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말 2아웃

2년 전쯤, 이런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다.

수애가 나와서 꼭 보고 싶긴 했는데, 제대로 챙겨보지는 못했고

별이 부른 'Fly Again'이라는 OST가 신나고 좋아서

그 무렵 늘 이 앨범을 듣곤 했다.

 

이 드라마의 큰 줄기는

스물아홉 동갑내기들이 서른을 앞두고 겪는 통과의례,

그리고 30년 소꿉친구인 수애와 이정진이 티격태격 끝에 연인이 되는,

아다치 미츠루 만화에서 많이 다뤄지는 이야기였다.

 

처음에 무척 기대를 했던 이 드라마에 점점 흥미가 떨어진 이유 중 하나는

평범하고 약간은 찌질한 스물아홉 난희와 수애 사이의 괴리감,

어떤 사람이 '난희와 수애 사이'라고 표현한 것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희도 그닥 푸념할 게 있을까 싶은 나쁘지 않은 삶이었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서, 거기까지는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그 푸념을 수애가 하는 걸 보니 별로 공감이 안 갔던 것이다.

(말하자면 극히 평범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는 <미술관 옆 동물원>의 춘희

를 심은하가 연기할 때 느낀 괴리감과 비슷하다고 할까.)

 

어쩌면 내가 그 때 막 서른살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아주 어릴 때 <사랑이 꽃피는 나무>나 <내일은 사랑>, <우리들의 천국> 따위를 보면서,

이 드라마들은 그냥 사랑 얘기만 나오는 게 아니라 젊은이들의 고민과 아픔을 그리는구나

(그러나 그 때 대학 다니던 선배들은 그 드라마를 보면서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식으로 생각한 것처럼, 내 나이 20대 초반에 그 드라마를 봤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하지만 서른살의 나이에 서른살을 다룬다는 드라마를 봤기 때문에,

더구나 어쨌든 약간 특이한 삶을 살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 더 괴리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남들이 그 나이에 한창 겪는다는 아홉수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가

뒤늦게 아홉수 비슷한 걸 호되게 느끼는 요즈음,

갑자기 그 드라마를 다시 보고 싶어진다. 어쨌든 서른살을 다룬 이야기니까.

서른이라는 나이는, 수애처럼 아름다운 이에게도, 지금 만나는 이 아이와 헤어지면

또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일으킬 수 있는 나이이고,

작가라는 꿈은, 지금 직장을 다니고 있고 돈을 벌고 있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처지

(물론 난희가 다니는 출판사 상황은 좀 안습이긴 하다)의 사람에게도,

내가 지금 뭐하고 사는 거지 하는 불안을 일으킬 수 있는 꿈이니까.

 

어쩌면 다행일는지 모른다. 늦게나마 아홉수를 잘 치르고 나면

뭔가 길이 보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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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8 22:43 2009/06/28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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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멜랑콜리아>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

 

이 시를 보고, 알튀세르가 다시 취한 말브랑슈의 비에 관한 질문이 떠올랐다.

"왜 바다에 비가 내리는가?"

또는, <보헤미안>에서 리채는 "사막에는 물이 없고 바다에선 물 뿐이"라고 노래했다.

그런데 왜 사막에 비가 내리는가?

 

왜 아이스크림은 아스팔트에 떨어졌는가?

왜 물고기는 모래사막에 그려졌는가?

 

이유는 없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다.

그러니 멜랑콜리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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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6 16:02 2009/06/2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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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달성하는 계획을 짤 땐

반드시 시행착오의 시간을 포함시켜야 한다.

 

원래 진도대로 되면 좋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대로 됐던 적이 없다. 전 날엔 너무나 유망하고 탄탄했던 길이

다음 날 보면 완전히 잘못된 길로 판명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때로는 며칠 동안 간 거리보다 더 먼 거리를 단 한두 시간만에 독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잘 풀렸던 때를 기준으로 계획을 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간을 많이 들인다고 해서 작업이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즉 작업이 선형적이고 단계적으로 진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득 작업의 리듬이 빨라지는 그 순간, 사람들이 흔히 '사건'이라고 부르는,

예견할 수 없고 우발적인, 때로는 아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순간과 마주치기 위해서는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한다.

