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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대립물의 통일로서의 구체적 통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 제1장 (7) 총명한 유물론 2 겨울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BM BN BO BP BQ BR BS BT BU BV BW BX BY BZ CA CB CC CD

대립물의 통일로서의

구체적 통일

 

이로써 우리는, 개념들 속에서의 사유가 사물들의 살아 있는 현실적 통일, 그것들의 상호작용의 구체적 연관을 드러내는 데로 향해 있으며, 그것들의 추상적 통일, 죽은 동일성을 규정하는 데로 향해 있는 것이 아님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상호작용 범주에 대한 분석은, 두 개별적 사물의 단순한 동일성, 단순한 일치는 그것들의 상호 연관의 원리의 표현이 전혀 아님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만일 한 대상이 다른 대상에게서 그것의 보완물, 즉 그것이 결여하고 있는 어떤 것을 찾아낸다면, 상호작용은 강력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물론, ‘동일성’은 상호 연관의 고리가 수립된다는 것의 전제 혹은 조건으로 가정된다. 하지만 바로 상호 연관의 본질 자체는 동일성을 통해 실현되지 않는다. 두 개의 기어가 정확히 맞물리는 것은 작은 기어의 톱니가 구동 기어의 똑같은 톱니 맞은편이 아니라, 두 톱니 사이의 빈 공간 맞은편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본래 명백히 동일한, 두 화학적 미립자가 하나의 분자로 ‘고정’되었을 때, 그것들 각각의 구조는 어떤 변화를 겪는다. 그 분자 속에 실제적으로 결속되어 있는 두 미립자 각각은 다른 미립자 속에 자신의 보완물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이 가장 외곽에 있는 껍질의 전자를 교환하는 순간마다, 이 상호 교환은 그것들을 단일한 전체로 결속시킨다. 각각의 주어진 순간에 그것의 전자(혹은 전자들)는 다른 미립자 내부에 있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미립자] 각각은 상대방을 향해 끌리게 되는데, 그 미립자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또한] 그 전자를 결여하고 있다. 그러한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지속적으로 소멸하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결합 혹은 상호작용도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이 경우에 우리가 가지는 것은 다소간에 우연적이고 외적인 접촉이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가상적 경우를모든 성질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동일한 두 현상상정해 본다면 그 둘 사이에 어떤 강한 결합, 응집, 혹은 상호작용을 상상하거나 파악하는 일은 극히 곤란할 것이다.

 

이 점은 이 과정에 포함된 두 개(혹은 그 이상의) 발전하는 현상들 사이의 연관을 다룰 때 더욱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물론 완전히 동일한 두 현상은 나란히 공존할 수도 있고, 심지어 일정한 접촉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촉은, 그 접촉이 각 현상 내부에서 변화를 유발하여, 그들을 하나의 일정한 통일체 안에서 서로 상이하며 상호 대립하는 계기들로 변형시키기 전까지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산출하지 못한다.

 

이 점은, 이 과정에 연루된 두 개(또는 그 이상의) 발전하는 현상들 사이의 연관을 다룰 때, 더욱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물론 완전히 동일한 두 현상은 나란히 공존할 수도 있고 심지어 일정한 접촉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접촉은, 그것이 각각의 현상 안에서 내적 변화를 불러일으켜, 그들을 하나의 일정한 응집적 전체 안에서 상이하고 상호 대립적인 계기들로 변형시키기 전까지는, 전혀 어떤 새로운 것도 산출하지 않는다.

 

