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짜증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은 그것이 옳을 때에나 틀릴 때에나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밖에 별로 없는 것이다. 자신은 어떤 지적인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고 믿는 실무가들도,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인 것이 보통이다. 허공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권좌에 앉아 있는 미치광이들도 그들의 미친 생각을 수년 전의 어떤 학구적인 잡문으로부터 빼내고 있는 것이다."

-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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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철학을 즐겨 읽는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그/녀들을 이해하는 데 철학이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철학을 외재적으로 거부하거나,

기존 철학을 '극복하는' '새로운' 철학(많은 경우 스스로가 철학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을 제시한다면서, 사사건건 다른 철학 전통이나 사조를 비판하는 이들일수록

기존의, 그것도 아주 낡은 철학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어제오늘 얘기는 아니다.

예컨대 1960년대 전후, 경제주의적이고 헤겔주의적이지 않은 맑스를 주장하던

일군의 '인간주의적'(humanist) 맑스주의자들에게

알튀세르가 던진 가장 강력한 폭탄은,

그의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알튀세르가 번역한 포이어바흐의 책,

인간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몇백 년 전에 훨씬 더 정밀하게 전개하던 그 책이었다.

그 책을 읽고 그들은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니체가 나에게 가르쳐 준 가장 소중한 교훈은

'원한'에 입각한 반대나 정치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가장 탁월한 니체주의자 중 한 명인 들뢰즈를 따른다고 주장하면서

원한의 정치가 스며 들어 있지 않은 글은 거의 쓰지 못하고,

자신이 스탈린주의를 일찍부터 비판했다는 자부심 바로 그것 때문에('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자신의 사고가 여전히 뿌리 깊숙이 스탈린주의를 닮아 있다는 걸 맹목하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특히 맑스주의의 '국가주의'를 비판하면서 비국가적 '공동체'를 대안으로 내세우는 이들은,

저 국가주의의 원흉 '헤겔', 나아가 '독일 관념론'이 정확하게 동일한 논리를 구사한다는 점

(헤겔은 국가가 '기계'가 아닌 '공동체'인 한에서만, 진정한 국가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을 알는지 모르겠다.

 

그런 이들을 만날수록

나는 점점 더 철학 독서에 집착하게 된다.

나 자신도 혹시 저러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커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읽고, 더 적게 쓰게 된다.

또는 쓰더라도, 항상 누구에 관한 주석으로만 쓰게 된다.

이런 까닭에 나는 그들이 밉다.

나의 역량과 활동력을 가장 줄이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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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14 17:44 2008/12/14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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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 작가에게, 오마주

요새 <그.사.세.>를 열심히 보고 있는데

시청률이 안 나와서 속상하다. 앞으로 노희경 작가가 글 쓸 기회가 줄어들 것 같아서.

난 노희경 작가 드라마를 그리 많이 보진 않았지만,

아래 장면-대사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문득 기억나서 옮겨 온다. 이런 장면을 만들어 낸 노희경 작가에게, 경의를.

 

------------

 

씬 58 미옥의 방안.


미옥, 벽에 기대 이불을 무릎에 덮고, 막막하게 앉아있는,
엄마, 죄지은 사람처럼 밥상 앞에서 앉아있고,
고모, 맘에 안들게 미옥을 보는,


엄 마 : 미옥아, 너 좋아하는 청국장이야, 한술만 떠봐, 어?
미 옥 : ....
고 모 : (버럭) 아, 거, 기집애, 진짜 해두해두 너무하네!
엄마, 미옥: (고모 보면)
고 모 : 똥개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벌써 몇번째 국을 뎁혔다 말았다 하는 줄 아냐, 너! 니 엄마가 기집애야, 니 종이냐!
엄 마 : (말리는) 고모...
고 모 : 언니도 애들 이렇게 키우지 말어! 이게 뭐야? (미옥 보며) 너 기집애야, 뭐가 그렇게 잘나서 식구들 전부 절절 매게 해! 너 뭐가 그렇게 잘났어! 영민씨는 집안이 어찌됐든 너 받아 줄 맘 있대! 그럼 끝난 거지, 니가 왜 쏘가지야! 대체 지금 누구한테 쏘가지가 난 거야, 너!
미 옥 : (엄마 눈가 그렁해 보며, 맘 아프지만, 담담하게) 엄마, 나 왜 대학 그만두라 그랬어.
고 모 : ?
엄 마 : (미옥 보며, 순간 철렁하는) ?
미 옥 : (울먹이며, 조금 큰소리로) 내가 4년제 대학 간다 그럴 때두 ..엄마가 2년제 가라 그랬지? 그나마 2년제두 엄마가 중간에 그만두라 그랬지.
엄 마 : (눈가 붉어져, 맘 아픈, 조심스레) 내가 언제..니가..그만둔댔잖어.
미 옥 : (격앙된) 엄마가 미수는 4년제 가야하는데 그러면 집안이 힘들어진다고..자나깨나 한숨쉬고 그러니까, 내가 그만둔 거잖어!
고 모 : (맘 아픈, 달래듯) 야, 야, 다 지난 일 갖고, 야, 김미옥,
미 옥 : (엄마에게, 눈물 흐르는, 맘 아픈) 엄마는 착한 게 아니라, 방관자야.
엄 마 : (미옥을 빤히 보는데, 눈물 뚝 흐르는)
고 모 : (맘 아픈) 미옥아.
미 옥 : 다른 엄마들 봐, 파출부를 하든 뭘 하든 죽어라 일해서 자식들 대학 보내잖어. 땅 장사다 집장사다 해서 어떻게든 돈 벌잖어! 그런데 엄마는 어땠어? 공장 가면 공장에서 쫓겨나고, 파출부 나가면 거기서 또 쫓겨나고, 덕분에 나는 대학도 못다니고, 시집갈 때까지 갈비집에서 가위질하며 돈 벌었어! 내 또래 애들 전부 잘 나가는 대학생 되고, 멋진 옷 입고 다닐 때 나는 앞치마하고 갈비집에서 일 했다구! 왜 미수만 유학까지 갔어야 돼! 나는 뭐가 모잘라서 갈비집에서 일했어야 돼! 내가 엄마 딸이지, 엄마 엄마야! 내가 왜 지금까지 엄마 생곌 책임져야 돼! 나 영민씨 아버지 집에서 돌아올 때 그 누구보다 엄마가 미웠어! 왜 날 이렇게 밖에 못키웠어! 왜, 이렇게 밖에 못키웠냐고, 왜!
엄 마 : (손등으로 눈물 훔치며, 맘 아픈) 미안해, 엄마가 모잘라서 그래.
고 모 : (속상한, 눈가 붉어져) 언니가 뭐가 모잘라! 사람 다 생긴 대로 사는 거지. (미옥 보며) 야, 기집애야!


