 점차 커져갔고 결과적으로 자본 없는 전문 기술자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사업을 해봐야겠다는 희망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길드 조직과 수공업의 규율에 영향을 끼쳤다. 장인(匠人)들을 보호하기 위한 독자적인 조직들이 발달되었고 가입 조건이 까다로운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 일반적으로 견습공직에는 남성들이 종사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남성들과 경쟁하지 않고 여성들만이 종사할 수 있는, 여성을 위한 특정한 직업들이 있었다. 이 직업들은 여성들의 가사 노동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는 아직도 가정 생활과 산업 활동이 분명하게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은 마실 것, 먹을 것, 입을 것을 생산하는 일을 하였다. 이 이후로 이러한 직업들을 가리키는 어휘들은 그 원래의 고유한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채 여성들을 가리키는 진부한 표현으로 바뀌어 버렸다. 즉 예전에는 "brewster"는 여성 양조자를, "spinster"는 노처녀가 아니라 물레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여자를 의미했다.”2
수공업적 생산이 지배적인 초기 자본주의 발달기─아직은 봉건제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에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그만큼 가사 활동과 생산 활동의 분리는 크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여성 일반 역시 이러한 경제사적 전개 속에서 남성이 종사하던 부문과 겹치지 않는, 그리하여 일자리 경쟁이 사실상 성립하지 않는 영역에서 소규모 노동력을 제공하는 형태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 시기 가사 활동 외 전반적인 생산 활동에서 여성의 역할이 아직은 저평가된 연유로 인해, 그만큼 여성 일반의 정치적 요구의 질적 수준이나, 그 양적 발전 수준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17-18세기 여성운동은 위와 같은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여, 주로 여성의 교육권 및 극히 일부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부르주아적 요구의 달성을 위한 형태로 등장하였다. 이 시기 여성운동은 초기에 극소수의 부르주아 지식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부르주아 여성 군중과 프롤레타리아 여성 군중 일부의 일정한 참여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후기의 경향은 특히 프랑스 혁명의 전야와 그 이후에 활발히 등장하였다.3
1789년 1월 24일 국왕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소집하여 당시 군중의 불만 사항을 조사하기 위한 진정서를 작성해 오도록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계층의 목소리가 담긴 진정서가 등장하였는데, 여성 역시 그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계기로 하여 여성 군중은 정치적 참여의 권리까지 요구하기에 이른다.4
이세희 교수는 이 시기 프랑스 여성운동에서 여성 군중의 참여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실지 대혁명 초기를 특징짓는 시위운동에서 여성의 참여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었으니, 여성들은 그들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 주권행사에 참여했던 것이다. 1789년 4월 생-탕투안 교외의 레베이용 공장주에 대한 폭도에 참가한 여성들은 폭력의 교사자 역할을 함으로써 남성들을 선동하였다. 사건 직후 한 생선장수 여인은 방화와 약탈 그리고 ‘제3신분 만세’를 외친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여성들이 이미 정치적 색체를 띠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된다. 보다 전통적인 경우는 1789년 봄 식량폭동 때의 여성 개입으로서,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강력한 동원화가 확인되었다. 여성들은 원래 빈번히 소요를 일으키는 집합체였던 바, 일반적으로 주민들의 불안과 분노를 촉발시킨 것은 시장에서의 곡물 공급의 부족이나 곡물가의 급등 때문이었다.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상태의 민중여성들은 그 자리에서 상황을 토론했으며 그녀들의 분노는 급속히 폭동에의 호소로 변화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남성들이 합세하고 사람들이 구제를 요구하면서 시청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관계 당국이 만족할 만한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그들의 요구는 협박과 더불어 곡물 저장소에 대한 습격으로 변질되곤 했다.”5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 보장, 여성의 기본권 보장 확대는 이 시기 발전한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대표적인 요구였다. 그러나 당시 부르주아의 가장 급진적인 날개에서 요구하였던 바의 내용이 세계사적 의미에서 실제로 온전히 받아들여지게 된 시점은 19세기 말, 심지어 20세기에 다다르면서였다.
착취 사회에서 여권신장의 제일 촉매제는 생산력의 증대이다. 생산력의 증대는, 부득이하게 기존 사회적 관계의 급변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생산력의 발전은 그에 걸맞는 형식으로서 새로운 생산관계와 이를 반영한 상부구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생산력은 사회형태에 내장된 각이한 형식적인 관계 변화를 주도한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규정된 생산양식의 내용이다. 그와 반대로 이에 수반하는 경제적인 관계항, 즉 생산관계는 그것의 형식이다. 이 변화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비로소 여성의 집단적인 실천도 가능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실천이 주체적 역량을 확보하게 되는 계기도 나오는 것이다. 즉 17-18세기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당대 사회의 근본변혁에서 진보적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그 규모는 매우 협소하였으며, 그 요구의 질적 수준도 이 시기 생산력에 대응되는 수준의 부르주아적 계급성·당파성에 의해 제한되어 있었기에 실질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실지 프랑스 혁명을 통해 형성된 급진 부르주아 정파인 산악파(La Montagne)의 정권하에서도, 그 이후의 기회주의적 테르미도르 정권하에서도 여성의 부르주아적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여성의 참정권 운동 및 기본권 보장 운동이 비로소 힘을 갖게 된 계기는 광범한 임노동계급 여성의 등장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임노동계급 여성의 폭발적 등장의 핵심 계기가 바로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의 확립이다.