가부장적 자급자족 가구들, 그 각각이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하며, 이웃 가구가 생산하는 것과 동일한 것들을 생산하는 이러한 가구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강한 연관도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노동의 분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어떤 것을 수행하는 그러한 노동의 조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급자족 가구들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는 곳에서, 노동생산물의 상호 교환의 가능성 또한 처음으로 발생한다. 여기서 출현하는 결합은, 그 차이를 공고화하고 또한 더욱 발전시키며, 그와 함께 상호적 연관 역시 발전시킨다. 한때 동일했던(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무차별적으로 공존하던) 가구들 사이에서의 차이들의 발전은, 그들 사이의 상호 연관의 발전이며, 그것은 그들이 단일한 경제적 전체, 하나의 통합된 생산 유기체의 구별되고 대립적인 요소들로 변형되는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노동 분업 형태의 발전은 동시에 물질적 삶의 생산에서 인간들 사이의 상호작용 형태들의 발전이다. 노동 분업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것이 초보적인 형태에서조차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사회는 존재하지 않으며거기에는 사회적 연관이 아니라 생물학적 연관에 의해 결속된 하나의 무리만이 존재한다. 노동 분업은 적대적인 계급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지적 협동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노동 분업으로 남아 있으며, 결코 모든 노동 형태의 ‘동일화’일 수는 없다: 공산주의는, 모든 개인의 능력들을 평준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생산과 물질적 생산 모두에서 각 개인의 능력들의 최대한의 발전을 전제한다. 여기서 각 개인은, 이 개념에 있어 완전하고 고귀한 의미에서의 인격이 되는데, 그것은 그와 상호작용하는 모든 다른 개인 역시, 동일한 틀에 박힌, 표준화된, 추상적으로 동일한 행동이나 조작들을 수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창조적 개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조작들은 일반적으로 인간 활동의 범위 밖으로 이전되어, 기계에게 넘겨진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연유로, 여기서 각 개인은, 자본주의적 노동 분업의 세계에서보다 훨씬 더 많이,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하며 또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인격을 인격에 결속시키는 사회적 연관들은, 여기에서 상품생산에서의 연관들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며, 포괄적이고, 강력하다.

 

따라서, 현실적인 개별적 사물들 사이의 살아 있는, 사실적인, 객관적인 결합과 상호작용의 표현으로서 이해된 구체성은, 추상적 동일성, 벌거벗은 등가성, 혹은 고려되고 있는 사물들의 순수한 유사성으로는 표현될 수 없다. 자연에서든, 사회에서든, 혹은 의식에서든, 아무리 초보적인 것일지라도, 현실적인 상호작용의 어떤 경우이든, 필연적으로 구별된 것들의 동일성, 곧 단순한 동일성이 아니라 대립물들의 통일을 포함한다. 상호작용은 한 대상이 자기에게 주어진 특정한 본성을 다른 대상과의 상호관계 속에서만 실현하며, 이러한 관계 밖에서는 그러한 것으로서, 다시 말해 ‘이것’으로서, 특정하게 규정된 대상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개별을 사유 안에서 표현하기 위하여, 개별을 그 개별의 다른 사례들과 맺는 유기적 연관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의 연관이 갖는 구체적 본질 속에서 이해하기 위하여, 결코 벌거벗은 추상을, 즉 분리되어 취해진 그것들 모두에게 추상적으로 공통된 하나의 동일한 특징을 구해서는 안 된다.

 

이제 더 복잡하면서 동시에 더 인상적인 사례를 취해보자. 가령,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의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구체적이며 객관적인 결속, 즉 이들 개별적인 경제적 성격들(인격들) 각자가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갖는 저 ‘일반적인 요소’는 어디에 놓여 있는가? 그들 양자가 사람이라는 사실, 그들 양자가 식량, 의복 등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그들 양자가 추론하고, 대화하고, 노동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있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이 모든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이 모든 게 심지어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로서의 그들의 결속의 필연적인 전제를 구성하기조차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결코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로서의 그들의 관계의 바로 그 본질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현실적인 결속은, 그들 각자가 상대방에게 결여된 경제적 특징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즉 그들의 경제적 규정들이 대척적으로 대립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요점은 그들 중 한쪽이 다른 쪽에게 결여된 특징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가 그것을 소유하는 것은 정확히 다른 쪽이 그것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데 있다. 각자는 그들의 경제적 규정들의 정반대적인 대립 때문에 상호적으로 상대방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들을 하나의 동일한 관계의 필연적인 양극(兩極)으로 만드는 것이며, 그들이 공통으로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것(‘그들의 같은 성질’)보다도 더 강력하게 그들을 결속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개별적 사물은, 정확히 그 타자가 모든 특징에서 그것과 정반대이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며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그것이 타자 없이는, 즉 그것 자신의 대립물과의 연관 밖에서는 그러한 것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이유이다. 자본가가 자본가로 남고 임금 노동자가 임금 노동자로 남는 한, 그들 각자는 필연적으로 타자 안에서 정반대로 대립하는 경제적 규정성을 재생산한다. 그들 중 한쪽이 임금 노동자로 출현하는 것은 타자가 전자에 대하여 자본가이기 때문이며, 이때 이 두 경제적 형상은 정반대로 대립하는 특징들을 갖는다.

