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북스 언어 교과서들

요즘 민중의집에서 스페인어 스터디를 하고 있다.

 

일단 느낀 건, 영어가 상당히 어려운 언어라는 점이다.

아직 깊숙히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모르지만

무엇보다 발음이 그렇다. 불어도 그렇고, 스페인어도 그렇고,

그냥 쓰인 대로 읽으면 되는데, 영어는 발음기호를 따로 외워야 하니까.

물론 명사 등에 성별 구별이 있기 때문에 이거 외우는 게 좀 까다롭긴 하고,

스페인어는 아직 잘 모르지만 불어는 시제가 복잡해서 이게 좀 어렵긴 하다.

하지만 뭐랄까, 처음에 입문할 때는

큰 어려움을 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다는 게 큰 유인이 되는 것 같다.

 

또 한 가지는, 일단 영어를 어느 정도 아는 상태라면

다른 언어를 익히는 게 훨씬 쉽다는 점이다.

이 역시 배운 지 2주 밖에 안 되는 처지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스페인어보다는 조금 더 아는 불어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한글보다 영어가 유비가능성이 훨씬 높아서

처음 영어 배우는 것보다는 좀 수월했던 것 같다.

지금 불어를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몇 가지 단어야 알고 있는데

스페인어의 경우 영어나 불어 단어와 유사한 단어가 많다.

생각해 보니, 영어보다 불어랑 더 유사한 단어가 아직까지는 많았다.

 

물론 전혀 다른 언어권에 들어간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일단 라틴어를 어원으로 하는 언어는,

영어가 됐든 불어가 됐든 스페인어가 됐든,

어느 언어를 하나 알면 다른 언어에 접근하는 게 훨씬 쉬워지는 듯.

 

이번 수업에서 위키북스 언어 교과서를 사용하는데

그 사이트에 들어가니까 여러 언어 교과서가 있다.

영어로 되어 있긴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영어로 배우는 게 다른 외국어를 익히는 데 더 유리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한 번 도전해 볼 만 한 것 같다.

주소는 http://en.wikibooks.org/wiki/Wikibooks:Languages_bookshelf 이다.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 번 가보시도록.

 

기왕에 스페인어 시작한 김에

아직 제대로 돌파하지 못한 불어를 일단락짓고

올해 안에 이태리어 학습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그나마 내가 상대적으로 더 훈련받은 분야가 어학이니까

이걸 정리해 두어야 나름 밑천 노릇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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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0/29 11:54 2008/10/29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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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고는 전진하고 있는가, 또는...

나의 가장 큰 단점은 지속하지 못하고, 매듭짓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고에 관해서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얼마간 꾸준히 읽었다고 자평하는 한두 명의 저자 및 책이 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하곤 내가 대략 2003년부터 2005년 정도까지

읽었던 여러 가지 책들은 거의 하나도 매듭짓지 못했다.

정신분석학이든, 언어학이든, 정치철학이든, 윤리학이든, 페미니즘이든, 예술이든, 스피노자든...

 

매듭을 짓지 못했으니 그 대부분은 잊히었다.

이 블로그 만든 걸 계기로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에 쓰던 글을 다시 읽게 됐는데

그 때 내가 부딪쳤던 벽을 거의 하나도 넘지 못했을 뿐더러

대개는 후퇴한 걸 보니 우울해진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적어도 한두 가지 정도는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손에 익어야 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식상해질 즈음에 새롭게 내놓을 수 있을

다른 사고들이 바로 지금 꾸준히 익어가는 중이어야 하지 않을까.

 

서른이 넘으면서 점점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 불안(anxiety), 행동을 강박하는 이 정서를 또 다시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다시 스스로를 다잡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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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4 14:18 2008/10/2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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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항우는 28세에 '패왕'의 자리에 올라 32세에 죽었으며,
제갈량이 삼고초려 끝에 유비를 따라나선 것은 27세였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제2서기장에 오른 것이 30세요,
스피노자의 모든 위대한 저작들은 46세 전에 쓰여졌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쓴 것은 31세,
레닌이 상트페테르부르크 해방동맹을 결성한 것은 26세,
마오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것은 32세,
박헌영이 조공 결성과 함께 고려공청책임비서가 된 것은 26세였다.
그리고 발리바르가 <'자본'을 읽자>를 출판한 것은 24세였다.

일단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았지만
이 목록은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은 나이가 어리다'는 변명이 설 자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추신:
목록을 적고 보니 여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두명을 부랴부랴 끼워 넣느니,
나의 사고 안에 있는 저 엄정한 결여를
그 자체로 드러내는 게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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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5:12 2008/10/2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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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와 냉소주의

역시 2003년 쯤에 쓴 글.

