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제2장: 포괄적 고찰에 대한 변증법적 개념과 절충주의적-경험주의적 개념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 제2장 (2) 총명한 유물론 2 겨울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포괄적 고찰에 대한

변증법적 개념과

절충주의적-경험주의적 개념

 

만약 우리가 모든 사실, 모든 상호작용의 요소에 대한 포괄적 고찰에의 요구만이 진정으로 구체적 지식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전면적 고찰’의 요구 자체가 변증법적으로 해석된다는 조건에서만 진실이다. 이 점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요구는 사고의 반(反)과학적 형태 중 하나인, 이론적 사고인 체하며 스멀대는 경험주의 속에서 가장 빈번하게 그리고 가장 기꺼이 남용되기 때문이다.

 

혁명적 변증법을 적용하는 데에서 천재인 레닌은, 마르크스를 따라, 구체성에 대한 변증법적 개념을 그것의 절충주의적 패러디와 혼동하는 것에 반대하여 몇 번이나 경고했는데, 이 혼란이 직접적인 정치적 의미를 종종 획득함에 따라 더욱더 그러했다.

“마르크스주의를 기회주의적 방식으로 위조함에 있어서, 변증법을 절충주의로 대체하는 것은 인민을 기만하는 가장 손쉬운 방식이다. 그것은 환상적인 만족감을 준다; 그것은 마치 과정의 모든 측면, 발전의 모든 경향, 모든 대립하는 영향 등을 고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사회발전 과정에 대한 통일적이고 혁명적인 개념을 전혀 주지 못한다.”1

이 말은 사회발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지식 혹은 실천의 그 어떤 영역에 대해서도 명백히 적용되며, 따라서 보편적인 논리적 요구를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이론에 맞서는, 과학적 공산주의의 적이 가장 널리 사용하는 논거의 하나는, 이론 이로부터 나오는 정치적 노선을 ‘완고한 일면성’, ‘추상성’, ‘유연함의 결여’ 등으로 고발하는 것이다.

 

변증법에 대한 절충주의적 위조의 특징적인 사례는 러시아 공산당(б) 제10차 당대회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토의에서 부하린의 기회주의적 입장이었다. 당과 트로츠키 그룹 사이의 논쟁에서 중재자의 자세를 취하며, 부하린은 그의 입장의 철학적인 구체화를 시도했다. 레닌은 부하린의 입장에 반대하는 그의 주장들에서, 진리의 구체성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의 심오한 본질을 찬란하게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과학으로서 논리학을 위해 매우 교훈적이다.

 

이 철학적인 논쟁의 상황들을 간단하게 다시 불러보자. 논쟁은 노동조합에 대한 당 정책의 원칙들에 관한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한 당의 입장은, 다수 문건에 기록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았다: 소비에트 노동조합은 ‘공산주의의 학교’이다. 이 짧은 공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체계 속에서 그들의 지위와 역할에 의해 노동조합이, 공산주의적 정신으로 대중들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것, 그리고 국민경제 관리에 대중들이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준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중 조직임을 전제했다. 트로츠키는 이 개념을 반대했는데, 그는 노동조합을 다른 무엇보다도 ‘생산의 통제를 위한 행정 기술적 기구’이라고 간주하는 자기 자신의 강령을 정식화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첨예한 입장들, 두개의 정치 노선당에 대한 레닌주의적 정책과 트로츠키주의의 좌익적인 정책인 악명 높은 ‘너트 조이기’ 정책의 충돌이었다.

 

이 상황에서 부하린은 철학의 영역으로 유람하여, 그 안에서 자기의 정치적 입장, 즉 대립하는 극단들을 화해시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입장의 정당화를 구하려 했다.

 

레닌주의적인 당의 공식은 노동조합을 ‘공산주의의 학교’라고 정의하고, 트로츠키의 공식은 ‘통제의 행정 기술적 기구’라고 정의하는 데 반해, 부하린은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나는 두 주장 중 어느 것도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전혀 보지 못한다; 둘 다, 그리고 그 둘의 결합도 옳다.”