(물론 들인 시간과 그 순간과의 마주침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없다.

어떤 이는 하루 만에, 어떤 이는 한 달 만에, 또 어떤 이는 한 해 만에 그 순간과 마주칠 것이며,

여기에는 개인의 능력도 다소간 영향을 미치겠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사실 '운'이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을 많이 허비할 줄 알고, 그동안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에서 (아마도 『에밀』의) 루소를 인용하며,

'시간을 잃는(lose time) 방법을 아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대학 시절 선배들에게 들은, '모든 이에게는 방황할 권리가 있다'라거나,

'대학교 1~2학년 때는 뭐를 해도 뻘짓이니 '그때 더 잘할 걸' 같은 생각은 하지 마라'

등의 얘기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것이다.

 

물론 이런 얘기들은, 앞서 루소를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넓은 의미의 '미성숙/미성년자'의 교육에 주로 관련된 것들이고,

서른이 넘은 시점에 스스로의 갈팡지팡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기엔 좀 낯뜨겁다.

그렇긴 해도, 적어도 나의 경우엔, 이 같은 미성숙 상태가 일종의 상수인 것 같으며,

따라서 앞으로도 끊임없이 시간을 잃어야 할 것 같다.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어쩌면 이게 나에게 있어서는,

시간을 버는 나름의 방식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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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5 23:53 2009/06/25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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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세, <연연>

 

나를 자꾸만 부르지마
내 마음 문턱을 넘어오지마
문을 열고 날 알아버리고
더 힘들면 어떡하려 그래

여기저기 다친 자리인데
못생긴 마음인데
누구도 아닌 너에게만은
보이고 싶질 않아

 

사랑 내 가슴을 닳게 하는 것
간신히 잦아든 맘 또 연연하게 하고
잊혀졌던 지난 상처 위에 또 하나
지울 수 없는 슬픈 이름 보태고
이내 멀어지는 것

 

얼마나 맑은 사람인데
눈물이 나도록 눈이 부신데
나 아니면 이런 아픔들은
넌 어쩌면 모르고 살 텐데

너를 보면서 하는 모든 말
사랑한단 뜻이라
쉬운 인사말 그 한 마디도
내겐 어려운 거야

 

사랑 내 가슴을 닳게 하는 것
간신히 잦아든 맘 또 연연하게 하고
잊혀졌던 지난 상처 위에 또 하나
지울 수 없는 슬픈 이름 보태고
이내 멀어진데도

몇 번이라 해도 같은 길로 가겠지
나는 어쩔 수가 없는 니 것인걸
다신 사랑하지 않겠어
눈물로 다짐했던 자리에
어느새 널 향한 맘이 피는걸
난 알아

 

사랑은 늘 내 가슴을 닳게 하지만
또 사랑만이 내 가슴을 낫게 하는걸
너의 사랑만이
내 가슴을 낫게 하는 건
너의 사랑뿐

 

(강조는 나)

 

------------------

 

얼마 전부터 <그사세>를 다시 보고 있는데

성시경의 이 주제곡에 꽂혀서 계속 듣고 있다.

준영에 대해 지오가 품는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 듯.

 

강조했던 부분은, 사랑의 (이렇게 말하자면) '마법'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전혀 새로운 곳으로 연인들을 데려간다기보다,

그/녀들이 살던 일상적인 것/곳에 전혀 예상치 못한 뉘앙스를 주는 그 마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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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21:58 2009/06/23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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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추도가

"가슴 쥐고 나무 밑에 쓰러진다

독립군 가슴에서 쏟는 피는 푸른 풀 위 질벅해
산에 나는 가마귀야 시체 보고 우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독립 정신 살아 있다
 

만리창천 외로운 몸 부모형제 다 버리고
홀로 섰는 나무 밑에 힘도 없이 쓰러졌네
나의 사랑 대한 독립 피를 많이 먹으려나
피를 많이 먹겠거든 나의 피도 먹어다오"

 

- <독립군 추모가>

 

------------------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다가 <빨치산 추도가>를 보았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도 없더니, 오늘 약간 가사가 바뀐 <독립군 추모가>를 찾았다.