 

그것은 주어진 구체적 관계 안에서 그들의 결속의 본질이 정확히 양자 모두에게 추상적으로 공통된 하나의 규정의 완전한 부재에 기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가는, 이 결속 안에서, 임금 노동자가 소유하는 그 어떤 특징들도 가질 수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중 아무도 동시에 타자 안에 내재할, 즉 양자 모두에게 공통될 그러한 하나의 경제적 규정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구체적 경제적 결속 안에서 결여되어 있는 것은 정확히 이러한 공동성(community)이다.

 

마르크스에 의해 질타받은 진부한 옹호론자들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상호적 연관의 기초를 그것들의 경제적 성격들의 공동성 안에서 구할 것을 고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르크스의 관점으로부터 보면, 둘 혹은 그 이상의 상호작용하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물들(현상들, 과정들, 사람들 등)의 참으로 구체적인 통일은 언제나 상호 배타적인 대립물들의 통일로서 나타난다. 그것들 사이에는, 즉 이 구체적 상호작용의 측면들 사이에는 추상적으로 동일하거나 추상적으로 일반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또한 있을 수도 없다.

 

이 경우에, 구체적으로 일반적인 것으로서의 공통적인 것은 정확히, 양극적이며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전제하는 대립물들로서의 상호작용의 요소들 사이의 바로 저 상호적 결속이다. 구체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측면들 각자는 오직 자신의 대립물에 대한 관계를 통해서만 그것인 바의 것, 즉 주어진 구체적 연관의 문맥 안에서 그것인 바의 것이다.

 

‘공통적인’이라는 용어는, 여기에서 그 의미에 있어서 ‘동일한’ 혹은 ‘같은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용법은 변증법적 논리학에 특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일상적 용법에 이질적인 것이 아니며, ‘공통적인’이라는 단어 안에 이미 현존하는 하나의 의미의 함축(shade)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언어에서 공동의- 혹은 집합적 소유에 있는 대상은 ‘공통적인’ 것으로 불린다. 예컨대 사람들은 ‘공통 영역’, ‘공통 조상’ 등에 대해 말한다. 변증법적 접근은 언제나 이러한 어원적 의미의 함축에 기초해 왔다. 여기에서 ‘공통적인’은, 그 내용에 있어서 상호 연관된 서로 다른 대상들, 인간들 등의 동일한 특징들과는 결코 일치하지 않는 결합의 의미를 지닌다. 공동으로 하나의 밭을 소유하는 인간들 사이의 구체적인 결합의 본질은, 그들이 공통으로 가질 수도 있는 그러한 동일한 속성들 속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서 그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그들 각자가 자기 자신들 바깥에 가지고 있으며 그들과 대면하고 있는 바로 그 특정한 대상, 다시 말해 그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그들 사이의 관계가 성립되는 그러한 대상이다. 그들의 상호적 결합의 본질은, 그리하여, 그들이 가장 다양한 역할들을 수행할 수 있는, 보다 일반적인 조건들의 체계, 곧 상호작용의 체계에 의해 주어져 있다.

 

책을 읽는 독자와 그가 읽고 있는 책 사이에 공통적인 것은 무엇이며, 그들 상호 관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분명히 그 공동성은, 독자와 책이 모두 삼차원적이라는 점에, 양자가 모두 공간적으로 규정된 대상들에 속한다는 점에, 양자가 동일한 원자들, 분자들, 화학적 요소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놓여 있지 않다. 그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양자 모두의 동일한 속성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독자가 독자인 것은, 그가 독자가 되기 위한 조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가 읽고 있는 것, 곧 독자의 구체적인 대립물과 대면하고 있으므로 정확히 그러하다.

어떤 것은 그러한 것으로서, 즉 주어진 구체적으로 규정된 대상으로서, 자기와 구체적으로 다른 어떤 것과 대면하고 있으므로, 그리고 오직 그렇기 때문에만 존재한다그 전자의 대상의 규정들과 전면적으로 정반대되는 규정들을 모두 갖는 대상과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의 규정들은 다른 하나의 전도된 규정들이다. 오직 이것이 대립물의 구체적 통일, 구체적 동일성이 개념에서 표현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구체적 연관들(구체적 공통성, 구체적 통일성)의 본질은, 그러한 공동성을 이루는 각 요소들 각각에 추상적으로 내재한 동일한 속성들을 탐색함으로써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들에 의해 규정된다.