레닌은 날카롭게 이 ‘논리적’ 주장을 규탄했다: “부하린 동지가 “논리적” 근거들을 말할 때, 그의 전체적인 추론은 그가아마도 무의식적으로변증법적 혹은 마르크스주의적 논리학이 아니라, 형식적 혹은 스콜라적 논리학의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2

 

‘한편으로는, 다른 한편으로는’ 유형의 ‘논리적’ 주장, 즉 사물의 다양한 측면을 다소 우연적으로 고립시키고 그것들을 다소 우연적 연관 속에 위치시키는 주장은, 레닌에 의해 스콜라적인 형식 논리학적 정신의 주장이라고 정당하게 조롱되었다.

“텀블러는 틀림없이 유리 원통이자 음료 용기이다. 하지만 그것에는 이 두 가지 속성, 질, 혹은 측면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거기에는 무한한 수의 그것, 즉 무한한 수의 “매개”와 전 세계와의 상호관계가 있다. 하나의 텀블러는 미사일로 사용될 수 있는 무거운 물건이다; 그것은 문진(文鎭)으로, 포획된 나비를 담기 위한 용기로, 혹은 예술적 조각이나 디자인이 있는 가치 있는 물건으로서 역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음료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유리로 만들어졌는지, 원통형인지 아닌지 등등과는 전혀 무관하다.”3

대상의 추상적이고 일면적인 규정으로부터 똑같이 추상적이고 일면적인  규정으로 미끄러져 가는 추론은 끝이 없으며 확실한 어떤 것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만약 당이 노동조합에 대해서 이런 원칙에 따라 추론했다면, 어떤 원칙적이고, 과학적으로 산출된 정치 노선에 대한 희망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물 일반에 대한 이론적 태도의 완전한 거부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의 입장은, 레닌에 의해 명확하게 표현되었듯이, 다른 사회적 조건들에서 그리고 사회발전의 다른 단계들에서 노동조합이 다른 역할을 할 수 있고 다른 목적들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 조직의 형태들과 사업 방법들이 그에 맞춰서 다양할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하는 혹은 객관적으로 할지도 모르는 역할의 현실화에서 비롯되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정식화는, 누군가의 소망이나 열망과는 무관하게,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과정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관의 체계 속에서, 노동조합들이 한편에서는 어떤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 보자면, 노동조합들은 공산주의의 학교이고 단지 공산주의의 학교일 뿐이고, 단결의 학교, 연대의 학교이며,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의 방어를 위한 학교이고 행정과 관리의 학교라는 결론으로 이끈다.4

 

레닌은, 트로츠키에 의해 제기된 그릇된 강령에 반대하는 논쟁에서, 노동조합은 학교로서 간주되어야 하며 다른 방식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이 점을 특히 강조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계에서 노동조합들의 지위에 의해 야기되는 그것들의 유일한 객관적 역할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텀블러를 그것이 쓰여야 하는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말하자면, 음료 용기가 아니라 미사일로그것에 그렇게 큰 해악이 있지 않다. 하지만 노동조합과 같은 ‘대상’과 관련될 때는, 모든 게 재앙으로 끝나게 될 수 있다. 러시아 공산당(б)이, 노동조합이 하나의 “생산 통제를 위한 행정 기술적 기구”라는 트로츠키의 강령과 견해를 ‘일면적인’ 것으로서 정당화하려 한 부하린의 시도에 그렇게 강하게 반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레닌은, 이 강령이 노동조합의 본질에 관해 철저한 정의로도 혹은 추상적인 일면적인 정의로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관들의 체계에서 노동조합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역할, 목표, 그리고 지위는 오직 당의 입장으로 표현된다: 소비에트 노동조합은, 그것을 어떻게 보든 간에, 하나의 학교이다. 다른 모든 정의는 이 기본적이고 원칙적이며 결정적인 정의로부터 파생한다. 이 정의는, 노동조합이 어째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기관으로서, 당과 국가와 나란히 그리고 그것들과 밀접하게 협력하여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의 이유를, 노동조합의 특수한 본성을 표현한다.