19세기에 이르러 기계제 대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자 기존의 가족제도 내에서 여성의 지위 및 이를 반영하게 될 다양한 여성운동의 성격이 급변하게 된다. 이 시기 소생산자 계급을 이루고 있던 중소농과 수공업자들은 자본과의 경쟁에서 몰락하였고, 그 결과 대규모 인구의 이촌향도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 인구는 이주하여 정착한 지역에서 임노동자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강화하였으며, 이 과정은 농촌에서 발생한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계급 집단을 다시 도시에 공급하는 원인으로 되었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원인이 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가사 활동과 생산 활동은 명백히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즉 광범하게 남아 있던 인력인 여성은 생산수단에 결합할 수 있는 대규모 노동력으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새로운 기계들은 노동자들의 조심스러운 취급을 요구했으며, 따라서 노동자들은 가내 공업의 장시간이긴 하나 불규칙적인 노동 시간과는 다른 노동의 리듬(주기적 리듬)을 감수하게 되었다. 공장 소유주들은 노동력을 기계에 대한 부속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랐다. … 공장 내에서의 육체적 현금 거래가 빚어내는 폭력은 비인격적인 징벌로서 새로운 산업적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되었다. 공장 내에서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남편과 아버지들이 아니라, 감독자와 고용주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이것은 노동계급 가족에 있어서는 남성의 사회적 지배가 위태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용주들은 자기들의 직업과 전통에 대해서 자부심이 대단한 장인들보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억누르기가 훨씬 쉽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공장 소유자들은 이러한 값싼 노동 예비군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자, 곧 이들을 고용했는데─때로는 남자보다 우선적으로─이때 그들은 여자들에게 남자들이 받는 임금보다 적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여성들을 그들의 전통적인 영역 밖으로 유혹해 낸 것은 아니라고 자축하기도 했다. 공장 노동의 조건은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절망적인 사람들이나 혹할 수 있을 정도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장 생산으로 인해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독립적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6
이 시기 여성 임노동자는 노동운동을 통해 여권신장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는 이를 통해 점차 부르주아 여성운동과 대립하는 (아직은 그 조직의 단결력이 매우 약소한 수준인)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의 주체로 나아가기에 이른다.
본래 19세기에 이르러서도 한동안 개별 임노동자 여성은 여권신장에 있어서 부르주아 여성운동과 결합하는 형태로 존재하였다.7 그러나 이와 동시에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수에 상응하는 만큼 자본주의에서 특수한 규정성을 띠는 계급적 적대,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적대가 굳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계급적 적대가 한 사회에서 갖는 인과적 힘은, 자본주의의 발전 수준에 대응하였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 자본주의의 발전 속도는 매우 빨랐으며, 따라서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간 계급 적대가 지니는 인과적 힘도 그만큼 증가하였다. 한편으로, 영국에서는 1824년 노동조합 단결권이 인정─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제한된 형태로서의 여러 노동-법률적 권리─되었다.8 노동조합 일부 활동의 법률적 보장은 임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합법적 투쟁의 확산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계급 적대는 제도적 영역 속에서도 노골적인 것이 되었으며, 이 적대는 여성과 관련된 모든 운동에 일정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 시기 제도권 개혁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부르주아 당파 역시 노동계급의 압박 속에서, 노동계급에 대한 회유책으로서 일시적인 타협을 강제당하던 측면이 있던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도 프롤레타리아 계급 전반의 주체적 역량은 부르주아의 그것에 비해서 상대적으로는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에, 대부분의 여성운동은 부르주아 당파 또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당파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일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노동운동이 핵심 계기로 된 영국의 1830년대 차티스트 운동에서 참정권 보장의 범위는 남성 도시노동자로 한정되었다. 1866년, 여성 참정권 보장을 공식적으로 의회에 요구한 당시 자유당 소속 하원의원이었던 존 스튜어트 밀은 부르주아였다. 그는 1,499명의 서명을 받아서 의회에 여성참정권을 요구하는 청원을 제출하였다. 또한 각각 1869년에 설립되어 영국,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여성사회정치연맹(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과 전국여성참정권협회(National Woman's Suffrage Association)의 결성을 주도한 계급이 부르주아였다는 것도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앞서 언급한 프롤레타리아와의 일정한 긴장 속에서, 부르주아에게 강제된 측면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두 계급 간의 계급 적대는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19세기 부르주아에게 있어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로버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중산 계급은 조합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거기다 여자들까지 조직화되자 조합은 완전히 계급적 힘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가 지니는 권위의 기초; 인용자]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버렸다. 여성 노동자들의 잠정적으로 간헐적인 투쟁은 노동자에 대한 고용주의 지배는 물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까지도 위협하였다. 예를 들어, 1832년 5월 리즈 지방의 머큐리는 1,500명의 여자 카드 식자공의 파업에 의해서 상당한 두려움을 느꼈다. … 지배계급은 여성들이 투쟁할 때 결과하는 사회-정치적인 의의를 대부분의 노동자들보다 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글래스고우 방적공 협회가 남녀 노동자들에게 동일 일금을 지급하기 위해서 협상을 벌인 것은 아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즉, 자본으로 인해 일어난 가족과 노동, 가정과 공장,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분열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노동계급의 일치단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한 초기의 중요한 사례였다.”9