 

이 경우 분석은, 두 요소·대상·현상 등이, 서로를 상호 배제함과 동시에 서로를 상호 전제하는 것으로서 출현하는, 구체적인 조건들의 체계를 향해 지향된다. 주어진 구체적 공통성인, 문제의 상호작용 체계에 존재를 부여하는 상호관계들을 지닌 대립물들을 확정하는 것이 그 과제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변증법적 공통성에 대한 분석은 상호작용의 두 요소(예컨대 자본가·임노동자, 혹은 독자·책)를 창출하는 과정에의 연구로 드러나는데, 이 두 요소 각각은 상대방이 갖지 않는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서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경우에는, 상호작용하는 두 대상 각각에서, 주어진, 유일하게 특수한, 구체적인 상호작용 양식의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그것에 내재하는 하나의 규정이 발견될 것이다. 오직 이 경우에만, 서로 관련된 두 대상들 각각에서, 이 대상을 주어진 구체적 전체의 한 요소로 만드는 그 측면이 발견될(그리고 추상을 통해 분리되어 드러날) 것이다.

 

구체적 동일성·대립물들의 동일성이것들이 변증법적 정식들이다: 상이한 것들의 동일성, 상호 배제하며, 따라서 상호 전제하는 규정들의 구체적 통일.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요소로서, 보편(구체적 보편)적 실체의 개별적 표현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것이 인식의 과제이다.

 

이 관점은,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교환관계의 본질, 그 실체, 즉 한 채의 집과 다섯 개의 침대의 동등성의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것을 가로막았던 난점들을 설명한다. 고대의 위대한 변증론자는 여기에서도 두 사물의 추상적 동일성이 아닌 그것들의 내적 통일을 찾아내려고 했다. 전자를 찾아내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지만, 후자를 발견하는 것은 꽤 어렵다.

 