 

이것은 레닌이 아이러니한 텀블러에 빗댄 비유를 계속하면서 트로츠키의 입장을, 텀블러를 그것의 실제적인 목적으로, 즉 마시기 위한 수단으로 쓰고자 하지만, 텀블러가 밑바닥이 없어야 한다고 바라는 사람의 입장으로 정의하는 이유이다.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노동조합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관으로 간주하면서도, 노동조합들이 국가의 역할과 구분되는 자신의 특수하고 필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 점을 거부했다. “그의(트로츠키의) 강령은 텀블러가 음료 용기라고 하지만, 이 특수한 텀블러는 밑바닥이 없다.”5

 

부하린의 입장에 관하여 말하자면, 레닌은 그것을 죽은 그리고 무의미한 절충주의로서, 즉 대상에 대한 하나의 추상적 규정을 다른 규정 뒤에 덧붙여 늘어놓는 무의미한 열거라고, 어떤 구체적인 것에 멈추지 않고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며, 단지 당을 당혹스럽게 할 뿐인 열거라고 묘사한다.

 

이 두 강령에 맞서 레닌은 당의 분명하고, 원칙적이며, 구체적인 입장을 대비시켰다: 소비에트 노동조합은 광범위한 노동대중에 대한 공산주의 교육의 도구이고, 공산주의적 단결, 연대성의 학교이며, 국가 기관의 관료주의적 요소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들의 방어하는 학교, 행정과 관리의 학교이다. 그것은 노동 대중을 공산주의의 의식적 건설자로 변혁하기 위한 도구이다.

 

이 구체적인 규정은 사회의 사회주의적 변혁을 수행하는 조직들의 체계에서 노동조합의 객관적 역할, 즉 누군가의 변덕이나 주관적 목적으로부터 독립된 그것의 본질과 성질을 표현한다.

 

언제나 기회주의와 수정주의의 방법론으로서 봉사해 온 절충주의는, 자신의 전면적 접근에 대한 애호를 자랑한다. 어떤 절충주의자는 ‘일면성의 해악’에 대한 의견과, 무수한 것들을 고려해야 할 필요에 대한 의견을 늘여 놓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전면적 고찰의 요구는 변증법과 그 실제적인 의미에서의 구체성의 원칙과 맞서 싸우는 도구로 된다.

 

구체적인 이론적 개념으로 나아가는 길은, 여기서는 첫 번째 것[절충주의]과 다를 바 없는, 외타적인 추상으로의 끝없는 방랑으로 대체된다.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대신에, 절충주의자는 추상에서 그만큼 추상적인 어떤 것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그것이 결실이 없는 만큼 쉽다.

 

그것이 쉬운 이유는 가장 작고 하찮은 대상도 주변 세계와의 무한한 수의 측면과 연관을 실제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방울 하나하나가 우주의 전체적인 풍부함을 반영한다. 심지어 명백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현상 세계는 수십억의 매개 연관을 통해서 공통적인 어떤 것이 있음이 증명될 것이다; 심지어 나폴레옹의 감기도 보르디노 전투를 구성하는 한 요인이었다. 만일 누군가가 구체적 분석의 요구를, 연구 중인 대상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연관된, 예외 없이 절대적으로 모든 경험적인 자잘한 사항, 사실, 상황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요구로 해석한다면, 그 구체성은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된 어떠한 범주와도 같이) 단지 벌거벗은 추상이며, 단지 상상에서만 존재하고 실제적 지식으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도달 불가능한 이상(理想)의 한 종류임이 밝혀질 것이다. 이러한 구체성 개념을 고백하는 이론가는, 마테를링크의 영웅파랑새를 뒤쫓되, 그가 그것을 만지는 순간 파랑새는 더 이상 파랗지 않게 되는의 처지에 서 있음을 발견한다.

 

여기서, 추상과 구체의 관계 문제에서, 형이상학은 사고가 필연적으로 불가지론에, 그리고 최종 분석에서는 이론 자체로서의 청산에, 즉 이론이 객관적 구체성을 결코 움켜잡지 못한 채 다소간 주관적인 추상들의 영역에서 영원히 움직일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견해에, 필연적으로 이르게 하는 그 다리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구체성을 가능한 모든 사정을 절대적으로 모두 고려하는 것으로서 해석하는 형이상학적 해석은 불가피하게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을 주관적 관념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의 논변들에 대단히 취약하게 만든다.