어느 곡이 원곡인지는 확실치 않은데, 확인해 봐야겠다.

<빨치산 추도가>를 보고,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데,

전에 이 곡을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을 거의 못 했다.

생각해 보니, 학교 다닐 때 과방에 굴러다니던 노래책에서 봤던 것 같고,

'피를 많이 먹겠거든 나의 피도 먹어다오' 이 대목이 이제야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아마 기억을 못 했던 것은 첫 대목, '나의 사랑 공산주의'

이건 처음 보았을 뿐더러, 극히 강렬해서인 것 같다.

 

------------------

 

"가슴 쥐고 나무 밑에 쓰러진다

혁명군 가슴에서 흩으는 피 푸른 풀에 즐벅해

산에 나는 까마귀야 신체 보고 울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 정신 살아 있다

 

만리천정 우주공헌 부모형제 다 버리고,

홀로 선 나무 밑에 웨맥 없이 쓰러졌다

나의 사랑 공산주의 피를 많이 먹었으나,

만약 먹고 싶으거든 나의 피도 먹으라"

 

- <빨치산 추도곡>

 

------------------

 

"나의 사랑 공산주의 피를 많이 먹었으나, 만약 먹고 싶으거든 나의 피도 먹으라"

어떻게 이런 가사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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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1 15:55 2009/06/2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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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가 제기하는 쟁점

"I would suggest, however, that ‘‘we the people’’ in the symbolic sense of the term, but also much more concretely and practically ‘‘we’’ the citizens, ‘‘we’’ the public opinion, are seldom aware of the extent to which the official democracy has a reverse side, becomes practically restricted or denied to many, and involves the implementation of ‘‘laws of exception,’’ if not the establishment of camps."

- Etienne Balibar, "Historical Dilemmas of Democracy and Their Contemporary Relevance for
Citizenship", Rethinking Marxism, Volume 20 Number 4 (October 2008), Routledge, p. 528(강조는 나)

 

-------------------------------

 

사회적 배제의 맞짝으로 '사회 통합'을 내세우려는 배제 분석은, 많은 경우 반동적이다.

그렇긴 해도 배제가 정치에 어떤 쟁점을 제기하는지에 관해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배제를 좌익적 사고의 중심에 올리려는 시도가 많은데,

내 생각에 한 쪽 끝에 아감벤이, 다른 쪽 끝에 랑시에르가 있는 것 같다.

주지하듯 아감벤은 배제의 문제를 '수용소'(camp)의 일반화와 연결시킨다.

이에 대해 랑시에르는 이렇게 말한다.

 

"We do not live in democracies, Neither, as certain authors assert — because they think we are all subjected to a biopolitical government law of exception — do we live in camps. We live in States of oligarchic law, in ohter words, in States where the power of the oligarchy is limited by a dual recognition of popular sovereignty and individual liberties. We know the advantages of these sorts of states as well as their limitations."

- Jacques Rancière, Hatred of Democracy, Verso, 2007, p. 73

 

랑시에르의 이 같은 지적은 일리가 있다.

발리바르는 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서, 그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What he wants to avoid, and I share this concern, is a transformation of the debate into a metaphysical alternative between ‘‘true democracy’’ and ‘‘camps’’ — that is, generalized totalitarianism, or ‘‘evil,’’ which in practice deprives the democratic conatus (as Spinoza would say) of its possibilities and its concrete objectives. In short, we should agree on the necessity
associated symbolically with the motto of equaliberty to retrieve the ‘‘lost tradition of revolutions’’: the tradition of the first modernity which its protagonists in Europe and in North and South America called insurgency — albeit in completely different conditions."