 

난 지금도 살레츨의 이 분석이 극히 흥미롭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한 번 다시 읽고 싶은 내용이다.

현실 사회주의를 경험한 이들이 그 이데올로기의 실패를 증언하는 내용일 뿐더러

내가 지젝 등에게 관심을 갖게 된 가장 결정적 분석인 '냉소주의' 문제를

역사적 전거를 가지고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초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거쳤는데

지금도 내 동료들에게 쉽게 건네지 못하는 질문이 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한편으로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렵고

다른 편으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들을까 봐 두렵다.

전자는, 이제 그/녀들과 정말이지 완전히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까 두려워서고

후자는, 내가 그들을 '벌거벗은 임금님'의 백성들과 같은 상황에 몰아 넣었다는

죄책감이 들까 두려워서다.

어느 쪽이든 나에겐 고통을 재생하고 연장하는 일이다.

 

어쨌든, 이런저런 일 때문에 다시 살레츨의 책을 읽어 보고 싶다.

 

--------------

 

일요일에 하기로 한 스피노자 세미나가 연기된 김에
그냥 이책저책을 떠들어 보다가
슬로베니아 학파의 한명인 레나타 살레츨을 읽기 시작했다.

전부터 생각만 하고 못 읽었던 글,
<'Normalization' in the socialist regime>부터 읽었는데
과연 아주 흥미롭다.
그녀에 따르면 사회주의(사례로서 유고슬라비아)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요체는
공식 이데올로기의 나이브함 + 사적 이데올로기의 냉소주의였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도 공식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냉소적 거리두기/위반이 그것을 전복하기는커녕
오히려 필수불가결한 보충물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목표가 바로 이 냉소주의였다는 점이다.

냉소주의가 정치적 수동화를 낳는 것은 기본이다.
살레츨이 자신의 정신분석적 문제틀로 고유하게 기여하는 것은
이같은 냉소주의가 '죄책감'
(잘은 모르지만 정신분석은 이것이 상징과의 괴리 및 '비일관성'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는 것 같다. 언젠가 칸트는 누군가 법을 어길 수는 있지만 거기서 나오는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고 말했는데,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즉 법에 대한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그것이 '법'(즉 지배적 상징)인 한, 그것에 대한 위반은 죄책감을 낳는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아무리 나쁜(물론 법 이전에 이에 대한 기준은 없다) 행동이라 해도 법에 의해 범죄로 지정되지 않는다면 죄책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즉 죄는 법의 사후 효과다)
을 낳고 이에 의해 '초-자아'가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음을 지적함으로써다.
말하자면 이렇다.
누구도 공식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고, 그것을 '속이면서' 각자의 '사생활'을 누린다.
그런데 또한 누구나 공식 이데올로기의 '정상적' 작동이
자신의 '사생활'의 보호와 체계적으로 연루되어 있음을 알고,
또한 '사생활'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즉 공적으로 표명되면)
공식 이데올로기의 작동을 교란시키고 따라서 결국 '사생활'을 파괴할 것 역시 알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공식 이데올로기의 우산 하에서 '사생활'을 누리는 모두
로 하여금 (그 강도가 어느 정도이건) 죄책감과 위협감을 겪게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녀들은 자신들의 '행복'이
공식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기'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
어쨌든 사기는 나쁜 것일 뿐만 아니라
이같은 사기가 일반화되면 결국 공식 이데올로기가 붕괴될 것인데
모든 사람이 다 사기를 치고 있음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녀들은 공식 이데올로기를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보다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공식 이데올로기의 '외양'을 보존하는 데 호들갑을 떤다.
그것이 누구에 의해서도 신뢰받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외양'마저 위협받으면 체계는 곧장 붕괴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왕의 권위가 침해되면 왕국이 붕괴한다는 것,
그런데 왕이 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것, 더구나 그 사실을 모두가 다 알기 때문에
그에 대한 단 한마디의 공적 표명조차 충분히 일으킬 수 있는
엄청난 파급력을 두려워 해 침묵을 지켰던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같은 일반화된 죄책감과 위협감은 '초-자아'의 개입을 쉽게 만든다.
즉 다들 '사기'를 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누군가에 대한 초-자아적 개입에 강력히 반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심지어 내심 그것을 요구한다.
초-자아가 없으면 공식 이데올로기가 붕괴하고
따라서 자신의 사생활도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게 가장 좋은 상황은 바로 이것이고
따라서 지배계급 역시 공식 이데올로기의 준수가 아닌
냉소주의의 확산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살레츨의 이 같은 분석은
'현실사회주의'의 핵심 모순이 (전체주의적) '광신'이라는
통속적 관념과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즉 실제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냉소주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외양'을 유지하려 했던 냉소적 실천이다.
(언젠가 홉스봄이 든 유명한 사례에 따르면, 서구의 저널리스트가 동구의 인민에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레닌의 후배 아닌가 라고 대답했던 것처럼 그/녀들은 전혀 '광신도'가 아니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살레츨의 분석은 사회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체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자본주의-자유주의/사민주의를 지탱하는 것 역시 냉소주의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누군가의 용어를 빌자면 '시장전체주의')는 바로 이것으로부터 나온 초-자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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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0/22 14:48 2008/10/2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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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행복

