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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 사노위 28호>현장정치활동 어떻게 할 것인가? 上

현장정치활동 어떻게 할 것인가? 上

 

편진바 주-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자본주의의 모순이 증폭되고 있다. 이럼에도 한국의 노동자정치 운동은 오히려 심각한 우경화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모순된 상황으로 비쳐지지만 실제 경제위기(자본주의)의 심화는, 대대적 폭발 바로 진전까지도, 노동운동 전반을 보수화하고 정치운동 역시 근본적 변화보다는 당장의 실리를 중심으로 향하는 것이 역사적 현상이었다. 이시기 중요한 것은 역시 노동현장이다. 노동현장에서의 정치활동의 부재 또는 왜곡이 정치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고, 우경화된 정치는 현장과 정치를 분리시키면서 동시에 상호 개량화를 가속화시킨다. 그렇다면 계급주체성을 강화하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현장에서의 정치활동의 상은 무엇이고 어떠한 것이란 말인가? 이러한 물음에 사노위는 지난 기간 ‘사회주의 현장정치활동에 대한 입론’을 정리하여 내용과 실천을 고민하고자 하였다. 이를 독자들에게 소개(연속기획)하고 이에 대한 고민을 나누려한다. 물론 입론은 기초 문제제기일 뿐 완성이 아니기에 독자들의 더욱더 혁신적이고, 풍부한 의견이 현장에서 토론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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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급변하는데, 노동현장은?

 

노동현장 밖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의해 가장 착취받고 억압받는 노동현장은 그 변화를 주도하기는커녕 따라잡지도 못하고 있다. 세계대공황의 여파 속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은 공장안으로 후퇴하여 ‘일자리’에 안주해버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청년실업자들만 절망과 분노의 몸부림을 되풀이 하고 있다. ‘절망’이 분노로, ‘분노’가 ‘점거’로 세계는 급변하는데, 노동현장은 ‘조합주의’와 ‘의회주의’의 양날개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가장 ‘전망’이 필요할 때, 가장 ‘행동’이 필요할 때, 오히려 많은 노동현장의 활동가들은 고립감과 무력감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런 현실,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이러한 급변하는 정세에서 어떻게 현장의 변화, 노동자의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인가? 열심히 하면 할수록 계속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는 현장활동을 어떻게 한걸음이라도 진전시켜날 수 있는가? 어떻게 다시 노동자계급이 이 급변하는 세계의 주도세력으로 서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노동현장이 이 자본주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변혁의 주된 현장으로 서 나가게 할 수 있을까? ‘경제성장의 정치’, ‘분배(복지)의 정치’를 뛰어넘어 ‘생산의 정치’, ‘노동의 정치’, ‘계급의 정치’를 어떻게 현실화시켜 나갈 것인가?

 

지난 수십년간 한국사회의 발전에서 노동현장의 변화가 세상을 변화시켜왔던 때가 있었고, 세상의 변화(계급적 힘관계의 변화)가 노동현장의 변화를 촉발시켰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급변하는 현장 밖 세계의 움직임을 주저 없이 현장 안으로 끌고 들어와야 할 때이다. 노동현장 앞에 붙어있는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팻말 앞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계급의 정치’로, 세계로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현장이 들끓게 해야 할 때다. 그러려면 노동현장의 활동가들이 ‘조합의 활동가’에서 ‘사회주의 활동가’로 서서 노동현장에서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전면화해 나가야 한다. 굳게 닫힌 노동현장에 ‘계급정치’, ‘사회주의정치’의 숨결을 불어넣어야 할 때이다.

 

되풀이 하지 말아야 될 역사

 

노동운동과 변혁적 정치운동 세력은 70~80년대를 거치면서 87년 6월 민중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예비하지 못했다. 그 결과 자유주의 헤게모니 하의 ‘민주화’라는 파고를 뛰어넘지 못했다.

또한 90년대 초반 변혁운동의 청산과 해체로 96~97년 노동자 정치총파업을 예비하지 못했다. 결국 96~97 총파업의 정치적, 조직적 성과와 헤게모니를 ‘의회주의적 반신자유주의 진보정치’에 내줘야 했다.

 

우리는 계급투쟁이 만들어낼 역사적 격랑을 예비해야 한다. 그 격랑을 타고 넘어 사회주의정치를 펼칠 때 사회주의는 계급의 요구이자 대안으로 설 것이다. 준비하지 못한 채 계급투쟁의 파고에 휩쓸려버린 사회주의자들의 역사는 해체나 청산, 고립으로 이어졌다. 사회주의정치를 노동자계급 내에 뿌리를 내려 대공황으로 형성될 계급투쟁을 준비하자.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불만과 요구가 일차적으로 형성되는 노동현장에서 계급투쟁을 준비하고자 한다. 다가올 거대한 계급투쟁을 ‘자본주의 철폐’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근본적인 정치투쟁으로 만들어가고자 한다.