- Etienne Balibar, 위의 글, p. 528

 

하지만 앞에서 발리바르가 말한 것을 실마리 삼아 가설을 제기해 보자면,

랑시에르는 배제, 특히 현대적 배제가 산출하는 종별적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것 같고,

그 결과 '갈등'(일반적인 의미에서 '계급 투쟁')과 '배제'를 같은 수준에서 다루지 않나 싶다.

물론 양자의 경계가 애매하고 따라서 서로 뒤섞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를 구별하는 것, 좋았던 옛 맑스주의 용어법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룸펜프롤레타리아트'

를 구별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발리바르는 프랑스 사회학자 로베르 카스텔의 개념을 빌려

현대적 배제의 핵심을 '탈퇴'(disaffiliation) 또는 '부정적 개인주의'(negative individualism)

로 규정하고, 그것이 낳는 고유한 정신적 동요를 지적한다.

이는 예컨대 『끝없는 이야기』에서 바스티안이 겪은 다음 상황과 같다.

 

"여러 낮과 밤을 방랑하면서 움튼 외로움 때문에 바스티안은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 것, 어떤 집단 속에 받아들여지는 것, 주인이나 승리자나 특별한 자로서가 아니라 그저 다른 이들 중의 하나, 어쩌면 가장 하찮은 자나 가장 중요하지 않은 자로, 하지만 물론 거기에 속하고 그 공동체에 참여하는 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소원하게 되었다. (…) 위스칼나리들에게는 서로 다투거나 불화가 생길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개체로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 견해 차이를 극복할 필요가 없었고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다(…)."

 

내가 제기하는 가설은, 랑시에르는 배제된 이들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파괴, 이에 따라 규정되는

배제된 이들과 '통합된 이들'(심지어 갈등적으로 통합된 이들) 사이의 소통의 어려움,

이것이 해방의 정치에 제기하는 장애물과 이를 극복하는 문제,

특히 현대에 고유한 배제에 관한 사고를 충분히 전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아감벤 등에서 보듯, 이 문제를 잘못 사고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

예컨대 허무주의와 그 맞짝으로서의 주의주의(푸코의 저 위대한 분석의 리스크)

사이에서의 동요는 아주 분명하다. 어떤 점에서 랑시에르는

분석을 성글게 하고, 평등의 지위를 '전제' 편에 놓는, 다소 거칠고 야성적인 논의 전개를 통해

완전히 통합된 '일차원적 인간' 따위의 숙명론에 항체를 제공하는

역설적인 진리 효과를 만들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한 때 지젝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더라도 배제의 문제를 훨씬 더 정교하게 분석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훨씬 중요할 것이다. 배제된 소수자를 다시 '자명한 주체'로 부당전제하는 경향,

그렇지만 배제가 기존의 갈등과 정치 전반에 제기하는 파괴적 효과를 충분히 제기하지 못한 채

배제에 맞선 투쟁과 계급 투쟁을 부당대립하는 경향(오늘의 정세에서는 양자의 변증법을

긴급한 문제로 제기하고 해명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실천적으로 이 같은 경향으로 귀결된다)

모두가 낳는 '비사고'에서 벗어나려면,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를 사고하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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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19:05 2009/06/1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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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부활 2

"3학년 때 닉은 교실을 열대 섬으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다. 사실 뉴햄프셔 주에 사는 아이라면 누구나 추운 2월에 여름을 맛보고 싶을 것이다. 닉은 아이들에게 초록색과 갈색의 두꺼운 종이로 작은 야자나무를 만들어 책상 네 귀퉁이에 붙이자고 했다. (…) 이튿날 여자 아이들은 머리에 종이꽃을 달고, 남자 아이들은 선글라스와 밀짚모자를 썼다. (…) 그다음 날 닉은 집에서 가져온 작은 드라이버로 온도 조절기를 돌려 교실 온도를 32도까지 높였다. 아이들은 모두 반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고 맨발로 돌아다녔다. 선생님이 잠깐 교실을 비운 사이에 닉은 희고 고운 모래 열 컵을 교실 바닥에 쫙 뿌렸다. 디버 선생님은 아이들의 풍부한 '창의성'에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 교장 선생님은 당장 모래 자국을 따라가 보았다. 그랬더니 디버 선생님은 앞줄 아이들에게 훌라 춤을 가르치고 있고, 웬 갈색 머리 꺽다리 녀석 하나가 웃통을 벗고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낸 채 티셔츠 여섯 장을 묶어서 만든 네트 너머로 배구공을 힘껏 내리치고 있었다."