2003년쯤에 쓴 글.

아마 한창 지젝을 읽던 중에 쓴 것 같다.

얼마 전 한 새내기가 이랜드 노동자들 앞에서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라고 발언하는 걸 들었는데

문득 옛날에 쓴 이 글이 생각났다.

 

지금이라면 약간 다른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젝이 여기서 설정하는 진리/행복의 대당은

결국 칸트의 의무/행복 대당에 기초한 것일 텐데

그것은 본래 '행복'이라는 욕망에 눈이 멀어 봉기를 일으킨 프랑스 혁명의 대중들을

꾸짖기 위한 도식이기 때문이다.

행복과 일상이라는 문제, 대중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고민이다.

내가 지젝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

내가 계몽주의적 경향에 끊임없이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후기 알튀세르('이론의 이중적 기입')와 스피노자에게 동의를 보낸 것도 결국 그 때문이다.

 

다만 행복/일상의 언표 역시 계급에 따라 다른 효과를 내고

상대적으로 지배 계급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은 자들이 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대개 반동적이다. 그냥 '착실하게' 살았다면 나에게도 가입 기회가 있었을 지배 계급

의 유혹과 아직 싸우고 있었을 때였으므로

나에겐 저 처방이 필요했다. 물론 앞으로도 '타락'을 막기 위해서는

항상 필요한 처방이기도 할 것이다.

 

------------

 

행복을 얼마간 부정적인 뉘앙스의 '일상'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국한시킨다면,
진리와 행복은 모순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이지 않을까.

노동자가 마르크스주의를 배우는 것, 여성이 페미니즘을 배우는 것이
행복이 아닌 것처럼.

2001년(이었나...?)을 뜨겁게 달궜던
대우차 파업의 와중에 있었던 한 해고노동자가
이제 복직이 되어 다시 한 명의 '가장'으로 설 수 있었을 때
그의 가족에 흐르는 그 행복을 TV 다큐멘터리에서 스쳐가듯 목격했을 때
나는 까마득함 같은 걸 느꼈다.

그와 그의 아내, 자식들을 '속물' 따위로 바라봤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다만 진리와 행복 사이에 존재하는 그 거대한 간극 앞에서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녀들에게 '진리'를 말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에 대해서
내가 너무 고민하지 못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럴진대, (쁘띠 이상의) 부르주아와 남성이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배운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문득 이리가레의 'Speculum'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책을 펴들었을 때
나는 남성 및 가부장제에 포섭된 여성에 대한 거의 완벽한 사고가
프로이트와 그의 (이단을 포함한) 후계자들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남성이 페미니즘에 대해 안다는 것에 대해 나는 그동안 너무 간단히 생각했다.
일반적인 기준에 비추어 별로 '남자답지 못한 남자'로서
별로 누리고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남성성에 내가 어떤 식으로 포섭되어 있는지를
머리 속에 들어왔다 간 것처럼 꿰뚫는 그/녀들 앞에서
나는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의 진리는 나의 일상과 행복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마 곧, 혹은 이미 지금이나 과거부터
진리에 대한 본격적 저항이 발동할 것 같다는 예감.

진리는 파괴적이다.
진리는 비타협적이다. 따라서 진리는
잔혹하다.
그것은 따라서 행복의 반대편에 있거나
적어도 행복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진리는 그것에 고유한 어떤 행복을 분비하지만
그 행복은 진리를 부인하며 구축된 질서의 그것에 비하자면 너무 미약하다.