19세기 말 독점자본주의에 이르게 되자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당파는 부르주아 당파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더 나아가, 여성 노동자의 수 역시 이전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 서문에 따르면, 19세기 말 당대 주요 서구사회에서 여성 노동자의 수는 다음과 같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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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남성보다 그 수는 적지만, 남성 산업 노동자의 60%를 초과하는 수에 도달하였다는 점은 노동운동에서 여성을 무시할 수 없음을 충분히 보여준다. 여성 산업 노동자 수의 절대치는 당대 유럽 인구의 폭발적 성장에도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며 증가하였다. 전체 노동자, 이와 더불어 여성 노동자의 양적 성장은, 자연스레 여성운동에서 여성 노동자의 비중을 상승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존에 관변적 성격을 지녔던 부르주아 여성운동 역시, 부르주아가 제도권 정치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경제적 토대가 존재하는 한에서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운동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 계급 적대를 반영하는 운동으로서 기능하게 될 수밖에 없다. 즉 19세기 말에 이르러 여성운동은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소부르주아,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에 긴밀하게 얽혀져 있는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동시에 해당 계급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지닐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한계도 고스란히 물려받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이미 몰락해 버린 소부르주아의 지속적인 노동계급으로의 인입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이 소부르주아에서 막 노동계급으로 된 운동원은 프롤레타리아 진영 내에서 ‘전(前)자본주의 시기 남성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사회적 생산에서의 여성노동을 ‘폐지’함으로써─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이는 19세기 여성운동을 평가하는, 적지 않은 여성사가들 사이에서 자주 지적되곤 한다.11
19세기 말에 성장한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은 당대 여성임금 차등 지급, 여성 노동자의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한 정책 요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철폐 등을 내세웠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은 또한, 여성 노동자의 정치적 활동 반경을 넓히기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개혁의 요구를 드높였다. 여성 노동자의 활동 반경이 넓으면 넓을수록, 전체 노동운동이 자본가와의 대립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기회도 넓어진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이 이러한 요구는 매우 정당한 것이다.
19세기 말 독점자본주의 시기의 양태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대표하던 한 인물인 아우구스트 베벨은 『여성과 사회주의』(1879) 1910년 증보판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렇듯 법률상으로 명백한 남성에 대한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를 입법에 의해 평등하게 실현시키기 위해, 참정권 요구운동이 지보적 여성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흐름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도록 고무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사상이다. 노동자계급에게 정당한 것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여성에게도 정당하다. 언제나 억압받고 권리를 박탈당하며 수없이 무시당하는 그들이 자신들의 종속적인 지위를 극복하기 위해 유리하게 보이는 모든 수단들을 동원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권리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조차 하다.”12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대중을 공적 사무에서 격리시킨다면 정치교육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정치적 권리를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연습 없이는 누구라도 대가가 될 수 없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민중을 정치적 미성숙상태에 묶어두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만인의 이익을 위해 열정을 갖고 싸우고 우매한 대중을 혼들어깨워 분연히 일어서도록 하는 것은 계급의식과 목적의식에 투철한 소수의 과제로 계속 남는다. 지금까지 큰 운동은 모두 반드시 그러하였다. 따라서 여성운동에서도 똑같이 그렇다고 하여 놀랄 것도, 실망할 것도 없다. 과거 경험으로 보건대 수고와 회생은 보답을 받으며 미래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 자신의 행복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사회 전반의 복지를 위해 함께 힘을 다해 뛰는 것은 무엇보다 당사자인 남녀 모두를 눈에 띄게 훌륭하게 만들 것이다. 근시안적 시각을 가진 자들이나 전체 구성원의 완전한 평등에 기초한 공동체에 적의를 가진 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사회제도가 남녀를 물질상의 걱정과 과도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정도에 비례하여 남녀관계는 발전적인 방향으로 개선될 것이다.”13
반면, 부르주아 당파에 속해 있던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의 개혁 요구를 완전히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1874년 영국에서 등장한 부르주아 주도 노동조합인 여성보호공제동맹(Women's Protective and Provident League, 이하 ‘공제동맹’)은 노동조합의 단체행동권을 부정하였으며, 이른바 자유주의의 ‘자조의 원리’에 입각하여 국가 주도의 개혁 정책에 공공연히 반대하였다.14 공제동맹은 19세기 말에 들어서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여성노조에 대항하는 어용 여성노조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의 요구를 일부분만 반영하면서 그것을 자신 활동의 토대로 삼는 경우였다. 마지막으로는 개혁이 지니는 내용에 타협점을 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19세기 말 이후, 여성의 임노동자화가 크게 진행된 상황에서 각 여성운동 조직의 입장은 특히, 1890년대 영국에서 벌어진 보호입법 논쟁15 속에서 극명하게 나뉘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여성 조합운동의 경우 보호 규정의 확대 적용 및 강화를, 그리고 자유주의 어용 여성 조합운동의 경우 보호 규정의 폐지 또는 현존하는 보호 규정의 완화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제 특성은 19세기 중엽부터 성장해 온 자유주의적 여성운동이 내세운 자본주의적 노동관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당대 여성운동은 여성적 특질이 산업적·전문적 노동에서 요구되는 미덕, 즉 자본주의적 노동 규율에의 적응에 아무런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음을 적극적으로 입증해야 했다. 이때문에 이 흐름은 여성의 개인적 자조 능력을 최우선시하였는데, 이러한 입장은 보호입법의 발전에 수반할 정치적 입장과 공존하기 어려웠다. 이는 한편으로 여성의 노동권을 제약하는 수많은 법률적 제한을 허물어 여성이 자본주의적 임노동과 결합하는 데 공헌하였다.16 그러나 노동 현장에서 여성이 임노동자 일반으로서 겪는 착취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하였다.