 

세계의 ‘무한한 복잡성과 혼돈으로부터’라는 논변은 아마도 현대 부르주아 철학자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회발전 이론에 맞서 벌이는 투쟁에서 다른 어떤 논변보다 더 열심히 만들어 낸 주장일 것이다. 실존주의자 칼 야스퍼스는 마르크스의 전체적인 이론이 유일자(the one and only)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본성상 총체적 세계관이라는 주장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자신의 노골적인 공격을 하기 시작한다. 대상을 그것의 모든 필연적인 측면의 총체성에서 파악하고 대상을 ‘다양성 속의 통일’로서 인식하는 사고의 능력에 대한 이 믿음은, 야스퍼스에 따르면, ‘현대 과학’에 의해 포기된 낡은 철학적 편견이다. “실제적인 현대 과학은 통일적인 마르크스주의 과학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특수주의인 것(particularist)”6이라고 야스퍼스는 말한다; 현대 과학은 그것의 자존심을 포기한 지 오래되었으며, ‘특수성’에 겸손하게 만족하고 있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지식의 통일’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 또는 신화이다.

 

야스퍼스는 ‘마르크스의 총체적 관점’에 대한 반감의 원인을 상당히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이론의 통일’과 ‘이론과 실천의 통일’, 즉 공산주의적 세계 변혁의 실천에 분개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침은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 어떤 과거의 방침이 할 수 없었던 것을 실행할 수 있다는 스스로의 능력을 믿는다. 과거에 대한 총체적 관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방침은 총체적 계획들을 만들 수 있고 그것들을 실현할 수 있다.”7

 

야스퍼스의 프랑스의 지지자인 앙리 니엘(Henri Niel)은 후자의 견해에 공감한다. 그는 같은 이유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구체 개념을 거부하며, 헤겔주의적 혹은 마르크스주의적 형태이든 간에, 변증법은 존재의 총체성을 정신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기초하고 있고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그 계획은 종교화된다고 썼다.8

 

실존주의자들은 지식의 그 형태[총체적인 것]가 헤겔로부터 빌려온 것이며 수완(tour de force)을 부려 특별히 현대적 내용에 적용된 것이라고 믿는다.

 

실상, 마르크스·레닌의 이론에서 구체성 개념은, ‘지식의 형식’을 그 질료 위에, 즉 현상의 실재적 다양성 위에 ‘덧씌우는(superimposition)’ 그 어떠한 시도와도 적대적이며 이질적이다.

 

구체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오늘날 특정 국가들에서 심각하게 오용되고 있는 그 어떤 “일반적인” 혹은 “사례에 기반 한” 주장들에 맞설 수 있는 엄밀하고 반박할 수 없는 사실들의 신뢰할 만한 토대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9

 

적절한 총체적인 상호연관 속에서 엄밀하게 수립되고 반박할 수 없는 사실들, 전체로서 취해진, 그리고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것으로서 취해진 사실들—이것이야말로 레닌이 ‘사유의 구체성’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원칙을 개진할 때 무엇보다도 역설하는 바이다. 그 원칙의 요체는 “우리가 개별적인 사실들을 취해서는 안 되고, 논의 중인 문제와 관련된 사실들의 총합하나도 빠짐없이 취해야 한다는 데 있다.”10

 

이것이, 야스퍼스가 현대 과학에 내재한다고 근거 없이 주장하는 ‘특수주의(particularism)’를 미덕으로 만들면서, 사실들을 그것들의 객관적인 상호연관으로부터 자의로 고립시키고, 나아가 그것들의 연관 밖에서, 전체 밖에서, 그것들의 상호의존 외부에서 해석하게 만드는 바로 그 술책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부르주아적 사유의 아주 전형적인 특징이다.

 

여기에 같은 종류의 또 다른 장광설이 있다. “현실은 매우 혼란하다. 하지만 사고도 경험도 현실을 그것의 통일성과 전체성 속에서 제시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 우리는 현실을 경험적으로 인식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그 전체성 속에서 경험할 수 있을 따름이다.”11

 

인식에 관하여, 그 추론은 다음과 같다: “유한한 인간 정신에 의한 무한한 현실에 대한 어떤 정신적 인식도, 매번 동일한 것의 유한한 부분만이 과학적 인식의 주제가 될 수 있고, 또 이것만이 알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에서 유일한 “본질적” 부분이라는 암묵적인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12 무엇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고 무엇을 우리가 무시할 수 있는지, 무엇이 ‘알만한 가치’가 있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는, “가치의 문제일 따름이며, 이는 오직 주관적 평가에 기초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13

 

다시 말해, 객관적으로(즉, 객관적인 근거 위에서) 한정된 전체는 절대로 과학의 주제로 없다어떤 과학자도 그가 원하는 곳에서 자유로이 경계를 그을 있는 특정한 사실의 영역만이 과학의 주제가 있다.