따라서 진리에 충실한 사고/정치가
붕괴론(혹은 비극)과 친화적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이 만일 진리를 따른다면 그것은
기존의 행복에 대해 더 '우월한' 행복을 진리가 약속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기존의 행복이 불가능해졌고
새로운 행복을 기초할 수 있기 위해 다시 진리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정치적 진리/사건이었던
10월 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므로 나는 행복을 비웃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것의 붕괴를 재촉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의 불가능성을 가슴 깊이 슬퍼하고
새로운 행복을 기초짓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어떤 잔혹을 거부하려 들지 않기만 할 것이다.
그것이 행복을 해치는 것이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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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4:07 2008/10/22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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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을 분류하고, 구별하는 방식으로서의 언어는 사물들에 대한 인식을 수반한다. 그런데 그러한 인식은 과학적 결정보다는 실용적 결정에 의존한다. 사물들의 원인과 본성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그 결과들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어는 본성상 부적합한 인식으로서의 상상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부적합성은 언어에서는 중화되어 나타난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언어가 전통의 결산, 공통의 경험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과학적 인식의 보고는 아니지만, 공통의 실천적 인식을 표현한다.
  요컨대, 언어가 사물들을 질서화하는 방식, 즉 사물들을 분류하고 분리하는 방식으로서 세계에 대한 우리 이해를 구성하는 조직자라면, 이 조직자는 사람들의 공통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이 공통의 경험은 사물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우리에게 주지는 않지만, 단순히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로 간주될 수도 없다. 그것은 어떤 공통적인 삶의 논리, 오랫동안 존속해 왔고 또한 앞으로도 쉽게 변할 수 없는 공통의 삶의 논리를 표현한다. 따라서 그것은 한편으로는 주관적이고 상상적인 인식,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획득된 인식과 동시에 구별된다. 그것은 적합한 인식 그 자체, 즉 원인에 대한 인식은 아니지만, 삶에 유용한 정보, 즉 결과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함축하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철학은, 따라서 정치는, 바로 이 공통의 자산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그것을 대상으로 삼고 있고,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바로 이 공통의 자산을 담지하고 있는 언어는 철학의 출발점이며, 철학의 대상이고, 철학적 작업의 장을 구성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정치의 장이기도 하다.  정치가 관념들을 전화하고, 그것을 통하여 사회를 전화시키는 데 있다면, 그것은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관념들이 육화되어 있는 ‘언어에 대한 작업’(le travail sur le langage)과 ‘언어의 작업’(le travail du langage)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정치는 문화 혹은 전통이라고 불리우는 공통의 유산을 무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실친적으로 유용하지만 부정확한, 뿌리 깊은 우리의 일반적 세계이해에, 따라서 언어의 일반적 쓰임에, 어떤 정확성(précisions)을 부여하려는 노력이다. 정확함의 부여는 결과적으로 단어들의 의미를 변이시키고, 미끄러뜨리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변이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확성의 부여는 철학 전체계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적합한 관념’(idea adaequata) 대상과의 일치로서 규정하고 있는 전통철학을 비판한다. 그에게 적합함이란 참된 관념이 갖는 내적 성질들을 지시하는 것이다. 내가 우연히 비가 올 것이라고 말했을 때, 비록 실제로 비가 와서 현실과 일치한다 하더라도 나의 생각은 적합성 혹은 진리를 표현하지 않는다. 적합성은 외적 일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합성이 외적 일치를 함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적합한 관념은 그 대상과 반드시 일치한다. 요컨대, 스피노자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진리 혹은 적합성의 ‘본성’을 일치로 규정하는 견해이다. 일치는 본성이 아니라 적합성의 한 ‘결과’ 혹은 ‘성질’에 불과하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화 작업은, 더 이상 사물들의 특정한 결과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그것들의 본성과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공통의 경험적 인식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고 그것에 ‘정확성’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적 작업은 새로운 용어를 창조해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언어에 대한 재정의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목적은 단어들의 의미가 아니라 사물들의 본성을 설명하는 것이고, 그 사물들을 어떤 용어들로 지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용어들의 통상적 의미는 내가 그것들을 사용하면서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와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다. 이는 한 번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에게서 새로운 개념화는 기존의 개념과 너무 동떨어진 것이 되어서도 안 되고,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된다. 너무 가까우면, 차이를 볼 수가 없고, 너무 멀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적 언어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자산과의 단절이 아니라, 그것의 전화이며 미끄러뜨림(glissement)이다.>

 

- 박기순, 「스피노자에서 언어와 정치」, pp. 236~238, 241~242, 『시대와 철학 2007 제18권 2호』(강조는 나)

 

많은 사람들이 스피노자에 관심을 가졌고

그에게서 유래한 몇 가지 개념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곤 했다.