- 앤드루 클레먼츠, 『프린들 주세요』, 사계절, pp. 8~9

 

------------------
 

민중의집에서 아이들과 독서토론 수업을 하면서 사용한 책인데

할 얘기도 많고 재밌는 책이었다.

구원이나 부활 개념을 너무 비속하게 만드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이 대목을 보고 저 개념들을 떠올렸다.

 

여기서 벤야민을 생각하게 되는 건 우연이 아닌데

알다시피 그는 '아동(기)'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아동의 '천진(天眞)함' 같은 개념에 별로 동의하지 않고,

스피노자를 읽고 나서 더 그렇게 된 나였지만

벤야민의 이야기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작년하고 올해, 이른바 '청소년문학' 범주에 들어가는 책들을 조금 읽었는데

내가 그 나이에 이런 책들을 읽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 평범사와 계몽사의 어린이 문학 전집을 읽은 뒤

사춘기/중학교 시절에 이상하리만치 책을 읽지 않은 나는

(이런 도식을 약간 무리하게 사용하자면) '동화'의 세계를 떠나 '소설'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했다.

최근 쏟아져 나오는 청소년문학은, 말하자면 약간 교육적 차원에서,

양자를 매개할 수 있는 형태와 내용으로 기획된 책들인데, 물론 책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고, 또 철학적이다.

 

개인적으로 최고로 꼽는 청소년문학

(사실 이건 흔히 '동화'로 번역되는 '메르헨'(Märchen)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정확할 텐데)

은 미하엘 엔데의 책들이다. 『모모』야 이제 워낙 유명하지만,

『끝없는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민중의집에서 청소년 독서토론교실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썼던 책이

저 『끝없는 이야기』였는데, 당시에는 이 책을 한 번에 다뤘지만,

지금이라면 몇 차례로 나눠서 더 꼼꼼히 할 것이다.

이 책은 '자유'에 관한 다양한 해석과 그 귀결을 사람들과 토론하는 데

가장 좋은 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과도.

 

성인들과 한다면, 메르헨의 문학사적 지위를 다루고,

아동기 개념(그리고 미메시스 개념)에 대한 벤야민의 해석을 검토한 다음,

엔데의 소설 말고 다른 메르헨(벤야민 전공자 윤미애 교수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쓴다.

여기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예컨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추가할 수 있다.)

을 함께 보는 식으로 짤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작년에 아이들 수업을 짜는 중에 든 착상인데

모르긴 해도, 특히 독일 예술/미학 등의 전공자라면, 이런 식의 커리큘럼을 이미 짰을 법도 하다.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지만, 어쨌든 이 내용은 나중에 한 번 정리해 보고 싶다.

구원과 부활이라는 테마를 메르헨과 연결시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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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5 19:35 2009/06/1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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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부활

"폭격기를 보면서 인간의 비행에 대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대를 기억하게 된다. 그가 공중으로 떠오르려 했던 것은, '산꼭대기의 눈을 가져다가 한여름 뙤약볕으로 이글거리는 도시의 거리에 뿌려주기 위해서'였다."

- 수잔 벅 모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p. 317

 

전에 얘기한 것처럼, 나는 새로운 것 일반에 매혹되진 않는다.

나를 매혹시키는 것은, '죽지 않는 것들',

바뀐 상황 속에서도 그 모습을 변화시키면서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것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되돌아오도록 만드는 이들, 그리고 그들의 작업이다.