집과 침대 사이의 교환관계를 고찰하는 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에는 해결될 수 없는 하나의 과제에 부딪쳤는데, 그러나 그것은 그가 이 둘이 공통으로 갖는 어떤 것을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논리학에 훨씬 덜 세련된 두뇌도 집과 침대에 공통인 추상적 특징들을 찾아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집과 침대가 공통으로 갖는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 쓸 수 있는 말들이 충분히 많이 그의 처분 아래에 있었다. 집과 침대는 둘 다 똑같이 일상생활의 대상들이며, 인간의 가사(家事) 환경의 한 부분이고, 둘 다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사물들이며, 둘 다 무게, 형태, 경도 등을 갖는다끝없이(ad infinitum). 누군가가 집과 침대가 똑같이 인간(또는 노예)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고, 둘 다 인간 노동의 생산물이라는 사실에 그의 주의를 환기하였다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다지 크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난점은, 집과 침대 둘 모두에 공통인 어떤 추상적 일반적 속성을 찾아내는 데에, 혹은 양자를 ‘공통의 속(genus)’ 안에 포함시키는 데에 전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추상을 만들어내는 머리와 인간이 실천적 편의를 위해 발명한 순전히 인공적인 장치들과는 무관하게, 그들이 동등하게 되는 실재적 실체를 드러내는 데에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집과 침대가 공통으로 갖게 될 어떤 것을 찾아낼 수 없음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실현 또는 표현을 위해 서로 다른 두 대상의 상호 교대, 상호 교환이라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어떤 존재자를 찾아낼 수 없으므로 더 이상의 분석을 포기한다. 그처럼 서로 다른 두 사물 사이에서 공통적인 어떤 것을 찾아내지 못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무능력은, 그의 논리적 능력의 약함이나 관찰력의 결핍이라기보다, 오히려 그의 사유의 변증법적 힘과 심원함을 드러낸다. 그는 추상적 일반에 만족하지 않고, 그 사실의 더 깊은 뿌리를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누군가가 원하기만 하면 양자 모두를 포함시킬 수 있는 바로 그 근접한 속(屬)에 단지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 속에 관심이 있는데, 그리고 그는 그에 대해, 논리학에서의 학파적 전통이 그에게 책임을 떠넘겨 온 것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개념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그들 사이의 교환관계 때문에만 침대와 집의 한 속성으로서 실현되는 현실성, 그 표현을 위해 교환을 요구하는 어떤 일반적인 것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가 그들 안에서 관찰하는 그러한 모든 공통 속성은, 그들이 교환에 대한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을 때에도 또한 존재하며, 따라서 교환의 특수한 본질을 이루지 않는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로부터 이천 년 뒤에, 어떤 사물의 가치 성질들의 본질과 실체를 그 효용(utility)에서 보았던 그러한 이론가들보다 현저히 뛰어나다. 사물의 유용성은 교환과 전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이 드러나기 위해 교환을 의무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교환을 통해서만 표현되고, 교환 밖에서는 결코 표현되지 않으면서도 그 사물의 ‘잠재된 본성’을 구성하는 본질을 찾아내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교환관계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가치 개념의 부재.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들의 교환 성질들의 실재적 본질, 실재적 실체를 이해하거나 드러낼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실체는 사실 사회적 노동이기 때문이다. 요점은 가치와 노동의 개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동시에, 그 시대에 그 둘 모두에 대한 일반적 추상적 표상은 존재했다는 점을 지적하자. ‘노동은 매우 단순한 범주로 보인다. 노동이 이 보편적 형태로, 노동 일반으로서, 또한 극히 오래된 것’1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확실히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집과 침대를 ‘노동생산물 일반’이라는 추상적 표상 안에 포함시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과도하게 복잡한 논리적 과제도 아니었을 것이며, 더더욱 해결 불가능한 과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가치라는 개념이었다. 가치라는 단순한 추상을 담고 있는 말, 그 명칭은 물론 그의 시대에도 존재했다.2 그의 시대에도 역시 모든 사물을 사고파는 추상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상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에 노동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다시 한번, 마르크스의 용어법에서 개념이란, 하나의 용어 안에 고정된 추상적 일반 표상과는 다른 어떤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노동의 개념(그에 대한 추상적 일반 표상과 구별되고 그것과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개념)은, 인간 삶의 전체 과정 속에서의 노동의 역할의 파악을 전제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는 노동이 사회적 삶의 모든 현상들의 보편적 실체로서, 인간적인 것 모두의 ‘실재적 본질’로서, 예외 없이 모든 인간적 성질의 실재적 원천으로서 보여지지 않았다.

 

보편적으로 어떤 현상의 개념은, 그 현상이 추상적으로(즉 반복되는 현상으로서) 이해되는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구체적으로, 다시 말해 상호작용하는 현상들의 일정한 체계 속에서 차지하는 그 위치와 역할과의 관련 속에서, 하나의 일정한 응집적 전체를 형성하는 체계 속에서 이해되는 곳에서만 존재한다. 개념은, 특수한 것과 개별적인 것이 단지 개별적인 것과 특수한 것으로서만(비록 반복되는 것일지라도) 파악되는 곳이 아니라, 그들의 상호적 연관을 통해; 이러한 제 연관의 원리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구축된 보편을 통해 파악되는 곳에서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동에 대해 그러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인류가 그 시대에 아직 사회적 삶의 체계 속에서 노동의 역할과 위치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인식도 형성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시대인들은 노동을 인간 삶 고유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는 하나의 삶의 활동 형태로 믿지 않았다. 그는 노동을 인간 삶의 모든 형태·양식의 실재적 실체로 파악하지 않았다. 놀랍지 않게도, 그는 그것을 사물의 교환적 성질들의 실체로서 이해하는 데에 실패했다. 마르크스의 용어법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곧 그가 노동과 가치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고, 다만 그것들에 대한 추상적 표상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정확히 의미한다. 이러한 추상적 표상은 상품교환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로 작용할 수 없었다.

 

부르주아 경제학의 고전적 대표자들은, 무엇보다도 상품교환과 같은 그러한 형태를 우선으로 포함하여, 경제적 삶의 모든 형태의 실재하는 실체로서 노동을 최초로 인식한 사람들이었다. 이는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만 추상적 관념만을 갖고 있었던 그 현실에 대한 개념을 최초로 형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물론, 영국의 경제학자들이 그 스타기라 사람보다 더 위대한 논리학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경제학자들이 더 발전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이 현실을 연구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탐구대상 자체이 경우 인간 사회가, 그 모든 표현의 구체적 실체를 표현하는 개념들에 의해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필연적이며 또한 가능한 정도로까지 성숙해 왔다는 것이다.

