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를 규정하는 근원적인 갈등

중 하나를 흔히 '개인과 국가' 사이의 갈등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갈등이 있다. 그것은

'일차적 공동체와 이차적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다.

왜냐하면 '개인'이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차적 공동체에서 해방되어 기존의 공동체가 제공하는 자원을 초과하는

새로운 자원들을 제공해 주는 새로운 관계들 및 공동체들과 접속하고

그 자원들을 독특하게 결합시켜 자신만의 개인(성)을 만듦으로써 비로소 '획득'되는 결과이며,

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 중 하나가 바로

일차적 공동체와 이차적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개인이라는 자율적 존재와 국가라는 대표적인 이차적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 있는 것이다.

 

한 종족, 한 가문, 한 신분 따위의 일차적 공동체에 절대적으로 소속될 때

강한 의미에서의 개인(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차적 공동체는, 이 역시 공동체인 한에서, 개인(성)의 가능성을 축소할 것이지만,

(물론 공동체가 제공하는 자원이 없다면 개인(성)은 아예 존재할 수 없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언어다. 언어 없는 개인, 아니 인간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일차적 공동체와 맞서는 한에서는, 개인(성)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바로 이 같은 모순이, 국가의 모순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를 이룬다.

 

이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결론이 따라 나온다.

 

국가 이전의 공동체를 이상화하는 낭만적 아나키즘은

자신들의 주장/바람과는 달리 전혀 개성화를 촉진할 수 없다.

그/녀들은 개인화/개성화의 역사적 조건, 그것과 국가의 (모순적이지만) 내재적인 관계,

또 일차적 공동체가 개인(성)에 가하는 제약을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오늘날 국가의 위기가 개인(성)의 해방으로 이어지기는커녕,

개인(성)의 축소와 한층 배타적인 일차적 공동체의 복귀를 낳는 이 역설 앞에서

다만 당황스러워하거나 고개를 돌릴 뿐이며,

또는 이 위기에 처한 국가의 퇴행과 폭력을 알리바이 삼아

자기 주장이 정당하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공동체와 개성화의 사고에 관한 한

낭만적 아나키즘은 단연 근대 국가보다 퇴행적이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대 국가라는 역사특수적 제도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일차적 공동체를 해체하되, 이로써 공동체(가 제공하는 자원) 없는 원자로 퇴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맑스가 말한 이중적 'free of', 즉 농노라는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동시에 기존의 생산/생존 수단을 빼앗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아니라, 이를 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자원이 풍부한 공동체의 창설로 연결시키는 것,

(근대라는 시대에, 민족 국가의 창설은 바로 이런 사례 중 하나였다)

하지만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공동체가 부과하는 역사적 제약을 다시 넘어서려는

끊임없는 봉기-구성의 '운동'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 운동이 결코 근대 국가 안에 기입되어 있는 역사적 해방의 경험보다

'더 작은' 해방을 지향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점이다.

더 많은 보편성만이 더 많은 개별성/독특성을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동시에 정치적.윤리적.사회적.철학적인 문제는, 개인을 국가와 그 제도들로부터 해방시키려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국가와 거기에 결부된 개인화/개성화 유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주체화를 촉진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에게 문제는,

근대 국가 이전 또는 그와 분리된 더 작은 해방과 개성으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국가가 표상하는 이차적 공동체에서보다 더 많은 해방과 개성을 향유할 수 있는

더 보편적인 공동체, 더 정확히 말하면 공동체들 간의 '관계',

따라서 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다원적인 주체화의 궤적과 자원을 구성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Posted by 아포리아

2008/12/26 18:39 2008/12/26 18:39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blog.jinbo.net/aporia/rss/response/36

자연 상태란 없다, 그렇다면...

정치 철학에 관한 이런저런 글을 보다가

다시 '자연 상태' 개념으로 되돌아온다.

 

자연 상태 개념을 비판할 때 내기에 걸린 건 무엇인가?

특히 폭력에 관한 사고 측면에서.

 

일단 '기원'(origin) 개념에 대한 비판,

그 너머의 순수한 기원이란 존재하지 않는 '기원적' 복잡성과 불균등성.