대추리에 관한 나의 기억 중 가장 강렬한 것 중 하나는 대추리 주민역사관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53937)

그 곳 한 편에 주민들의 기억이 담긴 사진들을 진열해 두었었는데,

그 사진들을 감싼 액자는, 마을 곳곳에 버려져 있던 책상 서랍들을 수집한 것이었다.

 

판화가 이윤엽씨는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어느 날 집에서 우연히 책상 서랍을 열었더니

아주 옛날 사진들이 있었고, 거기엔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이 새겨져 있었다고,

그 때부터 서랍과 기억을 연결시킨 작품을 언젠가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그런 착상에 따라 이 전시관을 만들었다고.

 

당시 벤야민을 띄엄띄엄 읽고 있던 나에게

그건 정말이지 놀라운 감동이었다.

잊힌 기억일 뿐만 아니라 버려진, 또는 강제로 빼앗긴 기억의 표징 자체인 '대추리의 서랍',

그것들이 죽지 않고 다시 예술 작품으로, 투쟁의 상징으로 되살아나는 장면,

벤야민이 말하는 저 '구원'(redemption)을 눈 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김에 말하자면, 노무현에 대한 나의 환멸이 그의 죽음에도 가시지 않는 이유는

그가 저 대추리를 파괴했고, 게다가 그걸 여전히 치적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봉화에 온 용산 주민들에게, 자신이 미군기지 내 보낸 덕에 용산 땅값 올랐으니 고마워하라

고 말하면서 웃는 노무현을 TV에서 보고 얼마나 끔찍했던지!)

 

구원과 부활. 돌이켜 보면 이 말들은 나를 항상 사로잡았다.

기억이 닿는 한에서는, 아마 20여 년 전, 아마도 우리 또래에게 최초로 비극을 가르친,

<성모승천> 앞에서 죽은 네로를 만난 다음이었을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민중가요가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와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1>

인 것도 나중에 생각해 보니 우연이 아니었다.

벤야민에게 그렇게 끌렸던 것도, 벤야민과 데리다를 '사진'이라는 주제로 연결시킨

카다바(Eduardo Cadava)의 Words of Light 주위를 끊임없이 맴돈 것도

구원과 부활의 현세적 변주라는 테마에 매혹됐기 때문이다.

 

돌파하고 싶지만 몇 년째 변죽만 울리고 있는 이 문제에 관해

더 늦기 전에 고민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일요일 저녁에 책을 읽다 문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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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6/14 20:09 2009/06/1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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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세상이 어찌 되려는 건지

요새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사람들이 노무현 시대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여전히 동의는 못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들 알듯,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폭력이나 심지어 죽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은 열사는 물론,

전용철, 홍덕표, 하중근 열사처럼 경찰에 맞아 죽은 열사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대추리에 투입된 군대는 또 어땠는가.

그리고 조중동 어느 신문에선가 이야기한 것처럼, 노무현 때에도 시청광장 봉쇄는 있었고,

횟수는 (뭐 이명박 정부가 아직 2년이 안 됐으니까 단순 비교를 할 순 없지만) 더 많았다.

 

그렇지만 그 때 느낀 감정은, 지금 이명박 정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과는 좀 다르다.

전자의 경우 (혹시나 하는) 기대와 배신, 분노와 비극 뭐 이런 감정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마치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한, 어이없음과 실소, 엽기 같은 감정이 더 많다.

 

예컨대 유인촌이 그렇다. 한예종 앞에서 1인시위 하는 학부모한테 한 발언은

참으로 엽기적이다. 동영상을 보면 볼수록 정말 막장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한예종 문제에 관해 내가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없지만, 그냥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서,

이념/정치적인 이유로 과를 없앤다는 발상이라든지,

심대한 실책이 아닌 '성과 부족'을 이유로 교수를 징계, 것도 해직/파면한다는 건

참으로 몰상식하다. 더구나 이번 사태의 중심에는 황지우 시인이 있었는데,

그의 사상이나 행적 여부를 떠나서, 어느 칼럼에서 김연수가 말한 것처럼,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인을 잡범 수준으로 만들어 내쫓"을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다.