현재까지 서술한 여성운동의 세 단계는 한국에서도 같은 양상으로서 발현─약간 시기가 뒤처진 형태로─되었다.
한국의 부르주아적 여성운동의 이념적 맹아는 봉건조선 해체기인 18세기부터 서서히 형성되었으며, 19세기 말에 이르러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형태로 본격 등장하게 되었다. 1898년 9월에 발표된 여권선언서인 『여권통문(女權通文)』은 이미 여성의 사회진출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 시기 여권운동은 당대 봉건적 생산양식 속에서 개혁적 성격을 띠는 양반부인을 주도로 하여 일어났다. 1896년 4월에 창간된 『독립신문』 역시 여러 차례에 걸쳐 여성의 평등한 인간권리론을 주장하였다.17 그런데 이 시기의 대한제국에서 전개된 여성운동은, 세계사적 차원에서 바라보자면, 이미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초기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이라는 당대의 역사적 배경이 지니는 특수성과 긴밀한 연관을 지니고 있었다. 즉 한국의 초기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당시 저항적 성격을 띤 민족자본 주도의 민족주의 운동과 표리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1907년에 진행된 부르주아 민족운동인 국채보상운동에서 여성은 다양한 의연금 납부 조직을 결성하여 참여하였다.18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과 여성운동과의 긴밀한 관계는 1919년 3·1 민중항쟁 때도 유지되었다. 이 시기 여성운동은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제작·반포하여 항일 정신을 고취하는 방식, 항일웅변 대회를 여는 방식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19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조선 지역 내 공단의 증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동방에로의 확대·소비에트 연방의 탄생 등 다양한 객관적 조건의 형성으로 인해 여성 공제조합20, 여성동우회21로 대표되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에 형성되어 있던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여성 교육 및 여성의 독립적 생활에 대한 지원 운동이 전개되었다. 즉 이 시기 여성운동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과 부르주아 여성운동 사이의 관계, 긴장 속에서 발전하였으며, 항일운동이라는 보편적 성격을 공유하고 있었다.
1920년부터 시작한 신여성운동 역시 1920년대의 여성운동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신여성운동은 크게 부르주아적 신여성운동과 프롤레타리아적 신여성운동으로 나뉘었는데, 먼저 등장한 신여성운동은 부르주아적 성격을 지녔었다. 두 신여성운동 모두 당대 식민지 조선에 잔존해 있던 봉건 구습을 비판하고, 근대화된 여성관을 사회에 확립하는 데에서 동일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신여성운동은 부르주아의 기본 이념인 자유주의, 평등주의에 입각한 부르주아적 여성관을 기초로 한 데 반대, 프롤레타리아 신여성운동 즉, 사회주의적 신여성운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주도로 하여 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역사적 사명을 지닌 투쟁가로서의 여성관을 기초로 하였다. 당시에 활동하던 남성 여성운동가인 김기전(金起展)이 『신여성』 1924년 6월호에 게재한 글은 당대 부르주아 신여성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신여성운동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부르주아 신여성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신여성들의 외형적 삶을 보면 종래 여자들의 그 더러운 생활 역사 속에서 근본적으로 뛰쳐나오려는 노력이나 기풍이 없이 그저 과도적인 부르주아식 분위기 속에서 더러운 향락만을 탐하려고 한다. 진정한 신여성은 자기 번뇌를 가지고 자신을 극복하는 싸움 속에서 새로운 사상을 가져야 한다.”22
1920년대 여성운동의 최대 성과는 1927년 근우회(勤友會)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근우회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여성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 간의 대립을 극복하여, 여성의 권리 신장을 이루어내고, 항일 여성운동에서 통일된 전선을 확고히 하고자 성립되었다. 근우회는 당대 여성이 겪는 사회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이 전 인류를 위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음을 표명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근우회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에 있어서 여성의 지위가 일층 저열하다.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 오히려 유력하게 남아 있는 그 위에 현대적 고통이 겹겹이 가하여졌다. 그런데 조선여성을 불리하게 하는 각종의 불합리는 그 본질에 있어 조선사회 전체를 괴롭게 하는 그것과 연결된 것이며 일보를 진하여는 전 세계의 불합리와 의존 합류된 것이니 문제의 해결은 이에 서로 관련되어 따로따로 성취될 수 없게 되었다. 억울한 인류가 다 한 가지 새 생활을 개척하기 위하여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며 또 역사는 그 분투의 필연적 승리를 약속하여 주고 있다. 조선여성운동의 진정한 의의는 오직 이와 같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의 이해에 의하여서만 비로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니 우리의 역할은 결코 편협하게 국한될 것이 아니다.”23
근우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1931년 소멸하였다.
