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담론/체계는 근원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데, '보편성'은 그 핵 중의 하나다. 인권은, '나' 이전에 존재하는 권리의 목록인가, '나'의 권리들의 집합적 실체인가와 같은 질문이 보편성에서부터 비롯된다. 과연 '모든 사람의 권리'라는 말은 옳은가 혹은 정당한가.
인권보장체계에서도 마찬가지의 모순이 드러난다. '모든 사람'은 국경없이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는데 그 권리를 보장해야 할 의무주체인 국가는 '모든 사람'을 국경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을 고유의 권한과 업무로 두고 있다. 주권국가체계 자체가 보편성을 배반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
국가를 인권보장의 의무주체로 두는 세계질서를 '관장'하는 것이 유엔이며 유엔 인권기구들은 때때로 의미있는 일들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고민하는 진보적 인권담론이라는 것은 현재의 인권보장체계가 지니고 있는 모순을 인식하고 더욱 세밀하게 관점을 벼릴 필요가 있다. 유엔인권기구를 정점으로 하는 주권국가를 통한 인권보장체계의 '완성'이 진보적 인권운동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적어도, 현재의 인권보장체계를 충분히 상대화시킨 이후에 가능해질 것이다.
동시에 두 가지를 고민해야 하는데, 하나는, 인권담론/체계의 모순의 핵인 '보편성'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맑스가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주창했던 것처럼, 인권'운동'이 아닌, '운동'으로서의 '인권'을 진보적 인권운동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 는 등의 생각이, 어제 (다소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는) 토론을 하면서 들었던 생각. 아마 국가인권위 투쟁을 고민하면서 들었던 생각들의 연속이기도 할 테고. 어렵당. 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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