얘들을 보면 정말 막되고 무례하다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진중권 스토커 드보르잡의 소송 건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막장드라마 보는 느낌으로 이 싸움을 구경하고 있지만

고소의 이유로 드보르잡이 제시한 '불법적 표현'('듣보잡')이라는 단어가

참 어이없으면서 동시에 섬뜩하다. 세상에, '모욕적'인 표현도 아니고, '불법적'인 표현이라니!

 

이런 짓들을 하니, 사람들이 노무현 시대를 그리워하게 되는 거다.

노무현의 나쁜 짓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브루투스, 너마저!' 같은 것이었다면,

이명박과 그 수하들에 대한 반응은, '이거 정말 미친 놈들 아냐!'가 아닐까.

이건 그 말의 이중적 의미에서, 즉 황당하고 섬뜩하다는 의미에서, '엽기적'이다.

"독재자, 살인마, 배신자를 거쳤더니, 이제 '미친놈'이라니!"가 사람들의 심정 아닐까?

 

물론 이런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대개는 부차적인 쟁점이 많다.

이런 쟁점이 더 중요한 사안들을 뒤덮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정서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다.

여튼 이 미친놈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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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6/12 18:27 2009/06/12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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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선물'

"조능희 전 < PD수첩> CP는 “지금까지 언론자유가 단단하게 이뤄진 걸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며 “언론자유는 한계단 한계단 쌓아 올리는 게 아니라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잠시라도 노 젓는 걸 멈추면 민주주의는 한 순간에 바닥으로 내려온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2009. 3. 26. 전국언론노조 MBC 본부의 긴급 비상총회 中)

 

-------------------

 

전에 이 얘기를 듣고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오늘 다른 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나 수집해 둔다.

 

급류를 거슬러 노를 젓는 것.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탁월한 심상 중 하나일 것이다.

민주주의에는 어떤 '단단한' 기초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어떤 질서를 아래에서부터 '한계단 한계단 쌓아 올리는' 건축술도 아니다.

 

그것은 '급류를 거스르는 것', 따라서 갈등적인 세력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기존의 지배적 경향('급류')에 맞서는 반경향('노를 젓는 것')을 끊임없이 재생산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역전되고 퇴행하고 패배할 수 있는('바닥으로 내려온다') 적대적인 투쟁이라는,

근원적인 '우연성'(contingency)이라는 '기초 아닌 기초' 위에 불안하게 서 있다.

(어쩌다 읽은 한 글의 각주에 따르면, 우연성이란

"그 존재, 사건, 인물 등에 있어서 아직은 확실치 않은 그 무엇에 의존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이명박 이전에도 언론자유나 민주주의가 '단단하게 이뤄'지지 않았고,

위의 상황이 이명박 시대의 특수한 '예외 상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일반적 조건이라는

유보 조항을 추가하는 한에서,

나는 조능희 CP의 저 통찰에 적극 동의한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곧 투쟁/운동의 시간 '이후' 도래한 제도의 설계/운영이 아니라,

이 제도를 항상-아직 규정하는 민주주의 투쟁/운동,

민주주의의 역전을 제어하고 '민주주의를 민주화'할 새로운 정치적 주체(화)의 유일한 원천인

저 투쟁/운동의 항을 보존/확장하는 것, 그에 기초해 제도와의 변증법을 꾀하는 것이다.

 

김대중이나 노무현의 시대에도 그랬었지만

이명박의 시대에 비로소 가능해진 저 정치적 진리의 대중화,

아마 이것이 이명박이 우리에게 준 예기치 못한 '선물'일 것이다.

이를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정쟁 속에서 자유주의적으로 낭비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전유를 넘어서는 '더 많은 민주주의'의 대중적 허구(fiction)

(자연적(natural)이지도, 자의적(arbitrary)이지도 않은, 진리의 이데올로기적 번역이라는 의미에서)

의 원천으로 삼을 것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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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6/10 01:20 2009/06/10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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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잖아 비가 오면 바다 정도는 생긴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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