봉건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쳐 전개된 한국의 여성운동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어떤 운동도 당대의 생산양식과 분리되어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여성운동이 초기부터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녔던 것은, 당대 한반도를 둘러싼 일련의 정치적 사태와 연관된 것이었고, 이러한 정치적 사태는 모두 당시 세계사적인 차원에서의 생산양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즉 19세기 말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규정성이 지배적인 규정력으로 화하였던 시대였으며, 이 당시 한반도의 상황도 이러한 규정력에 의해 일차적으로 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1945년 이후 해방 정국에서 전개된 여성운동은 계급적 대립의 성격을 훨씬 더 강렬하게 지니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여러 부문의 항일·노동운동 활동에 종사하였던 여성을 주축으로 조선부녀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조선부녀총동맹은 미군정의 탄압 속에서 1947년 남조선민주여성동맹으로 개편되었으며, 1951년 북조선민주여성동맹과 통합, 조선민주여성동맹으로 개편되어 사실상 이남에서 소멸 일로를 걸었다. 1945년 이후 성립된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 조직은 이남에서 갖가지 탄압 속에서 소멸하였는데, 이는 1945년부터 1950년대에 걸쳐 진행된 대규모 좌익 학살과 연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된다. 이 시기 여성운동의 성과는 1948년 2월 공창제의 폐지이다.
이후 이남에서 여성운동은 어용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는 소규모 우익 여성단체가 주도하였다. 이 소규모 조직은 1959년에 통합되어 한국여성단체협의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조직의 활동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나 ‘계몽교육’ 수준에 그쳤으며, 사실상 여성해방과 거리가 멀었다. 즉 1940-50년대 프롤레타리아 정치 세력을 대대적으로 학살한 후의 상황은 노동운동과 진보적 민주주의 운동의 부재였고, 두 운동의 부재는 여성운동의 소멸을 가져온 것이다.
여성운동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오랜 황혼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 의거를 계기로 하여 그간 묵살되어 왔던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가 표출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여성 노동운동이 크게 성장하게 된다.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80%를 차지24하였던 여성 노동자들은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이하,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하여 사측의 노동착취와 탄압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한일나일론 (1970), 한영섬유(1971), 크라운전자 (1972), 태광산업 (1972), 동일방직 (1976), YH 무역 (1979) 등에서도 여성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80년대에는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하여 노동운동은 변혁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변혁적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의 대대적인 결합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운동은 일반민주주의 운동의 한 부문으로 간주되어, 주로 여성 노동운동을 필두로 하여 성장하였다. 이를 반영하여 비단 노동운동의 영역만이 아니라 학계로 진출하여 여성 일반의 주제를 다루는 흐름도 크게 일어났다.
그러나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변혁적 노동운동이 크게 쇠퇴하고, 변혁적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운동 간의 연계성도 크게 파괴되었다. 1990년대 운동 전반에는 1980년 이후 변혁적 세계관을 담당하였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력이 사실상 소멸하고, 이 공백 속에 탈근대주의와 이른바, ‘탈민족주의’ 담론이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1980년대 말부터 대대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제3의 길’·페미니즘·생태주의·소부르주아 시민사회론 등이 노동운동과 일반민주주의 운동에서 점차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반동기의 물결 속에서 과학적 세계관이 후퇴하는 틈을 타 수많은 소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가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수많은 운동 영역에서 각각의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고수하며 분절된 운동이 전개되는, 이른바 운동의 분열적 경향성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경향성은 노동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이러한 경향성은 전체 운동에서 노동계급 헤게모니의 지속적 약화를 가져오는 동시에, 이전 노동운동이 다루어본 경험이 없는, 여성 일반을 둘러싼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노동운동 진영에 제공한다.
1990년대 이후 여성학계에 쌓인 수많은 연구는 여성이 겪는 범죄, 그리고 갖가지 차별 구조 등에 대한 다양한 접근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노동운동이 여성운동과 이전보다 더 강력한 통일을 구축하기 위해 포섭해야만 하는 몇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1990년대 이전 직장 내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지던 성범죄, 그리고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범죄 등은 사회의 근본변혁을 위한 투쟁에서 최주변부에 자리 잡은 주제였으며, 상대적으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이 형식적으로는 확고하게 자리 잡은 현 상황에서도 성별 임금격차가 극심하게 나타나는 문제, 일터에서의 성별에 따른 차별적 대우에 관한 문제 등이 가시화되었는데, 이러한 문제는 1991년 이전 계급적 운동 진영에서 적어도 일반적으로는 주제화·범주화되지 않은 문제였다. 같은 시기,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소가 일정 강화되면서 동시적으로 발전한 여성의 인식 발전은 계급 전선의 최일선에 있는 운동으로서 노동운동에 새로운 과제를 계속 떠안기고 있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경향은 국내에서는 최근의 경향이지만, 세계사적으로는 이미 1960년대부터 두드러졌던 것이었다.