그 중 하나가 '적합한 인식' 또는 '원인에 대한 인식'

(그런데 스피노자가 쓴 정확한 표현은 '원인에 의한 인식'이다.

문제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아니라,

자신이 그 대상의 능동적 일부, 곧 '원인'이 될 때 얻을 수 있는 인식이므로.)

일 것이다.

 

하지만 혹자의 용법을 보면

그 개념을 통해 스피노자가 제기하려 했던 비판적 쟁점은 사라지고

어느덧 그 개념이, 자신이 알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수많은 문제들과의 대결을 회피하며

자신의 무지와 무능, 결국 불성실에서 비롯한 불안감을 어루만져 주는

'무지의 도피처'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스피노자는 이런 효과를 내는 것들을 다름 아닌 '미신'이라고 불렀다.

과학주의적, 계몽주의적 미신이라는 이 도착적 역설.

 

여기서 문제는 스피노자의 용법에 맞게 이 언표를 사용하느냐가 아니다.

대중운동의 객관적 상태와 그 분기 방향에 관한

말의 강한 의미에서 '유물론적' 분석과 입장이 있느냐가 문제다.

'원인에 대한 인식'이라는 언표가 희대의 유물론자 스피노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더라도

많은 경우 그것은 말 그대로 '관념론적'이며, 또한 관념론에 고유한 '폭력적' 효과를 산출할 뿐이다.

 

나는 스피노자를 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를 통해서

부르주아 계몽주의(결국 엘리트주의)와 혁명적 자생주의(오늘날 네그리가 대표하는)

에 대한 이중 비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들었고, 실제로 그런 점을 발견했다(고 믿는다).

 

문제는 원인에 의한 인식이라는 언표를 주문처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과정(process)으로써 실현할지 사고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이 정언명령은 물론 나에게도 해당된다.

여기서 나의 문제는, 이 정언명령을 받아 들여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정언명령에 미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면서

점점 더 말하지 않고 주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나의 이 창백한 돌맹이의 도덕을 넘어,

내가 지금 내뱉은 비판만큼의 공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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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0/21 13:58 2008/10/2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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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 '표현주의 논쟁' 중

 <나 자신은 표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평가들을 보면 화가 난다. 논쟁 중에는 형식주의 문제로 소란이 생긴다. "너희들은 내용은 그냥 둔 채, 형식만 바꾼다"고 한 사람이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너야말로 형식을 위해서, 즉 관습적인 형식을 위해서 내용을 희생시킨다"는 느낌을 받는다.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아직 한 가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항상 변해가는 사회환경의 항상 새로운 요구사항들에 비추어볼 때 낡은 관습적 형식들을 고수하는 것 역시 형식주의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혁명을 하겠다는 자들이 실험을 반대할 수 있을까? 어째서 "무기를 잡지 말아야 할" 것인가? 혁명의 이점들을 설명함으로써 단순한(Putsches) 폭동의 해로운 점들을 설명하는 작업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진화의 이점들을 설명함으로써 그럴 수는 없다.

  리얼리즘을 하나의 형식 문제로 만들어, 그것을 단 하나의(그것도 실로 낡은) 형식과 결합시키는 것은 리얼리즘을 거세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글을 쓰는 것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인과관계의 기반에까지 도달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형식 요인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반대로 사회적 인과관계의 기반에까지 도달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형식 요인들은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

  민중들에게 말하고자 할 때에는, 민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단순히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다. 민중이 낡은 형식들만을 이해하지는 않는다. 맑스나 엥겔스, 그리고 레닌은 민중들이 사회적 인과관계를 깨닫게 하기 위해 매우 새로운 형식들을 이용하였다. 레닌은 비스마르크와 다른 내용을 이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낡은 형식으로도 새로운 형식으로도 이야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는 형식을 이용해 이야기했다.>(강조는 나)

 

- 베르톨트 브레히트, 「표현주의 논쟁」 中 pp. 52~53, 『브레히트의 리얼리즘론』, 남녘, 1989

 

현 정세(의 사고와 투쟁)에 적합한 형식/형태를 만들지 못하면서

대중들의 운동과 실험을 젠체하며 폄하하는 자들이 있다.

상반기에 나타난 촛불에 무작정 열광할 생각은 없고

특히 온갖 혁명적 수사들을 만들어 내는 이런저런 지식 분자들이 한심해 보이긴 하지만

그 대중운동에서 아무 것도 배우려 하지 않고 보수적 형식주의(최악의 형식주의!)

로 뒷걸음치는 이들을 보면, 브레히트처럼 나도 화가 난다.