“선택은 항상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선택하는 것은 각 개별 과학자의 일이다. 선택은 항상 가치와 연결되기 때문에, 누구도 그에게 [선택을] 지시하거나 충고할 수 없다. 그러나 가치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14

그것이 경제학의 주제일 때, 이 견해는 다음을 의미하게 된다: 경제학의 주제는 “스스로 경제학자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나 혹은 다른 이들에 의해 경제학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는 분야이다.”15 그리하여 경제학의 주제는 “모든 교육받은 사람”이 언급하는 만큼의 모든 것으로 구성된다. “대상의 통일은 문제들의 논리적 구조가 아니다. ; 그것은 어떤 과학의 연구 영역을 구성하는 문제들의 개념적 연관이다.”16

 

이러한 주장들은 매우 다양한 저자의 저작에서 가져온 것이다—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실존주의 철학자들, 신실증주의자들, 그리고 ‘지식사회학’의 대표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많은 측면에서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지식의 구체성’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에 반대하는 하나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추론의 방식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단일한 전체는 그것의 무한한 복잡성 때문에 사고에 의해 파악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특수주의적 지식’, 다소간 자의적으로 고른 사실들의 집합에 만족해야만 한다.

 

레닌은 “사회 현상 영역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고, 가장 그릇된 방법은 개별적이고 하찮은 사실들을 떼어내, 그것들과 예시들로 곡예를 부리는 것”17이라고 적고 있다. 현대 부르주아 철학은 이 비열한 술수를 미덕으로 만든다. 물론 ‘가치’에 관한 이미 선택된 그리고 전혀 입증되지 않은 명제에 맞게 예시와 사소한 사실을 골라내는 것이, 마르크스가 25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자본론』을 위한 자료를 수집함에서처럼 같은 철저함으로 사실을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하지만 과학은 ‘편의성’의 원리나 ‘정신적 노력의 경제성’이라는 원리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 과학은 어려운 작업이다. 그리고 그것의 최고 원리는 지식과 진리에서의 구체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concreteness of knowledge and truth)이다.

 

번역: 노준엽 | 집행위원

2026년 2월 20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 V. I. Lenin, “The State and Revolution”, Collected Works, Vol. 25, 1974, 405.텍스트로 돌아가기
  2. V. I. Lenin, “Once Again on the Trade Unions, the Current Situation and the Mistakes of Trotsky and Bukharin”, Collected Works, Vol. 32, 1965, 92-3.텍스트로 돌아가기
  3. Ibid., 93.텍스트로 돌아가기
  4. Ibid., 96.텍스트로 돌아가기
  5. Ibid., 100.텍스트로 돌아가기
  6. K. Jaspers, Vernunft und Widervernunft in unserer Zeit, München: Piper, 1950, 13-4.텍스트로 돌아가기
  7. Ibid., 15.텍스트로 돌아가기
  8. H. Niel, La dialectique de Hegel et la dialectique, Paris, 1956, 235.텍스트로 돌아가기
  9. V. I. Lenin, “Statistics and Sociology”, Collected Works, Vol. 23, 1964, 272.텍스트로 돌아가기
  10.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11. F. Vito, Bemerkungen, “über grundlegende Fragen der Wirtschaftstheorie”, Jahrbücher für Nationalökonomie und Statistik, Bd. 153, Heft 3/4, Jena: Verlag von Gustav Fischer, 1941, 332.텍스트로 돌아가기
  12. M. Weber, Gesammelte Aufsätze zur Wissenschaftslehre, Tübingen: Mohr, 1951, 171.텍스트로 돌아가기
  13. M. Weber, Gesammelte Aufsätze zur Soziologie und Sozialpolitik, Tübingen: Mohr, 1924, 420.텍스트로 돌아가기
  14. H. Tagwerker, Beiträge zur Methode und Erkenntnis in der theoretischen Nationalökonomie, Wien: Notring der wissenschaftlichen Verbände Österreich, 1957, 43.텍스트로 돌아가기
  15. Ibid., 26.텍스트로 돌아가기
  16. Ibid., 28.텍스트로 돌아가기
  17. “Statistics and Sociology”, 1964, 272.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