그때, 재수 화나 벌컥 문 열고 들어서서 미옥에게,


재 수 : (화난, 소리치는) 오늘 나랑 한판 뜰래!
미 옥 : (보면)
고 모 : (일어나, 재수 밀며) 넌 빠져, 자식아!
재 수 : (아랑곳없이, 미옥 보며) 지금 어디서 화풀이야! 누나 그 공치사하는 거 이제 내가 더는 지겨워서 못듣겠어! 염병, 재혼 못해 환장했냐! 그렇게 시집이 두 번 세 번 가고 싶어서, 엄마한테 이 난리야, 지금!


그때, 미수, 들어와 재수 끌고 나가며, 가라앉은,


미 수 : 재수 너 나와. 어서!
고 모 : (같이 재수 끌고 가며) 그래, 나가자, 나가자.
재 수 : (나가며, 큰소리치는) 지가 집에 잘했음 얼마나 잘했어! 이혼해서 엄마 그만큼 속썩였음 됐지, 뭐가 그렇게 잘났어!
미 수 : (재수 끌고 가며) 조용히 못해!
재 수 : 지가 못난 건 괜찮고, 왜 엄말 쥐잡듯 잡냐고, 왜!
고 모 : 나가, 자식아, 니가 뭘 안다고 그래!
미 수 : 나와, 어서!


고모, 미수, 재수를 끌고 문밖으로 나가는 소리 들리는,


미 옥 : (맘 아픈, 눈물 닦으며, 자조적으로) 그래...나 잘한 거 없다, 그러니까 너두 나 무시해, 다들 그래, 그렇게 무시하라 그래.
엄 마 : (눈물 닦고, 밥 떠 미옥의 입에 대주며) 한술만 떠.
미 옥 : (엄마 막막하게 보는, 속상한)
엄 마 : 엄마한테 할말 다 했음 ..제발 밥 한술이라도 좀 떠, 어?
미 옥 : (엄마 막막하게 보는, 내가 무슨 짓을 했나 싶다)


씬 61 엄마의 거실, 아침.


엄마, 졸린 얼굴로 눈 비비고 나오다, 순간 달그닥거리는 소리에, 멈칫하는, 조심스레 주방 쪽으로 가면,
미옥, 쪼그리고 앉아 물에 말은 밥과 김치를 바닥에 놓고 먹고 있는,


엄 마 : (마음이 조금 풀리는, 어색하게 작게 웃고, 미옥의 앞에 앉아서) 아이고, 밥 먹네, 우리 애기?
미 옥 : (엄마 보고, 미안한)
엄 마 : 왜 밥을 이렇게 먹어, 청국장 뎁혀줄까?
미 옥 : (어색하게, 눈가 붉어져) 어제..미안.
엄 마 : (맘 짠해지는, 끄덕이며, 애써 웃으며) 괜찮어. 니가 엄마 아니면 어디 가서 그렇게 소릴 질러, 안그래?
미 옥 : (눈가 붉어져, 작게 웃으며) 맞어, 나는 엄마가 젤로 만만해.
엄 마 : 알어. (하고, 김치 찢어 미옥의 입에 넣어주며) 아, 해!
미 옥 : (입벌리면)
엄 마 : (넣어주고) 꼭꼭 씹어, 큰애기.
미 옥 : (받아먹고, 눈가 붉은 채, 씩 웃는) 어.
엄 마 : (손가락 빨아먹으며, 미옥 보고, 눈가 붉은 채, 씩 웃는)


--------------------------

(위의 강조 표시는 내가 한 것이다)
 
씬 58, 굵은 표시를 한 고두심의 대사가 나왔을 때,
특히 '엄마한테 할말 다 했음 제발 한술만 떠'가 나왔을 때
눈과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그 느낌을 도저히 여기 옮겨놓을 수가 없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김흥수의 '오늘 나랑 한판 뜰래'로 시작하는 연기다.

이게 없었다면 그후 고두심의 대사는 훨씬 덜 감동적이었으리라)

 
한편
씬 61의 저 대화를 고두심과 배종옥이 한다고 생각해 보라!
모르긴 해도 국내에서 저 대화를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두 사람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 두 장면만으로 난 이 드라마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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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14 15:10 2008/12/1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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