 

우연히 브레히트를 읽으며

우리가 그를 좀 더, 보다 일찍 가까이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그가 우리의 '상식'(common sense) 노릇을 해 주었다면

우리는 덜 화 내며 대화할 수 있었거나,

또는 지속적인 화와 교통불능의 경험 때문에 지금처럼 대화를 중단하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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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 16:34 2008/10/2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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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거울

   "From Sade to Celine, literature seems to have devoted itself to the exposition of all that should not be said. The images it sends back to us from the historical world in which we live are distorted and deformed, completely indecent and corrupt. It is as though the images had taken shape in a broken mirror in which the world is reborn lager than life in the pitilessly cruel and cynical light projected on it by the truth of a style. For the world would not be as true as it is if it did not also speak its name through books."(강조는 나)

 - Pierre Macherey, The object of litera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p. 237

 

마슈레의 책을 최근 다시 읽고 있다.

'깨진 거울'이라는 은유, 전에도 봤던 표현이지만

이제서야 그 의미를 조금 알 것 같다.

 

현실을 비추는 거울,

그렇지만 스타일이라는 균열을 통하기에

현실을 비뚤고 굽게 비추는 거울.

'왜곡'이라는 수단으로써 진실을 말하는 거울.

 

우리가 문학이라고, 예술이라고 부르는

그 깨진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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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8 21:08 2008/10/18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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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거리두기가 성취한 영화미학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일본에서 발생했던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을 실화적 모태로 하는 영화이다. 한 엄마와 각기 다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4명의 아이들,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그나마 어렵게 마련한 전셋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큰아이를 제외한 나머지 세 아이는 말 그대로 그곳에 없는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 어느 날 엄마는 새로운 사랑을 위해 그 아이들을 떠나버리고, 아이들은 끝내 비극적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6개월 동안 아무도 모르는 그들만의 삶을 살아낸다. 그곳에 있지만 그곳에 없었던 아이들의 유령 같은 삶. 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는, 한동안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떠들썩함 속에는,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연민, 아이를 버린 무책임한 어미에 대한 분노, 결국 그 어미와 함께 아이들을 방치한 공범이 되어버린 사회-어른들 자신의 부채의식, 이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대도시의 익명적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또는 반성이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15년 만에 세상에 나온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이 모든 소란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 아이들의 삶이 생각만큼 온기없는 유령 같은 삶은 아니었음을 보여줄 만큼 충분히 사실적이지만, 또한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그 어미에 대한 섣부른 도덕적 분노와 단죄로 변질되게 하지 않을 만큼은 충분히 허구적이기도 하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결코 이 영화가 ‘재현 드라마’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사건을 모태로 하고는 있지만, 세부적인 디테일은 1년간 배우인 아이들과 함께 발견하고 창조해낸 것임을 힘주어 말한다. 사실, 그 단호함은 현실과 영화에 대한 감독 자신의 조심스럽고 근본적인 윤리적 질문의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대상에 대한 연민은, 특히 그것이 폭발적이고 집단적인 것일 때, 쉽사리 그 대상을 영원히 타자화시킬 위험에 빠진다. 터무니없는 일로 인한 충격과 분노는, 특히 그것이 폭발적이고 집단적인 것일 때, 도덕적 단죄라는 폭력이 되어 자신이 담지하고 있는 윤리적 힘을 소진시켜버린다. 문제는 연민과 분노라는 감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쉽사리 출구를 찾아 스스로를 해소하려고 하는 그 완강한 관성 또는 자동운동 속에 있다. 그것을 막는 또는 그 힘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끊임없는 삶에 대한 탐색과 윤리적 질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수행하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줄타기와도 같이, 고도의 균형감각과 끊임없는 긴장을 요구하는 일이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가 많은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영화와 구별된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바로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큐와 픽션, 선과 악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잡기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는 시종일관 미묘한 긴장이 흐른다. 그것은 카메라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공간적인 거리 감각이 낳는 긴장이기도 하고, 촬영과 편집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시간적 리듬의 공존에서 비롯되는 긴장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대상을 향해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지만, 끝내 그 인력에 함몰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무한한 인내심으로 대상의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지만, 일단 포착된 대상의 진실은 과잉에 이르기 이전에 냉정하게 편집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카메라와 편집 리듬에는, 대상을 향한 자연스러운 인력과 대상으로부터의 의식적인 척력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물리적 긴장이 실려 있다. 그 물리적 긴장은 감독 자신의 윤리적 질문의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다수화된 ‘이분법’에 질문하고 도전하는 영화이고, 그 이분법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순수한 아이들과 오염된 어른들이라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고, 그것을 위해서 사실과 허구, 다큐와 픽션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아이들이 만든 유사 가족 생활담

