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좌석 버스를 타기 위해 들른 한 터미널의 화장실. 터미널의 화장실답지 않게(?) 말끔해 들어서기가 멋적을 정도였다. 빈 칸을 찾아 들어가 변기에 앉았더니 눈 앞에 "당신의 프라이버시를 지켜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다. 오줌을 쌀 때 나는 소리가 밖에서 들리지 않도록 다른 소리가 나오는 벨을 누르라는 선전물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오줌을 싸고 그때마다 '졸졸졸'이든 '콸콸콸'이든 소리가 나는 것도 당연한데 그런 소리를 숨겨야 하는 걸까. 게다가 '에티켓 벨'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으니 마치 소리를 숨기는 것이 '예절'인 듯 강요당하는 기분이 들어 괜히 한번 비웃어주기도 했다.
소리가 자뭇 민망한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친구 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놀다가 이야기에 빠져 오줌을 참고 참고 참다가 화장실로 달려들어갈 때, 나 역시 너무 가까운 곳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세찬 오줌 줄기 소리가 덜 들리길 바라며 살살 조금씩 오줌을 누게 된다. 그러면서 좀 민망하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그걸 프라이버시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프라이버시는 숨겨야 할 무엇이라고 여겨진다. 어떤 이유에서든 숨기고 싶어할 만한 것, 부끄러워할 만한 것을 굳이 파헤치지 말라는 주장을 할 때 '프라이버시'가 불려나온다. 누군가 말하고 싶지 않고 알리고 싶지 않은 것, 알더라도 회자되길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 '프라이버시'를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거꾸로는 아니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요구가 뭔가 부끄럽거나 숨기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들이 지레 '찔리니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실명제를 반대한다는 주장에 가장 흔히 따라붙는 반론이 그것이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이름 밝히고 당당하게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이런 구도에서 프라이버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당하지 못한 사람들'로 낙인찍힌다. 꿍꿍이속이 있다는 눈초리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의사 표현에 못 미더운 구석이 있다면 듣고도 흘려버리시라. 정작 '당당하지 못한 사람들'은 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보장될 때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직감하는 이들이 불안해 하며 "니 이름 뭐냐"고 묻는 것은 아닐까. 인터넷 실명제 주장을 들을 때면, 자기 욕한 것도 아닌데 괜히 얼굴 벌개져서 삿대질을 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의견을 밝힐 때는 이름도 밝혀서 자신이 하는 얘기에 책임을 지라는 '절제된'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투표를 실명으로 하자는 주장은 왜 나오지 않는가.
내가 말을 하든 글을 쓰든 어떤 행동을 하든 '나'라는 사람의 정보를 밝힐 지 밝히지 않을 지를 선택하는 것은 '나'여야 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한,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정보를 요구할 수도 있고 '나'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정보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필요한 만큼 주고받으면 된다.
"나는 공산당이 좋아요"라는 주장을 들으면 왜 좋은지 궁금한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내 이름을 궁금해할 이유가 있는가. 한국에 HIV/AIDS 감염인이 몇 명 있는지는 궁금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군지 꼭 알아야겠는가. "당신의 프라이버시를 지켜"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불필요한 궁금증은 혼자 삭히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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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 2008/05/23 19:2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 불필요한 궁금증 때문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사고를 치더라고...
프라이버시, 참 어려운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