그런데 상기한 문제는 1922년 소비에트 연방의 등장으로 시작된 전반적 위기하에서, 그리고 이후 이어진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 속에서 형성된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발전 국면 속에서 가시화되고 또 주제화될 수밖에 없던 문제였다. 주지하다시피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위기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확산되며, 이에 따라 모든 부문에서 계급투쟁이 첨예화될 수밖에 없다. 즉, 여성이 겪는 사회모순도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는 단순히 경제적 위기의 한 표현태로만 될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위기의 표현태로도 된다.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질곡에 다다라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억압하는 측면이 강화되고, 그만큼 이전보다 더 심각한 수준의 상대적·정체적 과잉인구화를 불러온다. 더 나아가 노동계급의 정치적 동향에 대한 부르주아 국가의 예민성이 극도에 달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겪을 수밖에 없는 대대적인 실업, 경력단절 문제는 계급 역관계상 총자본이 사회를 통제하려는 전술이 빚어내는 결과로 될 수 있다. 즉 과거에 여성은 자본의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를 위해 집안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나와야 했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 전개 양상 속에서 여성 노동자는 또한 언제든 계급 역관계상 부르주아가 이점을 얻기 위해 해고되거나, 사회적 생산의 일선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25
왜냐하면, 첫 번째로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중 일반적으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계층은 남성 노동자에 해당하고, 따라서 여기서 해고가 되어도 상대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 않을 계층은 여성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가 (상대적으로 더) 빈털터리가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상대적으로 가정 경제를 책임질 확률이 더 높은 남성보다는 그 반대인 여성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게 부르주아의 ‘안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두 번째 이유로는, 현재까지도 여성은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가정에서 무급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로 되어 있으며, 여성 역시 이러한 것의 ‘당위’를 설파하는 반동적 이데올로기에 일정 영향을 받고 있다는 데 있다.26 세 번째로 여성의 주부화는 노동력 재생산비의 약간의 상대적 감소를 유발하는 요인으로 되기 때문이다. 물론 세 번째 요인은 단독으로서는 부르주아에게 여성 노동자 해고 및 배제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을 사회적 생산의 영역에로 이동시키는 것을 통하여 주어지는 잉여가치 존재(상대적 잉여가치 착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맞벌이라고 하여도 가사노동과 육아는 주로 여성이 맡는 것이 아직까지 당연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고 실제로 한국사회에서 여성 노동자가 상대적으로 가사노동과 육아를 더 많이 분담한다.27 따라서, 여성 노동자는 노동력의 만성적인 불완전 회복을 겪을 수밖에 없고28, 자본은 이러한 노동력을 노동력의 폐기가 필요한 상황에서 일차적으로 폐기하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로, 앞선 모든 과정의 결과로서 여성 일반은 자신의 노동 능력을 복잡화·숙련화할 기회를 잃게 되고, 종국에는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저임금 단순노동·고용 불안정 직종에 편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모든 사회적·경제적 결과가 이념적 형태로 반영되어, 여성에 대한 일련의 차별적 인식을 재생산하고, 이러한 인식이 다시 원인의 원인으로 되어 사태를 악화하기 때문이다.29 반동적 부르주아, 파시스트들의 여성관이 국가독점자본주의 하 여성이 겪는 사회모순을 모두 정당화하는 것은 이와 관련된다.30
오늘날 여성이 겪는, 그리고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여성을 향한 사회모순은 그 본질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특수한 모순이 산출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모순이며, 따라서 과거, 자유경쟁 자본주의와 독점자본주의 시기에 국한된 연구가 직접적으로 그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았던 현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모순을 정당화하는 독점부르주아의 공세는 이미 개시되었다. 이른바 첨단 심리학이라고 자칭하는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본성, 그리고 여성과 남성이 지니는 생물학적 본성을 절대화하여 그것을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이를 군중에게 지속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즉 이 반동적 사상은 인간의 본성은 처음부터 이기적이고 악하며, 이는 전혀 바꿀 수 없고 따라서 자본주의는 영구 불멸이라는, 자본주의 옹호론을 구사하고 있으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도 여성이 현재의 열악한 지위에 자족해야 함을 정당화하고 있다.
20세기 사회주의의 대규모 후퇴 이래 노동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은 부재해 왔다. 1990년대 이후 노동운동은 전반적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전개 속에 나타나는 여러 사회모순을 하나의 과학적 체계로 설명해내기보단, 몇 가지 소부르주아, 절충주의적 설명 방식에 만족해 왔다. 이 과정에서 여성운동은, 노동운동 내 개량적 방법론과는 다른,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한계를 지닌 다른 소부르주아적 이론을 받아들여 여성을 둘러싼 사회현상을 ‘설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혁적 노동운동이 여성운동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현재 새롭게 현상하는, 여성을 둘러싼 사회모순의 현상 형태를 범주화하여 과학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더 많은 현상을 하나의 체계로, 일관되게 설명할수록 통일에 가까워지며, 그만큼 여성운동에서 소부르주아 사상의 영향력은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여성이 겪는 사회모순을 연구하려면 먼저 여성을 둘러싼 사회모순의 객관성을 승인해야만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전히 적대적 생산관계를 극복하지 못한 사회이며, 따라서 계급 적대에 기초한 사회이다. 자본주의의 적대적 생산관계는 모든 인간 간의 관계─본래 적대적이지 않았을 관계인─역시 점차적으로 적대화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 모든 인간관계는 적대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이는 여성과 남성 간의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엥겔스 역시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에서 밝혔듯이, 계급 사회 형성과 함께 여성과 남성 간의 적대도 시작된 것이다.31 여성에 대한 남성의 독재로 현상하는 성별 간 적대─여성과 남성 간의 불평등한 관계, 전근대적 남성 독재가 자행한 노골적 폭력의 자본주의적 현상태로서 남성에 의한 여성 대상 범죄 등─는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이는 생산력이 과거 봉건제 사회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하에서도 역시 동일하게 (다소 약화된 형태로서) 적용된다. 