따라서 사회/시민 상태, 국가와 제도 이전의 자연 상태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항상-이미' 사회/시민 상태, 국가와 제도가 과잉결정한다.

 

이는 (비)폭력을 말할 때, 그 원인을 기원이나 본성/자연(nature) 편에서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홉스(폭력 = 자연 상태 / 비폭력 = 사회 상태)와 루소(비폭력 = 자연 상태 / 폭력 = 사회 상태)

모두를 비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자연/사회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아니라, 자연과 사회의 구체적 상호 결정에 관한 역사적 분석

이기 때문이다.

 

물론 홉스와 루소가 제기한 질문,

곧 폭력적인 전쟁 상태(에서 어떻게 '문명'을 건설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비극적이게도, 그 어느 때보다 유효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폭력적인 전쟁 상태는 '前-정치적'이 아니라 '超-정치적'이라는 점,

따라서 단순한 제도 창설과 파괴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

또는 차라리, 폭력의 원인을 자연 상태 쪽으로 돌리고 제도 창설을 그 해법으로 제시한다든지,

역으로 폭력의 원인을 제도의 존재 자체 쪽으로 돌리고 제도의 파괴를 그 해법으로 제시한다든지

하는 접근이야말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여기다.

그는 자유주의의 사회계약론적 전통을 비판하면서,

'자연 상태 / 사회 상태'라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대중들과 국가(제도)라는, 약분할 수 없이 분열된 두 항 사이의 내재적 변증법으로

전위시켰고, 어느 한 쪽을 절대적 선(따라서 다른 한 쪽을 절대적 악)

으로 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같은 노선에서는

(기원적인 것으로 상정되는) '유대'와 '질서'의 문제설정이 근본적으로 해체된다.

모든 개인 사이의 선험적 '일치점' 노릇을 하는 본성이 사라졌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차이와 개별성/독특성(singularity),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갈등 뿐이다.

루소가 말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 상태란 영원히 기각되는 것이다.

물론 홉스는 이 같은 전쟁 상태야말로 자연 상태의 본질이라고 말하면서,

그 해법으로 사회/국가의 창설을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건대, 자연 상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험적 일치점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선험적 차이와 적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각 개인들은 사회/국가/제도와 분리된 본성을 갖지 않으며,

사회/국가/제도가 작동하면서 산출한 사후적 결과가 바로 각 개인들의 본성이다.

개인들이 서로 갈등한다면, 이는 그/녀들이 원래 갈등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갈등하게끔 사회/국가/제도가 그/녀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어진 생물학적 질료를 가지고. 이 질료는 또한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갈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감축하고 조정하는 것은

사회/국가/제도를 단순히 창설하는 문제가 아니라,

항상-이미 그/녀들의 개성 및 그것들 사이의 갈등에 개입하고 있는

사회/국가/제도를 변혁하고 개조하는 문제가 된다.

(물론 그 계기 중 하나가 새로운 제도의 창설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같은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도 낙관주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개별자 사이의 교통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따위의) 비관주의도 아니다.

발리바르가 좋아하는 표현을 쓰자면, 이는 '비극적'인 관점이다.

즉 우리의 역사와 정치와 삶에서 차이와 갈등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우리의 역사와 정치와 삶이 곧 '전쟁 상태'라는 뜻은 아니다.

차이와 갈등은, 특정한 조건에서, 전쟁이 된다.

하지만 다른 조건에서 그것은, 가장 뛰어나고 생명력 있는 문명의 원리가 된다.

또는 이것이 다소 낙관적이라면, 적어도, 차이와 갈등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모든 反문명과 전쟁 상태의 불변수를 이룬다.

 

그러므로 문명과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차이와 갈등을 제거하려 들지 않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익히는 것이다.

때로 괴롭고 때로 스스로가 파괴되는 지경까지 이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차이와 갈등이 없다면 아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보다 '비극'이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상황이 있겠는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Posted by 아포리아

2008/12/26 17:10 2008/12/26 17:10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blog.jinbo.net/aporia/rss/response/35


블로그 이미지

당연하잖아 비가 오면 바다 정도는 생긴다구

- 아포리아

Tag Cloud

Notices

Archives

Calendar

«   2008/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ite Stats

Total hits:
309981
Today:
62
Yesterday: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