<아무도 모른다>는 아이들의 그 6개월을 고난과 참상으로 재현하려 하기보다는, 그 6개월을 살아낼 수 있었던 아이들의 삶의 의지와 생의 감각을 포착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아이들을 트렁크에 넣어 옮겨야만 하는 삶의 절박함은, 유키(시미지 모모코)의 천진난만한 질문(“여기는 몇층이야?”)과 시게루(기무라 히헤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로 스릴 넘치는 비밀 작전, 즉 유희가 된다. 비밀 작전의 무사한 성공을 자축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이들보다 더 아이 같은 철없는 엄마가 제시하는 터무니없는 의무의 법칙은, 아이들의 웃음과 함께 게임의 규칙이 된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엄마가 사라진 뒤에도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엄마보다 더 어른스러운 아이였던 장남 아키라(야기라 유야)는 이미 아빠이고, 이사한 집에서 제일 먼저 세탁기가 놓인 곳을 확인하는 장녀 교코(기타우라 아유)는 이미 엄마이며, 시게루와 유키는 아빠 엄마의 사정을 충분히 헤아려 보채거나 칭얼대지 않는 착한 아이들이다. 이 자발적인 유사 가족은, 위기의 순간을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계기로 만드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준다.

생활비(식비)의 고갈을 새로운 연대(먹을 것을 챙겨주는 편의점 직원)의 기회로 삼고, 단수로 인한 고통을 공원으로의 진출 기회로 삼는다. 엄마와 함께 금지의 규칙은 사라졌다. 공원과 거리로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확장한 아이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사키-간 하나에)를 사귀고, 그곳에서 발견한 새로운 생명의 싹에 감응하며, 그것을 데려다가 소중하게 키운다. 시게루는 자판기와 공중전화에서 동전을 모으는 생활의 지혜를 터득한다. 그리고 그 6개월 동안 아이들은, 자신들이 키우는 화분 속의 식물처럼, 실제로 자라난다. 13살이 된 아키라는 변성기가 시작되고, 5살이 된 유키는 이제 예전의 작은 트렁크에는 들어가지 않을 만큼 그렇게 자랐다. 물론 그 생명력과 성장력은 축복이라기보다는 비극이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키라의 고집(아키라는 이미 성을 바꾸어버린 엄마에게 더이상 도움을 호소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들을 뿔뿔이 흩어놓을 것이 분명한 사회에도 도움을 청할 생각이 없다)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너무나 빨리 자라버린 유키의 싸늘해진 몸은 한순간 우리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드는 충격이 된다. 유키의 죽음을 확인한 뒤 거리로 나간 아키라의 눈에 세상은 더이상 현실감을 갖지 않는 공허가 되고, 그 초현실적 공허감은 우리의 오감을 얼어붙게 한다. 아키라의 발걸음은 자동반사적으로 그를 경찰서 앞으로 이끌지만, 그는 끝내 돌아선다. 유키에게 모노레일을 타고 가서 비행기를 보여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 순간 아키라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훌쩍 넘어서 있으며, 그리하여 세상의 상식을 향하여 무기력하지만 끈질긴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탐색

어쩌면 이 영화가 그 제목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은, 아이들의 존재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아무도 몰랐던’ 어른-사회의 무책임에 대한 반성의 촉구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작 아무도 몰랐던 것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무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은, 그 아이들이 보여준 놀라운 삶에의 의지와 삶의 감각(감독은 그것을 “삶의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는 육체적인 기억”이라고 표현한다)일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꼈었는가를 질문하고 탐색한다. 마치 <말아톤>이 초원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 다그침이 아니라, 초원이가 바라보는 세상과 삶의 감각이 무엇인가를 포착함으로써 새로워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아무도 모른다>는 새로운 영화가 된다. 그것은 영화가 영화를 넘어서는 놀라운 기적의 순간들이다.