이러한 적대는 자본주의를 지양하고자 하는 노동운동 내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하지 않는 이상 누구든 주관적으로는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엥겔스가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활 양식은 부르주아 계급과는 달리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항구적일 수 없는 조건에 있다. 즉 “이 계급에게서는 고전적 일부일처제의 기초도 역시 모두 제거”32되어 있다. 왜냐하면, “남성의 지배와 일부일처제는 다름아닌 재산의 보존과 그 상속을 위해 이룩된 것인데, 그들은 이러한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남성 지배의 확립을 위한 아무런 동기도 없기”33 때문이다. 물론 엥겔스는 이러한 관계가 딛고 선 토대가 자본주의 가족제도인 이상, 그 본원적 적대성이 완전히 극복될 수는 없음을 다시 말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 여성과 남성 간의 관계가 다른 계급의 관계에 비해서 그 적대성이 매우 희석된 채로 있으나, 엄연히 적대의 가능성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조건이 부여하는 이러한 적대를 주관적으로 회피하거나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것의 원인이 사적 소유임을 설득하는 것이 여성운동과의 통일을 과제로 떠안고 있는 노동운동의 임무이다. 오직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여성 노동계급과 남성 노동계급 간 단결의 기초가 세워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변증법적 의미에서 통일은 양극의 대립·모순·적대를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되려 그것 연관 방식의 존재성을 승인하고, 더욱 높은 인식을 통해 그것을 능동적으로 지양해내는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언급한 주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 바로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진영으로서 페미니스트 진영과 프롤레타리아 운동 진영 사이의 관계 문제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에서 유의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페미니즘은 기나긴 여성운동의 역사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이념적 체계이다. 이러한 이념의 형성에는 여성 억압의 객관적 계기들이 존재하는데, 이 사상이 여성운동 내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페미니즘 비판에서 이러한 계기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그것은 계급운동과 여성운동 간의 모순을 격화하는 데로 나아가는 데 일조할 뿐이다. 따라서 비판의 원칙은, 여러 페미니즘이 지니는 이론적 한계를 드러내되, 동시에 그러한 이론이 형성된 객관적 계기들, 배경, 그리고 대상으로 하는 사회현상을 노동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의 일관된 체계로 포섭해내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 만약에 특정한 페미니스트가 여성 대상 범죄와 성별 임금격차, 고용에서 취약성 그리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멸시의 원인을 연구함에서 그릇된 사상을 지니고 있다면, 따라서 그리하여 사적 유물론적 비판이 제기되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 이론의 한계를 비판하되 동시에 그 이론이 연구하고자 하였던 대상과 그 이론을 생성한 조건들, 즉 그것의 사회적 계기들 역시 동시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1990년대 이후에도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여성운동, 즉 노동운동의 여성 부문으로서의 여성운동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외 노동계급과 연계가 없거나 적으나, 여성을 둘러싼 사회모순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여성운동이 전개된 바 있다. 1990년, 일본군 ‘위안부’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제국주의 전쟁범죄를 다루는 여성운동 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창립되었다. 그 외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평화를만드는여성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미군에 의한 여성 대상 범죄에 적극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운동 조직도 매우 많다. 이러한 조직들은 계급운동과 연계되어 있지 않거나, 연계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직접적 생산과정의 바깥에서 벌어지는 여성 의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할 수 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여성에 대한 차별, 멸시가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제국주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노동운동에서 적극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2024년 11월 8일
- M. Jimmenez, 「여성 억압에 대한 엥겔스의 견해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요소와 비마르크스주의적 요소」, 『여성의 노동, 여성의 삶: 엥겔스 그후 100년』, 서울: 천지, 1990, 75-6.
- S. Rowbotham, 『영국 여성운동사』, 이효재 역, 서울: 종로서적, 1982, 7-8.
- 이에 대해서 아우구스트 베벨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사당 수의 여성들이 시대사조에 동참하기 위해서 아니면 명예욕만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사소한 동기에서 국가 및 봉건사회의 모든 기초적 원리들을 의심하고 전복시켰던 이 대내적 운동에 뛰어들었다. … 대혁명, 마치 대기를 맑게 하는 소나기와 같이 낡은 모든 것들을 뿌리뽑으면서 프랑스 전역을 휩쓸어 문화세계의 진보적 정신들을 열광시켰던 이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수십 년 전부터 이미 여성들은 학문 및 정치적 클럽에 다수 참여하면서 철학, 자연과학, 종교, 사회, 정치 문제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대담함으로 논구하고 토론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1789년 7월 바스티유 감옥에서의 대혁명의 서곡이 시작되었을 때, 상층계급의 여성들 뿐만이 아니라 평민여성들도 모두 함께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반대 혹은 찬성하면서 놀랄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좋은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했다.” (A. F. Bebel, 『여성론』, 서울: 까치, 1995, 304.)
- 이세희, 『프랑스대혁명과 여성·여성운동 : 페미니즘의 파란만장한 드라마』, 서울: 탑북스, 2012, 273-4.
- 위의 책, 274-5.
- 『영국 여성운동사』, 1982, 40-1.
- 예를 들어, 1857년에 조직된 여성고용촉진협회(Society for the Promotion of the Employment of Women, 이하 ‘촉진협회’)는 영국 내 여성 노동자 문제에 관여하였는데, 이 조직은 부르주아 주도로 포섭된 여성 노동자 대중 조직이었다.(강남식, 「19세기 말 20세기 초 영국 페미니즘과 여성노동운동: 여성노동보호법을 중심으로」, 『영국연구』, 8, 2002: 73.) 촉진협회는 당시 빈곤한 노동계급 여성에게 "자조·자립의 기회"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여성노동보호법을 폐지시켜 여성 노동시장을 개방함으로써 여성 노동권을 보장하려고 하였다.(위의 책, 75.) 당대 영국에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포섭된 이와 같은 여성 노동자 조직이 산재해 있었다. 이러한 조직들은 당대 제도권에 여권신장과 관련된 개혁안이 통과되어야 하는 당위를 설파하기도 하였다.