 

‘사회주의 없는 노동운동’, ‘노동운동 없는 사회주의’의 극복을 위해

 

한국 운동 내에 ‘사회주의 없는 노동운동’, ‘노동운동 없는 사회주의’가 만연하다. 특히 조합주의, 사민주의, 의회주의 정치는 이러한 경향을 운동 내에 확산시켰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생각하거나 사회주의자로 호명되는 활동가들도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두 가지 경향을 경계하고 극복함으로써 노동운동 내에 사회주의정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사회주의 없는 노동운동’은 노동운동 자체를 노동조합에 기반한 경제투쟁으로 한정하거나, 노동조합운동 자체가 사회주의 또는 계급운동에 직접적으로 복무할 것이라는 막연한 자기만족적 태도와 연결된다. 이러한 경향은 대체로 조합주의 또는 전투적 조합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

 

‘노동운동 없는 사회주의’는 노동자를 계급으로 묶어세우지 못하고, 선거기간에만 시민권을 획득하는 의회주의로 나아가거나, 노동조합운동 또는 대중운동과 스스로를 분리시키며, 대중과 직접적인 결합력이 없는 선전, 선동을 통한 지도단위로 자임하는 태도를 취한다. 대체로 이러한 경향은 의회주의나 서클주의를 극복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이 항상 생산과 노동현장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산과 노동현장의 변화와 장악력 없이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가 양산한 생산과 노동현장의 문제는 사회주의 건설 없이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노동자들이 투쟁과 변혁의 중심세력으로 서는 것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핵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의 주체, 사회주의사회 건설의 주체를 ‘생산과 노동의 현장’으로부터 세워나가려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지난 시절 ‘노동운동 없는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없는 노동운동’이라는 두 가지 한계를 극복해 나갈 것이다.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을 통해 우리는 87년과 96~97년의 한계를 뛰어넘고, 사회주의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려고 한다.

 

 

노동현장과 노동조합

 

노동현장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평화란 없다. 노자간의 직접적인 모순이 발생하는 생산현장은 더욱 그러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자본의 정치가 우위를 차지하며 큰 저항 없이 실현되고 있다는 의미다. 노동의 저항이 미처 조직되지 못하거나 진압당한 현장을 일컬어 자본은 산업평화의 실현이라 말한다.

 

산재로 하루에 7명이 죽어나가도 파업이 벌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저들에게 ‘평화’다. 동료가 떨어져 죽은 현장에서 시체가 실려 나가면 곧바로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저들이 말하는 진정한 산업 평화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없는 한 자본에 의한 일방의 이해와 일방의 요구와 일방의 폭력이 관철되는 곳, 이를 위한 자본의 정치가 시작되는 곳이 생산현장이다. 이에 맞서 노동자의 불만과 요구, 분노와 투쟁이 자라나는 곳, 그리하여 노동자의 정치가 시작되는 곳이 생산현장이다.

 

생산현장은 이윤창출을 위한 자본의 착취와 노동의 희생이 전제된 곳, 노동과 자본의 일상적 적대가 맞부딪히는 곳, 노동자의 요구와 정신이 고개를 들 때마다 투쟁이 벌어지는 곳, 자본주의의 모순이 벌거벗은 형태로 드러나는 곳이다. 그렇기에 생산현장은 자본주의의 시초부터 전투와 휴전을 반복하는 전쟁터다.

 

그러나 아직 자본과의 투쟁을 경험하지 못한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계급으로 조직되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기 어렵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일상을 살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아침의 시작은 6시50분 체조부터이다. 아침에 현장에 와서 밥을 먹으려면 6시 20분까지는 현장에 도착해야 한다. 대부분 30분 이상의 거리를 출퇴근한다. 아침 5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한다. 육체를 갉아먹는 노동을 오후 7시까지 한다. 그리고 대충 닦고 현장에서 밥을 먹든지 아니면 집으로 간다. 밥먹고 씻고 정신을 차리면 저녁 9시...... 이런 것이 노가다의 일상이다. 가끔 모임이 있으면 그날 저녁은 일을 일찍 끝내고 밥은 포기해야 하고, 밤늦게나 모임이 끝나고 뒤풀이라도 참석하면 다음날 아침 고된 출근길을 감수해야 한다.”

 

한국 노동자 중 80% 이상을 차지하는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실태가 이와 다르지 않다. 8시간 노동은 그냥 법적 기준일 뿐 생계를 위해서 잔업량이 많은 공장을 찾아다녀야 하고, 잔업물량이 있으면 경쟁적으로 잔업에 뛰어든다.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은 100여년을 내려와 지금 이 땅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과제이다. 이러한 과제를 건너뛰어 노동대중이 사회주의운동을 시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힘 있는 노동조합의 건설과 투쟁은 노동자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의 혁명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불만이 일차적으로 형성되고 조직되는 것은 직접적인 임노동 관계에서 출발한다. 노동자의 눈에 명확하게 확인되는 적대, 그로 인해 형성되는 투쟁은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의 설립과 노동조건에 대한 투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개별 현장 안에 머물고 있는 노자간의 투쟁은 계급투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공장의 담벼락을 넘어설 때 비로소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세상이 생산현장의 착취에 기반하여 서있음을 확인하며, 거대한 자본주의 구조 자체가 자신들에 대한 착취를 유지하며, 저항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노동자들은 현장의 불만과 투쟁을 통하여 조직되지만 현장을 뚫고나와 세상과 직면할 때만이 계급으로 성장하며,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는 이상 착취의 사슬을 끊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때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과 자본주의를 대체할 세상, 자본의 사상에 대응할 노동의 사상을 찾는다.

 

현장에서의 자기투쟁 없이는 먹고 사는 것 자체가 버거운 노동대중을 혁명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 노동대중의 자기요구가 자연스럽게 모아지고 조직되는 곳, 개별노동자가 아니라 집단으로 노동자 군이 형성되는 곳이 노동조합이다. 이러한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노동대중과 호흡하고 조직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로서 당연한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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