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일본 오키나와 주민들, ‘미국기지 폐쇄’10만 집회를 열다
9월 9일, 일본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국산 신형 군용기 오스프리 배치 반대와 후텐마 미군기지 폐쇄 및 철거를 위한 10만 대중 집회를 벌였다. 현 집권당인 민주당이 오키나와 외부로 기지 이전을 약속했으나, ‘예상대로’ 미국의 반대로 공약은 포기되었고, 식을 줄 모르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가 거대한 대중집회로 모아진 것이다.
일본의 또 다른 식민국, 오키나와
오키나와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배와 전후 미-일 군사동맹의 상징이자, 일본 내 또 다른 식민국의 상징이다. 오키나와 원주민은 14세기 이후 정착하여 류큐(琉球) 왕국을 세웠다. 이들은 일본이 아닌 중국에 조공을 받쳤고, 중국의 책봉을 거쳐 왕위를 계승했다. 류큐 왕국과 일본의 관계는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급변했다.
1879년, 총칼도 없던 평화공동체 류큐 왕국은 메이지정부의 수행원 30명과 순사 160명, 보병 400명에 의해 왕국체제를 폐지당하고, 류큐 국왕은 도쿄에 압송당했다. 이후 천황의 교육칙어와 함께 천황 사진이 오키나와 학교에 걸렸고, 오키나와 방언 대신 일본 표준어를 사용하도록 강제당했다. 방언을 사용하는 학생의 목에는 방언찰(方言札)이 걸렸다. 이름과 복장도 일본식을 따르게 했고, 곳곳에 신사를 세워 고유의 민간신앙을 말살시켰다. 일본 군부의 각종 규제와 강압은 당시 조선에게 행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고통은 태평양 전쟁에 중에 가장 심했다. 일본 영토 내에서 이루어진 유일한 전투 지역이어서, 주민들은 쏟아지는 미군 포탄에 희생되었고, 아사와 말라리아 등으로 고통받았다. 약 3개월 동안 진행된 전투에서 총 20만 명이 희생됐고 그 중 반 이상이 민간인이었다. 더욱 서글픈 것은 아군에 의한 희생이었다. 일본군은 탄약과 식량이 바닥나자 주민들의 동요와 이탈을 막기 위해 그들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동굴에 피신한 주민들의 집단자살극(?)이 대표적이다.
전후의 또 다른 비극, 미군의 점령
비극은 전후에도 이어졌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은 한동안 군정을 실시했다. 군정은 냉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 한국전쟁을 빌미로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한 반환지역 중 오키나와를 제외했다. 물론 지역주민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미군정은 이를 억압했다. 언론, 집회, 출판,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 간 왕래 등을 통제했고 시장 선거, 사법부 판결 등에도 압력을 행사했다. 1960년대에 일본 내 사회주의 운동과 함께 오키나와 반환운동이 거세져 1972년에 오키나와는 일본에게 반환되었다. 물론 미군기지 유지가 조건이었다.
미국의 ‘식민지’였던 오키나와는 미군범죄의 온상이었다. 72년 이후, 보고된 미군범죄만 6,000여 건에 이른다. 이러던 중 전환점이 된 것이 1995년에 일어난 미 해병대 여중생 강간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일본 내 반미시위는 격해졌고, 그 결과 미-일 양국은 후텐마기지 반환에 합의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오키나와 주민들의 투쟁근거이자 시작점이다. 그러나 16년이 지난 현재까지 반환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2012년, 여전히 오키나와는 동아시아 내 최대 미군기지가 위치해 있으며, 이는 오키나와 면적의 18%에 달한다.
올해로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된 지 40년이 되었다. 현재 오키나와가 보여주고 있는 분노는 외형상 미국에 대한 분노이지만,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일본 정부에 대한 불신 또한 강력하다. 과거와 현재의 갈림길에서 갑론을박하는 우리의 주소와 그들의 분노는 묘하게 닮아 있다.
이유철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