 

보편적 실체로서의 노동은, ‘능동적 형태’로서, 여기에서 의식 속에서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나타났다. 즉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지 못했던 그 ‘근접한 실재적 속’으로서 나타났다. 모든 현상들을 ‘노동 일반’, 곧 모든 질적 차이를 결여한 노동으로 환원하는 것은, 이론가들의 추상을 만들어 내는 머릿속에서가 아니라, 경제적 관계들의 현실 자체 속에서 여기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가치는 각각의 사물이 노동 속에서 실현되는 목적이 되었고, ‘능동적 형태’, 각각의 사물·개인의 운명을 지배하는 구체적 보편 법칙이 되었다.

 

요점은 모든 차이를 결여한, 그러한 노동으로의 환원이 여기에서는 하나의 추상으로 나타나지만, “사회적 생산 과정 속에서 매일 수행되는”3 실재하는 추상으로서 나타난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가 말하듯이, 이러한 환원은 유기적 신체들을 공기로 분해하는 것만큼이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나의 추상이다. “따라서 시간에 의해 측정된 노동은, 실로, 서로 다른 사람들의 노동으로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 다른 노동하는 개인들은 이 노동의 단순한 도구들(organs)인 듯이 보인다.”4

 

여기에서 노동 일반, 노동 그 자체는 구체적 보편적 실체로서 나타나며, 단일한 개인과 그의 노동의 단일한 생산물은 이 보편적 본질의 표현들로서 나타난다.

 

노동의 개념은, 개별적 인간들의 노동 활동들로부터 추상될 수 있는 단순한 동일한 요소들보다 더 큰 어떤 것을 표현한다. 그것은 개별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지배하고, 그들의 운명을 규정하며, 그들을 통제하고, 그들을 그것의 도구들로 만들며, 그들에게 다른 것이 아닌 주어진 기능들을 수행하도록 강제하는 하나의 실재적 보편 법칙이다.

 

특수한 것과 개별적인 것 자체가 이 실재적 보편 속에 포함된 요구들에 따라 형성되며, 그 인상은 ‘개별자가 자기의 특수성 속에서 현실적으로 보편적인 것의 개별적 체현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개인들 자체 사이의 구별들은 보편과 나란히 서 있으면서 그것과 아무런 관계도 지니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의 하나의 표현 형태로 드러난다.

 

개념은 이러한 보편적인 것의 이론적 표현이다. 개념을 통해, 모든 특수한 것과 개별적인 요소는, 주어진 전체에 속하는 바로 그 측면들에서 정확히 파악되며, 주어진 구체적 실체의 표현이고, 구체적으로 특수한 상호작용 체계 운동의 출현하고 소멸하는 요소로서 이해된다. 실체 자체, 상호작용하는 현상들의 구체적 체계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체계로서 이해된다.

 

개념(단어로 표현된 일반적 표상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개념)은 어떤 하나의 사물(대상, 현상, 사건, 사실 등)을 다른 것에 그 근접한 속(屬) 안에서 단지 동일시함으로써, 그 안에서 그 모든 특수한 차이들을 소멸시키고, 그 차이들로부터 추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개념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다: 개별적 대상은 어떤 전체의 필연적 요소로 그것을 만드는 그 특수한 특징들 속에서 반영되며, 구체적 전체의 개별적(일면적인) 표현으로서 파악된다. 변증법적으로 분할된 어떤 전체의 각 개별적 요소는, 다른 요소들과의 추상적 친연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요소들과 자기의 차이 속에서 바로 그 때문에, 이 전체의 보편적 성질을 일면적으로 표현한다.

 

개념(엄격하고 정확한 의미에서의 그것)은 그러므로 과학적 이론적 사유의 독점물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은, 탁자나 의자, 칼이나 성냥과 같은 것들에 관해, 용어 속에 표현된 일반적 표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개념을 갖고 있다. 누구나 우리 삶에서 이러한 것들이 하는 역할과, 그것들이 만들어지고 출현한 사회적 삶의 조건의 체계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고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구체적인 특징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이 경우 개념은 그 규정의 충만함 속에서 현존하며, 모든 인간은 그들의 개념에 따라 의식적으로 사물들을 다루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이 개념을 갖고 있음을 증명한다.