그때 영화는 사실과 허구, 다큐와 픽션의 경계를 넘어선 화법으로, 쉽게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해낼 수 없는 삶의 진실에 이야기한다. 도덕적 폭력이 되지 않아야 할, 그저 끊임없는 새로운 윤리적 질문의 출발점이기만 해야 할 연민과 분노만을 낮고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환기시킨다.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 <원더풀 라이프>(1999)에는, 또 하나의 아이-소녀가 등장한다. 기억하고 싶은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습관적으로 디즈니랜드를 떠올렸던 소녀는, 그것이 이미 많은 아이들의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일 수 없음을 느낀다. 그 소녀가 대신 찾아낸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릎에 누이고 귀를 파주던 엄마의 살냄새”였다. 상식적이고 자동화된 우리의 반응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질문은 이렇듯 늘 새로운 삶의 감각과 함께 비로소 작동한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 새로운 윤리적 질문, 새로운 삶의 감각으로 충만해 있는, 아름답고 새로운 영화이다. 다음과 같은 고레에다 감독의 진심어린 연출의 변은, 그 새로움을 찾는 모든 감독들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다짐일 것이다. “소년의 옆에서 어깨를 다독여주고자 했다. 안아주는 건 안 된다… 나도 카메라도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글: 변성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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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4 16:14 2008/10/1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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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쯤, '난.쏘.공.'을 읽고 쓴 글

어쩌다 '난.쏘.공.'을 꼼꼼히 읽게 되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 책을 이렇게까지 꼼꼼히 읽은 건 처음이다.

몇년 전까지 난 '고전'을 거부 또는 회피해 왔다.

이유는 정확치 않다. 아마 무의식적이다.

 

내가 옛날에 이 책을 읽었다 해도

진가를 얼마나 알아볼 수 있었을까 는 회의적이다.

물론 이 책은 '고전'이다. 고전이란

초심자가 읽어도 30%는 알고

전문가가 읽어도 30%는 모르는 책이므로

읽어야 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너무 늦게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섯불리 '지양'한다는 따위의

건방진 얘기는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소설이 끝났다'는 선언에 대해 쿤데라는

'백년의 고독'이 있으므로 그런 얘기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 소설에선 일반적 진술을 하기 어려운 것 같다.

문제는 개별 '작품'이다. '난.쏘.공.'을 읽으면서

난 어떤 다른 기록형태도 이 책의 표현을 대체할 수 없다고 느꼈다.

속단일 순 있다. 다른 기록형태에 유례없는 난제를 제기했다

고 표현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을 앞에 두고 '소설이 끝났다'고 말할 만큼

뻔뻔한 사람은 존재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조세희 선생은 작품의 '독특성'을 통해 소설의 '보편성'을

구원했다. '구원'이란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경외스러운 방식으로.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난.쏘.공.'의 세계를 떠났다고 생각한다.

저 '산업화' 시대, 그 시절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조세희 선생이 아직 살아 그런 뻔뻔한 자들에게

침을 뱉아줄 수 있다는 점이 감사할 뿐이다.

선생은 오래 사셔야 한다. 소설도 빨리 출간하셔야 한다.

 

'난.쏘.공.'은 비극이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재판은 공론장에서의 발언의 환유라는 점에서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를 계승하며

비속류적인 헤겔적 '인정투쟁'을 상연한다.

'적대'와 '불화'를 전면화하고

'위반'과 '폭력'으로밖에는 자신의 존엄성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을 묘사한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나오는 질문은

따라서 '반폭력'이다. 어설픈 '지양'과 '화해'를 얘기하지 않으므로

속류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는 진정으로

폭력의 문제를 정확히 다루고 해결할 길을 개방한다.

자본주의 및 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과 함께

이 모든 질문, 무엇보다 그것이 제기되고 상연되는 방식 때문에

나는 읽는 내내 눈이 부셨다.

 

내가 볼 때 이 소설 이전과 이후의 대부분의 대당은

이 소설의 존재 자체로 해체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87년 재판에 실린, 뤼시엥 골드만을 원용한 김병익의 비평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에 이 비평은 이 소설을 인내할 수 없다.

이런 위대한 작가가 의도적으로 과작을 하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그 과작 자체가 메세지이므로.

나는 그의 동료나 후배들이 이 메세지를 이해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이 열 편씩의 쓰레기를 쓰는 것보다

열 사람이 한 편씩의 위대한 저작을 쓰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

모두 이 입장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런 입장을 곰곰히 인내하면서 글을 쓰라는 뜻에서.

 

그렇다면 조세희 선생은

비부르주아적인 다원주의의 전망을

과작이라는 뼈아픈 선택을 통해 몸소 실현한 셈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까닭에

쉽게 스스로를 타협/양보할 수 없는 강렬성/진정성들의

작가 수 만큼의 출현. 한편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작가는

'직업'이 아니라(평생 한 편을 쓰는 직업이 어디 있는가?)

모든 대중들에게 부과된 일생 (최소한) 한 번의 과제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 황홀한 빛의 세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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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0/14 16:07 2008/10/1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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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잖아 비가 오면 바다 정도는 생긴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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