- 『영국 여성운동사』, 1982, 44.
- 위의 책, 45.
- A. Kollontai, Alexandra Kollontai: Selected Articles and Speeches,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4, 22.
- 1889년 7월 19일 국제노동자대회에서 클라라 체트킨의 연설을 기록한 문헌에는 다음와 같이 서술되어 있다: “그녀[클라라 체트킨; 인용자]는 반동적 분자들이 여성노동(집 바깥에서의 노동)에 대해 반동적 관점을 지니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사회주의자의 진영에서도 역시 여성노동이 철폐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결국에는 여성노동의 문제가 되는, 여성해방의 문제는 하나의 경제적 문제이며 위에 언급한 관점들이 지니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정도의 경제적 이해를 사회주의자들에게서 기대하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기존의 경제발달 하에서 여성노동은 하나의 필연성이며, 여성노동의 자연스러운 경향은 각 개인이 사회에 부여하는 노동시간을 줄이거나 사회의 부를 증대시킨다는 것 그리고 남성노동과 경쟁함으로써 임금을 떨어뜨리는 것은 여성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을 전유하는 자본가들에 의한 여성노동의 착취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C. Zetkin, 『클라라 체트킨 선집』, ed. P. S. Foner, 조금안 역, 서울: 동녘, 1987, 51-2.)
- 『여성론』, 1995, 303.
- 위의 책, 311-2.
- 강남식, 2002, 75-6.
- 당시 영국 노동계에서 활발히 일어났던 논쟁으로, 여성이 몰리는 직종에 대한 노동시간규제, 고용금지, 모성보호조항과 관련된 논쟁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1891년 공장법 제정에서 여성세탁부 노동시간규제, 위험·유해직종에서의 여성고용금지와 모성보호조항 등에 대해 일어난 일련의 분쟁이 있다.(강남식, 2002, 80.)
- S. H. Hogg, The Employment of Women in Great Britain: 1891-1921, 2019, 151-3.
- 박용옥, 『여성운동』, 천안: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4-5.
- 위의 책, 51-2.
- 위의 책, 119-21.
- 인천선미여공조합, 평양처녀양말직공조합, 안주염직소공녀조합, 부산여공조합, 연호부인노동회 등 다양한 여성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당시 여성 노동조합은 식민지 사회라는 특수성 하에서 사회주의적 이념에 영향을 받았다.(위의 책, 200.)
- 1924년 5월에 창립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운동 조직이다.(위의 책, 194.)
- 같은 책.
- 근우회, 『근우』, 창간호, 3-4.; 『여성운동』, 223-4.
- 이옥지, 『한국여성노동자 운동사』, 제1권, 서울: 한울아카데미, 2001, 143.
- 이러한 문제는 세계노동조합연맹(WFTU)과 국제민주여성연맹(WIDF) 등에서 오래전부터 다루어왔다.
- 안리라 & 김수한, 「성별분업과 맞벌이 여성의 차별 인식: 가사노동, 유급노동, 성역할 인식의 효과를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7 (3), 2021: 243-4.
- 2019년 기준 맞벌이 가정에서 남성 노동자가 하루 평균 가사노동·가정관리·가족보살피기에 쏟는 시간은 108분, 여성 노동자는 374분으로 통계청에 의해 집계되었다.(참고: e-나라지표, 혼인상태별 및 맞벌이상태별 가사노동시간, 2019.)
- “한편, 기혼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진출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자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일과 가정을 양립하면서 겪는 이중역할부담으로 인한 갈등이다. 기혼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활동 외에도 가정에서 자녀 양육과 가사 등의 역할요구로 이중부담에 직면하고 있어 그들의 삶은 갈등과 긴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이재경 외, 2006). 일과 가정에 대한 갈등은 노동생산성을 저하시키고, 직무만족을 낮추며 이직률을 높이는 부정적 결과를 양산할 뿐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도 삶의 만족도를 낮추고 정신적 또는 신체적 건강을 해치는 문제로 확인되고 있다(가영희, 2006; 박기남, 2009; 권순원 외, 2013; 이지선⋅최영훈, 2013; 김경륜 외, 2014; 유성경⋅김은석, 2015; Konrad and Mangel, 2000; 허수연, 2017 재인용).” (김희주, 김지혜 & 장연진, 「근로환경과 일⋅가정 양립 갈등이 기혼 여성 노동자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 『한국가족복지학』, 67 (1), 2020: 7-8.)
- 안리라 & 김수한, 2021, 265.
- 전반적 위기 하 파시스트의 공세에 대응하는 차원에서의 여성운동은 특히 193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이어진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파시스트 정권 내부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소련여성반파시즘위원회은 1941년 9월 7일 최초의 집회에서 세계 여성이 파시즘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해야 함을 전 세계 여성에게 호소한 바 있다. (A. Michel, 『여성해방의 역사』, 이혜숙 역, 서울: 백의, 1994, 119.)
- MEW, Bd. 21, Berlin: Dietz-Verlag, 1962, 67-8.; F. Engels,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김대웅 역, 서울: 아침, 1991, 88-9.
- Ibid., 73.; 위의 책, 96.
- Loc. cit.; 위의 책, 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