 

원자나 예술과 같은 것들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예술가가 훌륭한 예술 작품들을 창조할 수 있다 하더라도, 모든 예술가가 예술에 대한 잘 발달된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본 저자는 물리학자와 비교하면 원자에 대해 다소 막연한 표상만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물리학자가 개념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을 회피하는 물리학자는 그것을 획득할 가망이 없다.

 

오해들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달아야 할 것이다: 본 작업에서 사유(thought)는 무엇보다도 과학적 이론적 사유, 즉 세계의 과학적 이론적 연구에서 작동하는 사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취해진다. 작업 범위에 대한 이러한 제한은 소위 일상적 사고가 과학으로서의 논리학에 어울릴 만한 가치가 없다거나, 또는 그것이 상이한 법칙들에 따라 발전한다는 것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요점은 과학적 이론적 사유가 사유의 가장 발달한 형태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것의 분석은 일반적으로 사유 속에서 작동하는 법칙들을 더 큰 용이함으로 확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일상적으로 실천되는 사유는 이러한 보편적 사유 법칙들과 사유 형태들의 발견에 그리 쉽게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 그것들은 언제나 다양한 요인들과 정황들의 대량의 복잡성에 의해 시야에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고 과정은 순수한 연상에 기인한 간섭들이나 순전히 개인적인 정서적 동기들에 의해 종종 중단된다; 아주 흔히, 추론 사슬에서 몇 고리는 그저 생략되며, 그 공백은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전히 개인적 경험들에 기초한 하나의 주장으로 메워진다; 그에 못지않게 빈번하게 인간은 발달된 미적 취미와 지각의 도움으로 하나의 상황 속에서, 다른 인간이나 사건에 대한 자기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지향하는 반면, 엄격한 의미에서의 추론은 부수적 또는 보조적 역할을 수행한다, 등. 이러한 모든 이유들 때문에 일상적 사고는 일반적으로 사유의 보편 법칙들을 확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논리적 분석의 매우 불편한 대상이다. 이러한 법칙들은 여기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하지만, 그것들을 복잡화하는 정황들의 효과로부터 분리하여 고립된 상태에서 연구하는 것은 과학적 이론적 과정의 분석에서보다 훨씬 더 어렵다. 후자의 경우에는, 보편적 형태들과 사유의 법칙들이 일반적으로 훨씬 더 ‘순수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도, 어디에서나 그러하듯이, 더 발달한 형태는 덜 발달한 형태를 그것의 진정한 본질 속에서 이해하도록 해주는데, 더더욱이 더 높은 그리고 더 발전된 형태를 향한 발전의 가능성과 전망들이 고려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이론적 사유는 일상적 사고에 대해 정확히 이러한 종류의 관계에 있다: 인간의 해부학은 유인원의 해부학에 대한 열쇠를 제공하며, 그 역은 아니다. 그리고 ‘더 발전된 형태들의 맹아들’은 오직 이러한 더 발전된 형태들이 그 자체로 알려져 있는 때에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일반적 방법론적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유의 법칙들과 형태들을, 대체로 그것들이 과학적 이론적 사유 속에서 나타나는 방식과의 관련 하에서 고찰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과학적 사고 보다, 즉 과학 이론적 문제들, 명확하고 엄격히 한정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사고 능력의 적용보다 더 복잡한 다른 모든 사고의 형태와 적용을 이해할 열쇠를 획득한다. 과학적 사유와 소위 일상적 사고 모두에서 사유의 보편 법칙들이 동일함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자본주의 구성체의 발전에서 보편 법칙들이 러시아나 이탈리아보다 영국 자본주의의 분석을 통해 19세기 중엽에 더 쉽게 확정될 수 있었던 것과 동일한 이유로 하여, 과학적 사유 속에서 더 쉽게 식별된다.

 

번역: 노준엽 | 집행위원

 

2026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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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209.텍스트로 돌아가기
  2. 고대 그리스어 단어 ἀξία(aeia)는 독일어 Wert의 정확한 대응물이다─즉 ‘가격, 가치, 덕’.텍스트로 돌아가기
  3. Ibid., 30.텍스트로 돌아가기
  4.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